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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길은 없었다. 물고기에게도 물속의 길이 있고 허공을 나는 새에게도 길이 있지만, 사람의 길이든 짐승의 길이든 맨 처음엔 길이 아니었다. 그저 숲이었고, 산이었고, 강이었고, 바다였고, 하늘이었다.
길은 ‘다시’ 혹은 ‘또’와 깊은 관계가 있다. 어떤 연유에서건 다시 가고 또 지나야만 길은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다시 가지 않고 또 지나가지 않는다면 길은 금방 자연으로 돌아가 그 흔적마저 감추고 마침내 ‘옛길’이라는 이름마저 지워 버린다.
그리하여 길은 발자국의 화석이다. 누군가의 발자국들이 포개지는 만큼 길은 그 생명력을 왕성하게 유지하며, 어느새 버젓이 지도 위에 새로운 선을 새겨 넣는다. 다시 말하자면 발자국이야말로 길의 일용할 양식인 셈이다.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길이라면 정신적인 경지의 도(道)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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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척마을의 600년 된 팽나무가 청년처럼 우람한 몸체를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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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명평화’라고 흔히들 얘기하지만, 아직은 그마저 희망의 길일 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오리무중이다. 이러한 막막한 시절에 지리산에 새로운 길이 열리고 있다.
이제 다시 길을 떠나자. 전북 남원시 주천면 주천치안센터 옆에서 그 동안 70km를 안내해주다 갈 곳을 잃은 채 서 있는 마지막 나무 기둥 이정표에서부터 다시 길을 이으며 개척자의 심정으로 떠나 보자.
주천치안센터 앞 도로를 건너 육모정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다리를 건너기 전에 오른쪽으로 야산이 하나 나오는데, 두 그루 소나무와 고추밭 사이로 산속으로 들어가는 풀밭 길이 나온다. 이 길을 쭉 따라 올라가 인삼밭을 지나면 육모정에서 용궁마을로 가는 1차선 포장도로가 나온다. 왼쪽을 보면 지리산 영제봉 등의 견두지맥이 흘러내리고, 오른쪽을 보면 주천면 들판과 남원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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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숙성치에서 남원시에서 나온 지리산길 조사팀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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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마을 입구에 있는 수령 350년의 건장한 느티나무와 정자에서 땀을 식히노라면 ‘하필이면 이 산중에 웬 용궁이란 말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용궁마을은 안용궁과 바깥용궁의 2개 마을로 구분되며, 해발 300m의 산간지대에 위치한 농촌마을이다. 신라 진성여왕 때 이 마을 동쪽에 있는 해발 1,050m의 영제봉에 세워진 부흥사에 고승과 선사들이 드나들며 휴양한 곳으로서 아주 오래전부터 ‘지상의 용궁’이라 칭하여 용궁리가 되었다고 한다. 뒷산 너머가 전남 구례군 산동면인데, 예전에는 숙성치를 넘어 구례로 통하는 주요 길목이었다. 주변 산세를 둘러보니 과연 바닷속 용궁처럼 조용하기 그지없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고려시대 후기의 효자 유익경(柳益逕)에 관한 얘기가 전해져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어머니 현씨(玄氏)가 병에 걸리자 유익경은 어머니의 똥을 맛보고 사생(死生) 여부를 가늠했다. 이 일을 왕에게 보고하니 동부녹사(東部錄事)에 제수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지금도 그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가 안용궁 앞 정문뜸 서산 유씨 감모재(感慕齋) 안에 있다.
