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좋은 책! 참좋은 사람!
“서두르되 무엇을 위해 서두르는지 알고 하라”
43년간 변함없이 월간 <샘터> 뒤표지를 지켜 온 지혜의 샘
-김재순 전 국회의장의 새 저서 <천천히 서둘러라>를 소개하며
월간 <샘터>의 뒤표지에는 광고가 없습니다. 창간호부터 무기명의 글로 채워져 왔지요. 매월 책을 받으면 뒤표지부터 읽는다고 할 정도로 많은 독자들이 이 글을 아끼고 사랑해 왔습니다. 그 글들을 고스란히 한 권의 책에 담았습니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인생과 나이 듦, 우리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이 가득합니다.
이 책은 ‘어른들의 학문 / 질 수밖에 없을 때 / 문제를 내는 삶 / 꽃을 보려거든 술을 마시려거든’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장은 계절 테마를 가지고 있는데, 여름(성숙), 가을(나이 듦), 겨울(성찰), 봄(행복, 희망) 순입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아니라 여름에서 시작해 봄으로 끝나는 구성을 택한 것은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이 책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것은 참된 삶을 사는 지혜입니다. 인생의 사계를 보내고 다시 봄을 맞은 노대인의 지혜는 인생의 절정에서 혹은 내리막에서, 좌절과 패배의 질곡에서, 희로애락의 순간마다 지침이 되어 줍니다.
제목인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좌우명이라고 합니다. 서두르되 내가 무엇을 위해서 서두르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어 목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순간순간을 더욱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월간 <샘터>의 창간인이자 이 책의 저자인 김재순 전 국회의장은 올해 미수(米壽, 88세)를 맞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정치인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가 문화인이자 지성인으로 우리나라의 출판문화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는 경제 개발의 논리가 지배하던 1970년에 ‘문화’와 ‘교양’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교양지를 창간하였고, 지금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창간 정신을 지켜 왔습니다.
그가 뒤표지에 써온 글들에는 그의 이러한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2002년에는 대장암 투병으로 글을 이어 가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연재를 멈추지 않았고, 신이 우리에게 절망을 보내오는 것은 생명을 불어넣기 위함이라는 글을 써서 독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샘터>를 창간한 것이 45세 때였으니, 그는 <샘터>와 함께 반평생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90이 가까운 나이에도 그는 다달이 <샘터>에 실릴 글을 직접 쓰고, 하루 세 시간 이상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행복한 삶이란 어떤 삶인지, 그리고 어떠한 식견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들려줍니다.
◈ 저자 소개
우암(友巖) 김재순
43년간 매달 샘터 뒤표지글을 써왔습니다. 1970년 4월,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교양지 월간 <샘터>를 창간했으며, 현재는 샘터사 고문입니다. 제 5, 6, 7, 8, 9, 13, 14대 국회의원으로 총 7선에 걸쳐 의원직을 역임했습니다. 제13대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정계에서 은퇴했습니다. 《한 눈 뜨고 꿈꾸는 사람》, 《걸어가며 생각하고 생각하며 걸어간다》, 《새 지평선에 서서》, 《대화》, 《그다음은, 네 멋대로 살아가라》를 지었습니다.
저자에게는 각별한 인연을 가진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습니다. 작곡가 길옥윤은 소학교 때 친구였고, 부산 피난 시절 주요한 선생에게 글쓰기를 배웠습니다. 피천득 선생은 첫눈이 오면 서로 알려주기로 한 약속을 40년이 넘게 지킨 사이였고, 법정 스님으로 인해 개를 무서워하는 트라우마를 고친 일화는 이번 책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소설가 최인호는 ‘젊은 청년 김재순’이라는 글에서 “김재순 씨야말로 여든 살이 된다 하더라도 청년에 머물러 있는 ‘한눈 뜨고 꿈꾸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쓴 바 있습니다. 또한 장영희 교수는 <샘터>를 가리켜 앞표지보다 뒤표지가 더 중요한 책이라고 말할 정도로 저자의 글을 애독했습니다. 소설가 김승옥, 시인 강은교, 동화작가 정채봉, 문학평론가 염무웅, 불문학자 오증자 교수 등은 모두 샘터를 거쳐 간 문인들입니다.
