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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늘 작고한 朴浚圭 전 국회의장 증언: "

오늘행복스마일 2015. 12. 20. 06:43
오늘 작고한 朴浚圭 전 국회의장 증언: "내가 겪은 現代史의 巨人들"
내가 편집장으로 있었던 2002년 2월호 월간조선은 朴 전 의장을 인터뷰하였는데, 한국 정치사에 대한 가장 심층적인 증언 중 하나이다. 『李-朴-全-盧는 성공한 대통령 兩金은 실패작』

김연광    

『(김영삼은) 화제가 풍부하지 않았어. 다른 정치인 비판하고, 단순한 생활 차원의 얘기 외에 다른 얘기가 안 돼. 그 양반 유일한 책이 몽고메리 자서전을 번역한 건데 몽고메리의 자서전이 번역할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야. 좋은 술 친구였지』 『DJ는 독학해서 균형이 안 잡힌다』 『JP를 크게 신뢰하지 않았어요. 朴대통령은 實利, 實用주의자야. 내실을 중요하게 생각했지, 쇼하는 걸 싫어했어요』
 
 
박준규(朴浚圭·89) 전 국회의장이 3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박 전 의장은 5대, 6대, 7대, 8대, 9대, 10대, 13대, 14대, 15대 국회의원을 지내, 金泳三(김영삼) 전 대통령, 金鍾泌(김종필) 전 국무총리과 함께 最多選(최다선, 9선) 의원 기록을 갖고 있다. 13~15대 국회에서는 잇달아 세 차례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故人(고인)은 1948년 유엔주재 한국대표부 창설 당시 외무부 사무관으로 유석(維石) 趙炳玉(조병옥) 박사를 도운 게 인연이 돼 政界(정계)에 입문,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당 舊派(구파)의 소장파로 활동했다. 5·16 후엔 공화당 정책위의장과 당의장 서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88년 민정당 대표위원과 1990년 민자당 상임고문을 지냈고, 1995년엔 민자당을 탈당한 金鍾泌과 함께 자민련을 만들었다. 2000년 16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은퇴할 때까지 40년간 政界에 몸담았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조동원 여사와 1남 3녀가 있다. 빈소는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장례식장 VIP실, 발인은 7일 오전 8시, 葬地(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내가 편집장으로 있었던 2002년 2월호 월간조선은 朴 전 의장을 인터뷰하였는데, 한국 정치사에 대한 가장 심층적인 증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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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 前 공화당 의장 前 민정당 대표 前 국회의장 朴浚圭
  
  한국정치 50년, 그 심장부 최근접 목격자의 놀라운 證言
  
  金演光
  
   개발연대의 策士, 대구-경북 인맥의 核
  
  
   『늙은이가 할 얘기가 뭐가 있노. 茶(차)나 한잔 하고 가요』
  
   지난 여름부터 계속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던 朴浚圭(박준규) 前 국회의장이 뜻밖에도 새해 첫날 직접 전화를 걸어 왔다.
  
   1월3일 아침 서울 종로구 구기동 建德(건덕)빌라 1층의 벨을 눌렀다. 목둘레가 해진 검은 티셔츠 차림의 朴 前 의장이 직접 문을 열어줬다. 북한산 산자락에 자리잡은 빌라는 전망이 좋았다. 30여년 전에 사들인 1000평의 땅을 부동산 업자에게 내주어 빌라를 한 棟(동) 짓게 하고, 땅 값으로 빌라 한 채를 받았다.
  
   복숭아 밭이 딸린 이 땅에 30여년 전 산장을 한 채 지었는데 호화주택으로 청와대에 投書(투서)가 들어가, 朴正熙 대통령이 직접 나와 확인했다고 한다. 金泳三(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3월 재산파동 당시 시비의 대상이 됐던 바로 그 빌라다. 사건의 여파로 그는 국회의장직과 국회의원직을 던져야 했다.
  
   金大中(김대중) 정부에서 국회의장에 복귀해 다소 명예를 회복했지만, 그에게는 「부동산 投機(투기)」라는 이미지가 덧칠해져 있다. 인터뷰 도중 재산공개 파동 얘기만 나오면 그는 『내가 40년 간 어떻게 돈(정치자금)을 만들어 썼는지 제일 잘 아는 YS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며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의 이력서에는 한 사람이 평생 하나 성취하기 어려운 자리들이 櫛比(즐비)하게 올라 있다.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고려화재보험 副사장, 부산일보 사장, 국회 외무위원장, 화려한 의원 외교 활동, 공화당 정책위의장, 공화당 黨 의장, 민정당 대표, 국회의장. 지역구 9選과 세 번의 국회의장은 한국 의정사상 初有의 기록이다.
  
   그는 維新시절 「시국대책회의」의 공화당 측 대표로, 공화당 黨內 서열 2위인 당 議長(의장)으로, 3金의 친구로, 全斗煥·盧泰愚 前 대통령의 「선배」로 한국 政治史(정치사)의 이면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했다.
  
   특히 6년 간 공화당 정책위의장을 맡아 獨裁(독재)와 産業構造(산업구조) 고도화라는 가치가 상충하며 공존하던 한 시대의 싱크탱크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에게 대통령이라는 말은 일반명사가 아니라 「朴正熙 대통령」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였다. 朴대통령이 逝去(서거)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그는 朴대통령을 꼭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다른 대통령들에게는 이름을 붙였다.
  
   한두 시간쯤으로 약속한 인터뷰는 떡국으로 간단히 점심을 떼우며 6시간 30분 동안 이어졌다.
  
   자신의 친구들인 3金에 대해 그는 스스럼없이 인물평을 했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모르겠어』라며 삼청각, 청운각 같은 요정을 드나들었던 젊은 시절을 회고했다. 긴 인생항로를 끝내고 마지막 항구에 정박한 70代 후반의 老政客만이 털어놓을 수 있는 정계 비화가 적지 않았다. 이미 神話가 되어버린 3金의 입을 통해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朴浚圭가 바라본 「3金 시대」, 한국 현대정치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비서로 모신 維石 趙炳玉의 크기
  
  
   한민당 경북도지부장인 先親과 維石의 交遊
  
  
   朴 前 의장은 韓·美·日 3國의 대학에서 공부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朴正熙 대통령이 滿洲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한국 육사 등 동양 3국의 사관학교에서 공부한 것만큼이나 독특한 학력이다.
  
   경북중학 4학년 때 일본 마스야마 고등학교로 전학한 그는 이 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다. 東京帝大 법학부에 합격했으나, 『군대에 끌려가지 않도록 의대에 가라』는 부친 朴魯益(박노익)씨의 권유에 따라 九州에 있는 구마모도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을 피하기 위해 1944년 京城帝大(경성제대) 의과로 전학했고, 해방 이후 京城대학 정치학과로 전과했다.
  
   그는 해방 직전 『연애도 文通(문통)도 없이 집에서 정해 준 대로』 열여덟 살의 규수 趙東媛(조동원)과 결혼했다. 부친은 외아들이 빨리 가계를 이어야 한다고 재촉했다. 趙여사는 사촌오빠인 시인 趙芝薰(조지훈-본명 趙東卓)의 집에 기거하면서 서울 성신여고를 졸업했다. 장인 趙根泳(조근영, 문교부 국장 역임), 처삼촌 趙憲泳(조헌영, 1·2代 국회의원), 趙俊泳(조준영, 민선 대구시장)은 그의 든든한 후견인이 됐다.
  
   1948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유엔 한국대표부 창설차 미국으로 떠나는 維石(유석) 趙炳玉(조병옥) 박사를 개인비서로 수행했다. 이 인연으로 그는 민주당 구파로 정치에 입문했고, 1960년 2월 미국 워싱턴의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수술을 받으러 갔다가 운명한 趙박사의 마지막 길까지 동행했다.
  
   ―維石의 유엔行에 어떻게 동행하게 됐습니까.
  
   『先親이 한민당 경북 道지부장이어서 維石이 대구에 내려오면 함께 술을 하시고 우리 집에 묵었습니다. 미국 가는 데 비서가 필요하다고 하시니까 徐相日(서상일) 선생이 「醉雲(취운:朴의장 선친의 아호) 자제가 서울대를 나왔으니 데려가시게」 했고, 趙박사가 「그러지」 하신 거예요. 내가 스물네 살이었는데 趙박사가 혹독하게 훈련을 시켰어. 뭘 특별히 가르쳐 주는 건 아니고, 영어 문서를 잘못 쓴다든지 하면 불호령이야. 유엔에 제출할 서류를 만들면서 너댓 달 공부를 많이 했지. 식사 매너, 서구식 에티켓도 趙박사에게서 배웠어요.
  
   維石은 한국 말을 해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가 어려워요. 영어는 더 알아듣기 힘들고. 李承晩(이승만) 박사의 영어 발음은 지금 들어봐도 아주 우스워요. 그런데 두 분이 영어로 글을 쓰면 완벽한 문장이야. 워낙 독서를 많이 하셔서 그런 거 같아. 張勉 박사는 영어로 말은 술술 잘하는데 문장은 두 분보다 못한 것 같아』
  
   ―維石은 어떤 스타일의 정치인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豪放(호방)한 분이죠. 강력한 對與투쟁을 하다가도 협상할 땐 협상하고. 유엔에 가셨을 때 새벽 2시, 3시까지 술을 들고 들어오셔도, 연설 원고를 써놓고 아침에 비서에게 타이핑하라고 시켜놓고 주무세요. 氣槪(기개)가 있어 외국에 나가면 시티뱅크 수표를 많이 끊어 썼어요. 당시는 100달러 이상 외화지출을 李대통령이 직접 결재했어요. 대통령이 결재를 하니까 다들 벌벌 떠는데 趙박사만 예외야. 7000달러, 8000달러를 대통령 사인을 받아 빚을 갚아. 그래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趙박사를 싫어하고, 얌전한 張勉 박사를 좋아했어요. 駐美 大使인 張박사는 아침에 호텔 카페테리아에 가서 직접 접시에 음식을 담아 드시는 근검형이세요. 그걸 보면 趙박사는 「대사라는 사람이 카페테리아에서 접시 들고 다녀서 나라 체통이 서느냐」고 큰 소리시지. 미국에 처음 가서 두 분과 아침식사를 하는데 내가 영어가 짧아 비프 스테이크를 시켰어. 두 분은 프렌치 토스트를 드시는데 그게 뭔지 이름을 알 수가 있나. 趙박사는 「아침부터 스테이크 먹는 사람이 어딨나」 하고 혼을 내고, 張박사는 싱긋이 웃으시고』
  
  
   유학중 美국무부에 취직
  
  
   ―趙박사를 따라갔다가 1949년 9월 미국 브라운 대학에 입학했는데, 외화 반출이 어렵던 시절에 학비는 어떻게 조달했습니까.
  
   『趙박사가 추천장을 써 주셔서, 브라운 대학에서 학비를 면제받았고 나머지는 접시닦이를 해서 벌어 썼어요. 미국 갈 때 내 여비 가져간 것 외에 집에서 한 푼도 안갖다 썼어요. 다들 내가 부잣집 외아들답게 호사스럽게 공부한 걸로 아는데 전혀 아니야. 나중에는 維石이 아는 분이 소개해 줘서 美 국무부에 취직해 한 달에 600달러씩 벌어 썼습니다. 요새 가치로 하면 6000달러쯤 돼요』
  
   朴 前 의장은 1954년 귀국해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에 부임했다. 한국전쟁 당시 대구로 피란했던 趙炳玉 내무장관은 대구의 朴 前 의장 집에 기거했다. 維石은 그의 선친에게 『여러 비서를 써봤지만, 朴비서같은 사람은 처음』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朴 前 의장은 『나는 겨우 낙제나 면했을까 생각했는데 좋은 점수를 주셨다』며 『선친께서 내게 엄청난 기대를 거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며 웃었다.
  
   朴 前 의장은 박사학위 논문을 다 써서 제출해 놓고 귀국했다. 지도교수가 『챕터 몇 개를 고치라』고 나중에 연락을 해 왔지만, 한번 들어오면 외국에 나가기 어려웠던 때라, 논문제출 시한을 넘겼고, 박사과정 수료에 만족해야 했다.
  
   그는 평생 「자유주의자(Liberalist)」를 자처해 왔다. 좌우 이념에 경도되지 않는 실용주의가 그의 이념이라면 이념이다. 해방 이후의 사상투쟁 소용돌이 속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했고, 평생 번거로운 격식을 차리지 않는 「심플 라이프(Simple Life)」를 생활신조로 삼아 왔다. 그는 자신의 자유주의적 사상은 고등학교 시절의 독서와 5년 간의 미국 유학생활이 토대를 형성했다고 했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내내 토머스 힐 그린, 존 로크 같은 자유주의자들과 낭만적 人本(인본)주의자들의 서적만 읽었어요. 남로당 간부인 李康國(이강국)과 京城제대에서 만나 토론하기도 했지만 공산주의에 사상적으로 끌리지가 않았어요. 미국 유학을 가지 않고, 한국에 그대로 있었으면 정치를 음모론으로 바라보고, 나만이 나라를 살릴 수 있다는 志士型(지사형)으로 갔을 거야. 미국에서 라인홀트 니버의 신학, 자유민주주의 정치학을 배웠고, 미국 사람들의 실용주의를 5년 간 몸으로 배웠어요. 「한국정치에 명분론이 위력을 발휘하는 한 민주주의는 어렵다」고 하니까, 고향 후배인 한나라당 金富謙(김부겸) 의원이 「의장님은 체질화되셔서 그게 가능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쉽게 안 될 겁니다」고 해요』
  
   서울대 교수 부임 직전 3代 국회에 고향 達城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그는 민주당 曺在千(조재천)씨에게 패배했다. 1958년 4代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나섰으나 자유당의 金成坤(김성곤)씨에게 패했다. 서울대학에 돌아가지 못하고, 浪人(낭인)생활을 했지만, 부친의 든든한 재력 덕에 그는 「행복한 浪人」이었다.
  
  
   『李秉喆 회장보다도 더 부자였어요』
  
  
   그의 부친은 死六臣(사육신)의 한 사람인 朴彭年(박팽년)의 직손으로 고향(경북 달성군 河濱面 妙里)에 수십만 평의 전답을 갖고 있었고, 대구 聖堂못 옆에 커다란 과수원을 운영했다. 일찍이 상공업에 진출, 조선양조장을 경영했다. 양조장을 李秉喆(이병철)씨에게 팔아 택시회사를 인수했고, 해방 이후 金成坤(김성곤), 金聖在(김성재), 柳基龍(유기룡), 李源磯(이원기)씨 등과 고려화재해상보험을 창립했다.
  
