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세 여인 이야기 - 선덕여왕, 천명부인, 선화공주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4:53

 

1300년전 신라.

왕권은 불안했고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 
           

진골 중심의 지배체제를 다진 26대 진평왕.

그러나 끝내 왕위를 물려줄 아들을 얻을 수 없었다. 
                        

딸만 셋 있었다.

영리한 덕만, 온순한 천명 그리고 아름다운 선화공주. 

고대 사회 정치적 의도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을 걸어야 했던

진평왕의 세 딸,

덕만, 천명, 선화공주에 대해 알아본다. 

 

1. 덕만 이야기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 탄생하기까지

 

한반도 남동부 자리잡은 신라가

6세기 한강을 차지하면서

고구려, 백제와 국경을 둘러싼 전쟁은 치열했다.

 

어릴 때 즉위해서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진평왕에게 고민거리가 있었다.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었던 것이다.

 

진평왕에게는 넓혀진 나라를 물려줄 아들이 없고

덕만, 천명, 선화공주 세 딸만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큰딸인 덕만공주다.

그 이전에는 한번도 여성이 왕위를 계승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팔공산 자락 대구 부인사.

신라때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이 사찰은 옛부터 한 명의 왕을 모시고 있다.

지금도 음력 삼월 보름이면 이 왕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여성으로 처음으로 왕이 된 선덕여왕이다.

신라 영토가 한강 유역까지 넓혀진 후 왕의 권위와 위엄이 한층 강조되던 시기였다.

   

                                       <선덕여왕 영정>

    

삼국시대 그녀는 어떻게 여성으로 왕이 될 수 있었을까?

 

632년. 1월.

선덕여왕은 국가 중대사를 정하는 화백회의를 통해 왕위에 오른다.

27대 선덕여왕이 왕관을 쓰기 전까지 어떤 여성도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여성의 즉위는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것이었다.

 

여왕의 즉위에 대해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선덕왕이 즉위하니 휘는 덕만, 진평왕의 장녀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의 성품은 관인(寬仁)하고  명민(明敏)하였으며

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니

나라 사람이 덕만을 세워 성조황고라는 호를 올렸다.."

 

'관인명민(寬仁明敏)'

'성조황고(聖祖皇姑)'

 

어질고 현명한 왕에게 올리는 '성조황고'는 무슨 뜻인가?

 

"성조홍고라는 것은 '성스러운 조상을 가진 황실여성'

성스러운 혈통으로 왕이 될 수 있는 여성을 뜻합니다.

성골(聖骨)이라는 것입니다."

                                 - 강종훈 교수(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삼국사기>는 여왕이 될 수 있는 덕만의 뛰어난 예지력을 '모란꽃 일화'로 전하고 있다.

 

진평왕때 당에서 온 모란꽃 그림과 씨앗을 덕만에게 보이자

덕만이 벌과 나비가 함께 있지 않으니 향기가 없을거라고 말한다.

진평왕이 직접 확인하자 덕만의 말과 같았다는 것은

덕만의 총명한 면모를 보여준다.

 

해마다 5월이면 크고 화려한 꽃을 피우는 모란.

 

모란에 향기가 없다는 덕만의 말은 사실일까?

 

"실제 모란꽃 종류는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이 향기를 못느껴도 곤충들은 맡고 찾아갈 수 있습니다.

또 곤충들은

향기 뿐만 아니라

모양과 색깔을 보고도 꽃을 향하기 때문에

실제 모란꽃에 향기가 없다거나,

향기가 없는 꽃에 곤충이 들지 않는다는 추측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 송정섭 박사(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과학원)

 

선덕여왕의 모란도 일화는

당 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남편이 없음을 조롱하기 위해

'향기 없는 꽃' 그림을 보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수많은 민화속에 그려지는 모란.

특히 왕실 여인의 병풍속에 그려지는 모란.

 

그렇다면 모란도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모란꽃은 부귀를 상징합니다.

