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리생명빛

[스크랩] 김수환 추기경님의 사진전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3. 07:31
김수환 추기경님의 사진전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위한 기도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활짝 웃으신 김수환 추기경 모습>

 

<혜화동 주교관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서임 소식에 함께 기뻐하는 모습 2006. 2. 22 서울대교구 주교관에서>

 

<성가정 입양원 방문 2005. 5. 15.>

 

<부처님 오신날 길상사 음악회에서 인사말 2005. 5. 15.>

 

<민족화합의 대미사 후 오라산역 전망대에서 2003. 6. 22.>

 

<음성 꽃동네 방문 2000. 10.15.>

 

<굶주린 북녘 동포를 생각하는 옥수수 죽 만찬 1997. 4. 12>

 

<행당동 철거민촌 방문 1997. 12. 24.>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축제 1996. 4. 14. 명동대성당>

 

<독도 방문 1996. 4. 23.>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관람후 이소선 여사와 함께 1995. 12. 3.>

 

<KBS 열린음악회 가톨릭대편에서 열창 1995. 9. 12. 가톨릭대 성심교정에서>

 

<서울 구치소 방문 1994.12.9>

 

<출소자들의 재활공동체인 금호동 평화의 집 방문 1990. 6. 16.> - 한때 아기사슴도 그들과 함께 이곳에서 살았지요.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 장엄미사에서 요한바오로 2세와 평화의 인사>

 

 

<강원도 사북 탄광 현장 체험 1985. 8. 27.>

 

<한국을 처음 방문한 마더데레사 수녀와 함께 1981. 5.3.>

 

<명동성당에서 단식중인 동일방직 여공들을 위로 1978. 3. 7.>

 

<양평동 철거민촌 복음자리 방문 1977. 4. 7.>

 

<지학순 주교와 함께 1974. 7. 23.>

 

<교황 바오로 6세 주례의 추기경 서임식; 추기경 반지 수여>

 

<군종신부로 입대하는 형님 김동환 신부와 함께>

 

<사제 서품 후 어머니 서중하 여사와 함께>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시절>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기억하며...>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49]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대회  - 사제단 입장 때 하늘에 십자가... 등져서 못봐
 
 
<사진설명>
여의도 행사장 상공에 나타난 십자가 형상 빛. 빛이 자로 잰듯 가늘고 또렷하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전국 신앙대회(1981년 10월 18일).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여의도 상공에 십자가가 나타나서 한동안 화제가 됐던 행사라고 하면 대부분 기억할 줄로 안다.
 
이날 신앙대회는 말 그대로 교황청이 150년 전 조선 포교지를 대리감목구(代理監牧區)로 설정한 것을 기념하고 우리 신앙의지를 새롭게 다지는 행사였다. 조선교회는 그 전까지만 해도 중국 북경교구에 속해 있었다. 조선교구(대리감목구) 설정은 박해로 풍비박산이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려는 교황청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정식 교계제도를 갖추고 걸음마를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건 그렇고 막상 행사 준비작업에 들어가니까 모든 게 막막했다. 교구 차원에서야 여러번 신앙대회를 열었지만 전국 규모 행사는 처음이라서 걱정부터 앞섰다. 한국교회은 그처럼 큰 행사를 치러본 경험이 아예 없었다. 더구나 행사 장소가 여의도광장이라서 외부 사람들 눈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모든 주교님들이 한마음이 되어 협력해 주셨다. 신부들과 평신도들이 밤을 새워가면서 일한 덕분에 준비를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30만~40만명쯤 참석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려는지(?) 전날부터 가을비가 줄기차게 쏟아졌다. 당일 새벽에 비가 그쳐 천만다행이었다.
 
전국 신자들이 이른 아침부터 대회장으로 집결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신자들 행렬이 끝이 없었다. 대회장 주변까지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그 넓은 여의도 광장이 행사 2시간 전에 꽉 차서 준비위원회측에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밤새 기차를 타고 올라온 영호남 지방 신자들은 영등포역 대합실에 쪼그려앉아 아침 도시락을 먹고 여의도로 줄지어 걸어왔다.
 
준비위원회는 참석인원을 80만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새벽까지 내린 비로 인해 대회장 바닥이 축축하고 날씨마저 쌀쌀해서 신자들 고생이 무척 컸을 게다.
 