   ―이력서에 보니까 고려화재 부사장이란 직함도 올라 있던데 경영에 직접 참여하셨습니까.
  
   『4代 총선에서 떨어지고 2년 노는 동안 고려화재에서 일을 했죠. 그 전에는 이사로 월급만 탔어요. 우리 집안이 3분의 1을 소유한 대주주였어요. 회사가 서울 청진동 금성방직에 있었는데, 전무이사와 부사장을 했어. 민주당 문화부장인 내가 경영일선에 나서니까 자유당 정부下에서 보험모집이 어려웠어요. 金鶴烈(김학렬)씨가 당시 재무부 보험관리과장이었어요. 내 株하고 다른 대주주 株를 합쳐 과반 넘는 주식을 金成坤(김성곤)씨에게 팔았습니다. 그 시절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들과 학교친구들과 어울려 술 많이 먹었어요』
  
   ―金成坤씨는 4代 총선 때 고향에서 맞섰던 정치 라이벌인데 주식 인수를 선선히 해주었습니까.
  
   『省谷이 대구에서 사업할 때 선친과 가까웠어요. 자형인 白南檍(백남억, 공화당 당의장 역임)씨하고는 대구고보(경북 중고등학교) 동기동창이라, 그 정도 편의를 안 봐줄 사이가 아니지. 「야당이라 사업을 못 하겠다. 그렇지만 내 주식은 옳은 값 받고 팔아야겠다」고 省谷에게 얘기했더니 「過半(과반)을 만들어 오면 인수하겠다」고 그래요』
  
   ―3분의 1 주식을 팔고 얼마나 받았습니까.
  
   『지금 돈으로 수백억원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 돈 가지고 국회의원 선거를 너댓 번 치렀으니까. 정치 안 하고 그 주식만 그대로 갖고 있었으면 내 재산이 지금 수천억원은 될 거야. 해방 전에는 우리 집재산이 李秉喆 회장보다 못하지 않았어요』
  
   민주당의 「386세대」였던 그는 야당 지도자인 維石, 滄浪(창랑) 張澤相(장택상), 海葦(해위) 尹潽善(윤보선)의 사랑방을 부지런히 드나들었고, 민주당 중앙당사 근처의 다방에서 정객들과 交遊(교유)했다.
  
   『維石은 正攻法(정공법)이고, 국무총리를 지낸 滄浪은 우회적으로 공격하는 스타일입니다. 청운각에 술을 먹으러 가서 趙박사가 상석의 보료 위에 자리를 잡으면, 滄浪은 목침을 갖다 놓고 그 옆에 한층 높게 앉아요. 그렇게 라이벌 의식이 강했지만, 음모로 서로를 공격하는 일은 안 했어요. 滄浪은 省谷의 오른팔인 金判述씨에게서 정치자금을 받아 쓰셨어요. 1958년 4代 선거 때 자유당 후보인 省谷을 후원하러 達城에 내려오셨어요. 내가 「창랑 선생님, 어쩌자고 여기에 내려오셨습니까」 했더니, 「준규, 자네가 여기 나왔나」라며 깜짝 놀라셔. 滄浪이 「이거 큰일 났구먼」 하고 고민을 해요. 논공이라는 지역에서 성곡 지원연설을 하는 걸 내가 가서 봤어요. 滄浪이 「여러분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복된 유권자입니다. 한 사람은 서구의 문명을 다 흡수해서 민주주의를 실천할 애국자고, 한 사람은 산업을 일으킨 애국자입니다. 여러분 알아서 투표하십시오」 하고 부리나케 서울로 올라가시더군요』
  
  
   趙炳玉의 지시-『국경을 넘으면 李박사 욕을 하지 마라』
  
  
   李承晩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맞선 민주당은 1956년 5월 대통령 후보였던 海公(해공) 申翼熙(신익희)가 腦溢血(뇌일혈)로 숨진 데 이어, 1960년 2월 대통령 후보 維石이 갑자기 사망해 정권교체의 호기를 놓쳤다. 維石의 사망 원인은 지금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당시 조선일보의 기사 제목은 「趙炳玉 박사 한국시간 5일 밤에 개복수술 성공적 완료」(1960년 2월6일), 「趙炳玉 박사, 제거 육괴엔 암의 흔적 전무」(2월7일), 「趙炳玉 박사 1週 후 퇴원」(2월13일) 「趙炳玉 박사 매우 양호. 외부인과 면담 가능」(2월15일), 「급서에 모두가 어리둥절」(2월16일)로 이어진다.
  
   기사에 따르면 維石은 암이 아니었고,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느닷없이 사망했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지병치료를 하러 떠났다」, 「뇌수술中 사망했다」로 維石이 어떤 병을 앓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정된 후에 美 8군에서 진찰을 했는데 胃癌(위암)의 가능성이 높다는 판정을 받았어요. 선거전이 임박하니까 암이란 사실을 숨겼죠. 그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암이라면 다 죽는 줄 알았으니까. 지병치료 한다고 얘기하고 1960년 1월29일 김포공항에서 미국 워싱턴의 월터리드 육군병원으로 출발했어요. 비행기에 타자마자 趙박사가 위암이라고 처음 얘기를 하시더라고. 나는 의학공부를 좀 했으니까, 「위암 정도는 잘라내면 괜찮습니다」고 위로를 했지. 趙박사가 「李박사 욕을 너무 하지 마라. 국경선 넘으면 대통령 비판하지 않는 게 내 소신이야. 주의하게」 하시고 정신을 잃었어요. 그 때까지는 바짝 긴장해서 참으셨는데 비행기에 타고 의식을 놓으신 거야. 그 이후에 趙박사 인터뷰라고 나간 건 전부 내 소리야. 스펜서 데이비스라고 유명한 AP통신 지국장의 기사, UPI통신의 기사는 내가 얘기해 준 걸 趙박사 멘트로 전한 겁니다. 「국경 넘으면 대통령 비판을 안 한다」, 「虎相(호상)에 눈물을 흘리며 내가 죽더라도 李박사가 나라를 잘 다스렸으면 좋겠다」는 얘기…』
  
   ―위암 수술은 잘 됐습니까.
  
   『일본 東京과 괌,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를 차례로 거쳐 워싱턴으로 갔습니다. 도착 이틀 뒤에 수술에 들어갔어요. 병원장이 외과 전공인데 암덩이가 잘 제거됐다, 경과가 좋다고 했어요. 의사 출신인 梁裕燦 駐美대사가 좋아하면서 李박사에게 수술이 성공적이라고 전보를 쳤어요. 梁대사가 維石과 그렇게 사이가 좋을 수 없었어요. 維石은 허심탄회하게 모든 걸 털어놓고 사람을 대하니까, 崔仁圭(자유당 내무장관) 같은 사람조차 「李박사 다음은 維石이 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얘기를 할 정도였으니까』
  
   ―그럼 암 수술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겁니까.
  
   『수술 후유증이라기보다 며칠 뒤 후두부의 혈관이 터져서 돌아가셨어요. 병원에서는 「趙박사가 쇼크를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한국에서 정치하면서 쇼크를 얼마나 받으셨겠습니까. 부산 피란 시절에 땃벌대의 습격을 받기도 하고, 쇼크가 어디 한두 번이었겠어요. 維石이 술을 많이 하시고, 줄담배였어요』
  
   ―국내 언론이 「암이 아니다」고 보도한 근거는 뭔가요.
  
   『미국으로 오기 전에 민주당 지도부와 암이 아닌 걸로 판명 나면 「잇스 낫 스프링(봄이 아니다)」이라고 전보를 치기로 약속을 했어요. 그런데 검사해 볼 것도 없이 거의 확정적으로 암이란 걸 김포공항에서부터 알았잖아. 월터리드 병원장이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경과가 좋다고 해서, 「잇스 낫 스프링」이라고 전보를 쳤어요. 민주당에서는 암이 아니라고 좋아서 난리가 나고, 그런데 며칠 못 가 돌아가셔서 면목이 없어졌지』
  
  
   『李承晩·趙炳玉 박사가 국제인』
  
  
   ―그후에 왜 암으로 돌아가신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3·15 부정선거에 4·19가 터지고, 국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니까 그런 얘기 할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어요. 회고록에나 쓰려고 했지』
   ―미국까지 따라가셨다가 아쉬움이 많았겠습니다.
  
   『더 살아계셨으면 하는 건 내 욕심이고, 국민들의 추앙 속에 돌아가신 게 잘 되지 않았나 싶어요. 대통령이 되어도 그렇고, 안 돼도 그렇고 어려웠을 겁니다. 그때 경제가 얼마나 피폐했습니까. 어려운 나라를 제대로 추스려 끌고갈 수 있었을까 싶어요. 훌륭한 분이었지만 대통령하셨으면 다른 후대 사람들처럼 큰 욕봤을 겁니다』
  
   ―趙박사는 정치자금을 어떻게 조달했습니까.
  
   『그 양반은 정치자금에 관한 限 公私(공사)관념이 없었어요. 워낙 친구가 많은 분이라 李起鵬씨 돈도 있고, 경무대 돈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 분이 「이 돈은 내 거다」 하는 생각이 없었어요. 있으면 쓰고 없으면 빚내서 쓰고. 재산이 돈암장 집 하나였어요.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라 「야당은 노름방 고리 떼서 정치한다」는 얘기까지 있었으니까』
  
   ―「李대통령은 끝까지 趙炳玉 박사를 꺼려했다. 李承晩 박사는 선거 시기를 갑자기 앞당겼다. 趙박사의 건강상태를 겨냥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金泳三 회고록)는 관찰이 있습니다. 維石과 李박사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趙박사가 수술을 받으러 출국하기 직전에 경무대에 들어가 李대통령에게 「수술하러 갑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공정한 기회를 갖도록 해 주시죠」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李대통령이 「오브 코스, 돈 워리, 유 윌 해브 잇(걱정하지 마시오. 공정한 선거기회를 가질 수 있을 거요)」 해서 기분 좋게 미국으로 떠났어요. 李박사가 알아서 선거시기를 앞당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李박사가 혁명가로서의 과한 면모가 있었고 국내 사정에 어두웠지만 근본적인 사고방식은 민주적인 분입니다. 4·19 학생 데모가 한창일 때 金貞烈 국방장관이 들어가니까, 「金장관, 내가 그만두면 아이들이 그만두고 숙어지겠나」고 묻더래요. 「각하 그만두시면 그만둘 겁니다」 하자, 「아, 그러면 내가 그만둬야지, 나 때문에 아이들 죽고 되겠나」 하고 사표 내고 하와이 가신 것 아닙니까. 李박사의 바탕은 지금 우리 정치 지도자들하고 달라요. 趙박사도 李박사의 그런 점을 신뢰했어요』
  
   朴 前 의장은 『李박사나 趙박사는 유교적 교양을 갖춘 國際人이었다』며 그에 비해 국제화 시대에 들어선 우리 정치인들은 언어능력과 국제감각이 너무 부족하다는 게 의원외교를 오래 해 온 그의 걱정이다.
  
   『우리 국회의원 가운데 외국어로 외교사절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돼요. 外遊(외유)는 서로 나가려고 하지만, 의사소통이 안 돼. 일본말 못 하지 영어도 못 하지, 전부 독불장군이야. 對美외교 對日외교가 광복 이후 이렇게 저조한 적이 없어요. 외교적 위기입니다. 언어가 안 되면 다른 나라에 대한 非정상적인 상식을 갖기 십상이에요. 코리아게이트는 우리가 미국을 잘 몰라, 중앙정보부가 돈을 가져가서 朴東宣씨 같은 교포들을 이용하다가 사고를 낸 겁니다. 朴대통령에게 「미국에서 로비하려면 미국 로 펌(Law Firm)하고 피알 펌(PR Firm)에 돈을 주고 시키십시오. 미국 사람 시키면 되는데 굳이 영어도 옳게 안 되는 교포들과 공무원을 왜 시킵니까」라고 건의했어요. 그런데도 공무원들은 자신들이 돈을 만지려고 「미국 로 펌 소용없다」고 고집을 피웠어요』
  
  
   「중다리 李서방」 삼성그룹 李秉喆 회장
  
  
   중다리 李서방의 자유당 내각 組閣
  
  
   ―삼성의 李秉喆 회장과 姻戚(인척)이시죠.
  
   『李秉喆 회장이 우리 종고모(朴杜乙·박두을 여사)의 남편입니다. 경남 宜寧(의령)에서 우리 집에 장가를 왔어요. 그때는 서로 양반을 따질 때라 우리는 우리 집안이 더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下道(하도·경상남도)에서 온 사람이라고 푸대접을 좀 했지. 李회장이 宜寧郡 中橋(중교)에서 와 「중다리(中橋) 李서방」이라고 짓궂게 불렀어요. 중다리가 「가운데 다리」니까.
  
   李회장은 300석 하는 재산을 갖고 있었어요. 그 당시 대구서 사업할 게 별로 없으니까 우리 선친이 하시던 조선양조사를 인수했어요. 아버지는 그 돈으로 과수원 하나 사고, 동아자동차 회사 사고, 영남일보에 투자를 했어요. 李회장은 술도가를 해서 돈을 벌어 대구에 국수도가인 삼성상회를 했어요(1938년). 거기서 돈을 벌어 5·16 전에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을 세웠어요. 1960년대 들어서는 월남전 特需(특수)를 봤고』
  
   ―李秉喆 회장과 개인적으로 친했나요.
  
   『아주 사이가 좋았어요. 5·16 혁명이 났을 때 둘이서 열흘 동안 일본에서 피해 다녔어요. 그때 朴대통령이 공산주의 세력인지 아닌지도 의구심이 가고, 그래서 李회장이 돈을 대고 여행을 했어요. 5·16 나기 직전 나는 필리핀에 다녀오다 京都에서 5·16을 맞았어요. 珍山은 「박정희가 빨갱이 같다」고 걱정을 하면서 먼저 귀국했고, 나는 李회장과 일본에 남았습니다. 李회장이 나보다 열두 살이 많아요. 나를 「꼬붕」처럼 데리고 다녔어요. 하코네 온천으로 후지산으로 잘 돌아다녔죠』
  
   ―李회장도 5·16 이후 부정 축재자로 몰려 고생했죠.
  
