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月下情人(최종회)

오늘행복스마일 2015. 3. 1. 15:34

     

                       

 

 

 

 

   月下情人(최종회) 

 

                                                                                              - 여강 최재효

                                                                                                            

                                  - 여강 최재효

  공주일행은 동학사를 출발하여 이틀 동안 걷고 걸어서 보은군 속리산 자락의

어느 산촌에 도착하였다. 산촌이라고 해야 고작 민가 대여섯 채가 전부였다.

산세가 험해 논 농사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멀리 천황봉이 아득하게 보이고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고 있어 사람 살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좋아보였다.


  서서히 날이 저물고 있었다. 빨리 하룻밤 묵을 장소를 정해야 했다.

사내가 가장 커 보이는 민가로 다가 갔다. 마침 앞 마당에서 촌로들이 농기

구를 수리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가 헛기침을 하면서 촌노들

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르신, 말씀 좀 엿쭙겠습니다.”
  “......”
  그러나 노인들은 본체만체 하였다. 최근들어 시국이 어수선하다보니

외부 사람들이 자주 나타나고 어떤 날은 외지인들이 다녀간 뒤 곧 바로

관군이 들이 닥쳐 촌노들에게 다짜고짜 외지인들이 간 곳을 대라고 윽박질

러대기 일쑤였다.


  “어르신, 몇가지 말씀 좀 엿쭙겠습니다.”
  “이 동네는 보시다 시피 민가 두 채 밖에 없수. 재워줄 수도 없고 먹을 것도

 없으니 지나가는 나그네면 어서 가던 길을 가슈. 우린 바쁘우.“


  촌노들은 사내가 묻기도 전에 몇 마디 던지고 휑하니 자리에서 일어

나더니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내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촌노가 들어간 대문을 두드렸다.


  “어르신, 잠시 말씀 좀 묻겠습니다.“
  “......”


  그러나 집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해가 산 정상에 걸리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봄바람 치고 너무 차가웠다. 멀리서 자신을 바라

보고 있는 공주와 유모가 걱정되었다. 만약 여기서 촌노들의 협조를 구하지

 못하면 지리도 모르는 산길을 더 걸어야 하기 때문에 사내는 어떻게

해서든지 노인들에게 엽전을 몇푼 집어 주고서라도 촌노들에게 환심을 사고

하룻밤 묵어야 했다. 


  할 수 없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마음먹고 살며시 대문을 밀었다.

빗장이 질러져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안채에서 마당을 쓸던 노인이 무단 침입

한 사내를 보자 질겁을 하였다.


  “아니, 주인 허락도없이 남의 집안으로 들어오다니. 어서 나가슈.

어서.”
  “어르신,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제 말씀 좀 들어 보세요.”
  “들어보고말, 난 지나가는 과객에게 은혜를 베풀 위인이 못되니 어서

가던 길을 가슈.“
  사내는 말로는 통할 것 같지않아 엽전 한 꾸러미를 슬쩍 내보였다.


  “우린 이 마을에 살러 온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어르신

 댁에서 하룻밤 묵고자 합니다. 그냥 재워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엽전 꾸러미를 본 노인의 태도가 금방 달라졌다.

 
  “방이 있기하오만 누추해서......”

  “괜찮습니다. 바람만 막을 수 있으면 됩니다.”
  “험, 험. 그러면 저 방으로 드시구려.”


  노인이 가리키는 방은 소 외양간 옆에 붙은 작은 방이었다. 초가집이

지만 안에서 보니 그런대로 집이 괜찮아보였다. 사내가 얼른 공주와 유모

를 데리고 들어왔다. 세 사람이 좁은 방에서 기거하기는 곤난했다.

 

사내가 노인에게 사정하여 간신히 방 하나를 더 구했다. 방은 좁았지만

사람이 두 사람이 하룻밤 묵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아랫목에 검정색 무명

으로 지은 솜 이불이 깔려있어 방안에 온기를 조절해 주고 있었다.


  “공주, 오늘은 이곳에서 묵으며 앞 날을 의논 해 봅시다.”
  “서방님, 공주라는 호칭은 쓰지마셔요. 그냥, 여보라고 하던지. 세희라고

불러주세요. 누가 들을까 두렵습니다.“
  “네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곧 이어 산채와 옥수수로 된 저녁상을 촌노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들

였다.