나비가 없다고 부귀의 의미가 희석되는 것이 아니고,

당 태종이 모란꽃 그림을 선물한 것은

신라왕의 부귀를 축원하는 의미로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게 그림과 함께 씨앗을 보낸 것이죠.

그렇다면 놀리거나 비하하는 의미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모란꽃이 많이 선물되는데

그 풍속대로 신라에 모란꽃 그림과 씨앗을 선물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 허 균 소장(한국민예미술연구소)

 

덕만공주는 모란꽃이 부귀와 풍요를 상징한다는 거 몰랐던 것일까?

모란도 이야기가 여왕의 뛰어난 예지력으로 전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모란도가 선덕여왕의 예지를 상징하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는데

사실 내용으로 보면 굉장히 설화적 내용입니다.

뒷날 어떤 사건을 매개로 선덕여왕의 예지를 입증하는 설화로

사람들에 의해 재구성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주보돈(경북대학교 사학과)

 

"여성의 몸으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남성들과 전혀 다른 무엇이 부각되어야 했겠지요.

뭔가 특별한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 조범환 교수(서강대 박물관)

 

신라시대 왕에게 아들이 없을 때 공주가 왕위를 계승하는 게 당연한 일인가?

 

2대 남해차차웅은 사위 4대 탈해이사금에게 왕위를 물러줬다.

11대 조분이사금도 사위 13대 미추이사금에게 왕위를 물러줬다.

 

그런데 진평왕은 왜 사위가 아닌 딸에게 왕위를 계승했는가?

 

"27대 선덕왕의 이름은 덕만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어머니는 마야부인 김씨다.

성골 가운데 남자가 없었으므로 여왕이 즉위했다(聖骨男盡)."

                                                   - 일연, <삼국유사>

 

"기록 그대로 따라가다보면

성골 남자가 다했기 때문에 여자가 잇는다는 것인데,

 

'성골남진(聖骨男盡)'은

여자인 덕만공주가 왕위 계승할 수 있게 하는 명분론을 내세우는데

사실 그것은 명분일 따름입니다.

 

사실 성골은 원래 신라 국가 형성때부터 있었던 게 아니고,

 

진평왕 시기

성골은 왕의 직계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특정한 집단만을 성골로 규정한 것입니다.

 

아들이 없어져 저절로 소멸되고 

마지막 딸들만 남자 그런 표현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 주보돈(경대 사학과)

        

  ‘성골남진(聖骨男盡)’은 덕만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핑계

 

                 

 

신라는 지배층을 대상으로 골품제도를 시행하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왕족은 다시 성골과 진골로 나눠지고, 

귀족은 6두품에서 1두품까지로,

지배층을 8등급으로 나누어 신분에 따라 

관등의 상한선은 물론 복색, 수레, 일상 생활 전반까지 규제해나갔다. 

 

왕족은

왕위계승을 물러받을 수 있는 성골(聖骨)

그렇지 않은 진골(眞骨)로 구분되었지만

그 기준은 명확치 않았다.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재위 54년 동안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가족만 성골로 규정한 것이다.

 

                                   진흥왕

                                     ㅣ

                                동륜태자

                                     ㅣ

                   진평왕    - 백반     - 국반

                  ㅣ                       ㅣ

     덕만-천명-선화공주          승만공주

 

성골은 진평왕과 두 동생,

그리고 자신의 세 딸과 동생의 자식까지로 정했다.

 

기록에 나오는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은 진평왕의 동생 백반으로 추정한다.

 

"신라 왕실에서는 고모와 결혼을 한다든지

신라말 진성여왕처럼 삼촌과 사통을 했다고 하는데,

신라 왕실의 근친혼은 불륜이라기보다

순수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관행이었습니다."