   『그래요. 내가 자유당 시절 李회장과 관련해서 정말 재미있는 기억이 하나 있어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떨어지고 1959년 장충동 李회장 집에 갔더니 李회장이 백지를 앞에 놓고 이름을 적고 있어요. 「아재, 뭐하십니까」 하니, 李회장께서 「朴군, 잘왔다 좀 도와 도」 해요. 뭐하시나 보니까 자유당 내각 명단을 작성하고 있더라구요. 이 사람 어때, 저 사람은 어때 하고 물어, 민주당원인 내가 자유당 조각에 참여한 꼴이 됐죠』
  
   ―李회장이 어떤 까닭으로 자유당 정부의 조각을 한 겁니까.
  
   『그때 三星이 자유당 정권下에서 제일 가는 기업체였어요. 정치자금을 안 댈 수 없는 처지였어요. 「명단이 어디로 가는 겁니까」 했더니 「서교동(李起鵬씨의 집이 있던 곳)에서 달라고 해」 하시더라고요』
  
   ―「李秉喆 組閣(조각)」이 그대로 통과됐습니까.
  
   『그건 확실히 기억이 안 나요. 李起鵬씨 한테 간 것은 확실해요. 정재호씨 처남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연락책이었어요』
  
   ―정치하면서 三星의 도움을 많이 받았겠습니다.
  
   『孟熙(맹희, 李秉喆 회장의 장남) 얘기만 안 했으면 사이가 괜찮았을 텐데, 李회장과 1970년대 초반부터 사이가 벌어졌어요. 서울 城東에서 출마할 때(1968년) 三星에서 대구·경북의 후보 10여 명에게 선거자금을 주는데, 孟熙가 보니까 그 명단에 내 이름이 없어. 그래서 李회장한테 「아버지, 왜 준규 형님은 없습니까」 하니까 「준규는 돈 많이 있어」 하더랍니다. 孟熙가 「부자는 돈 주면 싫다고 합니까. 多多益善인데. 형님하고 제일 가까이 지내면서 안 주면 어떡합니까」 따졌다고 해요. 孟熙씨는 내가 경북중학교 다닐 때 국민학생으로 나를 졸졸 따라다녔거든, 집도 가깝고. 李秉喆씨가 孟熙를 내치는 데 화가 치밀더라고. 孟熙씨가 삼형제 중에 제일 통이 커요. 李회장은 그게 싫다는 거야. 자꾸 남 주고, 동기동창들 보증 서 주었다가 돈을 많이 떼이기도 했거든. 내가 공화당 정책위 의장을 할 때 「돈이 뭔데 맏이를 그렇게 하나. (李회장이) 일본 언론에 (孟熙를) 나쁘게 말한 건 잘못이다」고 얘기했는데 이게 李회장 귀에 들어갔어요. 李회장이 「준규 이놈 많이 컸구나」 하고 화를 내셨다고 해요. 돌아가시고 問喪 가서 많이 울었어요』
  
   ―孟熙씨는 지금도 만나십니까.
  
   『孟熙씨는 「왕따」를 당해서 그런지 사람이 많이 상했어. 정말 마음이 아파요. 요즈음은 외몽고에 가서 사냥을 한다고 해. 제일제당하는 孟熙씨 아들하고 처남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일을 잘해요. 孟熙씨 인간성이 참 괜찮아요. 朴正熙 대통령하고도 친했고, 저렇게 뜻을 못 편 걸 보면 가슴이 아프지』
  
  
   朴正熙, 『재벌체제가 경제개발에 제일 빠른 길이야. 문제는 나도 알아』
  
  
   ―李秉喆 회장은 어떤 분입니까.
  
   『일본 사람을 꽉 줄여 놓은 것 같은 분이야. 말이 없고 치밀해요. 입을 앙다문 빈틈없는 사람이에요. 三星이 시스템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고, 전자와 반도체에 일찌감치 투자한 건 정말 탁견이에요』
  
   朴 前 의장이 재벌들의 문화재단을 규제하는 법안을 만들어 李회장과 종고모인 朴杜乙 여사가 살던 집에서 떠나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朴대통령이 불러서 갔더니 「재벌들이 문화재단을 만들어 돈을 많이 빼돌리고 脫稅(탈세)를 하는데 그것 규제 좀 하지」 하고 지시를 해요. 「그건 정부 입법으로 하시죠」 하고 대답했더니 「朴의장이 유정회 具泰會 정책위의장하고 상의해, 법안을 만들어」 하는 거야. 三星그룹에 가까운 걸로 알려진 나, 금성그룹 집안 사람인 具泰會를 시켜 재벌규제 입법을 시킨 거요. 朴대통령이 무서운 분이야. 우리 종고모가 호암문화재단에 들어가 있는 집에 살고 있었는데, 법이 통과된 후 집을 문화재단에 내주고 나왔어요. 종고모는 「하나밖에 없는 종고모를 못살게 하려고 준규가 집까지 빼앗아 내쫓았다」고 원망을 많이 했어요』
  
   朴대통령의 재벌규제 의지는 확고했다고 그는 기억한다.
  
   『1978년 무렵 朴대통령에게 「우리 자본주의가 기형적이다. 이래서는 발전에 한계가 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하실 겁니까」 물었습니다. 대통령이 「알아. 그래도 경제발전에는 이게 제일 빠른 길이야. 이렇게 어느 정도 가고 그때 가서 재벌을 규제하자. 내가 재벌들을 속속들이 다 알아. 내가 거기 안 넘어갈 거야. 걱정하지 마」라고 하세요』
  
  
   내 친구 金泳三
  
  
   『세 金씨는 다 친구야』
  
  
   朴 前 의장은 金泳三(김영삼) 前 대통령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리더인 維石의 휘하에서 정치를 했다. 5代 총선(1960년)에서 함께 당선된 후 淸潮會(청조회)를 주도했다. 요정출입 금지, 이권운동 금지, 자가용 폐지, 깨끗한 선거운동을 보장하는 선거제도 개혁 등을 내세운 이들의 청조운동은 정치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나이는 朴 前 의장이 두 살 위이고, 학교는 3년 선배다.
  
   5·16 이후 朴 前 의장은 공화당으로, YS는 민주당으로 길을 달리했다. 朴 前 의장은 6, 7, 8, 9, 10代에 당선돼 공화당 서열 2위인 의장서리에 올랐다. 신민당 총재에 두 차례 선출된 YS는 朴正熙 정권에 가장 위협적인 정치인이었다. 1979년 두 사람은 여야의 정점에서 정면 충돌했다. 朴浚圭 공화당 의장서리는 오랜 친구인 金泳三 신민당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는 惡役을 맡았다.
  
   공화당 합류, 의원직 제명, 재산공개 파동을 비롯해 두 사람 사이에는 40여년의 정치 여정에서 惡緣이 여러 차례 얽혔다.
  
   ―金泳三 前 대통령하고는 말을 놓으시나요.
  
   『그렇지. 친구야. JP도 그렇고. 자기들은 나를 「꼬붕」으로 볼지는 몰라도. 金大中 대통령은 자기가 나보고 친구라니까 친구인 것 같아. 재작년에 金대통령을 만나려고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비서가 옆에 딱 앉아. 전에는 둘이서만 얘기를 나눴는데 이상하더라구. 金대통령이 「내가 혹시 얘기한 걸 잊어 버릴까 봐 기록을 한다」고 해서 아, 벌써 이 체제가 이렇게 굳어졌구나 생각이 들어. 둘이 앉아 헛소리도 하고, 부담없이 잘못한 걸 지적해야 할 텐데, 비서가 있으니 무슨 말을 하나. 이제 그만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청와대를 떠나면서 「친구로서 지킬 건 지키고, 정답게 지내자」고 이별사를 하고 나왔어요』
  
   ―YS와 서울대 문리대학을 같은 시기에 함께 다닌 적도 있는데, 대학 다닐 때 아셨습니까.
  
   『학교 다닐 때는 몰랐어요. 내가 학교를 일찍 들어가 YS가 나보다 3~4년 후배였어요. 문리대 정치과에는 한 해 40명이 입학했고, 문리대 전체가 500명쯤 됐어. 경제학과, 정치과, 사회과, 철학과, 자연과학 계통 학과들이 있어, 후배들까지 다 알지는 못했어요. 정치 활동 하면서 동문이라는 걸 알게 됐지』
  
   ―5代 때 함께 의정활동을 하기 전에 金泳三 前 대통령과 같이 일한 적이 있나요.
  
   『1958년 선거(4代 국회의원 선거)에 둘이 같이 떨어졌어요. 金泳三씨는 3代 때 자유당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을 한 번 했지. 1958년에 金泳三씨는 민주당 청년부장이고 나는 문화부장이었어요. 落選(낙선)한데다 趙박사 문하의 같은 舊派(구파)라 한 2년 불평불만 속에 다방을 돌아다니면서 죽이 잘 맞았어요. 舊派의 가장 자랑스런 30代의 청년들이었으니까. 그 쪽은 계속 정치를 했고, 나는 외국 공부를 했고. 金泳三씨하고 나를 빼면 민주당 舊派에는 경상도가 거의 없었어요. 鄭憲柱(정헌주)씨가 경상도인데 新派(신파)였고』
  
   ―야당에 계속 계셨더라면 朴의장께서 민주당 구파의 리더가 되지 않았을까요.
  
   『5·16이 안 났더라면 그렇게 됐을 거야. 그때 야당에서는 제일 인기 있는 게 밥 잘 사고, 술 잘 사는 거야. 고생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으니까. 李敏雨(이민우), 柳致松(유치송)씨와 그때 다 알게 됐지. 민주당 구파 시절 내 인상이 「서울대 교수한 인텔리에, 넉넉한 청년」이었어요』
  
  
   『YS는 책을 안 보고 대화 주제가 늘 편 가르기』
  
  
   ―젊은 시절의 YS는 어땠습니까.
  
   『화제가 풍부하지 않았어. 다른 정치인 비판하고, 단순한 생활 차원의 얘기 외에 다른 얘기가 안 돼. 그 양반 유일한 책이 몽고메리 자서전을 번역한 건데 몽고메리의 자서전이 번역할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야. 좋은 술 친구였지』
  
   ―酒量은 누가 셌습니까.
  
   『YS는 세고 나는 좀 약했지. 다행히 술집 여자를 보는 취향이 나하고 전혀 달라서 그 분야에서는 전혀 충돌이 없었어. YS와는 젊은 시절부터 인연이 깊어요』
  
   ―金泳三 前 대통령이 젊은 정치인 시절 독서를 좀 했습니까.
  
   『YS는 책이란 걸 잘 안 봤어. 대화 주제가 늘 누가 내 편이다, 적이다, 정치얘기야. 그 친구 만날 때는 역사니 세계 정세니 이런 얘기를 피했어. 대통령이 되고 나서 다른 나라 대통령을 만날 때 보면 늘 화제가 빈약해 딱해 보였어』
  
   ―민주당 新派와 舊派의 분열이 2공화국 붕괴의 한 원인이 됐는데, 그렇게 갈라져 싸운 원인은 뭡니까.
  
   『黨首(당수)를 누가 하느냐, 어느 자리에 누구를 앉히느냐를 놓고 갈라진 거지. 당수를 張勉 박사 계통이 하느냐, 趙炳玉 박사 계통이 하느냐. 그렇게 싸워도 兩 金처럼 싸우지는 않았어요. 1960년 大選에 舊派인 趙박사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新派인 張勉 박사가 부통령 후보로 짝을 이뤄 나가지 않았습니까. 평소에는 친한 친구였고, 지역주의는 전혀 없었어요. 그때 경상도에서는 민주당이 없었어요. 민주당은 호남 일색이야. 梁一東, 李哲承, 蘇宣奎씨 등 호남 분들이 연설을 참 잘했어요. 그때는 전라도, 경상도라는 의식이 없었고, 그 사람들이 우릴 좋아했어요』
  
   ―지역감정이 언제부터 정치판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겁니까.
  
   『1971년 金大中씨가 朴正熙 대통령과 맞서 싸울 때 그때부터예요. 저쪽에서 「호남을 이렇게 푸대접할 수 있느냐」 얘기를 하기도 하고. 서로 입에 담지 못할 얘기를 많이 했어요. 한솔 李孝祥 黨의장은 점잖은 쪽이었고, 어떤 이들은 「전라도 가니까 포스터가 온전한 게 없다. 朴대통령 눈깔을 다 빼냈다」고 했지. 다들 이런 이들이 있나 흥분했죠. 말려야 하는데 용기가 없었지. 지역감정이 표로 연결된다니까 정치인들이 자꾸 이용했고. 1987년 大選 때 盧泰愚씨가 처음에는 대구·경북에서 별 인기가 없었는데 군산하고 광주에서 돌멩이를 맞자 지역 분위기가 홱 돌아갔어요. 그래서 盧후보가 당선된 거요』
  
   ―朴正熙 대통령이 대구·경북 출신 인사들을 지나치게 편애한 것 아닙니까.
  
   『공화당 고관대작 중에 실력 없는 사람은 어디 출신이라는 걸로 한 자리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 사람은 전라도니까 시키지 말고, 경상도 사람을 시킵시다」는 소리가 나오면 朴대통령은 화를 냈어요. 「고향이 경상도라는 게 무슨 크레디트(Credit)야」 하고. 자유당 시절부터 영남인맥이 두터워, 경상도가 많이 등용된 측면이 있어요. 민주투사 출신인 두 대통령은 家臣(가신)들과 전화부대까지 대접해 주다가 사고가 나잖아요』
  
   ―4·19 이후에 YS와 청조회를 주도했죠.
  
   『청조운동의 이데올르그는 나였고, 동아일보 정치부의 李萬燮(이만섭)씨, 한국일보 정치부의 李元洪(이원홍)씨가 많이 도와줬어요. 신문이 소장 국회의원들에게 도움을 더 이상 줄 수는 없었을 거야. 그 여력으로 내가 서울 성동에서 두 번이나 당선됐어요』
  
  
   『YS 주변을 정보부가 관리』
  
  
   민주당 舊派의 젊은 리더였던 두 사람은 1962년 3월 「정치활동정화법」에 따라 정치규제를 당했다. 金鍾泌 중앙정보부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공화당 창당을 서둘렀다. 1963년 11월 6代 국회의원 선거 때 YS는 부산 서구에서 민정당 후보로, 朴 前 의장은 서울 성동乙에서 공화당 후보로 각각 당선됐다.
  
   ―왜 YS는 야당에 남고 朴의장은 공화당으로 갔습니까.
  