  “찬은 변변치않으나 그런대로 요기는 될거유.”
  시골 인심도 변해 엽전이라도 몇푼 집어줘야 뜻이 통했다. 그동안 이집을

 다녀갔을 무수한 과객들의 낙서가 벽에 가득했다. 한시(漢詩)를 써놓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 하는 내용 등 다양한 과객들이 고된 삶이 벽에 고스란히

그려져 있었다.


  “미안해요. 나를 믿고 이곳까지 와서 이런 음식을 들게해서요.”
  “서방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서방님과 함께라면 모래를 씹어도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개의치마세요. 밥 맛이 좋습니다.“


  “공주, 아니 세희, 고마워요.”
  이틀을 쉬지않고 걸은 덕분에 발이 퉁퉁 부르텄다. 공주는 미지근한 물을

 떠와서 사내의 발을 씻어주었다. 공주의 부드러운 손이 사내의 발과 종아리

에 따뜻한 정을 소록소록 전하고 있었다.


  “세희, 고맙소. 내가 할테니 좀 쉬어요.”
  “아닙니다. 서방님. 제가 서방님의 피로를 풀어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지난 며칠이 긴 동굴 속을 헤맨 것 같았다. 공주와의 갑작스러운 혼사와

지나오던 길에 접한 조선 국모의 친서(親書) 등 사내는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

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자요?“
  “아니요. 서방님, 잠이 안 오세요?”
  “너무 피곤해도 잠이 오지 않나 봅니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주무세요.”
  “아니요. 오면서 가만히 살펴보니 우리가 정착해 살 곳이 여기 같습니다. 이

곳이 처음와본 곳인데도 웬지 낯설지가 않아요.“


  “서방님, 그럼 이곳에 터를 잡아요. 내일 집주인에게 며칠 더 묵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살 집을 알아보셔요.“
  “그래야 할 것 같소.”
  “세희, 이제 그만 잡시다.”


  사내가 공주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아무리 피곤하다고 하지만 젊은 육신은

그냥 자는 것을 거부하였다. 사내의 억센손이 공주의 젖가슴을 지분거리더니

이내 풍덕한 공주의 둔부를 쓰다듬었다.


  “서방님, 피곤하실텐데......”
  “......”
  사내의 육중한 나신(裸身)이 공주의 연약한 육신을 위에서 지그시 누르며 뜨

거운 혀를 공주의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공주, 사랑하오.”
  사내가 공주의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며 속삭였다.
  “서, 서방님. 소첩,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공주......“


  사내의 성난 것이 공주의 은밀한 부위를 파고들었다. 방안은 금방 한 여름

보다 더한 열기에 휩싸였다. 사내는 천천히 남성을 과시하며 공주를 열락

으로 인도하였다. 공주의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문 밖으로 흘러나갔다.

하늘에 반달이 은은하게 떠서 속리산 자락을 은빛으로 물들여 놓고 소쩍새는

산촌마을 가까이 내려와서 밤새도록 울었다. 


  다음날 사내는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며칠 더 묵겠다고 하자 주인

흔쾌히 승낙하였다. 엽전의 위력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사내는 주인과 함께

인근 동네를 돌아 다니며 집을 구하러 다녔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빈집이 있었다. 거의 헐값에 집을 구한 공주일행은

보름동안 집을 청소하고 수리하여 그럴듯하게 단장시켜 놓았다. 내친김에

패물을 정리하여 논과 밭을 마련하였다. 사내가 동네 사람들을 불러 조촐한

 잔치를 열어 자신과 공주를 농사지으러 산촌으로 들어 온 사람들이라고

소개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공주와 사내의 귀티 나면서 고상한 모습에

박수로 환영하며 좋아했다.


  사내는 마을 대소사마다 참석하여 마을 사람들의 인심을 샀다. 관아

에서 몇차례 호구조사차 다녀갔지만 그때마다 공주의 기지로 잘 넘어갔다.

그렇게 몇 년이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 흘러갔다. 공주는 아들과 딸을

낳았고 사내는 산골 사람이 되어 대처의 시름을 잊어가고 있었다.


  “고맙소. 당신덕분에 끊어질 뻔한 가문의 대를 잇는구려.”
  “김씨 문중에 시집을 왔으니 당연한 일인걸요. 모두 서방님의 홍복입니다.”