오전 10시 기수단과 사제단을 앞세우고 중앙 제단으로 입장할 때였다. 사제단에 이어 주교단이 막 단상에 오르는 순간 양 옆에 있는 3000여명 성가대석이 갑자기 웅성웅성거렸다. 사람들이 목을 빼고 하늘을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단에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잠시 무슨 소동이 일어났겠거니 생각했다.
 
그때 구름 속에서 십자가가 나타났다는 얘기는 행사를 마치고 주교관에 돌아와서 들었다. 어느 수녀님이 흥분한 어조로 "대회장에서 구름을 뚫고 나온 십자가를 보았다"고 말했다. 난 "무슨 헛것을 봤길래 그러냐"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그날 저녁 롯데호텔에서 열린 15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도 화제는 온통 십자가 얘기였다. 평소 허튼소리 안하는 사람들까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똑같은 얘기를 하니 안 믿을 수도 없고….
 
얘기를 종합하면 이렇다. 행사가 시작되자 신자들은 뒤로 돌아서서 사제단과 주교단을 영접하고 있었다. 중앙 제단 양 옆에는 수녀들과 성가대원들이 서 있었다. 그때 주교단 뒤편 동남쪽 하늘에서 구름 사이로 십자가 형상 빛이 1분 가량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누군가가 용케 그 십자가를 찍은 사진을 나중에 보니까 빛이 자로 잰듯 가늘고 선명했다. 누가봐도 영락없는 십자가였다.
 
글쎄다. 하늘이 개는 과정에서 우연히 나타난 형상인지, 아니면 정말 하느님의 어떤 뜻이 담긴 십자가 발현인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왜 하필 십자가가 그 순간에 나타나 나는 보지 못했단 말인가. 정말 십자가 발현이라면 난 일생 일대의 순간을 놓친 것이다. 사람들이 한동안 "추기경님도 그 십자가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는 성구를 읊으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난 그 십자가를 하느님 축복이라고 믿고 싶다. 하느님은 조선 말엽 중국에서 들여온 신앙의 씨앗이 박해의 비바람을 이겨내고 풍성하게 열매맺은 것을 보시고 무척 기쁘셨을 것이다. 대견스러운 어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버지 마음 그 자체였을 것이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불어닥친 박해의 광풍(狂風)을 이겨내고 어엿하게 성장한 한국교회가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대견스러웠겠는가.
 
한국교회 역사는 수난의 역사요, 순교의 역사다. 불모지에 뿌려진 신앙의 씨앗이 싹트고 꽃피는 과정에서 수많은 신앙선조가 피를 흘렸다.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 그런데도 신앙선조는 배교를 거부하고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하느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기꺼이 바쳤던 신앙선조의 순교혼이 바로 한국교회의 얼이다.
 
한국교회는 일제시대에도 여러 형태로 탄압을 받았다. 북한교회는 해방 직후부터 말살되다시피하는 고난의 길을 걸었다. 내 소신학교 동기생 3명도 북한 땅에서 순교했다. 6·25 전쟁 후에는 가난과 싸우면서 시대징표를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협박과 편견에 굴복하지 않고 이 나라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다.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은 2000년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도중에 과오(過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충실히 따랐다(마태 10, 38)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미래다. 사람이건 조직이건 위험신호는 자만심에 도취되어 있을 때 나타난다. 150주년 기념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교회사를 기릴뿐 아니라 민족의 현재를 변혁시키는 누룩이 되고,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빛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빛과 땅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날 행사가 끝난 여의도광장에는 휴지 한 조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신자들이 식전 공동 고해성사 때 받은 보속을 실천하느라 쓰레기를 모두 가져간 것이다. 이 또한 내내 화제가 되었다. "천주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해 호감을 갖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평화신문, 제772호(2004년 5월 9일), 정리=김원철 기자]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0]

형님 김동한 신부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정은 형님만한 분 없어"
 
 
<사진설명>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을 마친 김수환 추기경이 명동성당 앞마당에서 형 김동한 신부(왼쪽)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1968년 5월 29일)
 
 
1983년 9월 말 세계 주교대의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에 도착했다.
 
그곳에 체류 중인 장익 신부(현 춘천교구장)가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길래 저녁식사를 하러 바티칸 근처 중국집에 들어갔다.
 
식사를 막 마쳤을 때였다. 장 신부는 평소보다 나를 더 어려워하는 자세로 머뭇거리더니 "저…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며 말문을 무겁게 열었다.
 