                                                                      - 조범환(서강대 박물관)

 

진골로 왕위에 오른 김춘추의 혈통을 보면

성골은 출생과 더불어 고정된 신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진지왕 (성골)                 진평왕 (성골)

                      ㅣ                                 ㅣ

             용춘 (성골 -> 진골          천명(성골)

                                            ㅣ

                                      김춘추(진골)

 

원래 모두 성골이었으나

아버지 용춘이 진골로 전락되면서

김춘추도 진골로 된 것이다.

 

성스러운 피를 받았다는 선덕여왕.

더 이상 성골에 남자가 없다는 논리는 아버지 진평왕 자신이 만든,

강력한 왕권을 이용, 딸의 왕 만들기 명분일지도 모른다.

 

왜 진평왕은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을까?

 

많은 연구자들은 신라 왕실의 불교에 주목한다.

 

법흥왕때 불교 공인된 후 신라 왕실은

불교를 신라 왕실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용한다.

 

신라 왕실의 구성원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

 

* 진평왕 (백정-석가 아버지)  -  마야부인 (석가 어머니)

                                                 l

                                  선덕여왕 (석가모니)

 

* 백반, 국반 (석가모니 삼촌)

 

진평왕은 비록 아들은 없었지만

그의 혈육이 석가모니 같은 강력한 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딸이지만 덕만공주를 왕위에 오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우린 것이다.

 

진평왕은 54년간 재위했으므로

덕만공주는 오랜 기간 충실히 후계자 수업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시대.

전쟁에 나가지 못하는 여왕으로서 선덕영왕은

다른 왕들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진평왕 53년.

신라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귀족 이찬 칠숙과 석품의 반란.

민가에 숨었던 석품이 끈질긴 추격에 붙잡히면서 막을 내린다.

 

왕권에 대한 귀족의 반란.

이들의 반란은 진평왕이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선덕여왕 즉위는 순조로운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진평왕은 54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말년 사망전에 칠숙과 석품의 난을 겪게 됩니다.

선덕여왕 즉위에 반발한 귀족세력의 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배세력내에 모반사건이었습니다."

                                                      - 주보돈(경대 사학과)                               

 

칠석의 난을 지켜봤을 선덕여왕.

진평왕은 여왕 즉위의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단호했다.

칠석의 목을 베고 그 가족과 친지들 구족을 처형했다.

 

"결국 선덕여왕 즉위에 반발했던 세력이라 생각했기에

제거하는데 단호했던 겁니다.

잡아서 가족들까지 크게 형벌을 가한 것입니다.

여왕 즉위에 반발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진평왕은 반란자의 구족을 멸하는 강경책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여왕의 탄생을 부각시킬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라도 더 이상 여왕의 권력에 도전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였을 겁니다."

                                                                      - 조범환 교수 

 

여왕의 치세는 순탄치 않았다.

신라는 7세기 한강까지 진출한 후 백제와 고구려의 양쪽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특히 신라에 한강을 빼앗긴 백제의 공격은 이 시기 집요했다.

치열한 전투가 멀어지는 시대.

여왕의 즉위는 대외적으로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백제 침공이 잦아진 시기.

수세에 몰린 여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한다.

당 태종은 사신에게 여인이 나라를 다스리니 신하를 보내주겠다며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 그대 나라는 임금이 부인이어서

이웃나라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니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

해마다 편할 적이 없다.

 

내가 나의 친족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을 삼고

군사를 보내어 보호케 하면 어떠한가..." - (당 태종)

                                                   - <삼국사기>

 

전쟁에 직접 나가지 못하는 선덕여왕.

내부 귀족의 반발과 국제관계의 약점을 어떻게 극복하려 했을까?

 

선덕여왕은 20여 기의 사찰 창건와 대규모 불사로 국력을 모았다.

최대 규모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조성했는데

이는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였다.

여왕의 의지를 온 천하에 알리고 있다.

 

황룡사9층 목탑은

각 층마다 신라가 극복해야 할 적국의 의미를 담고 있다.