신라 진성여왕 때 ‘지상의 용궁’ 같아 용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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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용궁의 느티나무 아래서 좀 쉬다가 산 쪽으로 올라가는 임도 옆에 ‘지리산 용궁가족휴양촌’이라는 간판이 있어 무턱대고 올라갔더니 저수지와 소나무숲이 장관이다. 남원시가 영제봉 오르는 등산로 옆 솔숲 속에 이 휴양촌을 조성했는데, 지금은 개인이 임차해 운영하고 있다. 여섯 채의 독립 펜션과 계곡의 야외 수영장 등을 한 바퀴 휘둘러보며 ‘언젠가 벗들과 꼭 한 번은 묵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막 돌아서 나오려는데 주인장이 “차 한 잔 하고 가세요”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키가 작달막하면서도 다부져 보이는 주인장이 “이곳까지 왔다가 그냥 가면 섭섭하지요” 하면서 초면에도 불구하고 의자를 내주며 앉으라고 했다. 조금은 민망하기도 했지만 40대 초반의 젊은 부부가 워낙 살갑게 대해주며 커피 한 잔을 내어주니 비로소 ‘용궁은 용궁답고 휴양촌은 휴양촌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장 이길태씨는 전주에 살다가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 지난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들어왔다고 한다. 아마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지리산의 이름만으로도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마치 고향과도 같은 바깥용궁마을과 안용궁마을의 돌담과 산수유나무들을 둘러본 뒤 용궁교를 건너 왼쪽 장안저수지 옆으로 나 있는 임도를 따라 올라갔다. 저수지를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 올라가면 커다란 축사가 나오는데 이 축사를 지나자마자 산 쪽으로 전봇대가 서 있고 길바닥에 산길 쪽에서 세 가닥의 물 호스가 내려온다. 그 풀밭 길 임도를 따라 오르면 전북과 전남의 도경계인 숙성치로 오르는 원시림에 가까운 환상적인 숲길이 이어진다.
작은 계곡을 건너는 두 개의 임시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소나무와 참나무 숲길이 한참동안 이어지는데 비포장 임도 마지막에 깊은 산중의 농막이 하나 나온다. 이 농막의 오미자 농장 오른쪽을 보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오솔길이 산자락을 휘감아돈다. 이 아름다운 비탈길을 따라가다 보면 또 하나의 농막 같은 게 나오는데, 이는 전기가 들어오는 농막이 아니라 심심산중의 수행처이자, 토굴이다.
- <주천면~ 광의면 구간 22km>
전북 남원시 주천면 주천치안센터→(1.5km 농로 오르막) 용궁마을→(2.5km 임도 및 산길 오르막) 숙성치→(1.7km 임도 내리막) 전남 구례군 밤재터널→(2.5km 농로 내리막) 산동면 계척마을 산수유 시목→(3.5km 농로 및 옛 포장도로) 산동면 원천리→(1.3km 도로 평지) 탑동마을→(4km 임도 오르막) 광의면 온당리 철쭉꽃동산→(5km 임도 내리막) 광의면 온당리 난동마을 -
지리산 곳곳에 스며든 도인이 줄잡아 3000여 명
궁금증이 발동해 세 번이나 가 보았지만 주인을 만날 수는 없었다. 용궁마을 어른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스님은 스님 같은데 사주역학을 공부하고 점을 치는 분’이라고 했다. 빨랫줄에 걸린 흰 수건에 적힌 글귀를 보니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고, 삼각뿔 모양의 문짝도 없는 생태 뒷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나 바위틈에 바짝 붙여 움막을 지은 솜씨를 엿보아도 이미 오랫동안 산중에 살아본 도인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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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숙성치 아래 도인의 거처. 바위틈에 절묘하게 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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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리산 곳곳에 스며든 도인이 진짜든 사기꾼이든 초짜든 줄잡아 3000명은 된다고 하니 이 토굴의 임자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자세히 둘러보니 일회용 부탄가스 통이 여러 개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생식(生食)을 하지는 않으며, 움막 아래 구들장을 놓고 마른 장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산짐승처럼 스스로의 체온으로 겨울을 견디는 도인은 아닌 게 분명해 보였다.