"무슨 얘긴데?"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 오늘 서울에서 형님 신부님이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푹 파이는 것 같았다. 머리와 가슴이 텅 비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먼 길을 왔는데 식사라도 제대로 하라고 장 신부가 배려해 준 모양이었다. 부음(訃音)을 공항에서 들었더라면 육신마저 허기져 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형님 김동한(가롤로) 신부님. 이 세상에서 내 마음에 가장 큰 빈자리를 남겨 두고 가신 분이다. 나와 어머니 사이의 천륜지정(天倫之情)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뭐라 그럴까, 한 인간으로서 피부로 느끼는 정은 형님만한 사람이 없었다.
 
형님은 참으로 정이 깊은 분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행상을 나가시면 나는 빈 집에서 세살 터울인 형님하고 늘 같이 지냈다. 형님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먼저 소신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사내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하는데 형과 싸운 기억도 없다. 
 
그리고 15살 때까지 형님한테 "야, 너"하는 식으로 반말을 했는데도 워낙 유순한 성격이라 그 점에 대해 별 말이 없었다. 형님이라기보다 단짝동무였다.
 
형님의 소신학교 첫 방학 때였을 게다. 오랜 만에 집에 온 형님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예전같이 형님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방학 내내 뛰어 놀았다. 그런데 어느날 학교에 갔다오니까 형님이 집에 없었다. 형님도 개학에 맞춰 소신학교로 돌아간 것이었다. 마음이 휑하니 뚫린 것 같은 공허함을 그때 처음 느껴 보았다.
 
부음을 들었을 때도 어린 시절에 느꼈던 공허함이 엄습했다. 회의 때문에 로마에 한달 머물면서 낮이건 밤이건 형님 생각을 한시도 떨치질 못했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회의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형님과 친했던 분들에게 부음을 전할 겸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형님에 대한 정을 글로 옮길 때면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런 식으로라도 애달픈 마음을 달래야 했다.
 
출국 전 병원에서 뵌 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형님은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돼 다리 절단수술을 받아야 했다. 몸이 성치 않은데도 당신 몸은 돌볼 생각을 않고 결핵환자들을 위해 뛰어다니시느라 병이 그 지경까지 악화된 것이다.
 
형님은 당뇨 합병증으로 결핵에 걸려 마산 국립요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결핵환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 그쪽 방면으로 뛰어들었다. 천성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을 돕는 일에는 앞뒤를 가리지 않으셨다.
 
형님이 1976년 운영난에 허덕이는 대구 결핵요양원을 인수할 때만 해도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교회 관심은 매우 미약했다. 그런 여건에서 빚에 쓰러져 가는 시설을 맡아 운영했으니 고생이 오죽했겠는가.
 
언젠가 요양원에서 들렀는데 형님이 요양원 확장 계획을 말씀하셨다. 내가 "건강도 안 좋은데 무모하게 일을 벌이는 것 아닙니까? 수용 환자들 숫자를 줄이세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형님은 "오갈 데는 고사하고 그냥 두면 죽을 게 뻔한 중환자들이 도와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외면하겠느냐"며 내 조언을 일축하셨다.
 
형님 약점은 바로 이 착한 마음에 있다. 남의 사정 다 들어주고, 때로는 사람을 너무 믿어서 속기도 하셨다. 이런 선한 어리석음 때문에 교회 어른들과 주변 친지한테서 진짜 어리석은 사람으로 오해를 받아 소외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하셨다. 그럴 때마다 형님은 묵주를 돌리면서 성모님께 의탁하셨다.
 
형님은 당뇨병을 다스리지 못해 시력이 점점 약해지고 두 다리가 마비되어 갔다. 그런 몸으로 사방팔방 후원자들을 찾아다녔으니 그 걸음이 얼마나 무겁고 고달팠을까. 그런데도 그런 심경을 한번도 내비치질 않으셨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련해진다.
 
내가 주교가 된 후부터는 형님과 접촉도 뜸했다. 어떤 해에는 한두번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다. 주교관 출입이 행여나 이 동생에게 누가 될까봐 일부러 피하신 것이다.
 
형님은 나와 얼굴이 무척 닮았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아이고, 추기경님!"하며 반갑게 인사를 하면 주위 시선이 모두 쏠리는 터라 여러 번 당황한 적이 있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하지만 공부는 형님이 훨씬 잘하고 마음도 착했다. 형님은 학교성적이 늘 '갑(甲)'이었는데 난 '을(乙)'에서 맴돌았다. 어린 마음에 그런 형님이 자랑스러웠다.
 