 

9층 예맥(濊貊)

8층 여적(女狄)

7층 단국(丹國)

6층 말갈(靺鞨)

5층 응유(鷹遊)

4층 탁라(托羅)

3층 오월(吳越)

2층 중화(中華)

1층 일본(日本)

 

그렇다면 여왕은 정말 불력으로 이웃나라 침입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는가?

 

"엄청나게 비용을 들여 황룡사 9층 목탑을 조성한 이유는

외부적으로 주변국을 복속하려는 항전의 의지와

내부적으로는 결속력을 다져가는 노력이었을 것입니다."

                                                            - 주보돈 교수

 

여왕은 전쟁 수행에 아무런 역할도 못했을까?

 

<삼국유사>에 의하면

겨울철에 나타난 개구리떼를 본 여왕은

백제군의 매복을 직감하고 알천장군을 보낸다.

 

경주 건천면에 여근곡.

선덕여왕의 명을 받든 알천은

이곳에 이곳에 매복한 백제군 수백 명을 무찌른다.

하지만 이 이야기속에서도 여왕의 약점을 읽을 수 있다.

 

"선덕여왕의 예지력을 강조한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경주 가까이까지 백제군이 매복해왔다는 것입니다.

선덕여왕때 약해진 신라의 군사력, 국방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주보돈 교수

 

선덕여왕은 대외적으론 전쟁수행을,

대내적으론 정치 개혁과 통합을 시대적 과제로 안고 있었다.

 

여왕은 폭넓은 인재를 등용하여 자신의 반대세력을 견제코자 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전통귀족인 알천과 가야계 왕족 김유신,

외교면에서는 폐위돈 진지왕의 손자 김춘추를 등용했다.

 

특히 귀족사회에 비주류 김유신과 김춘추가 전쟁과정에서 거둔 놀라운 성과는

여왕에게 큰버팀목이 되었다. 

 

하지만 곧 위기가 찾아온다.

 

2. 여주불능선인(女主不能善理) - 시련, 수세에 몰리는 여왕

 

선덕 11년.

백제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신라 서쪽의 대야성을 비롯한 40여개 성을 잃는 국난을 겪는다.

 

경남 합천.

642년 백제 젊은 의자왕이 신라 대야성을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당시 대야성은 선덕여왕이 신임하는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대야성에서 백제와 신라의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이 전투의 결과는 선덕여왕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품석이 전세가 불리하자 끝까지 싸우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복한 것이다.

대야성은 백제 부여와 신라 경주를 차단하는 신라의 서쪽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대야성을 끝까지 지킨 화랑 죽죽에게 충신의 비가 내려졌다.

 

'신라 충신 죽죽의 비'(新羅忠臣竹竹之碑)

 

귀족들은 죽죽을 기려 비석을 내렸지만

거꾸로 그것은 선덕여왕에 대한 비난이기도 했다.

 

"여왕은 고통속에 귀족들을 견제하며 왕권을 유지해왔지만

대야성 싸움 패배로 지지세력인 김춘추와 김유신도 위기에 몰렸습니다.

이것은 곧 여왕의 위기였고 수세에 몰리자 선덕여왕의 기반은 흔들렸습니다.

642년부터 사망할 대까지 5년 동안 선덕여왕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잠재된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습니다." 

                                                                                      - 주보돈 교수

 

김춘추를 비롯해 여왕의 지지세력들은 힘을 잃어갔다.

백제와 접한 군사상의 요충지 대야성의 함락 이후

김춘추가 고구려로 목숨을 건 외교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선덕여왕은 정치적으로 점점 고립되어 갔다.

반란과 전쟁, 이 혼란의 시기 여성 군주 선덕여왕은 많은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대야성 전투 이후 선덕여왕은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비담은 여왕의 반대세력이었다.

상대등 비담은 선덕왕 16년 반란을 일으킨다.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 <삼국사기>

 

즉 여성 군주는 정치를 잘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난은 대규모 반란이었다.

그만큼 여왕 반대 세력은 강경해진 것이었다.

 

"선덕여왕이 반란에서 받은 심적 타격은 컸을 것입니다.