  조정에서는 살벌한 피바람의 상흔을 잊기 위히여 다양한 위민정책을

내놓았고, 상감은 내치(內治)에 정성을 쏟았다. 중전과 함께하는 술자리

에서 상감은 자주 세희공주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런 상감을

곁에서 지켜보는 정희왕후 역시 가슴이 아려왔다. 당장 세희공주가 살아있

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좀 더 세월이 흐른 뒤 상감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상감은 중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왕권 강화책으로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

하기 폐기 된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 또한 '동국통감'을 편찬해 전대의

 역사를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재조명하고, '국조보감'을 편수해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4대의 법과 규약등을 편집하여 후왕의 통치 법칙으로 삼았

다. 또한 최항으로 하여금 '경제육전'을  정비하게 했으며, 왕조일대의 총체

적 법전인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했다.


  정희왕후는 세희공주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지내고 있었다. 오래전 옥천현감이 자신에게 은밀히 보내온

보고 문서를 접한 뒤 공주가 보은이나 괴산 또는 상주 고을 쯤에 터를 잡고

 살고 있을 것이라 짐작을 하였다. 그러나 날로 악화되가는 상감의 안질

(眼疾) 때문에 정희왕후는 늘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중전이 어의(御醫)와 상의

하여 충청도 괴산 땅 초정리로 피접을 가기로 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약수가

안질에 좋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상감, 내달에 충청도 괴산 초정리라는 곳에 안질에 좋은 약수가 있다고

 하니 피접(避接)을 가심이 어떠하신지요?”

  “정사(政事)를 봐야하는 짐이 그 멀리까지 어떻게 피접을 간단 말이요?”

  “상감, 정사도 중요하지만 소첩에게는 상감의 옥체보존이 더 중요합니

다. 더 이상 안질을 방치하시다가는 더 악화하여 앞을 못 볼수 있다고 합니

다.”


 “짐이 앞을 못 본다고요?”

 “네에, 상감. 어의가 그리 진단을 하였어요. 그러나 다음 달 피접을 다녀

오세요.

소첩도 상감과 동행하겠습니다.”

 “중전, 고맙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리다.”


 정희왕후는 수양이 한가할 때마다 대전에 들어 괴산으로 피접 갈 것을

권하였다. 중전이 괴산 지방을 방문하려는 이유는 혹시 그곳에 가면 세희

공주를 만날 수도 있다는 일련의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옥천

현감이 올린 보고가 늘 중전의 마음을 괴산 고을로 향하게 했다.

 
 상감은 국정이 바빠 안 가겠다고 만류하였지만 중전과 대소 신료들의

간청에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진달래가 지고 철쭉이 인왕산을 붉게

물들일 무렵 수양의 피접 날자가 잡혔다.

 

  조정에서는 상감의 피접준비에 분주했다. 상감이 공석일 경우를 대비

하여 연일 의정부와 6조의 정승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였다. 상감의 피접

행차시 호위를 맡을 내금위소속 병사들의 숫자와 호위총책임자 그리고

왕명을 출남을 담당할 승정원 소속관리들이 정해졌다.


  늦봄 경복궁을 떠난 상감의 행차는 십여일 후 보은 고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부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던 정희왕후는 마침 속리산 법주사를

들렸다가기를 상감에게 청하자 상감은 쾌히 승낙하였다.


  상감의 어가(御駕) 행렬이 길게 속리산을 향하자 인근의 백성들은 모두

 나와 길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길가에 엎드려 상감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

다. 관아에서 나온 현령들이 아침 일찍 동네 사람들을 닥달하여 할 수

없이 세희공주 내외도 두 아이들을 데리고 길가에 나와 있었다. 오후 늦게

상감의 행차대열이 동네 앞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때 두 아이들이 길가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어가 행렬 앞으로

장난감이 굴러갔다. 두 아이가 어가 쪽으로 달려 나오자 호위 병사들이 제지

하였다.


  “이놈들, 어서 길을 비키지 못할까? 나랏님 가시는 길이니라.”
  어가가 잠시 멈추자 상감이 밖을 내다보았다.
  ‘허허, 그 계집 아이가 내딸 세희공주와 많이도 닮았도다. 사내 아이도

그렇고........'


  “여봐라. 어가를 멈추어라. 잠시 바람을 쐬고가야겠다. 도승지는 저 아이를

짐 앞으로 불러오시오.“
  겁에 질린 두 아이가 상감의 앞으로 불려오자, 동네 사람들과 함께 엎드려있

던 세희공주와 사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아, 아바마마. 어인일로 이곳까지 오셨나이까?“

  세희공주는 아버지 수양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 보지 못했다. 원망스러우면

서도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아버지 옆에 어머니 정희왕후가 앉아 있었다. 얼른

일어나 어머니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세희공주는 꼼짝하지않고 머리를 조아

리며 꿇어앉아 얼른 아버지 수양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었다.