내가 학병에 끌려갈 때 형님은 전장으로 나가는 이 동생의 손을 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전쟁이 끝나 귀국선을 타고 돌아왔을 때도 그러셨다. 여러 날 굶은 채 부산항에 내려 밥 한 그릇 얻어먹으려고 찾아간 범일동성당에서 기적적으로 형님을 만났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형님은 그때 범일동성당 보좌신부였다.
 
로마에서 돌아오자마자 형님을 모신 대구 남산동 성직자 묘역으로 내려갔다. 소박한 분묘 앞에 작은 나무 십자가가 꽂혀 있었다. 그때서야 형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요양원에 들러 형님이 쓰시던 방에 가보았다. 방은 내 마음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날 밤 형님의 체취가 남아있는 그 방에서 잠을 잤다.
 
참으로 고마운 것은 지금도 많은 분들, 특히 당시 형님 복지사업을 후원해 주었던 '밀알회' 형제자매들이 기일(9월28일)이 돌아오면 한데 모여 형님을 추모하는 것이다. 나도 매년 기일에 내려가 미사를 함께 봉헌하는데 그토록 많은 이들이 20년을 한결같이 한 사제를 기억해주는 게 놀랍고 고마울 따름이다.
 
형님은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요한 15, 13)는 말씀을 온전히 실천하다 가신 분이라고 믿는다.
 
[평화신문, 제773호(2004년 5월 16일), 정리=김원철 기자]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1]

가난한 이들과 살고 싶었는데   "꺼칠한 손 잡아 줄 땐 위로하기보다 위로 받아"
 
 
<사진설명>
현장체험을 하기 위해 강원도 태백 사북탄광에 찾아간 김수환 추기경(1985년 8월 27~29일).
 
 
1981년 작고하신 기후고(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님 병문안을 갔을 때 일이다.
 
병간호를 하는 아주머니가 기 신부님이 평소 입으셨던 속옷 바지를 옷장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데다 신부님이 직접 바느질을 하셨는지 엉성하게 꿰맨 흔적이 여러 군데 있었다.
 
그 속옷은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복음적 청빈의 표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어느 신부가 그처럼 낡은 속옷을 입어 본 적이 있겠는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있으면서 내 신앙과 생활이 과연 복음적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곤 했다. 대답은 '아니다'에 가까웠다. 특히 사제로서 지향해야 할 복음적 청빈생활에는 분명하게 '아니다'였다. 내가 좋아하는 설교 주제 가운데 하나가 복음적 청빈인데도 말이다.
 
주교관 집무실에 앉아서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주교관을 떠나서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살 수는 없을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은 열망에 몸살을 앓았던 본당신부 시절이 그리워서 더 그랬을 게다. 높은 자리라는 게 간혹 창살없는 감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과 웃고 울었던 본당사목 시절을 떠올리면서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가난한 동네에 들어가 사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적어도 비서신부와 끼니를 챙겨줄 식복사는 따라와야 한다. 여기 저기 다니려면 승용차도 필요하다. 수시로 내방하는 손님들을 맞이하려면 응접실이 넓어야 하고 주차장도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이 커야 한다.
 
결국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싶은 소망은 실현 불가능한 꿈에 불과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내 꿈은 물거품처럼 꺼지고 다시 추기경 일상의 자리로 돌아왔다.
 
70년대 중반쯤 빈민촌에 뛰어든 정일우(예수회) 신부님과 고(故) 제정구 의원이 양평동 철거민들을 이끌고 경기도 시흥시 신천리라는 곳에 이주했다. 철거민 집단이주는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찾아가는 여정과 같았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도움을 줬다.
 
정 신부님은 정착촌 복음자리에 내 방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곳에 여러번 가 보기는 했으나 자고 온 적은 한번도 없다. 공동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등 불편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라서 자고 가라고 할 때마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
 
동대문 평화시장에 있는 준본당을 사목방문차 가본 적이 있다. 그곳 신부님과 신자들이 시장구경을 시켜준답시고 나를 반시간 남짓 끌고 다니는데 정신이 없어서 혼났다. 비좁고 공기가 탁한 시장통에서 삶을 꾸려가는 상인들, 또 시장을 성당처럼 여기고 사목하는 신부님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나라면 사목은커녕 한달도 못가서 병이 나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난한 사람들과 살고 싶은 꿈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는 추기경 직책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라는 게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비우지 못했음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고, 그토록 자주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했으면서도 나는 왜 스스로 몸을 굽혀 장애인들 수발 한번 들어줘 보질 못했는가. 조금 후회스럽다. 지금은 그런 봉사를 하고 싶어도 누가 이 힘빠진 늙은이에게 일을 맡기겠는가.
 
