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리생명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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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행복스마일 2010. 7. 5. 10:04

원주교구 >  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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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설명 최초의 신학당 터
지리좌표 배론 신학당 터 비석 위 북위 37°09′46″ 동경 128°05′04″
주      소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2리 646 
전화번호 (043)651-4527
팩스번호 (043)651-9317
홈페이지 http://www.baer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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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승용차> 영동고속도로 → 중앙고속도로(제천방면) → 신림IC → 국도(제천방면) → 배론성지

<제천 - 배론간 시내버스 시간>

* 제천 시내에서 - 06:10 , 07:00, 09:35, 13:45, 18:45
* 성지에서(성지 주차장) - 07:20, 08:30, 10:55, 14:05, 19:05


심산 유곡(深山幽谷), 계곡이 깊어 배 밑 바닥 같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린다.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2리, 백운산(해발 1,087미터)과 구학산(해발 985미터)연봉 사이로 십여리를 들어간 곳에는 계곡만큼이나 깊은 신앙의 터가 펼쳐진다.

 

한국의 카타콤바라 할 만큼 풍성한 신앙의 유산을 지닌 배론은 우선 그 경관이 수려하다. 배론 입구에 위치한, 경치 좋기로 유명한 원주-제천 간의 탁사정(濯사亭)은 배론이 자랑하는 절경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수려한 자연도 배론이 안고 있는 신앙의 유산에 견준다면 그 빛을 잃는다. 배론의 옹기 토굴에서는 명주 자락에 1만 3천 3백 11자로 울분과 신심을 기록한 '황사영 백서'가 쓰여졌고, 바로 옆의 쓰러져 가는 초가에서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신학당이 섰으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가 이곳 배론에 묻혀 있는 것이다.

 

한 가지만으로도 가히 현양의 가치가 충분한 신앙 유산들이 몰려 있는 배론이야말로 최적의 순례지로 추천할 만하다. 더욱이 사통팔달(四通八達)로 편리한 교통과 피정센터를 비롯한 쾌적한 편의 시설들은 순례를 위해 '엄숙한 마음가짐' 외에는 다른 준비물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그 옛날 교우들은 박해를 피해 산으로 계곡으로 깊이 숨어들어야 했다. 그들 중 일부가 모여들어 교우촌을 이룬 곳이 바로 배론이다. 졸지에 재산과 집을 잃고 가족과 생이별을 한 교우들이 깊은 산 속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옹기 굽는 일이었다.

 

옹기구이는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감시의 눈을 피해 토굴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데 안성맞춤이기도 했다. 또 구워 낸 옹기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나서면 아무 집이나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어 잃은 가족을 수소문하거나 교회 소식을 전하는 데에도 편리했다.

 

사람의 눈을 피해 신앙을 지켜 가던 옹기 마을에 최초로 역사적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창원(昌原)황씨 성을 가진 사영은 나이 16세에 장원급제, 정조가 친히 등용을 약조할 만큼 앞길이 창창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정약종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 듣고는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한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택한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짐과 동시에 서울을 빠져 나와 배론으로 숨어든다.

 

그 해 8월 주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그는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적는다. 하지만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히고 황사영도 대역무도 죄인으로 능지 처참의 극형에 처해진다. 이 때가 그의 나이 27세. 이 사건으로 그의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십수 명이 공범으로 처단된다.

 

백서의 원본은 근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야 비로소 빛을 본다.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고, 현재 백서는 바티칸에 소장돼 있다.

 

배론의 두 번째 신앙 유산은 백서 사건 후 55년 뒤, 1856년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이다. 깊은 산골 장주기의 집에 세워진 신학당에는 학생 열 명에 두 신부가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배론에서도 집주인이었던 장주기와 두 선교사 신부가 잡혀가 형장의 이슬이 됐다. 그리고 목자 잃은 양 떼처럼 신학당 역시 페쇄되고 만다.

 

배론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귀중한 유산은 최양업 신부의 묘소이다. 한국 최초의 방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보다 4년 늦게 사제품을 받고 12년간 조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최 신부는 피로와 무리한 활동에 지쳐 쓰러져 이곳 배론의 신학당 뒷산에 묻힌 것이다. 혹자는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라 부르고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라고 일컬을 만큼 최 신부의 업적에 대한 높은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수려한 자연, 풍부한 신앙 유산 그리고 편리한 교통과 시설로 배론은 최적의 성지 순례 여견을 갖추고 있어 한번쯤 온 가족이 함께 찾아볼 만한 곳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할 만한 것으로, 원주에서 제천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용소막 성당은 배론 순례길에 반드시 들러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용소막 성당에는 성서학자인 고(故) 선종완 신부 기념 박물관이 있고 여기에는 선 신부의 유품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성서와 자료들이 풍성해 한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유익할 것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배론과 황사영의 백서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의 백운산(白雲山)과 구학산(九鶴山) 줄기에 둘러 싸인 벽촌. 이제 신자들에게 익숙해진 '배론(舟論) 성지'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배론이란 명칭은 이곳 골짜기의 형상이 배 바닥처럼 깊고 길게 뻗어 있다는 데서 붙여졌다.