   『5·16이 나고 혁명주체 세력에서 내게 연락을 해 왔어요. 朴대통령과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공화당에 갈 생각이 없었고, 朴대통령께 嚴敏永(엄민영)씨를 소개했더니 최고회의 의장고문에 임명했습니다. 茂朱군수, 서울법대 교수를 지낸 嚴敏永씨는 白南檍, 金成坤씨와 경북중학 동창이에요. 자형인 白南檍씨하고는 일본 九州대학 동창이라 절친했죠. 軍政 쪽에 들어간 嚴敏永씨가 자꾸 나를 불러들여 朴正熙 의장과 세 번쯤 만났어요. 白南檍 의장과 金成坤씨는 嚴敏永씨가 끌어 들여 공화당 창당 발기인이 됐고. 朴대통령이 뻣뻣한 軍人들을 상대하다가 그 분들하고 일하니까 재미있지 뭐. 嚴敏永씨가 얼마나 샤프해. 윗사람 비위도 살살 잘 맞추지, 아이디어가 샘솟지. 그리고 白의장이나 金成坤씨나 식견 있는 테크노크라트들이니까. 쓸모가 있지』
  
   ―군사정부 시절 부산일보 사장에 임명된 걸 보면 朴의장은 5·16 주체세력들과 급속도로 가까워진 걸로 보입니다.
  
   『5·16 주도세력이 우리 淸潮會의 개혁 슬로건은 다 가져가고, 우리는 부패 舊정치인으로 몰아 괄시를 했어요. 내가 혁명주체들과 가까워진 건 具滋春씨 때문이야. 포병장교로 쿠데타를 이끈 혁명 주체 중의 주체고, 성격이 시원시원한 진짜 사나이야. 朴대통령이 具滋春씨만 나타나면 좋아서 「어, 어, 왔어」라며, 입이 이만큼 벌어져요. 5·16 나고 나서 具滋春씨가 우리 집에 매일 놀러왔어요. 어렸을 때 우리 옆 동네에 살았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아. 저녁마다 찾아오고, 주말에 와서 한잔 하면서 밤새 놀다 가고. 이 친구 덕에 2년 동안 실업자 생활하면서 시간을 잘 보냈어요. 軍政 말에 朴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문화공보부 장관을 해주세요. 내일 발령납니다」 하고 통보를 했어요. 그 다음날 李厚洛 비서실장이 전화를 해서 「朴의원, 더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걸 좀 해주셔야겠습니다」며 부산일보를 맡으라고 해요. 그래서 부산일보 가서 한 1년 했죠. 대통령 선거 때 유세에 열심히 참여했고』
  
   ―金泳三 前 대통령은 처음부터 요지부동으로 공화당에 합류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습니까.
  
   『갈 마음을 비치기도 했는데 막상 가자니까 안 가겠다고 하더라고. 그때도 YS는 간다 온다 말이 없었지만, 이런 일이 있었어요. 혁명 정부에 나, YS, 김용성 세 사람이 건의서를 냈어요.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해서」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새로운 엘리트 그룹을 만들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30페이지쯤 되는 보고서야. 일단 칼날을 피해 보자는 뜻도 있었겠지만, 「민정이양시 새로운 민간 지도 세력이 필요하다」고 혁명정부에 건의서를 내자는 데 반대를 안 했어요. 金在淳 의원은 공화당에 갔는데 막판까지 金泳三이 안 간다고 하지, 趙尹衡이 안 간다고 하지, 친구들이 안 간다니까 나도 마음이 아파 공화당 창당에는 합류하지 못하고, 한 달 뒤쯤 갔어요』
  
   ―YS는 金鍾泌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나서 포섭공작을 했다고 하던데.
  
   『우리를 담당했던 중앙정보부의 육군 대위가 나중에 회사를 세우고, 돈을 좀 벌었어요. 돈이 많이 돌긴 돌았던 모양이야. 나야 고려화재 판 돈이 대부분 남아 있던 때라, 돈에 유혹받을 처지는 아니었고. 중앙정보부가 나를 통해 민주당 젊은 정치인들을 접촉하려 한 것 같아. 혹시 YS가 그 문제로 나를 오해했다고 해도 놀라지는 않을 거야』
  
   ―여당하면서 金泳三 의원을 도와줬습니까.
  
   『YS 담당은 내가 아니고 省谷이었어. 省谷의 연락책이 金判錫(김판석)이라고 포항 출신 국회의원(2代 민의원)이었어요. 이 사람이 滄浪하고 잘 알고, 신라회였어. 지금 증거 있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 당시 공화당 주변에서는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朴대통령에게도 보고가 된 것으로 압니다. 省谷이 吳致成 내무 해임건의안 파동으로 물러난 뒤에는 청와대에서 직접 관리하기도 했고. (YS) 주변 사람들은 정보부에서 많이 줄을 댄 것 같아. 지금 이 얘기하면 펄펄 뛰겠지. 야당관리를 꽤 잘 했어요』
  
   ―金大中씨에게도 공화당이나 정보기관이 정치자금을 지원했습니까.
  
   『그쪽과는 연결이 잘 안 됐어요. 납치사건도 있었고. 컨트롤하기 어려운 위험인물이라고 판단했고, 「金泳三은 다음에 정권을 잡아도 괜찮겠지만, 金大中은 안 된다」는 인상이 여권 주변에 딱 박혔어. 全斗煥씨가 쿠데타했을 때 金泳三씨는 가택연금을 당하고, 金大中씨는 내란음모로 구속된 건 그런 인식의 차이에서 온 거요』
  
  
   희한했던 YS-카터 면담
  
  
   ―朴의장이 공화당 당의장에 1979년 2월 취임하고 나서 그해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金泳三 총재 체제가 탄생했습니다. 金泳三 당선을 저지하기 위한 공작이 있었다는데 정확한 내막은 어떤 건가요.
  
   『그때 청와대에서 金載圭(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공작에 실패했다고 질책을 했는데, 車智澈 경호실장이 사실은 더 비난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어요. 정보부의 판단은 (신민당 지도체제를) 최고위원제로 해서 그 최고위원 대여섯 명이 신민당 대표를 뽑도록 하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이었어요. 車실장은 대의원이 바로 선거를 해야 金泳三 아닌 사람이 바로 당선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정보부 판단이 맞았어요. 공화당도 최고위원제로 가면 李哲承이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었어요. 왜냐하면 보스들은 反YS가 틀림없었으니까. 대의원들이 총재를 선출하면 계보 보스의 장악력이 떨어지잖아요. 2차 때는 李基澤이 양보하고, 3차 때는 辛道煥이 양보해 李哲承에게 표를 몰아 주도록 하자는 쪽으로 (공작이) 진행됐어요. 李基澤씨가 경선을 포기할 때 표를 거꾸로 YS에게 몰아 주고, 辛道煥 표는 분산돼 YS가 총재에 당선된 겁니다』
  
   金泳三 총재 체제가 등장한 뒤 청와대는 柳赫仁(유혁인) 정무수석을 앞세워 야당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하지만 카터 대통령의 인권외교와 訪韓(1979년 6월29일)은 신민당과 재야세력을 고무시켰다.
  
   『카터 대통령이 야당 대표인 金泳三 총재만 만나겠다고 했어요. 우리 외무부는 야당 대표만 만나는 건 안 된다, 여당 대표도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국회 귀빈식당 의원 휴게실에 칸막이를 해서 YS가 통역을 사이에 두고 카터 대통령과 앉고, 내가 그 옆에 앉아서 얘기하는 희한한 광경이 벌어졌어요. 나부터 얘기를 하라고 해서 對北문제와 韓美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10분쯤 영어로 얘기했어요』
  
   ―YS는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이게 참 YS의 강점이기도 하고 고집스러움이기도 하고, 나중에 뉴욕 타임스 기자에게 한 똑같은 얘기를 카터 대통령에게 그대로 하는 거야. 「미국이 군사원조를 많이 해줬는데 원조만 해주고 한국 국민을 괴롭히는 독재정권을 방치하고 있다. 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타도하지 않느냐」, 朴정권 전복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는 거야. 끝나고 나서 내가 「이거 너무 하잖아」 하고 한 마디 했지만, YS의 얘기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던 중 金泳三 총재의 9월16일자 뉴욕 타임스 인터뷰 기사가 문제가 됐다. 공화당은 「金日成을 만나겠다」는 YS의 발언이 국가보안법과 형법에 저촉되는 「사대주의」 발언이라고 金총재를 공격했고, 의원직 제명처분으로 치닫게 된다.
  
   『金載圭 부장이 나서서 金泳三 총재에게 「뉴욕 타임스 기자 만나서 얘기하는 중에 통역이 정확하지 않았다. 말한 것과 거리가 있는 부분도 있다」는 정도로만 얘기 해달라고 요청을 했어요. 金부장이 나한테 의논하길래 나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지. 국회 의사당 안에서 YS를 만나 「똑 부러지게 말고, 희미한 얘기 있잖아, 한 마디만 해라. 그러면 金총재도 좋고 朴대통령도 좋지 않겠나」 설득했는데, 아무 말도 없어요. YS 주변에서는 「이 정권은 곧 무너진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어요. 제명 처분하는 날(10월4일) 신라호텔 별실에서 나와 金載圭 부장, 太完善 유정회 의장 셋이서 「朴대통령을 만나 제명만은 막자」고 뜻을 모으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車智澈 경호실장이 들어와요. 車실장이 「지금 뭐 하쇼」 하니까, 金부장은 기가 약해선지 아무 말을 못 해. 내가 「청와대 같이 올라가지」 했더니, 車실장이 「내가 15분 전에 대통령을 만났다. 빨리 처리하라는 게 각하 명령이다」는 거야. 명령이라는 데 어쩌나. 국회의 의원총회실에서 투표를 한 거지』
  
  
   JP는 YS 제명에 찬표 던졌다
  
  
   ―金鍾泌 자민련 총재는 『나는 그때 분명히 부표를 던졌다』고 종종 얘기하는데.
  
   『159명 참석자 전원이 찬성한 만장일치예요. 그때 국회의장이 白斗鎭(백두진)씨인데 절차를 밟아서 투표를 끝내는 데 5분도 안 걸렸고, 끝나고 개표까지 했어요. 정보기관원이 와 있었고, 개표를 한 국회 사무처 직원이 있는데, 金鍾泌씨는 자기는 否票(부표) 던졌다고 계속 얘기하데. 나이가 들면 자기가 희망하는 일을 사실로 믿는 경우가 많아. 부표 던졌다니 어떡하나』
  
   朴의장은 유신 말기 의원직 제명 파동 등으로 YS와 惡緣(악연)이 겹쳤지만, 『YS를 대통령 한 번 시켜 줘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의 빚으로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朴正熙 대통령 서거 후 金鍾泌씨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여권 내부를 정리하고, 崔圭夏 과도정부 체제를 출범시키기 직전 신민당 金泳三 총재를 비밀리에 만났다.
  
   『1979년 말 워커힐 호텔의 펄(Pearl)이라는 별장에서 저녁 6시쯤 단 둘이 만났어요. 「崔圭夏씨를 대통령 시켜서 改憲을 준비하고, JP에게 공화당 黨 의장 자리를 넘겨 주지만, 統代(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출마 안 한다는 확약을 받았다. 너도 지금 당장 정권을 인수할 태세가 안 돼 있고, 밖에 있는 金大中씨가 (場內로) 들어와야 하니까 기다려라. 3金이 페어 찬스를 가지고 싸울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자세히 설명을 했어요. 그 사람이 말하면 言質(언질) 잡힐까 봐 언제나 말을 안 해, 얼굴이 벌게지면 좋다는 표시야.
  
   「우방국 대사하고도 다 양해가 됐다. 그렇게 한데이」 하니까, 「응」 하더라고. 그때 집에서 우리 집사람 전화가 왔어요. 「지금 국방부의 장군 한 사람이 전화를 걸어 朴浚圭가 지금 金泳三이 하고 만나서 모의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가만 두지 않겠다. 워커힐에 있는 것 안다」고 했다는 거예요. 盧載鉉 국방장관이 군부를 맡고 있었지만, 걱정이 되더라고. YS에게 그 얘기를 전했더니 정말 번개같이 달아나더구먼. 나도 화닥닥 도망쳤고』
  
   한 번은 꼭 대통령을 시켜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친구 金泳三이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던 날 朴浚圭씨는 국회의장 자격으로 단상에 앉아 있었다. 연설을 들으며 그는 「이게 낭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는 이데올로기보다 진하다」는 연설내용이 金大中 대통령의 햇볕정책보다 농도가 더 짙었어. 참모가 쓴 원고를 YS가 소화를 못 하고 그냥 읽어내린 거야』
  
   ―어떤 점이 불안했습니까.
  
   『YS는 체질적으로 反美가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 현실이 북한과 그렇게 이상적으로 지낼 수 없는 구조입니다. 젊은이들의 反美감정에 잠시 인기가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을 모르고 YS가 편향된 소리를 지르니 불안했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후에 「살살 해라」, 「혼내라」 强穩(강온)을 왔다갔다하니까 미국은 불안했고, 국가 원수가 우방국의 버르장머리를 고친다는 얘기를 하니 일본은 가슴에 사무쳤어요. 결국 金泳三 정부의 이런 외교정책이 현실에 부딪쳤고, 그 여파로 IMF 위기도 온 겁니다. 미국과 일본이 사전에 들어와 도와 줬으면 국가 위기 전에 해결될 수 있었어요』
  
   ―민주화 투쟁의 지도자인 兩金이 참모나 조직의 도움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점은 예전보다 더 퇴행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두 양반이 민주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정책을 결정하고, 생각나는 대로 밀어붙이는 사실상의 1人지배를 했잖아요. 金泳三 대통령은 人治(인치)라는 비판을 받았고. 민주화된 나라에서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국민 여론을 수렴하고 내각에서 토론하고 여야 간에 토론을 해야 하는데 그런 복잡한 과정을 싫어하는 체질이야. 말이 민주화 지도자지 공화당 시절보다 나아진 게 뭐가 있나요. 「민주화」, 「문민정부」, 「국민정부」 하고 구호만 요란했지. 아직 大權이니 統治權이니 하는 말이 안 없어졌잖아. 그런 말들이 민주국가에서는 없는 말이야. 大權이란 생살여탈의 권리까지 포함하는 뜻인데, 그러니 生死(생사)를 걸고 싸우지. 現代를 시켜 북한에 돈을 갖다 주고, 금강산 관광 시키고, 적자 나면 관광공사 시켜 돈을 대주고 이런 일들이 대통령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金泳三 前 대통령을 만나보면 아직도 「朴正熙=독재자」입니다. 대통령 재임 때 한국이 GNP 규모 세계 11위의 경제강국이라고 자랑했으면서도 그 國富(국부)를 만들어 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인색했습니다.
  