그러나 잠시라도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머문 시간은 행복했다. 성탄 전야에 산동네와 소규모 사회복지시설 같은 곳에 기쁜 마음으로 찾아간 이유이기도 하다. 또 그들에게 보탬이 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다.
 
정일우 신부님이 철거민들을 이주시킬 부지를 물색할 때도 내가 정부 모처에 시쳇말로 '빽'을 좀 썼다. 어느날 정 신부님이 "대한민국이 어디 있습니까? 이 나라에 국민이란 존재가 있기나 하는 겁니까?"라며 분노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까 정 신부님은 발품을 팔면서 땅을 물색하러 다녔지만 쓸만한 땅은 전부 힘있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팔지를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정부측에 "도시개발에 쫓겨난 힘없는 서민들은 내팽개치고 과연 누굴 위해 일하겠다는 정부냐"고 항의했더니 금방 일이 성사됐다.
 
그 즈음에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수녀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쓰레기를 주우면서 살아가는 난지도 쓰레기장에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그 척박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수녀들 얘기를 들으면 '나도 한번 가봐야지'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더구나 내가 가서 가난한 사람들 손 한번이라도 잡아주면 큰 힘이 된다고 하기에 늘 기쁜 마음으로 그런 현장을 찾아다녔다. 나 역시 그들의 꺼칠한 손을 잡아 줄 때는 내가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위로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 삶 속에 하느님이 머물러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사북탄광 현장체험(1985년)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아시아 사회주교연수회(BISA) 프로그램에 따라 주교들이 현장체험을 하기로 했는데 나는 '인생 막장'이라는 탄광을 선택했다. 그때만 해도 탄광 붕괴사고가 툭하면 발생해 구조현장에서 울부짖는 가족들 모습이 TV 뉴스에 자주 비쳤다. 또 탄광촌 부인들 사이에 춤바람이 나서 사회 문제가 될 때였다.
 
막상 갱까지 기어들어가서 탄을 캐는 척 해보니까 이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몸을 곧추세울 수도 없이 좁은 탄구덩이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하루 7시간, 8시간씩 일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독일 유학 시절에 한국인 노무자들과 막장에 가본 적이 있지만 한국 탄광은 작업환경, 특히 안전 면에서 너무나 열악했다. 나 같은 사람은 한나절은 고사하고 한시간도 못 버티고 뛰쳐나올 정도였다.
 
갱에서 나와 부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남편은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저 고생인데 부인들이 춤이나 추러 다니면 되겠느냐"며 야단(?)을 치고 돌아왔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슬퍼 우는 사람들을 수없이 찾아다녔지만 그들과 삶을 나누지는 못했음을 부끄러이 고백한다. 돌아보건대 난 인간 문제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깊었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몸과 피까지 내어주셨는데 난 그 흉내도 내보지 못했다.
 
내가 죽어 하늘나라에 가면 하느님한테 꾸지람들을 잘못이 그 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화신문, 제774호(2004년 5월 23일), 정리=김원철 기자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3]

제5공화국과 가톨릭 시국문제 유연한 대처 바라며 全 대통령 면담
 
 
<사진설명>
우리 사회는 제5공화국 말기에 이르자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민 학생들의 함성으로 요동쳤다. 사진은 김 추기경이 명동성당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86년 11월 17일).
 
 
1983년 전두환 대통령과 정확히 3시간 10분 동안 마주앉은 적이 있다.
 
학생시위를 비롯해 여러가지 시국 문제에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전달하려고 윤공희 대주교님(전 광주대교구장)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다.
 
당시 독재타도를 외치는 대학생 시위가 빈발했다. 시위가 있는 날이면 신촌 대학가는 돌맹이와 화염병, 최루탄이 난무하는 게 영락없는 전쟁터였다. 정부는 늘 강경진압으로 맞섰다. 날이 갈수록 사회가 어수선하고 국론이 분열됐다.
 
그날 집무실에서 잠깐 인사를 나눈 뒤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3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서 나와 윤대주교님은 별 얘기를 하지 못했다. 전 대통령 내외가 돌아가면서 쉬지 않고 얘기하는 바람에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내외는 누군가에게 속사정을 털어놓고 싶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 꾹 참고 지내는 것 같았다.
 
전 대통령은 "대통령 될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다"는 말을 거듭했다. 임기 후반부에 다시 만났을 때는 이런 말도 했다.
 