   ‘앗, 큰일이다. 나의 정체가 탄로나면 나와 저 두아이는 죽은 목숨이다.’
  사내는 좌우를 살피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래, 얘야, 네 아비와 어미는 누군고?”
  상감이 두 아이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손가락을 빨고 있던

 사내 아이가 상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이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우물쭈물하였다.


  “얘야, 나는 이 나라 임금이란다. 너에게 맛있는거를 얼마든지 줄테니

 무서워하지말거라.”

  “......”

 

  “어서 말해보렴. 네 아비와 어미의 이름이 무엇인고?”

  수양이 다시한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내 아이 등을 다독여 주었다.

사내 아이가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울엄마는 세희라고 하구유, 울아부지는 서방님이라고 해유.”

  수양은 귀를 의심하고 다시 사내아이에게 물었다.

  “아가, 다시한번 천천히 말해주겠니? 네 아비와 어미의 이름이 뭐라고 했

느냐?”

  “아, 할아부지 정말 귀가 먹었나유?”

  “울아부지는 서방님이구유, 울 엄마는 세희라구한다니까유.”


  “뭣, 뭐라고? 세희? 아가야, 너 방금 네 어미가 세희라고 했느냐?”
  “네, 맞구먼유. 울아부지가 늘 엄마를 세희라고 부르구먼유. 또 어떤 때는

 세희공주라고 부르구유.”


  “오오, 그러냐? 여봐라 이 아이의 아비와 어미를 당장 불러오거라.”
  ‘아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세희공주는 동네 사람들 틈에서 엎드려 흐느껴 울고 있었다. 관리들의

 손에 이끌려 사내와 세희공주가 수양의 가마 앞으로 불려갔다. 상감 앞에

 다가가자 세희공주는 눈물을 흘리면서 절을 올렸다. 세희공주가 수양에게

 절을 올리자 엉거주춤하고 서있던 사내도 아내를 따라 절을 하였다.

아비와 어미가 수양에게 절을 하자 두 아이는 덩달아 수양에게 절을 하였다.


  ‘아니, 저 여인과 사내 그리고 아이들이 어인일로 짐에게 절을 한단말

인가?’

  수양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봐라, 여인은 짐을 똑바로 보라.”

  “......”

  “여인은 짐의 얼굴을 보라.”

  세희공주는 어깨를 들석거리며 흐느끼고 있다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얼굴을 들어 아버지 수양을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소녀, 소녀, 세희옵니다.”

  수양은 뭔가 잘 못들었을거라고 생각하였다.

  “여봐라. 방금 뭐라고 하였느냐?”

  “소녀, 아바마마의 장녀 세희이옵니다.”


  “뭐라고? 네가 진정 세희공주가 맞느냐? 어디 자세히 좀 보자.”

  세희라는 말에 수양과 정희왕후은 가마에서 내려와 세희공주에게 다가

가 세희공주를  자세히 보았다. 비록 입고있는 옷은 평민의 복장이었지만

 수양과 정희왕후는 금방 자신의 혈육을 알아 보았다. 안질이 있던

수양은 손수건으로 두 눈을 닦고 천천히 세희공주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진정, 네가 세희, 짐의 큰딸 세희가 맞는냐?”

  “세, 세희야. 어미다. 네가 여기서 살고 있었구나.”

  “에네, 아바마마, 어마마마 소녀의 절 받으소서.”

  세희공주가 다시 절을 올리려고 하자 정희왕후가 세희공주를 일으켜 세우

며 세희공주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진정, 네가 세희로구나.”

  “아바마마, 어마마마, 소녀 그동안 문우 엿쭙지못해 송구하옵니다.”

  “세희야, 으흐흐흐흐흐.......”

 

  “네가 정녕 세희가 맞느냐? 내딸 세희가 맞느냔 말이다.

어이, 흐흐흐흐흐......”

  정희왕후가 세희공주를 끌어안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자 수양도 옆에

털썩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세희야, 정말로 네가 세희가 틀림없구나. 정말로 내딸, 세희가 맞구나.