   『맞아. YS가 지금도 공화당과 朴正熙 대통령을 미워해요. 朴대통령을 「대통령」이라고 부른 적이 없어. 그냥 「朴正熙, 朴正熙」야. 그런데 YS가 다른 대통령한테도 마찬가지예요. 「李承晩씨, 尹潽善씨」 하잖아. 비서로 모셨던 滄浪한테도 존대말을 안 쓰고 趙炳玉 박사는 「趙박사」라고 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 단순해. 왜 그러나 몰라. 그런 점에서 나하고는 영 달라』
  
  
   내 친구 金大中
  
  
   『YS보다 로맨틱했던 DJ』
  
  
   朴正熙, 全斗煥 대통령 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反체제 인사 金大中씨였다. 가해자의 입장이던 朴 前 의장은 『우리 때문에 고생을 했다 싶어 동정이 갔고, 朴대통령이 돌아가신 다음에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고 기억한다. 維新 이후 좀처럼 遭遇(조우)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13代 국회에서 여야의 대표로, 이어 국회의장과 야당 대표로 만나 마음의 벽을 허물 수 있었다고 한다.
  
   朴 前 의장은 盧泰愚 대통령에게 金大中의 평민당과 제휴하라고 강력하게 권했다.
  
   金大中씨는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후 국회의장으로 그를 지명했다. 당시는 여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하지 못해 金鍾泌 총리 임명동의안 처리가 표류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朴 前 의장은 국회의장 후보로 출마해 한나라당 吳世應(오세응) 후보를 10표차로 눌렀다. 생애 세 번째 국회의장 취임은 金大中과의 인연으로 이뤄진 것이다.
  
   ―민주당 新派인 金大中씨와도 야당시절 교분이 있었나요.
  
   『나하고 YS하고 민주당에서 두각을 나타낼 때 金大中씨는 黨內에서 우리와 가까이 지내지 않았어요. 그 뒤에 국회에 들어와서 알았죠. 그 양반이 합리적이고 사람을 편안하고 기분좋게 해주더군요』
  
   ―金大中씨와도 요정에서 어울리셨습니까.
  
   『그 얘기는 李重載(이중재)씨한테 물어봐야 돼. 金大中씨 청년 정치인 시절 얘기나오면 李重載씨가 「朴의장 니는 모를끼다」 그래요. 그럼 나는 「나도 알 만큼은 안다」 그러지. 金大中씨는 金泳三씨보다 로맨틱했어요. YS는 낭만이 뭔지 잘 몰랐고』
  
   朴 前 의장은 金大中 납치사건(1973년 8월8일) 직후 어수선한 정국 상황에서 『金大中씨를 국무총리에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朴대통령에게 권한 적이 있다. 그의 얘기다.
  
   『정책위 의장 때 기시 노부스케 수상의 오른팔인 야쓰기(八次)를 만났더니 「金大中씨를 국무총리 시키지, 朴대통령이 그것도 못 하시나. 두어 달 총리하면 실력이 드러날 텐데」라고 해요. 야쓰기는 일본 보수 우익의 실력자로, 낭인 정객이었습니다. 朴대통령에게 「金大中씨를 국무총리 시키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더니, 「누가 그래」 하고 날카롭게 쳐다보셔. 야쓰기 이름을 댔지, 야쓰기가 일본 보수세력의 실력자니까, 화도 안 내고 한참 바라보더니 「朴의장, 자네 생각을 나한테 파는 거 아냐. 글쎄 말은 좋은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어」라고 하셔』
  
   ―金大中씨를 일본에서 납치해 오는 것은 누구 아이디어였습니까.
  
   『확실히 단정은 못 해요. 李厚洛이 실행한 것은 틀림없는데 朴대통령이 모른 상태에서 해서, 朴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냈다는 게 지금까지 정설이죠. 그 사건은 자신이 없어요』
  
  
   『DJ는 독학해서 균형이 안 잡힌다』
  
  
   ―곁가지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만, 1970년에 있었던 정인숙양 살해사건의 진실은 뭡니까.
  
   『정인숙양 사건은, 아이는 朴대통령 아이가 아니고 丁一權 총리 아이야. 그건 확실해요. 내가 朴대통령은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丁총리는 나쁘다는 차원에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같은 당인 金鍾泌씨를 제쳐두고 金大中 후보를 적극 지지하셨죠.
  
   『역사의 악순환을 자르자는 생각을 했어요. 金大中씨가 전라도니까 영호남 지역감정이 줄어들 거다,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대중들을 통합시키는 데는 사회개혁에 앞장 선 사람이 적격이다, 對北 봉쇄정책이 한계에 왔으니 다른 어프로치를 해보자 그러려면 DJ가 적격이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군사정권 시절 고생했으니 민주화를 진전시키지 않을까 기대를 했죠』
  
   ―기대가 충족됐습니까.
  
   『결과가 많이 어긋났어요. 인사를 호남 일변도로 해서 지역감정을 더 키웠잖아요. 對北 문제는 혼자서 앞서 나가다 우리 내부의 혼란을 초래했고. 金大中 대통령이 저만큼 나가면 金正日이 저도 몇 걸음은 나가야지.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소외된 계층을 올려 주는 건 좋은데 국법 밖에 존재하는 이기주의 집단을 만들어 놓았어요. 대우자동차 처리가 이렇게 늦어지는 것이 괜찮은 건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영업이익이 좀 남는다고 그걸 갈라 먹자며 파업하는 게 타당한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농민을 위하는 건 좋지만 국제시가의 다섯 배나 되는 쌀값을 떨어뜨리지 않으니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金大中 대통령이 공동정권의 한 축인 金鍾泌 자민련 총재의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朴의장을 국회의장에 지명한 이유는 뭔가요.
  
   『13代 국회 국회의장할 때 DJ와 아주 가깝게 지냈어요. 여야의 격을 안 뒀으니까. 金大中 대통령은 내가 자기와 가까워서 1993년 재산 파동 때 YS에게 당했다고 알고 있어요. 정계은퇴하고 옥스포드 대학에 가 있을 때 손세일 의원 일행이 찾아갔더니 「朴의장이 나 때문에 그 고생을 하는데, 그것도 하나 보호 못 해주고 뭐하나」 하고 질책을 했대요. DJ가 13代 국회 때 내가 마음을 털어놓고 도와 준 걸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여야가 그렇게 사이좋게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朴대통령 시절 정책위의장을 6년 동안 하면서 정책이란 게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정보를 가능한 공개해야 합니다. 노조와 야당, 국민에게 다 털어놓고 도리가 없다고 설명하지,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아. 왜 대통령이 혼자 결단을 합니까. 金大中 대통령이 야당 총재인 李會昌씨를 불러서, 「법인세를 낮춰야 하는데 협조해 달라」고 왜 얘기를 못 합니까. 대통령이 그렇게 얘기하는데 야당 총재가 안 받아들일 수 있나요. 야당은 정보가 없으니까 엉뚱한 얘기 하다가 나중에 수습 불가능 상태가 되고. 대통령이 모든 걸 다 아는 척, 다 할 수 있는 척하는 그런 어리석은 정치를 왜 계속 하나요』
  
  
   『金正日을 가르쳐 가면서 해야지』
  
  
   朴의장은 『우리 정치인 중에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 金大中씨인데 혼자 독학을 해서 그런지 때때로 밸런스(균형)가 안 잡힌다. 정책 판단에서 그런 게 많이 보인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에서 그런 불균형이 느껴집니까.
  
   『金大中 대통령이 「京義線(경의선)이 복구되면 우리 물건이 5분의 1 코스트로, 3분의 1 시간으로 유럽으로 간다」고 했잖아.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런 엉터리 얘기를 대통령이 서너 번 얘기하면서 남북회담 잘 됐다고 하는데, 아니 한국에는 전부 무식한 사람만 모여서 사나. 상식 밖이야. 유럽이 번성한 건 라인강의 水運과 로테르담의 항운 덕이야. 육로로 어떻게 대량 화물을 유럽까지 실어 나르나. 대륙횡단 철도 지반 다지는 데만 수천억원이 들 거요. 러시아가 운임을 적게 받지만 화물이 조금 폭주하면 가만 있겠어. 과거에 시베리아 철도 이용, 物流(물류) 코스트 얘기가 이미 다 나왔던 거예요. 의약분업도 균형 있게 검토를 못 한 게 문제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도 있어요』
  
   ―정부가 금강산관광을 南北화해의 상징적인 사업이라며 계속 밀어붙이고 있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金正日이가 금강산관광 하나가 수십억 달러어치라고 오판하고 있는데, 그 말도 안 되는 경제논리에 왜 우리가 춤을 추나. 국회의장 때 금강산관광을 가자고 해서 「북한이 國賓으로 초대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국회의장이 뭐가 답답해서 가나」며 거절했어. 가자고 한 민주당의 중간 간부가 「朴의장은 守舊主義자라 안 가실 줄 알았습니다」라고 해. 「여봐, 거기 왜 守舊가 들어가나. 말조심해」 하고 호통을 쳤지. 南北협상을 잘 하려면 金正日이가 현실을 알도록 가르치는 어프로치가 필요해. 허황한 경제논리, 경제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우리가 하면 어떻게 하나. 그 외진 함경도 나진 선봉에 투자할 사람이 국제사회에 누가 있나. 값싼 인력, 기반시설 다 된 공단이 중국에 널렸어요. 북한이 경수로 사업에서도 시시때때로 임금 인상해달라며 작업을 중단하는데, 그 사람들 상대로 어떻게 수십년씩 안정적인 상거래를 할 수가 있겠어요』
  
   ―북한은 그럼 어떻게 다뤄야 하겠습니까.
  
   『金正日에게 사실대로 충고해 주고, 굶어죽지 않도록 인도적인 지원해 주면서 시간이 가면 지들도 깨닫지 않겠나. 자기들이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우리가 끌고 간다고 해도 안 가요 』
  
  
   나의 친구 金鍾泌
  
  
   朴대통령은 JP의 쇼를 싫어했다
  
  
   朴正熙 대통령 집권 기간 동안 공화당 안에서는 金鍾泌을 중심으로 한 혁명주체세력과 「4人체제」로 불리는 대구·경북 세력이 양립했다. 軍政(군정)을 끝내고 朴正熙, 尹潽善 후보가 大選에서 맞섰던 1963년 무렵, 공화당은 5·16을 주도한 육사 8기생들의 절대적인 영향력下에 있었다. 그러나 힘의 균형은 서서히 「4人체제」로 기울어졌다.
  
   4人체제의 맥을 이은 朴 前 의장과 JP는 가까워지기 어려운 사이였다. 하지만 1980년대 초반 全斗煥 정권에 의해 정치규제자로 묶여 있는 동안 미국에서 함께 머물기도 했고, JP가 1995년 신한국당에서 축출된 이후엔 손을 잡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기도 했다.
  
   ―4人체제는 어떻게 형성됐나요.
  
   『嚴敏永씨가 구심점이 돼 대구고보(경북고) 동창인 白南檍, 金成坤씨를 끌어들였고, 吉在號(길재호), 金振晩(김진만)씨가 가세했어요. 지역적으로는 대구 경북이고, 성향으로 보면 테크노크라트죠. 혁명세력 중에는 李厚洛씨가 4人체제와 가까웠어요』
  
   ―4人체제가 혁명주체들을 누르고 승승장구한 이유는 뭡니까.
  
   『朴대통령이 보니까 이 사람들이 아는 것도 많고, 일 시켜도 부담이 없고, 저쪽은 憂國之情(우국지정)을 앞세워 「우리가 혁명주체다」하며 못살게 조르니까. 朴대통령이 4人체제 쪽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어요. 「혁명주체라는 것들은 혁명 안 했으면 형무소 갔을 녀석들이 많아」라는 게 朴대통령 말씀이라는 얘기도 있어. 날이 갈수록 4人체제를 중용했어요. 대통령이 이것저것 시켜보니까 잘하거든. 이쪽은 가까워지고. 대통령 말기에는 완전히 눈에 났어요. 멀리 하셨죠』
  
   ―JP는 어땠습니까.
  
   『공화당 말기에 파티 자리를 마련하면, 나는 朴대통령 좌우에 JP와 白南檍 의장 자리를 마련했어요. 朴대통령이 나오시기 전에 車智澈 경호실장이 와서 JP 자리를 末席으로 보내요. 「봐라, 그렇게 하면 (JP가) 총리까지 지낸 분인데 내 얼굴이 뭐가 되노」 하면 車실장이 「대통령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 그랬어요」라고 해』
  
   ―JP가 수모를 많이 당했군요.
  
   『그래도 그 양반이 참는 재주가 있어. 朴대통령은 혁명주체라는 육사 8기들이 家臣(가신)그룹 비슷하게 사고를 내고 이권(利權)에 끼어들고, 거기다 때로는 자기한테 압력을 가하니까 부담스러워져 멀리하게 된 겁니다. 그래도 白南檍 의장은 대통령에게 「JP에게 총리 자리를 줘야 한다. 안 주면 늘 불안하니까 끌어안아야 한다」고 건의하는 쪽이었고, 金成坤, 吉在號씨는 JP를 압박하자는 쪽이었어요』
  
   ―朴대통령이 왜 JP를 싫어한 겁니까.
  
   『JP를 크게 신뢰하지 않았어요. 朴대통령은 實利, 實用주의자야. 내실을 중요하게 생각했지, 쇼하는 걸 싫어했어요. 경제부처의 테크노크라트들을 중시하고, 훈련시켜 키워낸 게 朴대통령입니다. 張基榮씨가 아시안게임을 유치해 왔는데 朴대통령이 「돈이 많이 들어서 안 돼」라고 했어요. 張基榮씨가 「가져갈 나라가 없습니다」 하니 朴대통령이 「그럼 돈 붙여서 돌려보내」라고 했어요. 그래서 태국이 1968년에 돈 몇백만 달러를 받고 게임 개최권을 받아갔어요. 朴대통령은 JP의 「더블 플레이」를 싫어했어요. 외국에 잠깐 나가 있으면 될 일을 「自意半 他意半(자의반 타의반)」이라고 척 걸치고, 일종의 쇼로 본 거지. (JP가) 재벌규제대책 회의를 하면, 모여서는 딴 얘기하고, 재벌한테는 자기가 옹호했다고 해. JP 입을 통한 朴대통령의 삼성觀이 삼성 메신저를 통해 삼성에 전달됐어요. 삼성은 朴대통령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朴대통령은 JP가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해요』
  
   ―JP가 朴대통령 자신에게 위협적인 존재라 경계한 것 아닙니까.
  