한없는 자부심을 가지려 했던 여왕은,

여왕이 능력이 없으면 갈아치워야 한다는

당 태종에게 들은 말도 너무 자존심 상했을텐데,

상대등인 비담이 일으킨 난은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여왕의 신하,

고위직의 관료 상대등,

진골 귀족의 대표가,

반란을 주도했다는 것은

타격이 아주 큰 것이었을 것입니다." 

                                                       - 김기흥(건국대 사학과)

                             

신라 왕실 월성과

비담의 반란 근거지 명활산성은 지척에 있었다.

신라 왕실을 방어하던 산성이 반란의 근거지가 된 것이다.

 

월성에 별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비담세력은 더욱 힘을 얻었다.

하지만 김유신은 이를 반전시킨다.

연에 불을 붙여 떨어진 별을 다시 하늘로 날려 민심을 수습한 것이다.

 

비담의 난으로 벼랑끝으로 몰린 여왕.

우연이었을까.

여왕은 비담이 난을 일으킨 다음날 승하한다.

 

중년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16년 신라를 다스린 선덕여왕은

반란의 와중에 운명을 달리했다.

 

여주불능선리.

 

비담의 난은

선덕여왕에 반대하거나

후계자 진덕여왕의 승계에 반대한 것일 수도 있다.

 

칠숙의 반란으로 즉위하여

정치적 갈등을 최소화 하기 위해 애썼지만 많은 한계에 부딪힌 선덕여왕.

내부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그녀가 가장 의지했던 것은 '불교'였다.

 

 

3. 첨성대, 불교는 도리천을 향한 선덕여왕의 염원을 담고 있다.

 

선덕여왕 대 창건되었다고 알려진 사찰은 영묘사 분황사를 비롯해 25개.

다른 왕대의 창건사찰보다 2~3배나 많다.

황룡사 9층목탑, 첨성대 등 수 많은 문화유산을 남긴다.

 

선덕여왕은 대규모의 사찰과 탑, 첨성대 등의 건립을 통해

외부적으로 건재를 과시하고,

내부적 결속력을 다져나가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경주 분황사.

'향기로운 사찰'이라는 뜻의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창건했고

지금도 많은 불자들이 찾는다.

 

대웅전 옆 분황석탑 사리함에서 나온

가위와 실패, 그리고 왕실여인들만 만질 수 있었을 금바늘이 출토되었다.

 

"부처의 힘을 빌러

백제를 물리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분황사를 창건했을 것입니다"

                                                          - 이인철(동북아 역사 재단)

 

선덕여왕은 불교에 의지해 정치적으로 왕권을 안정 시키고 

군사들을 전쟁터에 내보내야 하는 민심을 수습하고자 많은 사찰을 지었을 것이다.

 

경주 남산 부처골 감실석불좌상

7세기초 선덕여왕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감실부처님은 남성이 아닌 온화한 여성의 모습,

불심 깊은 여왕의 모습을 닮아 있다.

 

선덕여왕의 여성으로서의 삶은 어떠했을까?

 

"선덕여왕의 남편은 음갈문왕(壬之匹飮葛文王)"      - <삼국유사>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은

선덕여왕 즉위 당시 이미 사망한 것으로 전한다.

 

"선덕공주는 즉위하여 용공(龍公)을 지아비로 삼었는데

자식이 없자 흠반공(欽飯公), 을제공(乙祭公)과 다음으로 결혼하였다."

                                                             - <화랑세기 필사본>

 

 "선덕여왕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불행했던 인물이라 봅니다.

정상적인 결혼생활도 못하고

자식도 없고

정치적 권력을 얻지도 못해 

그 모든 이상을 얻기 위한 간구로

회피, 도피의 수단으로

불교를 믿고 사찰을 지어 침잠했던 것 같습니다."

                                                                - 주보돈 교수

 

경주 포항 천곡사

조선 후기에 창건된 절이지만

비석에 선덕여왕때 창건 기록을 전하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이 자장에게 명해서 짓게 했다."

