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큼추억여행

[스크랩] 창의문(彰義門:~북소문), 一名:~ 자하문(紫霞門)

오늘행복스마일 2018. 2. 18. 11:44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창의문(彰義門:~북소문) 

一名:~ 자하문(紫霞)

 

 

 

북소문(北小門)인 창의문(彰義門)은

자하문(紫霞)이란

애칭으로 널리 불리었다.

숙정문이 항상 폐쇄된 채

제 구실을 못하였기에 이 문이

그 문의 역할까지 도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창의문(彰義門)을

늘상 북문(北門)이라 불렀던 것이다.

도성의 북쪽 교외로 빠지거나

가까이는 세검정과 북한산으로 가자면

이 문이 관문이기에 이용도가 적지 않았다.

 

이 문 근처에는 자하(紫霞)가 많이 끼였는가

서울 내기들은 세검정 일대를 두고

<자문(門)밖>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창의문(彰義門) 밖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자하문(紫霞門)은 4소문 중에서

그 원형을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문이다.

등치로는 건축면적 49.587㎡(15평) 안팎의

조그마하지만 매우 단단하고

굳건한 기풍을 풍기는 건축물이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彰義門)이란 문명()을 얻었다.

 

북한()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 때는

능양군(:인조)을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는 임진왜란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창의문이 경복궁을 내리누르는

위치에 있다는 풍수지리설적 해석 때문에,

문은 세웠으나 수백년간 사용하지 않았고

국가적인 공역()을 수행할 때처럼

긴요한 경우에 한하여 성문을 열었다.

 

현재의 문루()는

1741년(영조 17)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956년에 이 문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741년( 6) 6월 16일에

상량()을 하였다고 적혀 있어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건물의 건축적 성격을 보면

숭례문이나 흥인지문(之門)의

석축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작은 규모로 쌓고

그 위에 세운 단층 문루이다.

 

가구() 방식은 평주()의

주두() 위에 바로 대들보를 얹고

이 위에 다시 화반형() 부재를 놓아

 마룻보와 중도리의 짜임을 받쳤다.

 

마룻보 위에는 사다리꼴에 가까운

파련대공()을 놓아

뜬창방·장여·도리로 짜여진

마룻도리를 받고 있다.

 

천장은 서까래를 모두 노출시킨

연등천장(障)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 물매는 가파르지 않다.

 

마루마다 회반죽을 바르고

취두( : 매 머리모양의 장식)·

용두()·잡상()을 배열하고

추녀 끝의 사래(羅)에는

토수( :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현재 문 서쪽으로 도로가 나 있어

통행로로 이용되고 있으므로

이 문은 여전히 닫혀 있다.

 

 

 

 

 

 

 

 

 

2    0    1    5.    3.    1    8.     하      얀      머     리.

 

 

출처 : 바람에 띄운 그리움
글쓴이 : 하얀머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