   『그건 JP의 일방적인 얘기지. 維新 대통령 체제下에서 위협적인 여권 2인자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야당이나 反체제 세력이 오히려 위협이지』
  
   ―3金이 사람을 안 키웠다고 비판을 받지만, JP 주변에는 특히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도 주변에 사람을 모으면 견제받기 때문에, 2인자 處世(처세)를 한 결과라는 얘기가 있는데.
  
   『JP 옆에는 金鎔采(김용채, 前 건교부장관) 하나밖에 없으니 딱해요. 2인자 처세라는 것도 JP 본인의 변명에 불과해요. JP는 상하관계의 이해만 따졌으니까, 옆으로 친한 사람이 없고, 명령에 따르는 사람만 있는 거지』
  
  
   『유신 없이 경제도약 불가능』
  
  
   ―JP가 三選 改憲을 막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물러섰다는 평가도 있는데.
  
   『그건 JP가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JP에게 「왜 안 막았느냐」고 책임을 묻는 건 무리예요. 나는 三選 개헌이 안정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 찬성 사인을 했습니다. JP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金泳三씨가 대통령할 때 「JP는 절대 탈당하지 못한다」고 오판했어요. 왜 그러냐면 JP에 관한 자료가 20년, 30년 쌓였으니 얼마나 많았겠어. 나도 알고 있는 게 많고, YS는 「JP가 신한국당을 나가면 죽는다」고 생각한 거지. JP가 신한국당을 탈당하고도 두세 달은 떠들지를 못했어. JP가 三選 개헌 반대하고 나갔으면 4대 의혹이다 뭐다 터져나오지 않았겠어요』
  
   ―10월 維新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때가 경제발전의 고비였어요. 북한의 金正日이가 한국의 한 유명 언론인을 만나서 「朴正熙 대통령이 없었으면 지금의 한국이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제일 위대한 인물입니다. 자료 좀 보내주십시오」 하고 요청했다고 해요.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경제가 북한에 뒤지고 있었습니다. 維新 없이 그런 경제적 도약이 가능했을까요』
  
   ―金大中씨는 『朴대통령이 아니라도 이 정도의 경제성장은 가능했다. 朴正熙식 경제성장의 폐해가 더 크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문민정부 시작하고 우리 경제가 얼마나 후퇴했습니까. IMF 위기를 극복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1인당 GNP가 1만 달러가 안 됩니다. 1만 달러 다 됐던 걸 아직 8000, 9000달러로밖에 회복을 못 했습니다. 이게 민주화 내세운 두 정부의 경제 성적표입니다. 대만, 싱가포르, 홍콩을 따라 잡았을 때, 희생되고 억울한 사람이 많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해냈다고 참 뿌듯했어요. 지금 그런 자부심이 있나요. 국가 지도자가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포퓰리즘에 사로잡혀 할 일은 안 하고 인기 있는 것만 골라 하고, 국민에게 협력과 희생을 요구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공화당 정책위의장으로 6년 간 지켜본 朴대통령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농촌 지붕개량 사업을 한 해에 5만 채 하라는 엄명이 있었어요. 그런데 南悳祐(남덕우) 부총리가 「시멘트 슬레이트 수요가 몰리면 경제에 주름이 간다」고 나한테 黨의견으로 좀 줄여 달라고 해요. 대통령께 「각하, 연차적으로 하시고 올해는 1만5000호 정도로 하십시오. 인플레 부담이 있다고 합니다」고 했어요. 대통령이 「내가 대통령하면서 농민들 초가집 하나 못 없애 주나」 하면서 심각해지셔요. 국민들을 절대빈곤에서 탈출시켜 제대로 먹고 입게 만들겠다는 것이 그 분 평생의 집념이었어요. 그게 朴대통령의 통치철학이었고, 좌우고면 안 하고 그 길로 매진한 겁니다』
  
   ―1995년 자민련을 창당할 때 JP를 총재로 하고, 朴의장은 최고고문이라는 자리를 맡게 된 이유는 뭡니까.
  
   『집단지도 체제를 하느냐, 兩人(양인) 대표로 하느냐, 아니면 내가 당수를 하고 JP가 명예당수를 하느냐 얘기가 많았어요. 金龍煥(김용환) 의원이 찾아왔는데 JP는 자기가 당연히 대표하는 걸로 알고 있다는 거야. 나는 JP 밑에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았어요. 그래서 「JP 단일지도체제를 해라. 단 조건이 있다, 나는 上下관계가 아닌 최고고문을 할 테니 전당대회에서 선출해 달라」고 했어요. 2000년에 국회의장으로 중립을 지키기 위해 자민련 당적을 버리려고 하니까, JP가 회의석상에서 다른 사람을 최고고문에 시키려고 해. 전당대회에서 뽑는 자리를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야. 아니다 싶어 다음날 곧장 사표를 냈어. 그리고는 JP에게 「더 이상 시비를 하면 복잡한 긴 얘기가 다 나올 테니까, 성숙한 관계를 유지합시다」고 편지를 보냈어.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아무 말이 없데』
  
  
   JP와 돈 문제
  
  
   ―1997년 12월의 大選을 앞두고 「9월말까지 대통령 후보를 단일화해라. 아니면 金大中을 돕겠다」고 JP를 압박해, JP가 굉장히 기분 나빠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 같은 당의 JP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았습니까.
  
   『JP 가지고는 안 되겠다 생각했지. JP의 사고가 내 척도로는 민주주의하고 거리가 멀어요』
  
   ―3金 중에 그래도 JP가 유연하고 민주적인 개성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요. 권력의 분산과 견제를 위해 내각제를 끊임없이 주장해 왔고.
  
   『내각제는 동등한 파트너끼리 협의해서 하는 거고, 돈 수수가 없어야 됩니다. 돈 수수가 많으면 안 돼요. 자민련의 공천과정을 쭉 볼 때 그 근처가 별로 깨끗하다고는 볼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JP가 얘기하는 내각제 개헌에 별 기대를 하지 않는 겁니다』
  
   ―다들 JP 같으면 詩心(시심)이 있는, 부드러운 리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고 있는데.
  
   『천만에. 그 사람 지금 고생을 해서 측은해 보이는 것뿐이지 무서운 사람이오. 중앙정보부장할 때 찬바람이 쌩쌩 불었어요. 오히려 朴대통령이 눈물이 있었고, JP는 눈물이 없어. 자민련에서 추천한 몇몇 장관들을 봐요. JP를 제대로 된 국가의 리더라고 할 수 있나』
  
   ―JP가 올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비쳤는데.
  
   『당치도 않는 얘기예요. 이제 JP를 동정하는 충청도 사람이 많지 않아요. 자민련하면서 인천·경기 지역에 충청도 사람이 많다고 해서 출마시켰는데 표가 나오질 않았어요. 沈大平(심대평) 충남지사는 개인조직이 있으니까 희망이 있을지 몰라도, 나머지 지역은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후진을 위해 그만 물러나는 게 좋을 겁니다』
  
  
   10·26 당일·그 후
  
  
   시해 하루 前에 만난 金載圭
  
  
   공화당 黨의장 朴浚圭씨는 1979년 10월25일 청와대 앞 安家(안가)에서 金載圭(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둘이서 점심을 함께 했다.
  
   釜山과 馬山의 소요사태를 직접 확인하고 온 金부장은 부마사태를 세금을 많이 부과한 데 대한 「조세저항」이라고 성격을 규정했다. 統代 선거나 朴正熙 대통령의 독재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는 게 金부장의 설명이었다. 朴의장은 『재판을 받으면서는 민주화 얘기를 강조했지만, 그날은 「틀림없이 조세저항입니다」라고 여러 차례 얘기했다』고 기억했다.
  
   그 자리에서 金부장은 『도사가 알려준 妙藥(묘약)을 쓰는데 간이 아주 좋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묘약이란 게 별게 아니라 가마솥 밑의 숯검정을 긁어내 물에 타서 마시는 것이었다. 朴의장은 10ㆍ26 전날 金부장을 만나면서, 그가 朴대통령을 시해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점심식사를 마친 金부장은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安家 마당으로 金泳三 신민당 총재와 연락을 취하는 야당 중요 간부가 들어서고 있었다.
  
   朴의장은 10월27일 새벽 0시30분쯤 申鉉碻(신현확) 부총리의 전화를 받았다.
  
   『朴의장, 각하가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각하가 저격을 당해 돌아가셨습니다』
  
   『車智澈이 그 놈이 그랬지』
  
   『글쎄 朴의장, 車智澈이가 아니고 金載圭 부장이 그랬어요』
  
   朴正熙 정권은 1974년 이후 매일 시국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기구가 정권의 최고 정책결정기구였다.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장의 정보보고를 듣고, 각종 시국현안에 대한 대책을 조율했다. 5共시절의 관계기관 대책회의의 전신인 셈이다.
  
   『국무총리, 당의장, 정보부장, 비서실장 등이 참석했는데 李孝祥(이효상) 공화당 당의장이 몸이 불편해 내가 대신 나갔어요. 정보부 판기국장이 「어디서 누가 反정부 음모를 했다」, 「대학생 수백명이 모여 유신반대 데모를 했다」, 「야당 국회의원 누가 美대사관 사람을 만났다」 정보 보고를 해요. 듣다보면 매일 危機(위기)고, 야당은 완전히 정부 전복 음모자들이야.
  
   야당 기사 줄이기 위해 오늘 공화당은 무얼 발표하고, 농림부는 어떤 정책을 발표하고, 하루 종일 그런 것만 얘기해요. 머리가 도는 것 같아. 자주 안 나갔더니 朴대통령이 「朴의장, 왜 빠져」 하세요. 「매일 대책회의만 하다가 大局(대국)을 놓치겠습니다」고 얘기를 했어요』
  
   ―金載圭 중정부장이 과연 독단적으로 朴대통령을 살해했느냐에 대해 아직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金부장은 건전한 판단을 할 몸과 마음이 아니었어요. 肝은 나빠지지, 시국상황이 악화돼 업무는 가중되지. 車智澈 경호실장은 보고할 때마다 자신에게 책임을 덮어 씌우지. 中情 사무실에서 늘 누워 있었다고 해요. 그렇지만 권력 주변의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金載圭를 다들 좋아했어요. 車智澈은 전횡을 일삼는데다 압박감을 주니까 경원시했고.
  
   金載圭는 자기를 좋아하는 崔圭夏 총리, 具滋春 내무, 金致烈 법무, 盧載鉉 국방 장관을 「자기 편」으로 착각한 것 같아요. 더구나 金桂元 비서실장은 金載圭 부장이 사실상 갖다 앉힌 사람입니다. 擧事(거사) 이후에 이들이 자기 편이 되지 않을까 오판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金載圭가 車智澈을 죽였다면 다들 「金부장을 살려줘야 한다」고 얘기했겠지만, 대통령을 시해한 사람을 비호해 줄 사람이 누가 있겠어』
  
  
   정보부와 경호실이 도청 경쟁
  
  
   ―金부장이 美 CIA와의 사전교감下에 거사를 했다는 설이 있지 않습니까. 미국이 움직인 건가요.
  
   『金載圭는 일을 저질러 놓으면 미국이 자기 편을 들어 줄 거다 믿고 오판한 흔적이 있습니다. 미국도 朴대통령 정책에 반대했지만, 그런 해결책을 지원할 리 없죠. 金載圭씨는 군사재판을 받으면서 마지막까지 사람을 내세워 미국 대사관과 연락을 시도하려고 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그건 얘기하기가 곤란합니다』
  
   ―朴대통령이 중정부장이라는 중책을 金載圭에게 맡긴 이유는 뭔가요.
  
   『朴대통령이 金載圭씨를 인간적으로 좋아했어요. 야심 없고 자신의 장단점을 다 알고, 그래서 곁에 두면 믿을 수 있고, 의지가 돼 좋지 않겠나 생각하신 겁니다』
  
   朴의장은 1979년 2월 공화당 의장서리에 취임하면서 金載圭와 車智澈 간의 힘겨루기를 직접 경험했다. 두 사람은 黨의장 임명을 앞둔 그해 1월부터 매일 전화를 걸어 『내일 발령납니다. 제가 천거했습니다』고 생색을 냈다.
  
   『의장 발령나기 전날 車智澈이 부하를 우리 집으로 보내 경복궁 내 팔각정으로 오라고 연락을 했어요. 찾아갔더니 「金載圭가 청와대 전화를 전부 도청해서, 朴의장님을 만날 때도 제가 직접 사람을 보내 연락을 드려야 합니다」고 그래. 「무슨 연락할 게 있나」 했더니 車실장이 「내일 (공화당 당 의장) 발령이 납니다. 제가 다 해서 각하 결재를 맡았습니다. 안 한다는 얘기 마십시오」 하더라고. 나는 대통령이 여러 사람을 추천받고 「준규밖에 할 사람 없다」고 얘기했다는 걸 알고 있는데 車智澈은 그렇게 공치사를 해요. 어쨌거나 정보부와 경호실이 서로 도청한다는 걸 알고, 이거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車智澈은 대통령을 만나고 나오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사무실을 들렀다 가도록 했다. 朴의장은 서너 번 「실장님을 꼭 보고가라」며 막아서는 경호원을 뿌리치고 당사로 직행했다. 1979년 7, 8월쯤 대통령 독대를 마치고, 처음으로 경호원의 안내를 받아 車智澈 실장 전용식당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金載圭 정보부장, 金桂元 대통령 비서실장, 具滋春 내무장관, 盧載鉉 국방장관, 金致烈 법무장관이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車실장은 자신이 이 회의를 주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고 한다.
  
   『車실장이 앞뒤가 잘 안 맞는 얘기를 하는데, 내용은 이래. 이 나라가 대통령이고, 대통령이 나라다. 대통령을 경호하는 것은 이 나라를 경호하는 일이다. 나라를 경호하는 내가 모든 국가보안 안보관계 정책을 책임져야 한다, 1주일에 한 번씩 이렇게 모여 회의를 하겠다』
  
  
   『JP가 대통령 되려는 것 막았다』
  
  
   ―車智澈이 사실상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따로 주재했군요.
  
   『그때 車智澈의 명분이 어설프긴 하지만 대권론, 통치권론이야. 국가의 대표인 대통령을 책임지고 경호하는 내가 나라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육군본부의 정보과 참모인 대령, 중령, 소령들이 통치권을 代行했어요. 만주사변, 중국사변도 자기 멋대로 일으키고. 시바 료타로가 「육군본부의 영관급 장교 몇 명이 통치권을 빙자해서 내 생명, 우리나라의 생명을 인질로 삼았다. 국회가 뭐며 천황폐하, 내각은 뭐냐」고 통탄했어요』
  
   ―朴대통령이 車智澈의 壟斷(농단)을 왜 그렇게 방치했습니까.
  