 

선덕여왕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를 보면

평소 피부병을 심하게 앓던 선덕여왕이 군신을 이끌고 천곡사를 찾았고

천곡사 우울물로 몸을 씻자 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고승 자장율사에게 명해 우물에 감사, 천곡사를 창건케 했다는 것이다.

 

경주의 상징 첨성대도 선덕여왕때 건축했다.

 

첨성대는

천문 관측의 기능과 더불어 선덕여왕의 염원이 깃든 곳이다.

 

천문 관측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사다리를 이용해 12단 위에 난 창문으로 들어간 후

다져진 바닥위에 다시 사다리를 놓고

첨성단 꼭대기 33천 하늘의 뜻을 관찰했다.

 

"하늘을 보고 하늘의 뜻을 찾았을 것입니다. 변고가 없는가 등..."

                                                - 김기흥 교수(건국대 사학과)

 

첨성대는 27단,

달의 공전주기와 같다.

27대 선덕여왕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첨성대를 쌓은 돌은 364개,

수학적으로도 여왕의 천문대를 상징한다고 한다.

 

"27의 제곱 + 364의 제곱 = 365의 제곱

이것은 a의 제곱 + b의 제곱 = c의 제곱이라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와도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27대 선덕여왕이,

364개의 첨성대를 통해,

365일의 하늘과 통한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 김기흥 교수 (아주대 건축공학과)

 

하늘에서 본 첨성대는 마치 우물 같은 모양이었다.

김유신이 살았다는 집터의 재매정 모습과

첨성대 상층부의 모습은 닮아 있다.

 

"신라에서 우물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시조 박혁거세과 알영 등 거룩한 인물이 탄생하는 곳,

또 다른 세계와 신라를 연결해주는 신성한 통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 김기흥 교수

 

신라 왕궁 월성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는 우물 같은 모양 첨성대.

수많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굳건하다.

어쩌면 첨성대는 천상의 세계 도리천을 향해 강력한 왕을 희구한 선덕여왕의 염원 아닐까.

 

 

선덕여왕에 대해

불교에 의지해서 그 어떤 개혁도 이뤄내지 못한 나약한 왕이었다는 평가부터

변화의 시기, 신라의 왕으로 내부 분열의 위기를 막아냈다는 엇갈린 평가가 함께 한다.

 

분명한 건 위기의 시기, 신라 김유신과 김춘추 등 비주류계 인사를 등용하여

삼국통일의 초석을 닦았다는 것이다.

 

특히 김춘추는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의 최초의 왕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큰 기틀을 마련했다.

 

 

4. 천명 이야기 -통일제국을 이룬 왕의 어머니

 

김춘추의 어머니는

선덕여왕과 자매인 천명공주,

진평왕의 둘째딸이다.

 

"태종무열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춘추요

진지왕의 아들 용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천명공주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이야기 한 문헌 자료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들 김춘추를 보면 훌륭하지 않았겠어요.

선덕여왕이 머리도 좋고 지도력도 있고 더구나 미인이었다고 하니

천명공주도 거기 버금가는 능력을 지녔겠지요."

                                                                        - 김기흥 교수

 

천명공주는 어떤 인물, 어떤 삶을 살았을까?

 

                       동륜                           사륜(진지왕)

                         ㅣ                                  ㅣ

                     진평왕                          용춘(용수)

                        ㅣ

            덕만 - 천명 - 선화

 

천명공주는 왜 폐위된 왕의 아들과 결혼했을까?

 

"천명공주는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결혼합니다.

순수한 남녀의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진평왕의 의도였지요.

폐위된 진지왕을 따르는 세력을 잠재우려는 전략이었습니다."

                                                              - 조범환 교수

 

진흥왕을 이은 25대 진지왕.

그러나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어쩌면 진평왕은 전왕의 아들을 사위 삼아 왕권을 물려 주려고 했을 수도 있다.