 

옛날 이 부근에는 아랫배론, 중땀배론, 윗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미륵재 등 6개 동리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교우촌이 있던 곳은 바로 점촌배론이었다. 이 점촌배론의 본래 이름은 '팔송정의 도점촌(陶店村)'으로,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충청도 남부에서 피신해 온 신자들이 옹기점을 운영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부르게 된 이름이었다. 그후 박해가 끝나고 다시 이곳에 돌아온 신자들은 1890년대에 와서 '사학(邪學)쟁이들의 옹기점'이라는 기억 때문에 전교 활동에 지장을 받을까 염려하여 마을 이름을 바꾸어 주도록 관계 당국에 요청하였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구학리 배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원주에서 가자면 동쪽으로 치악산 줄기의 끝자락에 연결되어 있는 가라피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그 왼편에는 중앙선의 유명한 또아리굴이 있다. 또 남쪽으로 가자면 온갖 설화로 얽혀 있는 박달재를 넘어야 한다. 바로 이 두 고개처럼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하여 길고 긴 고난의 여정을 넘나든 곳이었다.

 

배론 사적지가 갖고 있는 특징은, 첫째 그 복음사가 한국 천주교회와 함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는 점이고, 둘째 다른 사적지와는 달리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들을 함께 간직해 온 곳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요, 유명한 황사영(알렉시오)의 "백서"(帛書)가 탄생한 곳이며,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또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여러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순교사가 시작된 요람지이기도 하다.

 

배론 교우촌에 대한 기록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부터 나타난다. 이 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유일한 목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하는 것을 본 황사영은, 그 해 2월 말에 서울을 떠나 경상도와 강원도를 거쳐 이곳으로 숨어 들게 되었다. 그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던 교우 김귀동이 그를 받아들여 옹기점 뒤에 토굴을 파고 그의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현재 배론에 조성되어 있는 토굴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최근에 다시 조성한 것이다.

 

황사영은 이후 토굴에 은거하여 자신이 겪은 사실들과 김한빈(베드로), 황심(토마스) 등이 알아 오는 박해 내용들을 세명주에 적어 나갔다. 이것이 '명주에 담은 신심', 곧 "백서"로, 122행, 13,384자에 달하는 장문의 서한 형태의 글이다. 그 내용은, 박해의 원인과 "백서"의 작성 이유를 기록한 첫 부분, 신유박해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둘째 부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셋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황사영은 이 서한을 북경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전달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달리 결정되고 말았다. 북경 주교는 조선 교회의 소식을 듣기 위해 간절하게 밀사들을 기다렸지만 하루하루가 헛수고였다. "백서"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할 책임을 맡은 밀사 옥천희(요한)과 황심이 9월에 체포되었고, 얼마 뒤에는 황사영도 배론에서 체포되고 만 것이다. 오히려 "백서"는 박해자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렇게도 신앙의 자유를 고대하던 황사영은 1801년 11월 5일(음력)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병선 수백 척에 정병(精兵) 5-6만, 대포 등 날카롭고 강한 병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글을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3-4명을 데리고 오십시오. 그리고 이 나라의 해안에 정박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선교를 용인하고 우호 조약을 체결하도록 요구하십시오. 그리고 국왕에게 '한 사람의 선교사를 받아들여 온 나라가 화를 입지 않도록 하라.'고 요청하십시오(황사영의 "백서", 110-111행 중에서).

 

이처럼 황사영은 무력을 통한 선교의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우호 조약 체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이냐? 모반이나?'의 갈림길에서 방황해야만 했던 조선의 신앙인이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뇌도 민족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비록 전근대적인 민족의식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결코 수긍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훗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하느님의 종'을 선택하면서 황사영을 제외시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신심과 순교 자체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6호(1999년 7월), pp.123-124]

 

 

배론 신학교와 순교의 요람지

 

"백서 사건이 있은 후에도 배론 교우촌은 신분을 속이면서 신앙을 지킨 신자들 때문에 계속 유지되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1855년 무렵부터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으니, 바로 그 해 이곳 교우촌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당신 조선교구의 장상 역할을 하고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의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는 신학교 서립을 결정한 뒤 배론의 회장인 장주기(요셉)가 제공한 세 칸짜리 초가집에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의 학생수는 6명에 불과했고, 교재도 변변치 않았으며, 방 하나를 교실 겸 숙소로, 다른 방 하나를 신부의 거처로 사용해야만 하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감옥, 즉 신학교 역할을 하는 오두막집에 8년 간 갇혀 있었기 때문에 내 건강이 완전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과 나는 방 두 개밖에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 두 방이 형편없이 잘 닫히지 않는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어서 공기와 발산하는 냄새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조금도 어렵지 않게 침투합니다. 이번 겨울에 나는 발진티푸스에 걸렸었는데 학생들에게 옮겨 주어서 차례차례로 앓고 있습니다(푸르티에 신부의 1865년 11월 20일자 서한 중에서).