어이구, 으흐흐흐.....”
  “아바마마 -”

 

  마을 앞 길은 갑자기 울음바다가 되었고 어가를 호위하던 관리들과 마을

사람들은 상감과 중전이 촌부를 끌어 안고 우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한 모습

들이었다. 호위하던 무사들과 관리들도 부녀상봉을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잘못했다. 세희야,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그 동안 나는

늘 너를 잊지못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이제, 이 아비를 따라 한양

으로 가자.“
  “세희야, 아바마마께서는 이미 모든걸 용서하셨단다. 이 어미를 따라 한양

으로 가자.”
  “아바마마, 어마마마, 소녀의 낭군과 아이들입니다.”


  “소신, 상감마마와 중전마마께 인사올립니다.”

  “오오, 부마, 잘 생겼도다. 정말로 늠릉한 대장부로다.”

  수양은 사내를 아래위로 흝어보더니 매우 흡족한 포정을 지었다. 정희왕후도

사내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사위, 참으로 잘났어요. 정말이지 사내다운 기운이 철철 넘칩니다. 내가

사위 하나는 잘 얻은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부족한 공주를 인애하며 잘 살아

줘서 정말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정희왕후는 사내의 두툼한 두 손을 잡더니 기뻐서 얼쩔 줄 몰라했다. 사내는

수양과 중전의 앞에서 쩔쩔매며 눈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행여 자신이 절재

(節齋) 김종서의 손자라는 사실이라는 것이 알려질까 두려워 하였다.


  사내가 두려움을 애써 감추고 두 아이들과 큰절로 상감 내외에게 인사를 올

리자 중전은 두 아이를 꼭 안아주었고, 상감은 사내의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상감과 중전은 가슴벅찬 혈육의 상봉에 너무 기뻐 어찌할 줄 몰랐다. 정희왕

후는 상감의 피접을 핑게로 괴산 지방으로 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꿈에도

그리던 큰딸 세희공주를 만난 것에 대하여 수양과 정희왕후는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세희는 아비와 어미가 법주사에서 불공을 드리고 초정리에 다녀 올 동안

서둘러 떠날 차비를 하거라. 이 아비와 궁궐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그동안 못다한

아비 노릇을 할 수 있게 해다오."

  “.....”

  “그래, 세희야 이 어미를 따라 한양으로 돌아가자.”

  “......”

 

  “여봐라, 세희공주가 짐과 함께 대궐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

  “도승지, 상감마마의 지엄하신 명을 철저히 받잡겠사옵니다.”


  임금의 행차는 법주사로 향했고 공주일행은 집으로 돌아왔으나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수양의 명에 의해 수양을 수행하던 승정원 관리

한명과 내금위 소속 병사 네명이 남아 세희공주가 상감을 따라 한양으로 갈 수

있도록 짐을 채기기 시작했다. 이틀 만에 짐을 모두 꾸려 한양으로 떠날 준비를

마치자 사내는 불안해 했다.

 

 “여보, 나는, 나는 이곳에 남겠소. 도저희 상감을 따라 대궐로 갈수 없소.

그러니 당신과 아이들이나 가시구려. 난, 난 상강을 따라 갈 수 없소.”

 

 “서방님,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소첩을 용서하시었습니다. 소첩과 함께 한양

으로 돌아가세요. 가셔서 평안하게 사세요.”

 “아닙니다. 난, 이곳이 좋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시구려.”

 “......”


  “여보, 정말입니다. 나는 한양으로 갈 수 없소. 난 한양으로 가기싫소.

만약 내가 한양으로 돌아가면 나는 살지 못할 것 같소. 그러니 당신이나 아이

들과 한양으로 올라가 구려.“

 

  “......”

  “진정입니다. 나는 가고싶지 않아요.”

  “......”

 세희공주는 뜻 밖에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나 혼자 아바마마를 따라 한양으로 돌아간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이미

나는 왕실 족보에서 삭제되었고, 왕실의 종친들은 나를 죽은 사람으로 알고 있을

 텐데......’

 세희공주는 긴 한숨만 내 쉬었다.


 ‘아아, 어찌해야 하나. 만약 내가 김종서 할아버님의 혈손이라는 것을

알면 상감은 절대로 나를 살려두지 않을것이야. 아니지, 공주와 부부가되어

아이들을 낳고 살고 있으니 죽이지는 않겠지. 그러나 대신들은 나를 역적의

자식이라고 연일 죽이라고 상감에게 주청하는 상소를 올리것이 뻔하다.’


