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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사적순례 (韓國史跡巡禮) 1부

오늘행복스마일 2014. 8. 7. 09:30

 

 





한국 사적순례 (韓國史跡巡禮) 1부


史跡 32호 : 독립문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
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史跡 117호 : 경복궁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 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史跡 121호 : 서울 사직단

종묘와 함께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에 수도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
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에 지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들을 이 곳에서 지냈다. 1902년 사직단과
사직단의 임무를 맡는 사직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우리 민족을 업신여기기 위하여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았다. 1940년 정식으로 공원이 된
사직공원이 옛 사직단의 자리이다.















史跡 122호 : 창덕궁 (비원포함)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
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출처 : 언제나 그자리에서
글쓴이 : 느림보 거북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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