 

게다가 주변에는 언제나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학교 옆으로 지나가는 외교인이 들을까봐 소리를 내서 글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선의 선교사들은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존속시키고자 했으며, 1856년에 교장으로 임명된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와 교사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는 아주 열성적으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배론 신학교는 이후 꾸준히 발전하였다. 신학생 중에서는 임 빈첸시오가 1864년에 소품을 받았고, 이 바울리노가 삭발례를 받았으니, 더 있었으면 이 땅에서 사제가 탄생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실을 얼을 수는 없었다.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의 회오리가 이곳에도 몰아쳤기 때문이다. 이때 푸르티에 신부는 배론이 궁벽한 곳이었으므로 당장에 포졸들이 쳐들어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는 각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피할 형편도 아니었다.

 

3월 2일, 포도청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푸르티에 교장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하였다. 그러면서 신학교도 자연히 폐쇄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포졸들은 체포한 이들을 앞세우고 서울로 떠났다. 보통 배론에서 서울까지는 3일이 걸리는데 극도로 쇠약해진 푸르티에 신부가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날이 걸렸다. 두 신부는 서울에 온 지 하루 만에 군문효수형을 언도받고 3월 11일에는 새남터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안타깝게도 훗날의 시복 과정에서 모두 제외되고 말았다. 끝가지 신앙을 증거한 사실이나 순교 의지를 표명한 점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장주기 회장은 신부들이 체포되어 간 뒤 이웃 마을에서 체포되었고, 이내 서울로 압송되어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런 다음 자신이 원하던 대로 다블뤼 주교 등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수영)으로 옮겨져 1866년 3월 30일에 순교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배론은 또 다른 의의를 갖게 되었으니, 신학 교육의 요람지가 순교자들의 요람지로 변하게 된 것이다. 특히 장주기 회장이 훗날 성인품에 오름으로써 배론 순교사의 의미는 더욱 빛을 내게 되었다.

 

박해의 물결이 지나간 뒤에도 배론 교우촌은 꾸준히 그 복음의 터전을 유지하였다. 또 박해 때 피신했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면서 공소로 설정되었고, 1920년대에는 공소 강당이 건립되었다. 당시 이곳은 가구수는 65호, 총 신자수는 100여 명이었다. 그리고 이제, 배론 성지는 순례의 명소가 되어 우리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신심과 성인의 가르침, 그 안에 담긴 애환들을 전해 주게 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6호(1999년 7월), pp.124-126]

[사진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년)

 

성 장주기 요셉(Josephus)은 경기도 수원 땅의 어느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 태어났다. 한문에 유식했던 그는 열심한 자기 형수로부터 천주교 도리를 배워 23세에 영세 입교하게 되었는데, 그때 온 가족이 모두 입교하였다. 그는 학식이 있고 슬기로웠으며 신심이 두터웠기 때문에, 모방(Manbant, 羅)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회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거듭된 박해로 네 번씩이나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살아남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해주며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1845년경에 그는 친척들의 성화와 박해를 이기지 못해 제천 땅 배론 골짜기로 옮겨가 살았다.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자 그는 자기 집을 신학교로 서슴지 않고 제공하였으며, 앞장서서 신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하였고, 신학교 관리직까지 맡아보았다. 장 요셉과 부인은 합심하여 농사를 지어 신학교에 바쳤고, 자신들은 청빈과 봉사로써 11년간이나 신학교 실림을 잘 이끌어 갔다.

 

1866년 3월 1일 갑자기 포졸들이 배론 골짜기에 들이닥쳐 신부들과 함께 그 역시 체포되었으나, 장 회장의 공을 잘 알고 있는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신부가 관헌하게 돈을 주며 그를 석방시켜 달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는 울면서 배론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신자 집에 갔다가 다시 포졸들이 그를 덮쳐서 제천 관장에게로 데려갔다. 제천 관장은 장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품신하였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그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서양인 신부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는 결박을 당하지도 않은 채 짚으로 만든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 채 서울로 향하였는데 지나가는 길목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기는커녕 기쁨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군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6년 3월 24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 날을 기다렸다. 그때 나라에서는 왕비가 해산할 달이었으므로 서울에서 죄인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불길하다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하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이에 그는 1866년 3월 30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그는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메스트르(Joseph Ambroise Maistre) 신부(1808-1857년)

 