문득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 연락이 끊어졌지만 한동안 절친했던 50대 중반의 윤 도사가 생각났다. 긴 머리에 염소수염의 도사 윤혁은 지리산 남부능선의 범바위 아래에서 억새로 움막을 지어 군불을 지피지도 않고 불에 익힌 화식(火食)을 먹지도 않으며 10년을 지낸 사람이다. 그는 생식을 했다. 칡뿌리며 둥굴레 뿌리, 솔잎과 온갖 약초만 먹고 살며 영하 30℃의 강추위를 억새 풀더미에 의지해 자기 체온만으로 견뎠다. 그리하여 어쩌다 하산해 우리 집에 놀러 와도 익힌 음식을 조금만 먹으면 토해 버리고, 한겨울에 군불을 조금이라도 지피면 ‘더워 죽겠다’며 잠을 자지 못했다. 물론 소주 두 잔 정도는 얼굴 벌겋게 마실 줄 알았지만, 말 그대로 한 마리 야생 짐승이었다.
물론 윤 도사도 처음부터 생식을 한 것은 아니었다. 뜻한 바 있어 산중에 들어가 처음에는 밥도 해먹고 구들장을 놓아 겨울이면 불도 지폈다고 한다. 그러다 한 3년쯤 지나니 쌀을 구하러 하산하는 일도 번거로워 서서히 생식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입산 3년차의 봄, 온산에 철쭉꽃이 필 무렵 ‘대오각성’을 했다. 뭐 대단한 것을 깨달은 게 아니라 온산에 꽃이 피는데 윤 도사의 움막 주변 30m 이내에만 꽃이 피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제서야 뼈아프게 깨닫고 무릎을 쳤다. 혹한과 폭설의 겨울을 나기 위해 주변의 나무들을 꺾어 군불을 지피다 보니 움막 주변의 나무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황무지가 된 것이었다. 윤 도사는 그날 이후 당장 자기 한 몸을 덥히기 위해 나무를 죽이는 짓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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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궁마을에서 숙성치로 가는 초입에 있는 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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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부터는 움막 속을 억새로 가득 채우고 그 속으로 기어들어가 영하 30℃의 강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어쩌다 폭설이 오면 오갈 곳 없는 고라니가 움막 속으로 들어와 두 눈을 빤히 쳐다보며 도망은커녕 자신의 이불인 억새더미를 씹어 먹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5년차가 되자 마침내 자신의 내장도 초식동물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5일에 한 번 정도 겨우 똥을 누는데 마치 토끼똥이나 노루똥처럼 청심환같이 동그란 환약 몇 알을 누었으며, 그 똥에서는 향기가 났다고 한다. 칡뿌리나 둥글레 뿌리, 솔잎 등을 먹으니 거의 100퍼센트 소화가 되고 섬유질만 똥으로 나왔던 것이다.
숙성치에서 정유재란 때 왜군과 격전
어쨌든 숙성치 아래의 이 움막 주인이 윤 도사만큼은 아니더라도 산중의 거처로 보아 만만치 않은 인물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이 수행도량을 지나 으름나무와 다래덤불이 무성한 원시림 사이를 걸어 오르다 보면 왼쪽 오르막으로 작은 오솔길이 있는데 그냥 지나쳐 숲속으로 직진하면 마침내 전북과 전남의 도경계인 숙성치가 나온다. 이 오래된 고갯길은 정유재란 때 의병들이 왜군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곳이다.