◈ 추천의 말
<샘터>를 받으면 제일 먼저 읽는 뒤표지글이 좋아 늘 내 마음의 앞자리로 모셔 오곤 했습니다. 무언가에 늘 의미를 부여하고 재미를 붙여 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미처 몰랐던 일을 공부하는 보람도 있습니다.
_이해인 수녀(시인)
지성과 멀어진 정치는 퇴화하기 마련이라는 고전적 정치 철학의 교훈을 현실로 연계시키고자 온갖 시련을 다 겪으며 반세기의 정치 역정을 보낸 원로 정치인, 김재순 의장. 그의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수상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고 되짚어 보게 한다.
_이홍구(전 국무총리)
국내 최초로 육아 잡지 <엄마랑 아기랑>을 창간하실 때 처음 김재순 의장님을 만나 뵈었고, 그분의 인격과 박식함에 매료되었다. 그분의 지혜를 배우려 <샘터>를 받자마자 뒤표지부터 읽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글을 읽을 때마다 정원에서 책을 읽으시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_이원영(중앙대 유아교육학과 명예교수)
◈ 본문 엿보기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시간이 갈수록 상대방의 좋은 면보다 그렇지 않은 면이 더 눈에 띄게 되어 관계가 소원해지기 쉽다. (…)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이란 상대의 인품에 맞추어서 심리적 거리를 잘 조절하는 사람이 아닐까. 인생길을 별 사고 없이 주행하려면 적당한 ‘차간 거리’가 필요하다.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되도록 먼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10쪽)
문학에는 여정, 음악에는 여운, 그림에는 여백이 있어야 아름다워진다. 인생도 여생이 충실한가 아닌가에 따라 과거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사람을 알려거든 그의 만년을 보라”는 것은 명언 중의 명언이다. (22쪽)
사람이 늘 이길 수는 없습니다. 질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젊음은 아름답지만, 젊음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조용히 감수하는 것, 이런 태도가 인간을 강하게 만듭니다. (73쪽)
죽음은 인생의 종착역이며,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렇다고 죽음이 인생이나 기쁨까지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죽음과 마주 서야 한다. (…) 진정 나의 삶을 사랑하려거든, 삶을 즐기려거든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말자. (149쪽)
바쁜 사람일수록 충실(忠實)하고 정력이 넘쳐흐른다. “아, 힘들어 죽겠어.” 그러면서도 그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번진다. 알랭에 의하면 이렇듯 자기를 돌볼 겨를 없이 쉬지 않고 일하는 삶, 바로 여기에 행복의 정체(正體)가 있다고 한다. 행복의 비결은 이렇다. 무엇에든 미치는 것이다. (173쪽)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어 보다 장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돋보입니다. 만족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단순한 일을 할 때도 목적의식이 분명하지요. 목적을 가지고 산다는 것, 그것은 사람마다의 에너지를 확대시키고 인생의 순간순간을 뜻있게 만들어 줍니다. (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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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청년 김재순’
-최인호 작가의《가족》5권 중에서
김재순 선생님과 처음 만난 것은 20여 년 전, 을지로5가에 있던 <샘터>의 초창기 사무실에서였다. 당시 그분은 여당의 원내총무로 한창 서슬이 퍼런 협객(俠客)이었고 나는 이십 대 후반의 신예작가였다. 어느 날 편집실에서 친한 편집자들과 바둑을 두고 있는데 발행인인 선생님이 불쑥 들어왔다.
그 무렵 나는 소위 정치를 한다는 사람이 자신의 정치적 계산도 아닌 독특하고 유니크한 <샘터>라는 잡지를 만든 사실에 대해서 굉장히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샘터>는 당시 그 내용 하나하나를 엄정해서 원고료를 지불했다고 해도 <샘터> 성격에 맞지 않는 내용이면 가차 없이 폐기처분하는 고집불통의 잡지였다. 당시로 보면 콩깍지만 한 잡지를 만들면서도 한 달에 편집회의가 대여섯 번이나 열리는 이상한 잡지였다.
함께 바둑을 두던 편집자가 발행인인 선생님이 들어왔으므로 벌떡 일어났지만 나는 누가 들어오거나 말거나 그대로 바둑판 앞에 앉아 있었다. 편집자가 나를 선생님께 소개시키자 선생님은 “이름은 많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라는 첫인사를 나눈 후 악수를 청하였는데 그때 악수를 나눈 느낌으로는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악력(握力)이 세다는 느낌이었다.