한국성 이(李). 조선교구 선교사. 안느시(Annecy) 교구의 앙트르몽(Entremont)에서 태어나 1832년에 신부가 된 후 7년 동안 교구사제로서 활약하다가 1839년 이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뜻을 품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1840년 1월 15일 프랑스를 떠나 우선 마카오로 향하였다. 마카오의 경리부장이 그의 임지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9월 21일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임지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마침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는 한편 경리부 일을 도왔다. 1842년 2월 프랑스 군함 편으로 우리 신학생들의 귀국이 결정되자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 교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를 떠났다. 이 때 그는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육로로 또는 해로로 10년간의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선교사의 입국이 불가능하게 보이자 그는 김대건만이라도 입국시키고자 김대건과 하직하였고, 1846년 초에는 최양업과 함께 동북 국경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으나 만주 군인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고, 간신히 풀려나 만주로 돌아왔다.

 

드디어 1852년, 1847년에 난파한 프랑스 군함들의 유물을 철거한다는 구실 아래 중국 배를 타고 조선 서해안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상륙하는 데 성공,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이미 중국에 있을 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더구나 연장자였으므로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사망하자 1856년 새교구장이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아보았다.

 

그간 그는 성영회(聖孀會)의 사업을 도입하였고 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고아나 기아를 거두어 키우는 성영회의 사업을 조선에서도 촉진시키고자 그는 성영회의 도움을 얻어 외교인들의 자녀들을 거두어 교우가정에서 양육하게 하였다. 비록 박해로 시설을 갖출 수는 없었을지라도 어쨌든 조촐하게나마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사업이 시작되었다.

 

또 그는 국내에서의 성직교육의 긴급성을 절감하고 1855년 제천(堤川) 배론에 성 요셉신학교를 개설하고 우선 그곳의 회장으로 하여금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신학교 살림을 돌보게 하였다. 새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입국하자 그는 충청도로 내려와 조그마한 교우촌을 맡아 오던 중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인근 덕산(德山) 황무실에 묻혔다. 그는 특히 그의 착하고 양순한 성격 때문에 최양업 신부와 조선 교우들의 각별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었다.


 

푸르티에(Jean Antoine Pourthie) 신부(1830-1866년)

 

순교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명 신요안(申妖案).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 교구의 ‘발랑스 앙 알비즈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貴州)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와 함께 상해(上海)를 거쳐 해로(海路)로 한국에 잠입, 충청도 배론[舟論]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張周基, 요셉)와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프티니콜라(Michel Alexandre Petitnicolas) 신부(828-1899년)

 

순교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성(韓國姓)은 박(朴). 1828년 8월 21일 프랑스 생 디에(Saint Die) 교구의 코앵시(Coinches)에서 출생. 샤텔 쉬르 모젤의 소신학교를 거쳐 생 디에 교구의 대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850년 1월 20일, 차부제(次副祭)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으나 그해 10월 병 때문에 외방전교회를 나와 1852년 생 디에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라블린본당 보좌신부로 1년 동안 사목하였다. 그러나 1853년 6월 다시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인도, 홍콩 등지에서 포교하다가 1856년 3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푸르티에(Pourtie, 申)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 충청도지방에서 사목하였고 1862년부터는 배론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배론에서 체포되어 이 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한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대성당으로 옮겨졌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1775-1801년)

 

황사영 백서 원본이 신유박해 순교 200 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의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 동안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던 황사영 백서는 1801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참상을 기록하고 신교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재건하려는 자신의 개인적인 방안을 건의한 편지글로 한국교회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다. 조선 조정의 잔인한 박해로 겨우 움튼 한국교회가 참혹하게 찢겨져 가는 현실을 바라보며 토굴 속에 숨어서 피눈물로 써 내려간 편지글, 가로 62㎝ 세로 38㎝의 흰 명주 천에 붓으로 쓰여진 깨알 같이 작은 해서체의 먹글씨, 122줄 1만3384자 앞에서 200년 세월을 넘어 전해지는 황사영의 신앙적 열정을 느끼며 전율했다. 세월의 흔적이 어린 비단 위에 조금씩 번지기도 한 작은 글자들은 이제 우리들을 감격의 눈물로 역사 속에 젖어들게 하고 있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년)은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으며 남인 시파에 속하는 양반가문 출신이다. 정5품 정랑직을 역임했던 아버지 황석범이 일찍 돌아가시어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 이소사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본관은 창원이요 자를 덕소(德紹)라 한 그는 명문가의 자손답게 영특하고 학문에 뛰어났다. 그의 11대 할아버지인 황침이 한성판윤을 지낸 이래 10대에 걸쳐 벼슬이 떨어진 적이 없는 명문가 출신인 그는 수염이 아름다운 귀공자로도 주변의 환심과 기대를 받고 있었다.

