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무엇인가?
[질문]
: 저의 내면에서 자라나는 것이 초연함인지
무관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쇼]
: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머리가 아프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다.
초연해지면 그대는 더 건강하고 행복해진다.
그대의 삶이 기쁨으로 가득 찬다.
어떤 일로 인해 건강하고 행복하고 기뻐진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판단하면 된다.
기쁨이 판단의 기준이다.
기쁨 속에서 성숙해간다면 그것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무관심에는 기쁨이 없다.
사실 그대가 조금이라도 기뻐한다면 무관심은 이미 사라진다.
행복은 건강한 것이다.
종교성이란,
적어도 나에게는 기본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성향이다.
쾌락주의는 종교의 핵심이다.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기억하라.
모든 상황이 제대로 흘러가고 그대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매순간은 더욱 큰 기쁨으로 가득 찬다.
아름다운 정원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과 같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공기는 더 신선해지고 서늘해지며 향기는 짙어진다.
그것이 그대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공기가 신선하지도 서늘하지도 향기롭지도 않다면
그대는 반대 방향으로 잘못 가는 것이다.
존재는 기쁨에서 비롯되었으며 기쁨으로 채워져 있다.
기쁨은 존재의 원료이다.
그러므로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중일 때는
아무 이유 없이도 더욱 더 기뻐지고 즐거워진다.
초연을 향해 나아가면
사랑과 기쁨은 더 커지고 집착은 사라진다.
집착은 불행과 속박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집착은 자유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관심이라면,
무관심은 위조지폐와도 같다.
겉으로만 초연해 보일 뿐이다.
그 속에서는 아무것도 성장할 수 없다.
그대는 위축되고 죽어간다.
밖으로 나가서 보라.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수도승들이 있다.
카톨릭,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의 수도승들을 지켜보라.
그들에게는 빛이 없다.
아우라의 향기도 없고 다른 사람들보다 활기차 보이지도 않는다.
생기도 없고 병들고 무기력해 보인다.
물론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있는 내면의 수행은 아니다.
제어할 수는 있지만 깨어 있지 못하다.
사회가 그들에게 부여한 도덕을 따르고 있지만 깨어 있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하며 개인으로 살아 있지도 않다.
그들은 마치 이미 무덤속에 들어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들의 인생은 침울하며 단조롭고 슬프다.
일종의 절망상태이다.
깨어 있어라.
무엇인가 잘못될 때마다 그대의 존재에 그 표시가 나타난다.
슬픔이나 우울증이 그 지표이다.
기쁨과 환희 역시 지표가 된다.
그대가 초연함을 향해 나아갈 때면
아름다운 노래가 그대 내부에 울려 퍼진다.
그대는 춤을 출 것이고 사랑할 것이다.
기억하라.
사랑은 집착이 아니다.
사랑은 집착을 알지 못하며,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집착은 소유하고 매달리고 욕심내며 두려워한다.
집착은 수없이 많은 특성을 지녔지만 사랑은 결코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왜곡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숨기고,
사랑이라는 상표를 붙인 상자 속에 여러 가지를 집어넣는다.
그 속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있지만, 결코 사랑은 아니다.
주시하라.
그대가 누군가에게 집착한다면 그대는 사랑에 빠진 것인가?
아니면 홀로 있는 것이 두려워 매달리는 것인가?
그대는 홀로 있을 수 없기에 홀로 있지 않으려고
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면 그대는 두려워한다.
그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면
그대는 사람을 죽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너무 집착했다.'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대는 자살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에게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 사람 없이 살 수 없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대는 홀로 있는 것이 두렵고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없으며
자신을 흩뜨려놓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대는 다른 사람을 소유하려 한다.
그대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폭력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을 하나의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
가장 부도덕한 행동이라고 말하곤 했다.
자기 욕심을 채우거나 성적인 욕망 혹은 두려움이나
다른 여러 이유들로, 타인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그 사람을 물건으로 격하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고 영혼을 죽이는 일이다.
영혼은 오로지 자유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은 자유를 준다.
자유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롭다.
그것이 바로 초연함이다.
다른 사람을 속박하려 하면, 자기 자신 역시 감옥에 갇혀 버린다.
남을 얽어매려 하면 상대방 역시 나를 얽어매려 한다.
다른 사람을 규정하려 하면 그 사람 역시 나를 규정한다.
그대가 누군가를 소유하려 하면 그 사람은 그대를 소유하려 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는 평생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다툼을 계속한다.
남자는 남자의 방식대로, 여자는 여자의 방식대로 하기 위해 투쟁한다.
잔소리가 계속되고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남자는 나름대로 여자를 조종할 수 있게 되고,
여자 역시 남자를 조종하는 법을 터득한다.
그러나 조종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라.
모든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라.
매달리거나 집착하지 말라.
사랑하되 자유를 주어라.
상대방에게 자유를 주면 그대 역시 자유로워진다.
자유 안에서만 영혼은 성장한다.
그대는 진정한 행복을 맛보게 한다.
세상은 너무나 불행한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세상이 원래 불행한 곳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릇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세상에서 불행할 수도 있고,
행복한 향연을 벌일 수도 있다.
그대가 행복하다면 그냥 앞으로 나아가라.
행복하고 중심이 잡혀 있고
이전보다 더 활기 있다면 그냥 계속 나아가라.
그러면 두렵지 않다.
행복을 시금석으로 판단하라.
다른 무엇도 기준이 될 수 잆다.
경전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든 상관없다.
그대의 가슴이 행복으로 고동치는 것이 바로 기준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주 섬세한 계기판이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았다.
생명이 있다면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저절로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이 행복한지 아닌지 타인에게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자기 자신은 안다.
행복하다는 것도 물론 안다.
그것은 아주 본능적인 척도이다.
그대는 그것을 안다.
태어날 때부터 알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본능적인 계기판을 사용하면,
인생에서 실패하는 일은 없다.
/ 오쇼(Os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