  “서방님,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합니다. 어찌 소첩 혼자

부귀영화를 누리겠습니까? 서방님이 원치않으시면 소첩도 가지않겠습니다.“


  “아니오. 당신만이라도 상감마마를 따라 한양으로 가세요.”
  “아닙니다. 소첩, 죽어도 서방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고, 고맙소. 나는 경상도 포항으로 떠날 작정입니다. 그곳에 먼 집안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소첩과 두 아이들도 함께 데려가주세요.”
  “고맙소. 그러나 당신은 상감을 따라 한양으로 가세요. 가셔서 그동안 못 누린 

공주의 지위를 받고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세요." 

 

  “아닙니다. 부부는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들었습니다. 서방님이 안 가시는

 데 소첩이 어찌 아바마마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이제 소첩은

조선국 공주도 싫고 부귀영화도 싫습니다. 오로지 서방님, 한 분 제 곁에 계시면

됩니다. 소첩, 죽는 날까지 서방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부인, 고맙소.” 


  불안한 가운데 평화로운 날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산촌에 세희공주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인근 고을의 수령들이 앞 다투어 세희공주와 사내에게 몰려

들어 공주를 뵙기 위해 난리법석을 떨었다.

 

  어떤 수령은 마차에 금은보화와 값비싼 재물들을 바리바리 싣고 와 공주의

알현을 요청하였고, 또 어떤 지방 토호는 쌀 수백 가마니를 가지고와 세희공주

에게 진상하고자 하였으나 세희공주가 거절하자 앞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가버렸다. 조용하던 산촌이 갑자기 몰려든 인파들로 인하여 마치 장터를

방불케 했다.


  아침부터 동네 촌로들과 청년들이 몰려들어 집안일을 거들고 아낙들은 맛있

는 음식을 준비하여 공주가족에게 바치는 등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공주가 살고 있는 집 앞마당에 큰 천막을 치고 몰려드는 지방수령들과

토호들을 맞았다.

 

  그들이 타고 온 가마와 말들이 동네 한가운데 줄지어 늘어서 있어 마시장

(馬市場)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공주에게 환심을 사서 벼슬 한자리라도

 얻어보려는 속셈으로 인근뿐만 아니라 경상도와 충청도 각 지역의 약삭빠른

자들이 거의 총 출동하다시피 했다.


  사내와 공주는 점점 늘어나는 방문객들로 인하여 큰 부담을 느꼈다. 그렇

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내칠 수도 없는지라 할 수없이 방문객들의 인사를 받

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상감이 이 사실을 알면

큰 호통을 칠 것 같았다.

 

 “서방님, 내일이면 아바마마께서 피접을 마치시고 한양으로 돌아가시는 날

입니다. 오후 쯤 이곳에 들리실 것 같은데 어찌해야하나요?”


 “나도 그것이 고민입니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갈 계획을 세우셔야 합니다. 오늘 밤 안으로 이곳을

떠나지 못하면 아바마마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렇게 합시다.”

 사내가 혹시 자신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들을까 걱정되어 방문을 열고 밖을

한번 살펴보았다.


  “여보, 오늘밤 집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과 승정원관리에게 기름진

음식과 술로 위로해 줍시다. 그들에게 음식을 푸짐하게 들게 하고 독한 술을 먹여

잠들게 한 뒤 이 집을 빠져나가는 겁니다.”

 “오오, 정말 기가 막힌 방법입니다. 서방님.”

 “가능하겠지요?”

 

 “가능하고말고요. 아까 점심에도 병사들에게 탁주 한 말을 내줬더니 금방

 먹어 치웠어요. 병사들이 술을 좋아하니 집을 빠져 나가는데 성공할 수 있을거

에요.”

 “그럼, 어서 서두릅시다.”

 “나는 관리를 책임질 테니......”


  세희공주는 동네 아낙네들에게 청주(淸酒)와 기름진 음식을 준비하여 달라며

돈을 건네자 동네 아낙들은 돈을 받지 않고 술과 음식을 준비 하였다. 세희공주

는 고을 수령들과 토호(土豪)들이 진상한 물건 중에 귀금속과 값나가는 물건과

여벌의 옷을 준비하였다. 또한 유모에게 넌지시 오늘밤 탈출 계획을 알리고

준비에 철저를 기하라고 하였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자 사내는 승정원에서 파견

된 관리를 방으로 불렀다.  


  “우리 가족들을 위하여 수고하시는 나리께 저녁에 술이나 함께 하고자 합니

다만?”

 “아이고, 부마님, 소신이야 가문의 영광입죠. 헤헤 헤헤......”

 “고맙습니다. 그리고 오늘밤은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에게도

그동안의 수고를 위무하는 뜻에서 공주가 술을 마련했습니다.”