 

1790년(정조 14년) 황사영은 열 여섯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조 임금은 특별히 그의 학문적 재능을 칭찬하며 격려하여 스무 살이 되면 탁용하겠다는 중용을 약속하여 그의 장래를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더욱 학문에 전념하도록 급양비를 하사하였는데 이 때, 임금님이 그의 손을 잡아 주어 어무가 내린 영광을 입었다. 황사영은 이 영광을 표시하기 위하여 당시의 관례에 따라 비단으로 그 손을 감고 다녔다. 이로서 절대군주제도 아래 신분계급 사회였던 당시의 황사영은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온전히 다 갖추었다.

 

황사영은 진사시에 급제했던 그 해에 혼인을 하여 정란주(보명은 명련)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이 결혼은 그의 인생에 있어 귀중한 전환점이 되게 하였다. 부인인 정란주는 진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그 명성이 자자한 정재원의 네 아들 중 맏이인 정약현의 맏딸이었다. 정약현은 한국 초기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정약종과 다산 정약용의 맏서형이 되니 황사영은 정약종과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 것이다.

 

황사영은 이 무렵인 1791년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으며 정약종, 홍낙민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하고, 특히 처숙인 정약종 형제들로부터 교리를 익히게 되어 알렉시오란 세례명으로 영세입교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황사영은 관직의 길을 포기하고 교리연구에 몰두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춘 그는 현세의 행복을 버리고 구원의 학문이 아닌 다른 학문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뒤 주신부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양반인 그는 평민신분의 양인들과 어울려 남송로, 최태산, 손인원, 조신행, 이재신 등 다섯 사람과 함께 명도회 단위 조직을 구성하여 이끌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 권일신, 최창현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서양선교사 파견 요청을 위한 일에 동참하였다. 그는 1798년부터 자신의 고향을 떠나 서울 애오개(아현동)와 북촌에 머물며 신자들의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해 갔다.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졌다. 그는 체포를 피해 신앙생활을 바로 할 곳을 찾아 방황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금령이 강화되니 친척과 친구들 가운데 천주교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온갖 성의를 다하여 신봉하게 되었다"고 증언한 바와 같이 그의 신앙을 지켰다. 그는 신앙생활 그 하나를 바로 하기 위하여 스스로 이씨 성을 가진 상주로 변장하고, 김한민과 함께 서울을 벗어나 충청도 제천 땅 배론으로 숨어들어 김귀동의 집 옹기가마 토굴에 은신하였다.

 

일찍이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칭찬과 격려를 받았던 그는 이제 이름 석자도 밝히지 못한 채 토굴 속에 몸을 숨겼다. 진정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 이것뿐이기에 그 구원을 위한 학문 밖에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의 학문과 신앙이 조선조정의 일방적인 박해로 모욕을 당하고, 신앙의 동지들은 형장의 죄수처럼 처형되고 있음을 보는 그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는 눈물과 기도로 신앙 동지들의 장한 순교의 모습을 정리해 두었으리라. 마침내 주문모 신부마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박해과정을 증언하고 조선교회를 재건해야 할 사명을 통감했으리라! 그는 이 역사적 소명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유명한 백서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출처 : 김길수, 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12월 9일]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1821-1861년)

 

두 번째 한국인 신부. 세례명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일명 대래골, 현 靑陽郡 化成面 禮岩里]에서 출생.

 

1. 생애

 

최양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

 

다락골에서 점차 생활이 넉넉해지고 또 외교인 친척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자 최경환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형제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같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3년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서울을 떠나야 했는데 이 때 최경환은 과천(果川)의 수리산 뒤듬리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그는 산지를 개간하며 연명해 나아갔는데, 틀림없이 이 곳 수리산에서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발탁되었을 것이다.

 