"권력은 일단 한번 잡으면 놓고 싶지 않은 게 인간 본성입니다. 이 자리에 있으면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어요. 주위에서도 (권력을) 놓지 말라고 조언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저는 내놓을 겁니다."
 
전 대통령은 "사마란치 IOC 위원장도 88 서울올림픽을 치르려면 더 해야 하지 않느냐면서 연임을 종용했다"고 말하고 몇몇 인사들 이름까지 죽 나열했다. 약속대로 물러나기는 하겠지만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권력은 참으로 묘하다. 권력을 올바로 사용하면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만 그 단맛에 취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권력을 남성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군에서 남편이 별 한개 장성이면 부인은 별 두개 장성"이라는 말이 있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여성도 권력에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봉사와 희생 없는 권력은 진정한 권력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도 이 점을 무척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누구를 제일 높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할 때 이렇게 말씀(루가 22,24-27)하셨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 특히 정치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복음이다.  
 
"이 세상의 왕들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린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한다… 너희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행세해야 한다. 식탁에 앉은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 중에 어느 편이 더 높은 사람이냐? 높은 사람은 식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다."
 
좀 빗나간 얘기지만, 권력으로 치자면 나만큼 장기간 절대권력(?)을 쥐어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교구장직을 30년 동안 수행했으니 말이다. 교구장들 중에는 교회법에 명시된 권한이나 권력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교구를 이끌어가는 분이 있는가 하면, 권력을 쓸 줄 모르는 분이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주변머리 없는 교구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비쳐지지 않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서품 2년차 젊은 신부가 사제직을 떠나면서 편지를 두번 보내왔는데 그 편지 속의 김수환은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독재자였다. 하도 기가 막혀서 그 신부와 만나 이야기를 해봤다.
 
"난 자네와 이렇게 대면하는 게 처음이네. 자주 만나기라도 했어야 자네 표현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억압하지 않았을 텐가. 내게 부족한 점이 있거든 솔직히 말해 주게."
 
"편지에 쓴 것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얘기가 아니라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입니다. 실제로 교구장은 모든 권력을 한손에 쥐고 교구를 통치하지 않습니까?"
 
난 기가 막혀서 "허허"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부임하기전부터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신부였는데 그가 사제복을 벗는 이유 중 하나가 "독재자 밑에 들어가 일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난 그 신부가 어디에 간다고 하면 추천서를 써주었을망정 인사발령 한번 내본 적이 없다. 내가 무슨 일이라도 시켜보고 독재자 소리를 들으면 덜 억울했을 텐데….
 
원래 높은 자리라는 게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무척 힘들고 고독하다. 오해도 자주 받는다. 말 많고 탈 많은 본당에서 장(長) 자리를 맡아 일해본 사람은 쉽게 수긍할 것이다. 하물며 난 서울대교구 책임자였으니 오죽했겠는가. 다 지났으니까 털어놓는 얘기인데, 교황님께 보낼 교구장직 사직서를 쓰다가 찢어버린 게 몇 번인지 모른다. 심적 고통을 견디기 힘든 순간이 더러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로 버텼다. 교구장직 30년 버팀목은 다름 아닌 기도였다.  
 
아무튼 유신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제5공화국과 가톨릭 교회는 편한 관계가 아니었다. 1982년 3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관계를 더 악화시켰다.
 
그 사건은 광주 항쟁을 묵인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폭발한 것인데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가 사건 주범 김현장, 문부식씨를 보호해 주는 바람에 불똥이 튀어 가톨릭이 한동안 여론의 뭇매에 시달렸다. 피의자들의 보호 요청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설득해 자수시킨 최 신부 행동은 정당했다. 그러나 신문방송은 가톨릭을 용공분자 비호세력으로 일제히 매도하기 시작했다. 부활 성주간 내내 비난성 기사가 쏟아졌다.
 
난 성주간 성유축성미사에서 "최 신부 행동은 사제로서 정당하고 합당한 행동"이라고 옹호하고 정부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언론의 '가톨릭 때리기' 이면에 숨어있는 정부 계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조되는 반미감정을 꺾기 위해 희생양을 찾고 있던 정부 입장에서 방화사건은 호재였다. 더욱이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한 가톨릭 위상까지 동시에 무너뜨리는 것은 그야말로 '도랑치고 가재잡는' 일이었다. 당시 정부 압력을 거부할 수 있는 언론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래도 역사의 강물은 도도히 흘렀다. 민주화운동 분수령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평화신문, 제776호(2004년 6월 6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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