 “아이고 부마님, 그리 하지 않으셔도 되는 걸요. 하루 세끼 공주마마님께서

잘 챙겨 주셔서 잘 먹고 있답니다. 헤헤 헤헤......”

 “아닙니다. 이 나라 부마와 공주로서 여러분께 치하하고자 하니 그리

아세요.”

 

 “고맙습니다. 부마님, 공주님, 고맙습니다.”

 30초반의 관리는 사내에게 손을 싹싹비벼가며 허리를 반쯤 굽힌 상태에서

비굴할 정도로 아양을 떨었다.


 공주는 저녁을 일찍 준비하여 관리와 병사들에게 먹이고 농담을 해가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보름달이 중천 쯤 오자 공주는 승정원 관리를 안방으로

부르고 유모를 시켜 병사들에게 술을 동이 째 안기도록 하였다. 저녁을 일찍

먹은 터라 관리와 병사들은 출출한 상태였다.


 “어서 오세요.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주가 일어나 관리를 맞자 관리는 넙죽 엎드려 세희공주에게 절을 올렸다.

 “소신, 공주마마님을 뵙습니다.”

 “어서일어나세요. 어서요.”

 “소신이 어찌 감히 공주마마 앞에서 술상을 받을 수 있습니까?”


 “호호호호, 괜찮대두요. 오늘은 내 그대의 수고를 위무하는 것이니 그냥 편

하게 앉으세요.”

 “그래도 어찌 감히......”

 “일어나세요. 공주께서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니 개의치 마세요.”

 

 “부, 부마님, 고맙습니다.”

 관리는 푸짐하게 차려진 상 위의 음식으로 자꾸 시선을 돌렸다. 공주가 얼른

주전자를 들어 손수 술을 따라주었다.


 “공주마마, 소신,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요?”

 “호호호호, 아니에요. 그동안 우리 가족을 보살펴 주시느라 너무 고생을

하셨습니다. 오늘 마음껏 드시고 편안하게 주무세요. 내일 오후 쯤 아바마마

께서 이곳을 들리실 테니 시간도 넉넉합니다. 자리를 편하게 하세요.”

 “황감하여이다. 공주마마.”


 “자, 내 술도 한잔 받으시구려.”

 “부, 부마님, 이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나이다.”

 “허허허허허.......,  많이 드세요. 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고, 고맙사옵니다요. 부마님.”

  공주와 사내가 따라주는 술을 연거푸 마시던 사내는 그만 혀 꼬부라진 소리로

횡설수설 하더니 이내 술 상머리에 쓰러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이 술은 공주마마와 부마님께서 하사하는 겁니다. 어차피 내일이면 한양으로

올라가실 테니 오늘밤은 마음 푹 놓으시고 이 술로 객고를 푸시구랴.”

 “하이고, 고맙습니다. 공주마마님의 하해같은 은혜를 어찌 보답해야 할지요?”

 

 “아이구, 그런 소리말구 많이 드시기유. 술과 안주는 얼마든지 있어유.

그리고 승정원 나리도 안채에서 부마님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어유.”


 “그래요? 그럼 오늘은 안심하고 마셔도 되겠네. 흐흐흐........”

 그렇지 않아도 속이 허해 뭐 먹을 거 없나하고 자꾸만 안채를 기웃거리던 병사

들은 유모가 내온 술과 고기 안주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입이

벌어졌다.


 “역시, 사람은 줄을 잘서야 돼. 우리가 상감을 따라 갔으면 죽을 고생만 했을

거여. 허허허허.”

 “자네 말이 맞아. 줄은 무조건 잘서야 돼.”

 “이 사람들아, 나 좀 줘. 자네들만 마시지 말고.”

 

 집 앞에서 경계 근무를 보던 병사들은 사랑채에 들어 공주가 하사한 술과

고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퍼마시고 있었다. 술 두 동이가 비워지자 병사들은

하나 둘 쓰러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여보, 어서 이곳을 뜹시다.”

 “서방님, 밖에 누가 없겠지요?”

 “내가 방금 집 안팎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병사들은 사랑채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어요. 저 사람은 저렇게 코를 골고 있고......”

 사내가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관리를 가리켰다.


 “서방님, 혹시 누가 볼지 모르니 뒷담을 넘어 가는 게 어때요?”

 “내 그렇지 않아도 뒷담을 약간 헐어 놨습니다.”

