길진리생명빛

[스크랩] 순교 역사에 특별히 가슴이 찡해지던 곳 - 천주교 해미순교성지 여숫골

오늘행복스마일 2014. 1. 4. 14:32

 

 

 

 

 

 

 

 

 

 

 

 

 

오래전 해미읍성은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박해의 공간으로 18~19세기 서산은

천주교인들이 가장 혹독하게 탄압을 받았던 지역 중 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 서산 지역에서 특히 천주교 전파가 활발했던 곳이기도 하였지만

이 일대 내포 8현을 관할하던 감영과 감옥이 서산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서산 해미를 가면 곳곳에 천주교의 아픈 흔적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 여러 곳이 있습니다

해미순교성지와 해미읍성에 이 같은 비극의 흔적과 그 역사적인 현장이 보존되어 있답니다

현재는 아늑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공원화를 해놓아서

돌아보면서 가슴 아픈 역사를 바로 알게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도 여러 번 해미읍성을 다녀왔고 소개도 하였지만

오늘 소개할 해미순교성지 여숫골은 처음 방문을 해보았습니다

순교성지의 역사는 아프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봄꽃이 만발하여 평화로운 봄 풍경이었습니다

담아온 풍경 사진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 머리"로 알아듣던 곳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의 땅이 되어 오늘의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답니다.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이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친 관헌은, 특히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시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 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참혹한 행위가 수없이 되풀이 됐다.
 
이렇게 스러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132명의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그나마도 불확실하고
나머지는 이름 석 자 하나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다.
 
이들이 숨져 간 유적지는 현재 깨끗하게 단장돼 있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교우들의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라 알아듣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오는 생매장 터인 진둠벙이,
14처 노천 성당으로 단장돼 있다.

 

-출처 해미순교성지 홈페이지-

 

 

 

 

해미순교성지의 역사적 배경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 해미에서는 인언민(마르티노)과 이보현(프란치스코)이 순교하였고,
1811~1839년의 기해박해 이전에는 김진후(비오)가 1814년에 옥사한 것을 비롯하여 모두 8명이 순교하였다.
또 1866년 이후의 병인박해기에는 122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이처럼 해미의 유명 순교자는 모두 132명에 이르는데, 여기에 무명 순교자 47명 이상의 수를 더하면,
기록으로 확인되는 박해기의 순교자 총수는 179명 이상이 된다.
한편 해미 순교자들의 순교 형식은 교회 순교록을 통해서만 67명이 확인되는데,
그 중에서 교수형이 33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참수와 옥사가 각각 5명, 병사가 4명, 생매장이 3명, 장사가 3명,
미상이 14명으로 나타난다. 해미읍성 안의 진영 동헌 앞은 순교자들이 갖은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한 장소가 되며, 읍성의 옥은 신앙 증거 장소요 중요한 순교 터가 된다.
또 서문 밖의 교수형(혹은 참수형) 터와 문 마리아, 박 요한, 방 마리아 등이 생매장으로 순교한
조산리의 생매장(교수형 포함) 터도 교회사는 물론 지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해미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생매장 순교 터와 그 순교자의 유해가 확인 발굴되고

보존되어 왔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출처 해미순교성지 홈페이지-

 

 

 

 

해미천 좌우 주변에서 1866년부터 1872년 사이에

1천 명 이상의 신자들이 생매장당하였답니다

이 순교자들의 유해는 대부분 홍수로 유실되고

1935년에 그 일부를 발굴하였답니다

이 일대에서 생매장당한 이름 모를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1975년 높이 16m의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아픈 역사와 슬픈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아

돌아보면서도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더군요

이런 슬픈 역사가 간직되어 있는 곳이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계절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찬란한 꽃을 피운 봄은

가신 분들에 대한 위로를 하는 것처럼 환하게 피어있었습니다.

 

 

 

 

 

 

 

 

 

 

 

 

 

 

 

 

 

 

순교 자리개 돌

바라만 봐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다 싶었습니다

 

 

 

 

 

 

 

 

진둠벙

1790년대부터 80여 년간 시산혈하를 이루던 서문(정분문) 밖 사형 터는 병인 대박해시(1866년 이후)에는

 주거 인접 지역인 관계로 대량의 사학 죄인의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다.

1천여 명을 단기간 동안에 처형하기 위해 벌판에서 집행하게 되었는데 죽

이는 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십수 명씩 생매장하게 되었다.

생매장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된다. 개울을 건너는 곳에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묶이어 끌려오는 사학죄인들을 외나무다리 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어 버리기도 하였다.

묶인 몸으로 곤두박질 당한 죄인은 둠벙 속에 처박혀 죽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 하여 동리 사람들 입에 "죄인둠벙"이라 일컬어지다가

오늘날에는 말이 줄어서 "진둠벙"이라 불린다.

 

 

 

 

전해오는 이야기...

동구 밖 서쪽의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기에 "숲정이"라 불리던 곳이다.

오늘엔 논으로 가꾸어진 벌판이지만 병인년 대에는 숱한 천주학 죄인들이 산 채로 묻혀졌던 곳이다.

옛날엔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던 뼈들이 많았었다 한다.

이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 하는데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산 사람들이 묻히던 어느 날엔 함께 묻힐 동아리 가운데에 어여쁜 규수도 있었다 한다.

 묻기를 명할 찰나에 형장의 눈에 들어온 규수의 자색은 그 형장의 연민을 자아내었다.

어여쁜 얼굴에 어찌 사학을 하여 죽는 몸이 되었느냐고. 살려줄 터이니 사학을 버리라고 꾀었으나

 입술을 깨물고 그 규수가 먼저 구덩이에 뛰어내리니 동아리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묻히더라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 온다.

그날 묻히던 그 찰나에 하늘이 천둥으로 함성하고 사흘을 안개로서 생무덤을 덮어 주더라고 전해 온다.

 

 

 

 

 

 

 

 

 

 

 

 

 

 

 

 

 

 

 

 

 

 

 

 

 

 

 

 

 

 

 

 

 

 

 

 

 

 

 

 

오로지 믿음 하나로 목숨을 내놓았던 천주교인들...

그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해 놓은 곳이기도 하지만

돌아보면서 가슴이 찡해지던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생각의 차이로 많은 사람의 아까운 생명을 앗아간 슬픈 역사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날의 아픔과 기도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여

발걸음도 조심스러웠고

 마음이 숙연해지던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그 아픈 역사가 남겨져 있는 한

많은 교인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를 떠나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진 그 흔적을 느껴보는 시간도

참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출처 : 내 영혼이 아름다운 날들...
글쓴이 : 초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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