   『뭘 시키면 가부간에 단세포적으로 행동으로 화끈하게 답을 하니까. 유신 말기 때 큰 사건이 터지면 車智澈은 「이건 金載圭 정보부에서 실패한 겁니다」 식으로 보고를 해. 朴대통령이나 정부정책의 잘못으로 됐다고 안 하고, 모든 것을 대통령이 기분좋게 얘기하는 거지. 朴대통령이 말기에는 어려운 일을 생각 안 하려고 했거든.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해주는 車智澈로 기운 거예요』
  
   공화당의 당내 서열 1위로 「朴正熙 체제의 붕괴」 이후를 관리하게 된 그는 維新헌법 아래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통해 공화당이 再집권하는 걸 일찌감치 포기했다. 헌법을 고쳐 3金에게 공정한 기회를 보장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것이 서거한 朴대통령을 욕되지 않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육사 8기를 중심으로 당내 일부 세력이 『왜 기득권을 포기하느냐』고 거세게 반발했지만, 그는 『그 기득권이라는 게 불덩이요, 폭발물이다. 스스로 내놔야 한다. 공정하게 선거해서 이기면 되는 것 아니냐』고 설득했다.
  
   『JP는 「未知(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보다, 지금 바로 대통령이 되는 게 좋다」는 뜻이었던 것 같지만 내가 안 움직였어요. 총재대행인 내가 사표를 안 내는 한 JP는 당권을 잡을 수가 없었으니까. 나와 申鉉碻 부총리,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신 다른 한 사람과 셋이서 「崔圭夏씨를 앞세워 과도정부를 만들자. 과도정부가 개헌을 완성하고, 3金 모두가 참여하는 선거를 실시하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셋이서 역할을 분담해 한 사람은 軍, 한 사람은 내각을 담당하고, 나는 외교가와 여·야당을 담당했습니다. 미국·일본 대사들은 합리적인 案이라고 평가했고, 金泳三 신민당 총재도 「3金이 페어 찬스를 가지고 싸우도록 해주겠다」는 제의를 수락했어요. 공화당의 8기생들에게는 「우리 案에 합의해 주면 내가 黨의장 자리를 JP에게 내놓겠다」고 했어요』
  
   ―朴대통령이 시해당한 혁명적인 상황 속에서도, 「장충체육관 선거」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JP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구기동 우리 집에 쳐들어오고, 「나라 팔아 먹는다」는 협박전화가 밀려들고. 계속 설득하니까 JP가 「軍部가 내게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며, 「朴의장만 믿소」라고 해.
  
   그래서 「統代 선거에는 안 나가는 겁니다」고 다짐을 받았어요. 그리고 李孝祥(이효상)씨와 丁一權씨를 모시고, 그 자리에서 JP가 한 번 더 확약을 했어요. 내가 곧바로 당 의장직에서 사퇴했고, 그래서 JP가 당무회의에서 당 의장서리가 되고 동시에 공화당 총재서리가 됐어요』
  
  
   『3金이 崔圭夏를 적으로 돌리는 사이 신군부 집권』
  
  
   ―JP가 총재서리가 된 것이 1979년 11월이니까, 엄청나게 빨리 움직였군요.
  
   『역사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책임감에 밀려 쉬지 않고 움직였으니까, JP가 총재서리 된 이후에도 「출마한다, 안 한다」 옥신각신이 있었어요. 그래도 JP가 현실을 보는 눈이 있어. 무엇보다 군이 JP가 統代에서 대통령이 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갖고 있으니까, 禪問答 한참 하다가 포기했지. 그래서 崔圭夏씨가 단독으로 출마해 대통령이 된 겁니다』
  
   崔圭夏 과도정부는 출범 이후 정국 안정에 실패했다. 朴의장은 3金의 조급함이 상황을 악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
  
   『3金씨가 이성을 가지고 순차적으로 했으면 되는데 「崔圭夏, 申鉉碻이가 군부와 손잡고 계속 집권하려고 한다」고 막 밀어붙인 거지. 3金이 자기들끼리 타협할 생각을 안 하고 崔圭夏, 申鉉碻을 라이벌로 생각했어요. 그렇게 떠들고 학생시위하니까 군부가 그걸 빌미로 삼아 나선 겁니다. 1년을 못 참아서 그렇게 됐어요. 자기들끼리 합의보면 될 텐데 합의 볼 수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나 아니면 안 된다. 세 사람이 다 그래. 타협이라는 걸 안 해』
  
   ―崔圭夏 정부가 개헌 일정을 투명하게 제시하지 못했고, 3金의 협력을 구하는 데 실패한 게 신군부 등장의 중요한 원인 아닐까요.
  
   『崔圭夏 대통령과 申鉉碻 총리가 개헌하겠다, 민주선거를 하겠다고 당시에 분명히 했어요. 개헌작업도 이해가 상충하니 간단한 일이 아니었고, 중화학 투자로 경제가 어려운 때였습니다. 崔圭夏 대통령은 「개헌하고 정권이양하는 데 1년 반쯤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崔대통령이 청렴하고 국제문제에 정통한 분이지만 위기관리 능력이 모자라 사태장악을 못 했어요. 3金씨를 붙잡아 설득하면 될 텐데 그걸 못 했고』
  
   ―崔圭夏 대통령과 주변에서 욕심이 생긴 것은 아닌가요.
  
   『그 분은 몸을 아끼고 조심하는 스타일입니다. 내가 국회 외무위원장하고 자기가 외무장관할 때 연말에 나한테 정종을 보냈는데 두 병도 아니고 딱 한 병을 보냈어요. 이런 장관도 있구나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 崔대통령이 데려간 申鉉碻 총리, 崔侊洙 비서실장 모두 욕심 없는 사람이에요. 崔대통령이 「朴의장은 총리를 못 할 거고, 申鉉碻씨 시킵니다」고 통보를 해줬어요. 그런 사람하고 싸우다 세 金씨들이 망한 겁니다』
  
   ―申鉉碻 총리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申총리 장인이 내 어린 시절의 주치의입니다. 우리 집이 申총리 처가와 오랜 친분이 있고. 申총리가 내 경북중학 선배입니다. 姉兄(자형) 白南檍(백남억) 의장이 자유당 때 申총리를 보사부 장관으로 천거했어요. 申총리는 옳은 일을 상식적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아첨하고 하는 일을 모르니까 3金씨가 버거웠던 거요. 간단한 사람이 아니니까. 3金씨가 처음에는 崔圭夏 대통령을 물고 늘어지다가 나중에는 申총리를 집중 공격했어요』
  
   ―軍部는 접촉을 안 하셨습니까.
  
   『군부는 노재현 국방,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담당했어요』
  
   ―5·17 군부 쿠데타를 막을 수는 없었나요.
  
   『崔圭夏씨가 훌륭한 외교관료였지만 그런 난국을 헤쳐갈 현실 정치감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盧泰愚 대통령
  
  
   내가 金泳三을 도우려다가 단념한 이유
  
  
   朴 前 의장은 1980년의 5·17 이후 7년간 정치규제에 묶였다가 3金씨와 함께 해금됐다.
  
   7년 동안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州의 스탠포드 대학 후버 연구소와 버클리 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공부를 했다. 4代 국회의원 낙방 이후 두 번째 찾아온 긴 낭인 생활이었고, 일종의 亡命(망명) 생활이었다.
  
   스탠포드 대학이 중심에 위치한 팔로 알토(Palo Alto)市에 살 때인 1982년 같은 처지였던 金鍾泌씨와 이웃에서 살았다. 후버 연구소에서는 남미의 軍과 민간 관계를 연구했다. 캠퍼스內 수영장에서 한밤에 수영을 마치고 쏟아지는 듯한 별을 바라보던 그 시절이 그는 지금도 꿈 같다고 했다.
  
   『JP는 대학에 적을 두지 않고, 팔로 알토에 방을 하나 얻어서 살았어요. JP는 외손자 백혈병 치료를 겸해 왔어요. 나랑 차 타고 놀러다니고, 골프를 쳤어요. 서너 달 같이 생활하다가 나는 스칼라피노 교수가 오라고 해서 버클리 대학으로 갔어요』
  
   6·29 선언으로 그의 긴 방학은 끝났다. 그는 1988년 13代 총선에 출마해 대구 동구에서 당선됐고, 민정당 대표위원(1988년 12월~1989년 12월)으로 3金씨와 與小野大(여소야대)의 정국을 이끌었다. 1990년 5월부터 1992년 6월까지 2년 동안 첫 번째 국회의장직을 맡았다.
  
   그가 화려하게 여당 대표, 국회의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盧泰愚 前 대통령과의 인연이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盧泰愚씨는 버클리 대학으로 朴命根(박명근) 前 의원을 보내 민정당 입당을 요청했다. 10·26 이후 이미 「군부통치는 그만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는 盧후보의 권유를 거절했다.
  
   『어느 날 새벽 한 시쯤 大田이라며 朴命根씨가 전화를 연결해요. 잠시 후에 「盧泰愚 후보입니다」는 목소리가 들려요. 나는 「盧泰愚 후보가 나한테 무슨 볼 일이 있어. 왜 잠자는 사람을 깨워」라며 퉁명스럽게 끊어버렸어. 나는 신군부가 내 공민권을 7년 간이나 제한했으니까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朴命根이는 나를 설득했다고 얘기했다가 얼마나 낭패를 봤겠어.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미안해』
  
   ―1987년 선거 전에 民推協(민추협)에 가입해 민주당 金泳三 후보를 도우려다가 결국 盧泰愚 후보를 돕는 쪽으로 돌아섰죠.
  
   『盧후보가 접촉해 왔지만 나는 金泳三씨를 돕겠다고 귀국했어요. 그런데 YS의 오른팔인 金東英씨가 만나자더니 「공화당 당의장을 하신 분이 앞에 나서면 역효과가 난다. 좀 뒤에 계시죠」 하더라고. 그래 그럼 안 하지 하고 빠져 나와 미수교상태였던 中國으로 갔어요』
  
   ―1987년 大選 때 盧泰愚 후보를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1987년 大選 때 나는 중국에 있었어요. 그런데도 金泳三씨는 건망증이 심한지 지금도 朴浚圭가 나를 도와 주기로 해놓고 盧泰愚를 도와 줬다고 원망이야』
  
  
   盧泰愚+金大中 합당을 권유
  
  
   大選에 승리한 후 盧泰愚 당선자는 朴의장의 자형 白南檍씨를 여러 차례 찾아가 『처남이 나를 도와 주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결국 민정당에 입당했고, 1988년 12월 민정당 대표에 취임했다.
  
   朴浚圭씨는 대표시절 『민정당을 해체한 후 양당 체제의 정계개편을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 『大義를 위해 집권당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다』는 언론 인터뷰로 1989년 12월28일 대표직을 사퇴했다. 3黨 합당이 공식선언되기 불과 한 달 전의 일이다. 천기누설이었던 셈이다. 1990년 5월 그는 민정당이 아니라 민자당의 추천으로 국회의장에 내정됐다.
  
   ―동아일보 인터뷰 발언은 3黨 합당이 성사 직전이라는 걸 알고 하신 겁니까.
  
   『대충 짐작은 했지만, 민정·민주·공화 3黨 합당이라는 건 몰랐어요. 나는 盧泰愚 대통령에게 金大中씨와 손을 잡으라고 설득했어요. 동아일보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야당과 정책연합을 해야 한다. 정책연합의 대상은 金大中 당(평민당)을 포함한 야당 전부다. 초당적인 거국내각 구성을 위해 盧泰愚 대통령이 총재직을 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고 했어요. 그런데 동아일보는 「평민당과의 통합도 고려」라는 부분을 쏙 빼버렸어. 내가 덫에 걸린 건 아니고, 동아일보 기자가 상도동에 밝고, 평민당을 제외한 3黨 통합이 YS의 의도라는 걸 잘 알아서 그렇게 몰고 간 거죠』
  
   ―진행중인 일을 일부 흘린 건데 대표직까지 사퇴할 필요가 있었나요.
  
   『보도가 나간 날이 마침 全斗煥 前 대통령이 국회 증언을 하기 직전이야. 기사가 나가고 洪性澈(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이 찾아왔어. 「평민당을 배제한 3黨 통합 얘기로 평민당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평민당이 내일 全斗煥 증언을 뒤엎을 수 있으니, 대표가 실수한 걸로 해야 평민당이 설득되겠다」고 해요. 그 자리에서 사의를 표시했지. 5共 청산에 내가 방해가 되서는 안 되겠다 싶었어. 3黨 합당은 내 발언으로 속도를 받아 급전직하로 성사됐고』
  
   ―왜 金大中씨와의 합당을 盧대통령에게 권유했습니까.
  
   『나는 金大中 당과 정책연합을 해야 된다는 지론이었어요. 이질적인 요소와 결합해 국정을 안정시키려면 金大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했는데, 盧대통령 주변의 사람들은 나와 「김대중觀」이 아주 달랐어요』
  
  
   『지가 바로 기면서』
  
  
   ―盧泰愚 대통령과의 관계는 상하관계였습니까, 횡적인 관계였습니까.
  
   『이 양반이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公私席에서 「朴선배」야. 대통령으로 연설하는 자리에서도 「朴선배께서 뒤에 계시지만」 하면서 깍듯이 대접을 했어요. 盧대통령이 속으로야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고마웠지. 취임 후 2, 3년은 돈 문제도 엄격하게 관리했는데 판단을 흐린 사람이 몇몇 있어요』
  
   ―朴의장 얘기에 귀도 잘 기울였구요.
  
   『그런데 金大中씨하고 손잡으라는 건 안 듣데. 3黨합당은 내 말이 안 먹혔어요』
  
   ―盧대통령은 왜 퇴임해서까지 2000억원이라는 거금을 갖고 있었습니까. YS에게 대선자금으로 주려다가 민자당에서 탈당하면서 넘겨 주지 못한 돈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YS에게 많이 넘겨 줬어요. YS가 지금 저렇게 말하는 건 도리가 아니오. 李會昌씨가 자기를 총재직에서 밀어내고 쫓아냈다고 괘씸하다는 거잖아. 자기는 盧대통령한테 그만두라고 안 했나. YS하는 걸 보고 있으면 「지가 바로 기면서」 하는 생각이 들어 기가 막혀요. YS가 물러나라니까 盧대통령이 물러났잖아. YS가 黨에 돌아와서 「(盧대통령이) 그만두게 됐다」고 하니까, 「돈 줄이 끊어지고 대통령의 영향력 없어지면 大選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 총재에 계시도록 해야 한다」고 다들 난리였어』
  
   ―盧대통령이 YS에게 大選자금을 줬다는 말씀입니까.
  