1836년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즉시 방인(邦人)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맨 먼저 최양업이 발탁되었고, 이어 최방제(崔方濟)와 김대건이 발탁되었다. 최양업 등 세 소년은 서울의 모방 신부 곁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출발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모방 신부는 그들을 국외로 내보내어 성직자로 양성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세 소년은 마침내 그해 12월 3일 마카오로 가기 위해 의주(義州)를 향해 서울을 떠났다. 이들은 출발에 앞서 그 전날 모방 신부 앞에서 소명(召命)에 충실하고 장상들에게 순종할 것을 선서하였다.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유지 교우들이 그들을 동행했는데 이들은 세 소년을 변문(邊門)까지 인도하고 거기서 새 선교사를 맞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일행이 12월 28일 변문에 도착한 후, 세 소년은 중국인 안내원을 따라 중국 대륙을 횡단, 이듬해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경리부 책임자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는 경리부 안에 임시로 조선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신학생 3명을 교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르그레즈와 신부 책임 하에 경리부 차장 리브와(Libois) 신부가 주로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후에 조선 선교사로 부임한 메스트르(Maistre)와 베르뇌(Berneux) 신부처럼 선교사들이 마카오에 체류하는 기회에 그들의 교육을 돕기도 하였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아편전쟁을 전후해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으로 인하여 두 번이나 마닐라로 피난해야 했고, 또 최방제와 1년여만에 사별(死別)하는 등 그들의 유학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나 그래도 1842년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1842년 그들은 아직 수학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실(Cecille) 함장이 마카오의 경리부를 찾아와 조선원정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1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는(그간 르그레즈와 신부는 파리본부로 전임되었다) 벌써 몇 년째 조선교회와 소식이 끊겨져 있었으므로 세실의 요청을 하느님의 섭리처럼 생각하고 쾌락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의 종말이 가까워지자 프랑스 정부는 중국에서 어떤 이득을 얻어 보려는 심산에서 군함 2척, 즉 에리곤호와 파보리트호를 파견했었는데 세실은 에리곤호의 함장이었다. 리브와 신부는 건강이 약한 김대건을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먼저 에리곤호에 태워 보냈다(2월 15일). 한편 최양업은 파보리트호로 떠나게 되어 있었는데 입항(入港)이 늦어져 7월 17일에야 요동(遼東)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와 같이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8월 23일 오송(吳淞)에 이르러 최양업은 먼저 떠난 김대건과 만났다. 그런데 세실은 남경조약이 체결되자(8월 29일) 더 이상 북상(北上)하기를 포기했으므로 두 신학생은 프랑스 군함에서 하선하고 다른 방법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행히 강남(江南)교구장의 주선으로 중국배 한 척을 얻어 우선 요동을 떠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배로 10월 2일 상해(上海)를 떠나 10월 23일 요동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그 곳에 남아 입국을 시도하였고, 최양업은 몽고땅 팔가자(八家子)로 가서 페레올(Ferreol, 高) 신부와 합류하였다.

 

최양업은 소팔자가(小八家子) 교우촌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한편 김대건은 입국에 실패했으나 그간의 조선교회 소식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839년 기해박해로 3명의 선교사를 위시하여 그의 부친 최양업의 부모 등이 순교한 소식에 접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최양업은 오히려 그들의 순교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는 동안 페레올 신부가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43년 12월 31일 개주(蓋州)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게 되었다. 성성식에 참석한 후 최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소팔가자로 돌아왔고, 얼마 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도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간 김대건은 다시 한 번 훈춘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었다.

 

1844년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늦어도 12월 15일 이전)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으나 교회법이 요구하는(만 24세) 연령 미달로 사제품까지 받지는 못하였다. 최양업 부제는 계속 소팔가자에 남아 있었다. 한편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와 같이 입국을 시도한 끝에 성공하지만 주교를 대동하지는 못하였다.

 

최양업은 1845년 한 해를 기다림 가운데 허송한 뒤 1846년초에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두만강 쪽을 통해 처음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최양업은 요동교구의 베르뇌 신부의 사목활동을 도우며 1846년을 보냈다. 1846년 말 변문을 통해 두 번째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이 때 그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소식을 들었다. 이제 최양업은 육로(陸路)로의 입국을 단념하고 해로(海路)로의 입국을 시도하고자 홍콩의 경리부로 갔다(그간 경리부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1847년 초에 홍콩에 도착한 최양업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한국순교자전기를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겼다. 드디어 입국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조선정부로부터 회답을 받기 위해 조선해안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1년 전 세실은 조선 서해안에 나타나 1839년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선정부에 보내면서 1년 후 그 회답을 받으러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었다.

 

라피에르 함장은 메스트르 신부, 최양업 등과 같이 군함 2척을 이끌고 1847년 7월 28일 마카오를 떠났다. 그러나 두 군함은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완전히 난파하였다. 상해로부터 구조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양업은 육지로 잠입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부득이 구조선을 타고 상해로 돌아와야 하였다. 난파된 군함의 잔해(殘骸)를 거두러 갈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으므로 그 기회를 기다렸으나 그것도 프랑스의 국내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1848년도 지나가 버렸다.

 

1849년 최양업은 백령도를 통해 입국을 네 번째로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그는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숙원인 사제품을 받고 동료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되었다. 최 신부는 다시 육로 입국을 시도하고자 5월 요동으로 떠났다. 연말을 기다리며 7개월 동안 베르뇌 부주교를 도우며 사목경험을 쌓았다. 12월 변문으로 떠났고, 이번에는 입국에 성공했다. 그러나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입국하지는 못했다. 실로 입국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 입국의 시도를 거듭하기 다섯 번만의 성공이었다.