 

"왕위 계승의 원리는 두가지입니다.

안정된 왕위계승을 위해 왕위 계승의 경쟁자를 방지하는 것과

후계자 자리를 비워두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603년. 진평왕은 용수를 자기 사위로 삼아 다른 계승자를 방어한 것입니다.

아들 없는 진평왕은 천명공주의 남편 용춘을 후계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 이종욱 교수(서강대 사학과)

 

사료 가치로 논란이 많은

<화랑세기 (花郞世記) 필사본>에 천명공주의 이야기가 나온다.

 

천명공주의 남편 용춘, 용수는 형제로 등장하는데

폐위된 진지왕의 두아들로

진평왕에 의해 거둬져 월성 궁궐에서 공주들과 함께 자랐으며

천명공주는 동생 용춘을 좋아해 자신의 어머니께 자신을 마음을 털어놓는데

어머니 마야부인은 용춘을 용수로 잘못 알아듣고
천명공주를 용춘의 형 용수와 결혼을 시킨다.

 

어쩌서 이런 오해가 발생했을까?

 

"천명공주는 용춘을 좋아했습니다.

결혼하고 싶어했지요.

그러나 부모님은 형 용수랑 결혼을 시켰는데

이는 '진골남진'의 상황에서 왕위계승권자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진지왕의 큰아들 용수를 사위삼아 왕위계승권자로 말입니다."

                                                                               - 이종욱 교수

 

순종적인 천명공주는 용수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어머니 마야부닝의 적극적인 중개로 용춘과의 만남을 갖는다.

과거 선례처럼 진평왕이 사위에게 계승해줬다면

어쩌면 천명공주는 왕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평왕은 사위보다는 자신의 딸에게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선덕공주는 점점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이

왕위를 이을 만하다."

                                          - <화랑세기 필사본>

 

"612년 진평왕은 덕만공주를 계승자로 결정합니다.

그리하여 천명공주와 사위 용수를 출궁케 합니다.

천명공주는 순순히 왕궁을 떠났다고 합니다."

                                                  - 이종욱 교수                                               

 

안정된 왕위를 위해 천명과 용수를 출궁시킨 것이다.

천명공주는 정치적 야심이 없었을까?

필사본에는 천명공주가 왕의 명을 따랐다고 적고 있다.

 

천명공주는 604년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춘추'라는 이름을 짓는다.

신라 왕실이 철저히 불교식 이름을 지은 것에 반해

'춘추'는 유교식 이름이었다.

 

김춘추는 자라나 선덕여왕을 보필하고

진덕여왕을 이어 태종무열왕에 즉위한다.

그리고 어머니 천명부인에게 문전태후라는 시호를 내린다.

 

왕권의 안정을 위해 폐위된 왕의 아들과 결혼한 천명공주는

죽어 태후의 칭호를 얻었다.

 

                                         <태종무열왕 영정>

 

5. 선화 이야기 -국경을 넘는 사랑인가, 정략적인 결혼인가

 

덕만공주나 천명공주처럼 기록은 없지만

<삼국유사>는 진평왕의 셋째 딸로 선화공주를 언급하고 있다.

 

가장 아름다웠다는 선화공주.

그런데 적국 백제의 왕비가 된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 <서동요>

 

백제 무왕과 혼인하는 선화공주.

<삼국유사> 백제 무왕편에서만 확인되는 이야기다.

 

서동요를 퍼트린 서동은 쫓겨난 선화를 만나 결혼한 후

훗날 백제 무왕에 즉위한다.

 

그리고 무왕은

연못에서 미륵 삼존의 출현을 보았다는 선화공주의 발원을 들어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를 창건한다.

 

전북 익산에서 어린시절 서동은 마를 캐면서 살았다고 한다.

어린시절 백제의 수도 부여가 아닌 익산에서 살았다는 것으로

무왕이 왕실의 적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서동의 어머니가 마룡지라는 연못에서 용을 만나 서동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 일대에 서동의 생가터가 있었을 것입니다."