 공주 일행이 뒷담을 넘어 시오리 쯤 왔을 때 반달이 동산에서 떠올랐다.

 

 "서방님, 저 달 좀 보세요."

 "달이 참 밝습니다. 부인."

 "서방님과 소첩이 인연을 맺은 날도 저 달님이 내려다 보고 계섰지요."

 "그래요. 그날밤 탑돌이 할 때도 저 달님이 환하게 지상의 만상(萬像)들을 비추는

밤이었지요."

 

 "나무 월광보살마하살"

 공주와 사내는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달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자신들의 미래를

굽어 살펴달라고 빌었다.

 

 큰 아이는 사내가 업고 작은 아이는 유모가 업었다. 공주는 금은보화와 값진 물건이

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사내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의 긴 그림자가 산길에 길게

드리웠고 반달은 서서히 중천에 오르면서 하얀 입김을 지상으로 뿜어냈다. 


  다음 날 오후 상감과 정희왕후가 다시 세희공주가 살고 있는 마을에 들렸다.

그런데 자신들의 행차를 알고 있으면 당연히 집 밖에 나와 환영을 할 줄 알았는데

공주와 사내 그리고 아이들의 그림자도 보이자 않았다. 동네 사람들만 길에

나와 엎드려 상감의 행차를 맞고 있었다. 그때 병사 네 명과 관리가 나타나

상감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여봐라, 어찌 세희공주가 보이지 않느냐?”

 “사, 상감마마. 주, 죽여주소서.”

 “죽여 달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수양이 관리를 쏘아보며 묻자 관리는 벌벌 떨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여봐라, 네가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더냐? 어서 아뢰지 않고 뭐하느냐?”


 “사, 상감마마. 소신을 죽여주소서.”

 “아, 답답하구나. 도대체 공주는 보이지 않고 너는 왜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이

냐? 어서 소상히 아뢰보거라.”

 관리는 겨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간밤의 일을 수양에게 아뢰자 수양은 노발

대발하였다.


 “뭣, 뭐라고? 공주와 부마가 야반도주하였다고?”

 “도대체 왜? 왜 공주와 부마가 야반도주하였단 말이냐? 네놈들은 무엇을 하였

기에 공주가 집을 떠나는 것을 모르고 있었더란 말이냐?”

 “소, 소신을 죽여주소서. 상감마마.”

 관리와 네 명의 병사들은 사색이 되어 벌벌 떨면서 오줌까지 지렸다.

 

 “여봐라, 저 놈들은 당장에 효수(梟首)하거라.”

 “상감, 상감, 아니 되옵니다.”

 “아니 되다니요? 중전은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사람을 또 죽여서는 아니 되옵니다. 상감, 세희는 우리와 한양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그냥 세희와 그 가족들이 평안히 살도록 조처

하세요. 그 아이가 우리와 오랜 세월 떨어져 살다보니 대궐에 가서 사는 것이

불편한가 봅니다. 지금까지 그 아이를 죽은 것으로 알고 살았으니, 다시 가슴에

묻고 사십시다. 상감.”


 “크흐흐흐흐흐.........”

 수양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내개, 내가 지은 업보입니다. 이제 와서 그 애를 잘 대해 준들 지난 세월

내가지은 업보가 사라지겠습니까? 중전말대로 그리하리다.

으흐흐 흐흐흐....... 세희야, 세희야, 으흐흐흐흐…….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

다오 세희야. 네가 어찌 이 아비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단 말이냐?

으흐흐흐흐......”


  “상감, 진정하세요. 그 아이의 운명이 그런 것을 어찌하겠어요. 그냥  그 아이

가 편히 떠나도록 하세요. 이것이 우리 내외가 지은 업보인지도 모릅니다.

먼 훗날 저승에 들면 이승에서 못한 아비 어미노릇을 다시 할 날이 오겠지요.

그만 진정하시고 한양으로 올라가세요.“

  "세희야, 세희야,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이 못난 아비를…….

으흐흐흐 흐흐흐......“


  "상감, 어서 한양으로 올라가세요. 그 아이들은 잘 살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살 것입니다. 이제 그만 진정하시고 한양

으로 올라가세요."

 

  "세희야,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세희야. 으흐흐흐흐……."
  마을 사람들은 상감의 통곡소리가 멀어질 때 까지 길가에 엎드려 있었고,
하늘은

차차 맑게 개고 있었다. 

                                                                                                                                                           

  


 



출처 : 언제나좋은벗
글쓴이 : 범사에감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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