 

2. 사목활동

 

귀국하자 최양업 신부는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5개 도를 두루 다니며, 그것도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산간벽지만을 찾아다니며 교우들을 심방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1년간 7천여리를 찾아다니며 4,000여명의 고해를 들었다. 그는 건강한 편이었으나 워낙 그가 맡고 있던 지역이 넓고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어서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철종년간(1850∼1863)은 천주교가 묵인되던 때여서 정식 박해는 없었으나 소위 사군난(私窘難)은 그칠 날이 없었다. 사군난은 그의 전교여행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외교인들의 습격을 받으며 체포될 뻔도 했고, 추방되고, 관가에 고발되는 등 도처에서 중대한 위험을 겪어야 하였다. 그러나 최 신부는 이같이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궁핍 가운데서도 많은 개종과 용감한 입교자들 앞에서 위로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최 신부는 이같이 바쁜 전교활동 중에서도 신학생을 선발하여 페낭 신학교로 보냈고 또한 선교사들의 입국을 주선했으며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과 자료까지 수집하는 등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을 보였다. 최 신부 혼자만도 1,000여명의 예비자를 기록함으로써 개종운동이 그 절정에 달했을 때 뜻밖에 1859년말에 박해가 일어났다[庚申迫害]. 이 박해로 인해 최 신부는 경상도의 한 공소에서 여러 달 동안 외부와 완전히 소식이 두절된 채 갇혀 지내야 하였다.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선생신부들에게 고별편지를 쓰고 순교까지 각오하였다.

 

그러나 박해는 다행히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최 신부는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중단되었던 전교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개종운동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최 신부는 박해 때문에 밀린 공소를 너무 무리하게 추진시켰다. 그는 하루에 80리 내지 100리를 걸었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났다. 그러면서 그는 한 달 동안 나흘밤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성사집전을 끝낸 그는 주교에게 보고차 상경하던 중 1861년 6월 과로로 경상도 문경(聞慶)[충청도 鎭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에서 쓰러져 장티푸스로 보름만에 사망하였다. 최양업 신부 집안에 전해지는 구전에 의하면, 쇠고기에 체해 사망했다고 하는데 아마 처음의 식중독이 겹친 과로로 합병증을 일으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 같다. 최 신부는 이렇게 사목활동 12년 만에 기진맥진한 끝에 순직하였다.

 

장례식은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배론 신학교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신학교 산기슭에 매장되었다. 최 신부의 사망은 조선교회를 위해 그가 유일한 한국인 신부였고, 열렬한 선교열에 학덕을 겸비한 모범적 사제였다는 점에서 당장은 그 무엇으로써도 보충하기 어려운 가장 큰 손실이었다. 교구장을 위시하여 선교사들이 한결같이 그의 유덕을 추모해 마지않았다.

 

3. 저술활동

 

최양업 신부는 19통의 라틴어 서한[그 중 1통은 遺失]을 남겼다. 그는 라틴어를 정확하게 말하고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미사여구를 구사할 정도였다. 또한 그는 라틴어 작문 2통을 남겼다. 최 신부의 서한들은 최 신부 자신에 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한국교회사 연구에 필요불가결의 기본자료이고 또한 한국 근세사 연구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최 신부는 그의 부모의 순교사적을 위시하여 한국 순교자에 관한 증언과 자료도 수집했는데 다블뤼(Daveluy, 安敦尹) 보좌주교는 그것을 그의 비망기(備忘記)에 수록했고, 달레(Dallet)는 그것을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하였다.

 

최 신부는 또한 ≪한국순교자전≫을 번역했는데 그 제목은 이러하다. “1839년과 1846년에 조선왕국에서 발발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 현 가롤로와 이 도마 수집. 벨리나 주교의 프랑스 원문으로부터 최 토마스 부제 번역”.

 

최 신부는 또한 보다 완전하고 보다 정확한 교리문답의 출판을 준비했는데, 이것이 1864년 목판본으로 간행된 ≪성교요리문답≫이었을 것이고, 주요 기도서도 번역했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같은 해 간행된 ≪천주성교공과≫였을 것이다.

 

최 신부는 또한 사향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 많은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저술했다고 하는데 그 확실한 저자성(著者性)에 관해서는 좀 더 객관적이고 서지학적(書誌學的)인 연구의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4. 사상과 영성(靈性)

 

그의 성성(聖性)은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보좌주교의 찬사에서처럼 굳건한 신심, 드문 덕행, 구령(救靈)을 위한 불같은 열심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덕행 중에서 첫째로 그의 겸덕(謙德)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 겸덕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순명을 기다리는 것이었고(이것은 그의 7여년에 걸친 입국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대인(對人)관계에서는 인간을 인간의 존엄성에서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의미하였다.

 

영혼을 구하기 위한 최 신부의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은 그의 12년간의 사목활동에서 여실히 입증되었다. 그의 동료 김대건 신부의 성성이 한마디로 피의 증거(순교)였다면 최신부의 일생은 땀의 증거(순교)였다.

