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법정법륜

[스크랩] 길상화 & 뽀여네

오늘행복스마일 2014. 4. 7. 15:43

 

 

엉엉

길상화

 

길섶서 정분찾던 야생화 아니련만

상사모 깊어진날 임께선 각오하고

화려한 전재산 쾌척 백석재단 일궜네

 

 

 

★위치는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어떻게 : 지하철 4호선 타고 한성대역

  6번 출구로 나가 길상사 이정표 따라 

 천천히 걸어 삼십 여분 쯤 길상사입구

 

길상사가 원래는 삼청각,청운각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요정으로 꼽혔던

대원각이라는 요정이었다. 1987년 공덕주 길상화(법명)김영한님이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스님을 친견 한 뒤, 당시

싯가 1000억원이 넘는 음식점이던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청정한 불도량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1995년 이에 법정스님이 그 뜻을 받아 들이셔서

6.13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 말사 '대법사'로

등록을 하고 초대 주지에 현문 스님이

취임 했다. 그리고서 1997년에는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

길상사'로 이름 바꿔

등록을 하였다.

 동탄임성택

편집한

 

故 진향 길상화

 

故 백석(白行)시인

 

시인 백석과

소설같이 아린사랑 했던

김영한 님(吉祥華)의 프로필

 

1916년 서울 태생

1931년 첫 남편 만나 얼마후 자살

권번 기생수업

1936년경 배석만남 (백기행-1912-1994)

1939년 백석 신경으로 감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만학으로 졸업

1987년 미국 체류시 법정스님께 대원각 시주 의사 밝힘

1989년 백석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1990년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내 사랑 백석』을 펴냄

1995년 대원각을 송광사 말사로 조계종에 대법사로 등록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꿔

동년 12월14일 창건법회

(길상사 창건법회날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음)

1997년 사재 2억을 출연,

백석문학상 제정 (창작과 비평사 주관)

1999년 11월 14일 사망

( 당시 자신의 몸을 화장하여서 눈이 하얗게 쌓이는 날에

 길상사 주변에 뿌려 달라고 유언해 한달 후 시행했다 함)

1999년 12월 유언장 공개해 유언대로 전재산을

자라나는 후학 대한민국 과학도들 위해서 쾌척함

 

 

《落水》

 

기생 진향과 길상사

기생 진향 (眞香)은 가세가 기울어 방년 16세 나이에 조선권번 (기생학교)에

들어가 궁중 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일규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나
더 큰 꿈을 이루기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일본에서 스승이 함흥에서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함흥으로 달려가 스승을 만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스승을 만나기 위해 함흥기생이 되었으며 이때 함흥의 영생여고보 교사

교직원들 회식있다는 장소에서 둘 사이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둘의 만남은 한 사람은 기생 진향(眞香)으로서 또 한사람은 함흥 영생 여고보

영어교사로 만났는데 기생 진향(眞香)의 이름은 김영한(金英韓 1912~1999)

이고 교사의 이름은 백석(白石) 백기행(1912-1995)이다 이 두 사람은 불같은

사랑을 시작하였으며 어느날 시인 백석은 그녀가 사온 “ 당시선집(唐詩選集)”

뒤적이다 이백(李白)의 시 “ 자야오가(子夜吳歌) ”를 발견하고“자야(子夜)”

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고 하는데 “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네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詩라고 한다. 함흥서 시작된 사랑은 진향이 먼저 서울로 오고 뒤 이어

백석이 서울로 와서 청진동에 신방을 차렸는데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 여섯살

김영한의 나이 스물둘였다 한다. 그러나 기생과의 사랑이 순탄치 만은 않았다.

고향의부모는 기생과의 사랑을 막으려고 고향으로 불러 내려서 강제로 결혼을

시켰었지만 그때마다 초야만 치르고 도망처 나와 자야의 품에 돌아 오곤 했다.

그러나 백석은 장남이고 봉건적 습관서 괴로워 했고 자야 에게 아무도 모르는

만주로 도망 가자고 설득을 했지만 백석의 앞 길을 막을까 두려워 자야는 이를

거절하며 괴로워했다 한다. 세월은 흘러 1939년 백석은 사랑하는 자야를 두고

만주 신경으로 직장 잡아서 떠났는데 이 것이 자야 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뒤 해방은 되었으나 휴전선이 가로 막혀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시인백석은 북한에서 국문학을 강의하고 일생 지냈으며

자야는 남한서 성북동의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을 사들여요정“대연각”을 만들어

1000억원대의 큰부자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평생동안 밤낮으로 백석을 그리워

했으며 백석의 생일인 7월1일이되면 하루 온종일 일체의 음식들을 먹지않았고

그님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한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시를 조용히 읽는 것이

생의 가장 큰 기쁨이었으며 “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한 맑고 신선한 원천수였다“라 했다.그러던 어느날 법정(法頂)스님

“ 무소유 ”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싯가 천억대의 대연각을 시주 할터이니

사찰로 만들어 달라 했다. 그러나 법정스님은 줄곧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이를 받아들여 조계종에 등록하고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지어 12.14일 창건법회를 열었다 이날 길상사 창건법회날 자야 김영한

보살은 법정스님으로 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네 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 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 곳에서 맑고 장엄한

법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 라고 했다. 또한 거금을 희사하여 꿈에도

그리던 "백석 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길상화 보살 김영한은 1999. 11.14 일

목욕 재계를 하고 본인이 기부한 길상사에 와서 참배를 하고 길상사 내에 있는

길상헌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또한 백석 백기행 시인은 1995년 1월 83세의
일기로 한많은 세상을 그리움으로 독거 전재산을 사회에 헌납출연하고 떠났다.
 

 

 

 

뽀여네...

          

                                              東歎/ 임성택

 

 

어화

둥둥

"뽀여네"

그들사랑

그리도 기구한 운명으로

남겨진 동화로 만인에 전래 될줄이야

 맺지못할 천박한 신분은 도통 한이 없던 그리움

마음속 인연에 쇠 못을 박혀냈더냐

 

눈물 없인 못볼 그들의 애정사

너무나도 뽀오얀 그리움은 여인의 한

사랑아~

사랑아~

가엾게도 짚시가 돼버린 둥둥 사랑아...

 

그래

맞다 맞어

거기 멈춰 서버린 이데오르기

양극차 철조망은 155마일 분단속으로

뼈저린 그리움은 영어(囹圄)

너무나 왜곡된 진실은 아픔의 잔재

 연인지간 둘사이 한 들이 많았었구나

 

아 아 참담한 비극

그 가신 민족의 영혼들

오늘도 오뉴월 그리움으로

그들의 유산은

아름다운 문학사 순정으로

계승 발전돼

백석 문학상으로 제정 승화 되었네

 

  ▒ 20140116 獻詩

 

 

 

 

 

 

 

 

 

 

 

 

 

 

 

 

 

 

 

 

 

 

 

 

 

 

출처 : ♬미리내 소리사랑♬
글쓴이 : 스자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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