숙성치라.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사실 별 감흥이 없었다. 그 풍광에 매료됐을 뿐 마을 사람들의 발음상 ‘숲성치’로 들리기도 했으니, 그저 숲이 성을 이룬 것 같은 고개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 뒤에 한자로 그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정수리를 후려치는 통쾌한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숙성치는 한자로 잘 숙(宿), 별 성(星)으로 별들이 잠자는 고개였던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지리산의 별들이 잠드는 고개라니! 월출재니, 바람재니, 하늘재니 숱하게 많은 이름의 고갯길을 가 보았지만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이처럼 별을 노래한 고개는 없었다. 숙성치는 말 그대로 밤새 빛나던 별들이 새벽이면 슬그머니 찾아와 잠을 청하는 ‘지리산 별들의 여인숙’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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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지리산길 어디를 가나 철마다 다른 각종 야생화가 자취를 뽐내고 있다. 2 철쭉꽃 동산에서 난동마을로 내려오는 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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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고갯길에서 두 명의 사내와 마주쳤다. 남원시에서 준비 중인 지리산길의 조사원 유정철(55)씨와 김광수(27)씨였다. 처음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멧돼지인가 고라니인가 걸음을 멈추고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아 다시 숙성치를 향해 막 올라서는데 “여기야, 여기”하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상대가 놀랄까 봐 헛기침을 하며 다가서니 지도와 GPS를 든 조사요원들이었다. 남원시에서도 이 숙성치 길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하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물론 숙성치 너머 쪽은 남원시 지역이 아니니 그들은 이곳까지 왔다가 다른 길로 내려가는 코스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로써 남원시 지역은 이미 만들어진 산내면 등구재~인월면~운봉읍~주천면 주천치안센터와 마무리로 숙성치를 잇는 길이 가시화됐으니 지리산권에서 남원시가 한 발 앞서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산길을 마구잡이로 훼손하는 일 없이 옛 고갯길을 그대로 살려서 시행한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숙성치를 넘어서면 조금 넓으면서도 초록이 짙은 내리막 숲길이 나오는데,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구례군 산동면 계천리 계척마을로서 그 이전의 길과는 풍광이 완연히 다르다. 젊은 편백나무들이 길 옆에 도열한 채 마치 길손들에게 박수를 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인 데다 얼핏 보면 보랏빛 엉컹퀴꽃 비슷한 뻐꾹채 등 온갖 야생화가 만발해 있다. 시원한 그늘 속 산바람을 맞으며 내리막길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밤재 정상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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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시목(始木) 있는 계척마을
임도의 오른쪽 밤재로 올라가면 견두산 등 지리산 견두지맥을 따라 구례 구역의 섬진강변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밤재~월암(29.8km) 구간이 멋지게 이어진다. 구례군이 개설한 이 등산로가 각광을 받는 이유는 등산로 왼쪽은 섬진강이 따라 흐르고 오른쪽은 구례평야와 더불어 지리산의 주능선인 노고단과 반야봉 등이 유장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 험하지 않은 데다 중간 중간에 마을로 하산하는 짧은 코스들이 자주 있어 무리한 등산을 하지 않을 사람들에겐 안성맞춤이다.
숙성치에서 내려와 밤재 임도의 왼쪽으로 내려서면 민가가 두어 채 나오고 4차선 밤재 터널 입구가 나온다. 17번 4차선 산업도로 옆으로 작은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산수유의 고장답게 그 유명한 산수유 시목(始木)이 있는 계척마을이 나온다.
계척마을 주변은 산책로와 체육공원 등으로 잘 가꾸어 놓았는데, 산수유 시목과 더불어 꼭 보고 가야 할 나무가 한 그루 더 있다. 체육공원에서 시목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 두충나무 숲 근처의 개사육장 앞에 수령 600년의 노거수인 팽나무가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며 서 있다. 내가 본 우리나라의 팽나무 중에서는 아마 가장 건장한 노거수로 마치 보디빌더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아주 가까이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러워 좀 쉬고 싶은 마음을 접고 발길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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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겨우 혼자서만 올라갈 수 있는 숙성치 비탈길이 정겹다. 2 여름 가는 길목엔 밤꽃 냄새가 곳곳에서 진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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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척마을에서 내려와 산업도로 아래쪽으로 뚫린 작은 터널을 빠져나가서 포장 옛길을 따라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으로는 수락폭포의 시원한 물을 맞으러 가는 길이고 직진하면 면소재지인 산동면 원촌리가 나온다. 그 길을 지나가다 보면 내가 자주 가는 ‘산동오토바이’의 사장인 부산 출신 노총각 김성찬씨가 “행님, 어데를 그리 바삐 가능교? 커피 한 잔 하고 가이소”하고 반갑게 맞는다. “요즘, 뭐하노? 맨날 낚시하러 댕기나?” 하고 말을 받으면 “아이구, 뭐. 여자도 없꼬, 밤마다 저수지로 섬진강으로 낚시나 하지요, 뭐”한다.
냉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원촌리 시장길을 지나 왼편 지리산온천단지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삼거리를 건너 탑동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입구에는 아주 멋진 자태의 느티나무 당산나무가 두 군데 있으며, 한옥으로 잘 지은 우리콩체험장도 있다.