   『YS가 1992년 大選 때 돈을 물같이 썼는데 그 돈이 어디서 왔겠어요. 선거자금을 겁이 날 정도로 썼어요. 우리 지구당(대구 東)에 6억원이 내려왔는데, 전국 지구당 조직 같은 데 간 걸 다 합치면 그것만 해도 2000억원이오. 洪仁吉(前 청와대 총무수석)이가 유세 버스에서 나눠 주는 돈이 2억, 3억원이야. 盧대통령이 많이 줬어요. 2000억원은 개인적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정치자금으로 보관했을 거야』
  
   ―盧대통령이 大選 때 YS에게 준 돈은 천억원 단위입니까.
  
   『액수는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많이 간 건 알아요. 大選 전에도 줬고. 3당 合黨하고 나니까 돈 지출이 크게 늘어났어요. 내가 민정당 대표할 때는 대표에게 한 달에 200만원이 나왔어요. 3黨 합당하고 나서는 세 계파의 최고위원 세 명에게 각각 한 달에 2000만원씩을 줬어요. 민자당 때 큰 국가사업이 민주계와 공화당에 많이 갔어. 盧泰愚씨는 YS에게 할 만큼 했어요』
  
   ―DJ에게도 할 만큼 했습니까
  
   『YS만큼은 안 했지만 그래도 응분의 예의는 차렸을 거야』
  
   ―金大中 대통령은 청와대 정무수석이던 金重權(김중권)씨를 시켜서 전해 준 20억원이 전부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朴의장은 대답을 하지 않고,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내가 국회의장을 그만두고 대구 東乙구 보선을 하는데 徐勳(서훈)씨가 무소속으로 당선됐어요. 이 선거에서만 신한국당이 수십억원을 썼어요』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때 신한국당 후보가 내 경북중학, 서울대 정치학과 후배입니다. 선거운동한 사람들이 전부 내가 관리하고 잘 아는 사람들이니까. 돈을 어마어마하게 쓰고도 실패했지. 그 수십억원도 특별히 모은 게 아니고 大選 殘金(대선 잔금)이야. 그때 사무총장이 權海玉(권해옥) 의원이었는데 민망해 할까 봐 돈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직선제로 당선된 대통령은 자동적으로 범죄자가 되고 검찰과 국정원은 이 도둑을 5년 간 보호하는 임무를 띠게 되는데…
  
  
   ―지금 같은 大選이 계속된다면 한국의 대통령은 계속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검찰과 국정원은 제일 큰 도둑이 5년 간 무사히 자리를 지키다 물러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걸 어떡해야 합니까.
  
   『시민단체가 낙천 낙선 운동하는 걸 대통령이 방조하는 건 어떻고? 金大中 대통령이 「법에 금지돼 있지만, 법을 어기는 것도 개혁」이라고 부추겼는데, 법을 어기면 탄핵대상 아니오. 민심에 올라타면 돈을 안 써도 당선이 됩니다. 돈 쓸 생각을 안 해야 하는데 이번 大選에서도 후보들이 불안해서 돈을 쓸 거예요. 재벌들이 돈을 달라고 안 해도 승산이 있다 싶으면 억지로 갖다 줍니다. 다음 대통령이 부담없이 정치를 할 수 있도록, 大選 정치자금의 덫에서 구해 주는 게 金大中 대통령의 마지막 임무입니다』
  
   ―돈 안 쓰는 大選은 선거관리위원회가 공명선거한다며 단속한다고 될 일은 아닙니다. 대통령이 직접 여야 후보들과 정치협상을 하고, 선거법을 개정해야 해결되지 않을까요.
  
   『그래요. 여야 후보들을 같이 불러서 돈 안 쓰는 선거를 하도록 압박을 넣고, 선거를 제대로 관리해야죠. 그러면 金大中 대통령이 지난 4년의 실점을 만회할 수 있을 거요. 나는 金大中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를 그만둘 때 이제 그 일을 하는가 보다 생각했어요. 총재만 그만뒀지, 구연을 못 끊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요』
  
   ―대통령의 얼굴은 세 가지 입니다. 행정부의 장, 정당의 대표, 국가지도자. 세가지 얼굴을 다 갖춰야 하는데, 우리 대통령들은 당선되는 순간부터 국가지도자를 자처하면서, 현장을 떠난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텔레비전을 보면 金대통령이 「이렇게 하시오」 지시만 해요. 다 자기가 할 일인데. 兩金은 태생적인 한계가 있나 봐. 家臣을 못 버리고, 一人지배 체제를 못 버리고. DJ는 머리가 좋은 사람인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 남의 얘기를 귀담아 듣질 않아요. 청와대와 官僚(관료) 엘리트가 이렇게까지 質이 낮아진 것은 5·16 이후 처음이오. 全斗煥, 盧泰愚 대통령 때도 이렇지 않았어요. 한 일본 친구가 「한국은 문민 국민 민자(民字) 들어선 정부가 들어서면서 기강이 없어지고 망조가 들었다」고 얘기를 해요』
  
  
   하고 싶은 이야기
  
  
   『나는 내 돈 갖고 정치했다』
  
  
   ① 재산 공개액 41억8400만원. 서울 강남, 경기 여주, 경북 대구 일대에 21만여 평의 땅 소유. 여주군 강천면 일대 14만 1000평의 땅을 1956년부터 1987년까지 31년 간 20여 차례에 걸쳐 구입. 서울 송파구에 아들 종보씨(37) 명의의 100억원대 빌딩 소유(조선일보 1993년 3월23일자).
  
   ② 1986년 송파구 석촌동에 지하 1층 지상 2층의 태원빌라 11개 棟을 짓고, 무주택자 서민들을 대상으로 12~18평형 소형주택 75가구를 임대해 주면서 보증금 월세를 받는 본격적인 임대업(중앙일보 1993년 3월24일).
  
   ③ 1969년 13세인 아들 종보씨 명의로 종로구 구기동 땅 1000여 평을 구입. 1989년 건축업자 李모(59)씨에게 땅을 매도, 李씨가 12가구 분의 고급빌라를 지어 이 중 한 家口를 토지대금 대신 종보씨 명의로 넘겨 받음(한국일보 3월25일자).
  
   1993년 3월 언론이 집중 보도한 朴 前의장의 부동산 투기의혹의 골자다.
  
   언론은 국회의장이 왜 이렇게 많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느냐, 공화당 정책위의장, 黨의장을 하면서 투자정보를 빼내 치부한 것이 아니냐, 미성년자 아들 명의로 부동산을 취득한 것은 탈세 목적이 아니냐는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朴의장은 언론의 집중포화가 쏟아지는 1993년 3월29일 민자당을 탈당했고, 4월24일에는 의장직을 사퇴했다. 그해 7월30일에는 의원직까지 던졌다.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 『너무 억울하게 당해 지금까지 한으로 남아 있다』며 인터뷰 도중 불쑥불쑥 재산공개 파동 때의 얘기를 꺼냈다. 무엇이 그렇게 억울한 걸까.
  
   『광복 무렵 우리 선친이 사놓은 땅만 대구 근처에 30만 평 이상이었어요. 선친께서 내게 물려 준 고려화재 주식만 지금까지 갖고 있어도, 재산이 1000억원은 넘을 거야. 정치한다고 이리저리 다 써버렸어. 나보고 부패 정치인이라면 그 사람은 우스운 사람이야. 유산받은 게 썩었다면 썩은 거지. 그 때 청와대에 「국세청 내무부에서 탈세나 불법이 있으면 고발하라」고 했어. 내 윤리의식으로는 돈을 모아 땅에 투자하는 게 나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땅 사서 오르면 팔아서 정치에 쓰고, 그게 내 일상이었어. 그래서 억울했던 거지』
  
   ―문제가 됐던 여주의 땅은 그대로 갖고 계십니까.
  
   『다 팔았어요. 30년 전부터 조금씩 사들인 땅들을 거의 다 정리했어요. 계산해보니까 사들인 가격의 50배쯤 값이 올랐어요. 그런데 그 기간 동안 우리나라의 땅이 100배 이상 올랐다고 해. 부동산 투기했다고 그렇게 얻어 맞았는데 투기도 제대로 못 한 거야. YS가 가진 자들에게 고통을 주겠다고 하더니, 몸서리가 치도록 욕을 봤어』
  
  
   『국가에서 장려하던 사업을 했는데 욕을 먹다니…』
  
  
   ―공화당 정책위의장, 黨의장 시절 강남개발 정보를 알고 잠실의 땅을 사들였다는 의혹도 제기됐죠.
  
   『잠실은 내 선거구 안에 있었어요. 1960년 4·19 직전에 고려화재 주식을 팔아 지금 돈으로 수백억원을 받았어요. 강남 개발 말도 나오기 전에 이 돈 가운데 일부로 장안동, 성수동에 땅을 샀어요. 이 땅의 3분의 1을 팔아 1968년 선거에 쓰고, 나머지 3분의 1로는 여주에 땅을 샀어요. 내 선거구 洞 책임자가 부도 나서 도망을 갔는데, 자기 뚝섬 땅을 사 달라고 해서, 평당 50원에 5000평을 샀어요. 그 옆의 포플러 밭 1만 평도 샀고. 강남 개발 한다고 해서 1만 평은 정부에 뺏기고, 나머지 5000평이 구획정리가 돼서 2200평이 됐어요. 10·26 나서 정치규제에 묶인 후 300평, 500평씩 팔아 썼어요. 나머지 빈터에 임대주택을 지었는데, 비둘기집 지어서 서민 착취한다고 난리가 난 거야. 다세대 임대주택이 국가에서 장려하던 사업이었다고 얘기해도 듣지를 않아』
  
   ―지금 살고 있는 이 빌라는 건축 허용면적을 초과해 준공검사가 안 나서 문제가 됐죠.
  
   『그건 건축업자와 구청 사이의 얘기지, 나는 상관이 없어요. 내가 여기 땅 1200평을 1969년에 샀습니다. 별장 비슷하게 하나 지었는데 호화주택이라고 소문이 나서 朴대통령이 직접 찾아왔습니다. 朴대통령이 쓱 둘러 보시더니 「시원찮은 집에 웬 페인트를 이렇게 요란하게 칠했어」 하고 돌아가셨어요. 1976년 무렵에 다시 투서가 들어와 朴대통령이 한 번 더 나와 보셨어요. 세금이 너무 나와 건설업자에게 땅을 주고 70평짜리 빌라 하나 받은 게 전부요』
  
   재산 파동 3년 전인 1990년 朴의장은 달성군 하빈면 묘리의 임야 7만8000평, 10억원 상당을 「六臣祀(육신사) 보존회」에 기증했다. 2년 전 그 인근에 30具(구)를 모실 수 있는 집안 납골당을 만들었다. 朴의장은 자신이 죽으면 화장을 하라고 자식들에게 얘기를 해두었다.
  
   『나도 지금 조상 산소 관리하기가 힘든데 우리 아랫대가 어떻게 하겠어. 눈 찔끔 감고 재작년에 납골당을 만들었지』
  
  
   『李-朴-全-盧는 성공한 대통령 兩金은 실패작』
  
  
   朴 前 의장은 1960년부터 40년 간 한국정치 현장을 지켰다. 2000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해 파란만장한 한국정치 長征(장정)을 끝냈다.
  
   그는 한국정치가 민주화로 가는 未完(미완)의 도정에 서 있다고 평가했다.
  
   『李承晩 박사가 나라를 세우고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라는 길로 올려 놓았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은 국가존립의 근간이 되는 근대화를 완성시켜 國富를 일으켰습니다. 全斗煥 대통령은 朴대통령이 가던 길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어요. 盧泰愚 대통령은 민주화로 가는 과도기를 이끌었습니다. 金泳三, 金大中 두 사람은 민주화를 자신의 목표로 내세웠지만 실질적인 민주화와 개혁에는 실패했어요. 구호가 아니라 정서와 체질로서의 민주화를 정착시키지 못했어요. 3金을 잇겠다는 정치인들도 지난날의 낡은 대통령文化와 「3金 정치」를 유일한 롤 모델(Role Model)로 삼아 그대로 하고 있어요』
  
   그는 세대교체의 새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의 정치 리더십이 너무 낡았어요. 정치는 40, 50代 새 세대가 해야 합니다. 공화당 때 우리가 40代 초반이었어요. 그때 國運(국운)이 제일 승할 땐데, 지금은 70代 지도자가 나라를 끌고 있습니다. 40, 50代가 우리가 하겠다고 들고 일어날 것 같은데, 어째 밑에 사람들이 쥐약 먹은듯 가만 있나 모르겠어. 朴正熙, 메이저, 클린턴 모두 40代에 집권했어요. 3金의 제일 큰 해악은 후진을 키워내지 않은 겁니다』
  
   朴 前 의장은 대통령과 정치인이 불법 정치자금의 덫에서 헤어 나오도록 만드는 것이 나라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정치개혁으로 꼽았다.
  
   『가장 이상적으로 하자면 道 단위로 정당비례대표제로 국회의원을 뽑았으면 좋겠어요. 이스라엘은 全 국회의원을 전국구로 선출해요. 한 선거구에 수십억원씩 선거비용 쓰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돈이면 벤처기업 하나가 왔다갔다 하는데. 중·대 선거구로 가야 해요. 워낙 지역이 넓어지면 돈을 쓸 수가 없어요. 지금 조그만 상식에 따라 가면 정치개혁을 할 수 없어요. 대통령이 리더십을 가지고 生死를 걸고 하면 한 번 할 수 있을 거야. DJ가 마지막으로 그걸 한 번 했으면 좋을 텐데, 이대로 다시 5年을 가면 어떡해』
  
   6시간 30분을 쉴 새 없이 얘기했는데도 朴 前 의장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집 근처 헬스장에 가서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걸으며 건강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그는 『정말 수고했다』며 기자를 현관까지 배웅했다. 친구 3金씨를 보면 요즈음 어떤 생각이 드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이렇게 얘기했다.
  
   『이렇게 사는 게 얼마나 좋아. 나들이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혼자 나다니고, 외국 가고 싶으면 가고. 老後는 산 頂上까지 안 올라간 내가 그 사람들보다 더 행복한 것 아냐』●
출처 : 자유토론
글쓴이 : 무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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