                                                                   - 김복현 원장(익산문화원)

 

서자 서동이 왕에 오르기까지 신라 선화공주는 든든한 지원자였을 것이다.

 

익산 왕궁리 유적지는 백제 무왕이 세운 왕궁지다.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려는 무왕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를 떠나 백제에 온 선화공주 역시 이곳을 기반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면에는 가혹한 역사적 현실이 이어진다.

서동은 무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신라를 거세게 공격한다.

고구려를 견제하고 무왕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신라는 사면초가에 직면한다.

 

"익산 출신의 약한 정치 기반의 무왕은

부여의 귀족 기득권 세력과 구왕(舊王) 세력 등

내부 분열된 지배세력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공동의 외부의 적으로 신라를 삼고 공격한 것입니다.

처가인 신라를 백제 내부의 공동의 적으로 삼아

자신의 정치 기반을 강화한 것입니다."

                                                - 이도학(한국전통문화연구 문화유적학과)

 

남편 무왕과 아버지 진평왕이 서로 창을 겨누는 현실에 처한 선화공주.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이 결혼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4세기 이후 고구려의 남진으로 

백제와 신라는 수세에 몰리자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는다.

이후 양국은 적대국이지만 상황에 따라 종종 정략결혼을 맺곤 했다.

 

498 백제 동성왕은 신라 왕족과 결혼을 통해 나제동맹을 맺는다.

553년 신라 진흥왕은 백제 성왕의 딸고 결혼한다.

554년 성왕은 신라 공격하다 전사한다.

 

"선화공주가 백제 무왕과 결혼했다면

국가간의 이익을 고려한 정략결혼일 것입니다."

                                                      - 양기석 교수(충북대 역사교육학과)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는 익산 미륵사지.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서탑을 보수하고 있다.

 

2009년 1월.

미륵사지 사리장엄구에서 아무도 생각지 못한 비밀이 드러났다.

 

"...우리 백제 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은...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 <미륵사지 석탑 출토 금제사리봉안기>

 

"과연 백제 무왕이 선화공주와 결혼했을까 학계에 큰 쟁점입니다.

무왕이 60대 고령으로 사망했는데

부인이 한 명 아닌 서너명으로 거론됩니다.

사택적덕녀는 무왕의 여러 부인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 양기석 교수

 

서동요속에 살아있는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

백제 무왕과 아름다운 사랑을 이뤘다는 선화공주는

새로운 봉안기의 발견으로

정말 무왕의 부인이었는지 불투명해졌다.

 

익산 무왕릉.

인근에 자그마한 능이 있다.

작지만 왕릉의 격을 갖춘 이 능을 선화공주릉이라 본다.

 

"서동은 여기가 태어났고,

천도 구상도 확실히 했고,

미륵사지 왕궁터도 확실히 있고,

선화공주가 죽어 어디에 묻혔느냐 추측해볼 때

당연히 무왕곁이 선화공주의 묘 아니겠습니까."

                                                                     - 김복현 원장

 

     

                            <서동과 선화공주 조각상>

  

무왕과 선화공주의 국경을 넘는 사랑의 이야기는

어쩌면 치열한 신라와 백제 사이의 전쟁시기,

평화에 대한 기원이 담긴 당시 백제와 신라의 험악한 관계를 반증하는 설화,  

평화를 갈구했던 백성들의 염원이 만들어낸 이야기 아닐까.

 

우린 역사속에서 전하고 있는 덕만, 천명, 선화공주 세 여인의 삶을 돌아보았다.

최초의 여왕 덕만공주,

왕의 어머니가 된 천명공주,

그리고 적국의 아내가 된 선화공주.

 

이들의 이야기는

고대사회 개인의 의사나 결정이 아닌

정치적 목적을 따라야 했던 세 여인의 숙명을 전하고 있다.

 

 

- 역사스페셜을 보고 (풍요로운 가을날 되세요!~~)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황금마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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