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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독신의 탄생’

오늘행복스마일 2018. 7. 30. 08:28

‘독신의 탄생’  


                                                                                                                                                                            

                                  ‘독신의 탄생’ / 이주향 수원대 교수 철학

                                

                                                                                                     금욕의 두 얼굴


                                                                                                         

성(性)은 원초적 에너지다.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을 빼고 생명이 생명일 수 있을까. 생명이 생명을 사랑하여 생명을 낳는 이치를 통해 세계는 지금 여기까지 왔다. 특별한 재앙이 없는 한 생명권은 모든 생명의 본질적 요소다. 

그런데 다른 생명과 달리 인간사에 특이하게 나타나는 것이 있다. 바로 인위적인 금욕(禁慾)이다. ‘독신의 탄생’에서 애보트는 그것을 독신으로 표현한다. ‘독신의 탄생’의 원제는 ‘A History of Celibacy’. 여기서 ‘Celibacy’엔 독신이란 뜻과 금욕이란 뜻이 동시에 들어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곳 어디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현실의 일부로 버티고 있는 독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왜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금욕을 영혼과 교감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이는가. 자발적 독신과 비자발적 독신은 어떻게 다른가. 이것이 ‘독신의 탄생’이 제시하는 문제의식이다. 


모든 문명은 에로스의 억압’ 

그리스의 신들은 종종 방탕했다. 대부분 혈기가 넘쳐흘러 여기저기서 뭇 여성을 유혹하고 유혹당했다. 그런 중에 독신을 고집한 신들이 있다. 물론 여신들이다. 전쟁의 여신 아테나, 그리고 사냥과 동물의 여신 아르테미스. 애보트는 묻는다. 왜 이들은 독신을 고집했을까.

“아르테미스는 자기를 따르는 이들에게도 독신을 요구하고 또 장려했다. 가령 아르테미스와 흡사하면서 아르테미스를 숭배했던 아마존(Amazon)이라는, 활쏘기에 능한 여인족(族)은 남자와 어울리는 것을 경멸했다.” 

아테나, 아르테미스, 아마존의 여전사들, 그리고 잔 다르크까지, 이들은 모두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을 표방한다.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전쟁터에서 힘과 판단력과 용기로 두각을 나타낸 존재들이다. 애보트가 묻는다. 이들의 독신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남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공동체를 지켜야 하는 여성이 결혼과 모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지켜야 하는 아이들을 줄줄이 안고 집안을 지키면서 천상으로 날아오르는 날개옷을 입을 수 있을까. 

애보트는 독신이면서도 ‘가정의 수호신’으로서 화로를 지키면서 알뜰하고도 아름다웠던 헤스티아도 같은 선상에서 해석한다. “결혼한 여자는 모두 자기 남편의 화로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그러므로 헤스티아가 올림포스 산을 꿋꿋하게 지키는 길은 결혼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모든 문명은 에로스의 억압이다.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키워야 하는 일을 억압하지 않고 여성이 어찌 전사가 되고 사제가 될 수 있었을까. 어쩌면 대부분의 종교가 금욕을 기반으로 삼는 것은 이성과 가정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고 그 에너지를 온전히 영혼을 정화하는 데 쓰고자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종교는 왜 금욕을 강조할까 

애보트에 따르면 기독교는 처음부터 성을 긍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결을 강조하고 성을 죄악시한다. 

“금욕과 결혼이라는 문제는 신자들에게 발등의 불이었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편이 낫다’는 사도 바울의 유명한 발언은 여자 앞에서 약해지는 남자의 모습과 결혼의 실상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부정적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혼을 인정한 것은 욕정을 견디느라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보았기 때문이지, 결혼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거룩한 신의 아들이라는 ‘동정녀의 잉태’는 성을 불결한 악으로, 성에 대한 무지를 순결로 인지하게 만들었다. 순결은 죄악 세상에 속한 인간이 천사로 사는 길이었다. 더구나 복음서의 예수는 혈육에 대해 무심했다. 그것은 독신이 비극이 아니라 성스러움의 징표로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기독교는 왜 이렇게 성에 대해 부정적이었을까. 애보트는 ‘순결 이데올로기’가, 탄압이 일상적인 폭군의 억압에 대항하면서 혈연에 속박당하지 않고 자기만의 공동체를 일구었던 힘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손이 아니라 영적 구원이었으므로. 순결과 금욕에 대한 긍정은 피타고라스, 영지주의, 스토아학파 등의 금욕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지만 이것을 통해 기독교는 수도원, 수녀원 같은 대안공동체를 발전시키고, 성모경배 사상을 심화해 나갔다는 것이다.
                                                                                                                                                


 

                

   



출처 : 바람에 띄운 그리움
글쓴이 : 청송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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