그 후 나는 <샘터>에 ‘가족’을 연재하게 되었고, 선생님은 유신(維新), 그 어지러운 정치 풍토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사경을 헤매더니 기적적으로 희생하고는 정치에서는 손을 뗀 야인으로 돌아와 거의 매일같이 <샘터>의 발행인실에 나와 계셨는데 그 무렵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매일같이 점심을 공짜로 얻어먹곤 하였다.
선생님이 자주 가시던 음식점은 예나 지금이나 청계천 4가에 있는 ‘우래옥’이라는 냉면집인데 나는 그제야 그분이 우리 집과 같은 평양 출신이며 집안끼리는 이미 널리 알고 있는 구면(舊面)이며, 일찍이 <새벽>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던 잡지계의 기린아였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새벽>이라는 잡지는 자유당 말기에 발간되었던 아주 참신하고 혁신적인 잡지였다. 당시에는 <사상계>라는 잡지가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었는데, <새벽>이라는 잡지는 <사상계>보다 더 싱싱하고 생동적인 새 세대의 젊은 잡지였다.
나는 그 잡지를 통해서 최인훈의 <광장>을 읽었으며 프라스코의 <제8요일>, 케스트너의 <파비안>이란, 당시로서는 놀라온 새 풍조의 소설들을 읽고, 신문물을 접했던 감동을 갖고 있었으므로 김 선생님이 젊은 시절 <새벽>을 창간하고 그것을 발간한 사람이라는 말 한마디에 정치가로서의 그분이 아닌 문화 창조자로서의 역량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마음속으로 그분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때의 추억에 대해 언젠가 ‘우래옥’에서 냉면을 먹다가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을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새벽>을 만들 무렵 원고를 수집, 취재, 교정 과정을 거의 내가 혼자서 맡아 하고 있었는데 밤이면 그 일을 끝내고 명동에 나가서 호떡 사먹고 소주 마시면서 울고 떠들던 그때가 내게는 제일 행복했던 시절입니다.”
<새벽>은 군사혁명 후 서리를 맞아 폐간되었으며 올바른 잡지에 대한 그분의 고집불통과 같은 정열은 또다시 한문 이름이 나닌 한글 전용의 새 이름 새 잡지 <샘터>를 창간하게 된 것이다.
선생님은 늘 두터운 여송연(呂宋煙)을 물고 계신데 나는 그분과 얘기를 나눌 때면 이분은 정치가라기보다는 정론가(政論家)라는 느낌을 언제나 받곤 하였다.
언젠가는 선생님으로부터 하와이에서 보낸 편지도 받은 적이 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직접 빈소에까지 찾아와 주신 은혜를 입고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선생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린 적도 없고, 선생님이 대수롭지 않은 부탁을 하였음에도 나는 언제나 버르장머리 없이 살짝살짝 도망쳐 버리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언제나 한결 같아 처음과 끝이 일관되게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시곤 했다.
돌아가신 장리욱 박사님에 대한 애정은 대단해서 살아 계실 때도 그분을 친아버지처럼 섬겼으며 지금도 동숭동 <샘터> 사옥 옆에는 장리욱 박사의 조그마한 흉상이 세워져 있을 정도이다.
장리욱 박사 흉상 밑에는 평소에 그분이 좋아하던 말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누군가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사람은 한 눈 뜨고 꿈꾸는 사람일 게다.’
장리욱 박사가 좋아하던 말 중에서 이 말이 자신에게도 가장 좋은 말이라고 느껴졌는지 국회의장을 물러나 맨 처음 펴낸 책의 제목을 ‘한 눈 뜨고 꿈꾸는 사람’이라고 붙인 것을 보면 뜬 눈으로는 세상(현실)을 직시하고 감은 눈으로는 꿈(이상)을 꾸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싶어 하는 김 선생님의 인생관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꿈꾸는 사람 김재순.
그 후부터 나는 김 선생님을 보면 그런 느낌을 가져왔다. TV 화면을 통해서 주로 뉴스 시간에 의장석에 앉아서 의사봉을 두드리는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그분이 정치가라기보다는 뭔가 새로움을 꿈꾸는 한국인으로서의 젊은 혈기를 느끼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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