 

최 신부의 선교정책은 세 가지 점에서 매우 예언자적인 것이었다. 첫째로 그는 교회와 국가의 장래를 위해 양반제도의 폐지를 주장해 마지않았다. 양반제도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서 교회 내에서는 분열을 초래하여 교회에 큰 손실을 가져오고, 국가를 위해서는 인재등용에서 인권이 무시되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선교사에 관해 최 신부는 그들이 사전에 조선의 실정과 풍속을 익혀야 할 것을 주장했고, 셋째로 한국적인 선교대책으로서 조속한 종교자유의 획득과 이를 위한 프랑스 정부측으로부터 조선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崔奭祐)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배론과 황사영의 "백서"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의 백운산(白雲山)과 구학산(九鶴山) 줄기에 둘러 싸인 벽촌. 이제 신자들에게 익숙해진 '배론(舟論) 성지'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배론이란 명칭은 이곳 골짜기의 형상이 배 바닥처럼 깊고 길게 뻗어 있다는 데서 붙여졌다.

 

옛날 이 부근에는 아랫배론, 중땀배론, 윗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미륵재 등 6개 동리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교우촌이 있던 곳은 바로 점촌배론이었다. 이 점촌배론의 본래 이름은 '팔송정의 도점촌(陶店村)'으로,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충청도 남부에서 피신해 온 신자들이 옹기점을 운영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부르게 된 이름이었다. 그후 박해가 끝나고 다시 이곳에 돌아온 신자들은 1890년대에 와서 '사학(邪學)쟁이들의 옹기점'이라는 기억 때문에 전교 활동에 지장을 받을까 염려하여 마을 이름을 바꾸어 주도록 관계 당국에 요청하였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구학리 배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원주에서 가자면 동쪽으로 치악산 줄기의 끝자락에 연결되어 있는 가라피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그 왼편에는 중앙선의 유명한 또아리굴이 있다. 또 남쪽으로 가자면 온갖 설화로 얽혀 있는 박달재를 넘어야 한다. 바로 이 두 고개처럼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하여 길고 긴 고난의 여정을 넘나든 곳이었다.

 

배론 사적지가 갖고 있는 특징은, 첫째 그 복음사가 한국 천주교회와 함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는 점이고, 둘째 다른 사적지와는 달리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들을 함께 간직해 온 곳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요, 유명한 황사영(알렉시오)의 "백서"(帛書)가 탄생한 곳이며,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또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여러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순교사가 시작된 요람지이기도 하다.

 

배론 교우촌에 대한 기록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부터 나타난다. 이 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유일한 목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하는 것을 본 황사영은, 그 해 2월 말에 서울을 떠나 경상도와 강원도를 거쳐 이곳으로 숨어 들게 되었다. 그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던 교우 김귀동이 그를 받아들여 옹기점 뒤에 토굴을 파고 그의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현재 배론에 조성되어 있는 토굴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최근에 다시 조성한 것이다.

 

황사영은 이후 토굴에 은거하여 자신이 겪은 사실들과 김한빈(베드로), 호아심(토마스) 등이 알아 오는 박해 내용들을 세명주에 적어 나갔다. 이것이 '명주에 담은 신심', 곧 "백서"로, 122행, 13,384자에 달하는 장문의 서한 형태의 글이다. 그 내용은, 박해의 원인과 "백서"의 작성 이유를 기록한 첫 부분, 신유박해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둘째 부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셋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황사영은 이 서한을 북경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전달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달리 결정되고 말았다. 북경 주교는 조선 교회의 소식을 듣기 위해 간절하게 밀사들을 기다렸지만 하루하루가 헛수고였다. "백서"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할 책임을 맡은 밀사 옥천희(요한)과 황심이 9월에 체포되었고, 얼마 뒤에는 황사영도 배론에서 체포되고 만 것이다. 오히려 "백서"는 박해자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렇게도 신앙의 자유를 고대하던 황사영은 1801년 11월 5일(음력)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병선 수백 척에 정병(精兵) 5-6만, 대포 등 날카롭고 강한 병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글을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3-4명을 데리고 오십시오. 그리고 이 나라의 해안에 정박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선교를 용인하고 우호 조약을 체결하도록 요구하십시오. 그리고 국왕에게 '한 사람의 선교사를 받아들여 온 나라가 화를 입지 않도록 하라.'고 요청하십시오(황사영의 "백서", 110-111행 중에서).

 

이처럼 황사영은 무력을 통한 선교의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우호 조약 체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이냐? 모반이나?'의 갈림길에서 방황해야만 했던 조선의 신앙인이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뇌도 민족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비록 전근대적인 민족의식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결코 수긍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훗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하느님의 종'을 선택하면서 황사영을 제외시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신심과 순교 자체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차기진, 사목 246호(1999년 7월), pp.12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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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풍수와 함께하는 문화답사
글쓴이 : 이순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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