구례군 산동면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온천과 봄날의 샛노란 산수유꽃이지만 내게는 그보다도 너무나 가슴 아픈 노래 ‘산동애가(山洞哀歌)’가 떠오른다.
‘잘 있거라 산동아 / 너를 두고 나는 간다 / 열아홉 꽃봉오리 / 피어보지도 못하고 / 까마귀 우는 골을 / 멍든 다리 절어 절어 / 다리머리 들어오는 / 원한의 넋이 되어 / 노고단 골짝에서 / 이름없이 쓰러졌네. (대사)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 열아홉 꽃봉우리 피어보지도 못하고 / 까마귀 우는 곳에 나는 간다 /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 너 만은 너 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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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의면 난동마을 위 솔숲 속의 양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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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대중가수가 부른 이 노래는 사실 해방공간의 가슴 아픈 현대사가 서려 있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쓰러져간 열아홉 꽃봉오리’의 주인공은 바로 이 노래를 지어 부른 백부전이라는 처녀였다. 백부전(본명 백순례)은 산동면 상관마을 백씨 집안 5남매 중 막내딸이었다. 큰오빠 백남수가 일제의 징용으로 끌려가 죽고, 둘째 오빠 백남승이 여순사건으로 처형됐으며, 다시 셋째 오빠 백남극(나중에 여순사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마저 끌려가게 될 상황에 처하자 백부전은 오빠가 가문을 잇도록 하기 위해 대신 죽음을 자청하고 나섰다고 한다.
“나를 죽이고 오빠를 살려도라 허고 죽으러 나감서 노래를 그러게 슬프게 불렀드래. 죽으러 감서 어찌게 그런 노래가 나왔을까. 그것이 신기허기도 허고 짠허기도 해.” 오빠를 대신해 처형장으로 가던 백부전의 산동애가(山東哀歌)는 그렇게 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산동애가를 떠올리며 탑동마을을 지나 철쭉꽃 동산으로 오르는 임도를 따라가다 보면 온산에 환하게 밤꽃이 피어 있는데, 비릿한 밤꽃 냄새가 코를 지나 폐부 깊숙이 들어선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맡아본 이는 알겠지만 옛날부터 밤꽃 냄새는 남성의 정액 냄새와 같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청상과부가 엄동설한이야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면서도 수절할 수 있지만 밤꽃 피는 오뉴월에는 밤마다 봉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밤꽃 냄새 때문에 참으로 수절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개는 비릿한 이 냄새를 싫어하는데 오죽하면 “밤꽃 냄새가 좋다고 하는 처녀는 이미 처녀가 아니다”라고 했겠는가.
산림 25㏊ 불타자 철쭉동산으로 조성
탑동마을과 온당리 난동마을을 잇는 9km 이상의 이 임도는 조금 지루한 맛도 없지 않지만 확 트인 구례평야의 장관과 5월의 철쭉꽃 동산을 마주치게 되면 탄성이 저절로 나올 만하다. 광의면 온당리에 위치한 25ha의 대규모 철쭉동산은 철쭉, 단풍나무, 산벚나무 등 100여만 본이 식재되어 있으며 7km의 산책로, 정성껏 소원을 빌면 한 가지 소원이 성취된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흔들바위 등이 있는 자연학습체험 테마동산이다. 철쭉 전시포는 1ha의 규모로 60여 종의 희귀품종 3만여 본이 무궁화 꽃잎 모양에 따라 조성되어 있어 가족단위 학습체험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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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례평야에서 한 농부가 2모작 모내기를 위해 보릿짚을 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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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쭉꽃 동산이 주목을 끄는 이유는 ‘상처’가 꽃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1999년과 2000년 연이은 산불로 임야 25㏊가 소실되자 구례군이 산림 녹화사업의 일환으로 철쭉동산을 조성한 것이다. 사륜차가 올라올 수 있을 정도의 임도이니 새해 일출을 보러 오는 사람도 많고 해마다 봄이면 상춘객과 더불어 철쭉꽃 사진을 찍으러 오는 이도 많다.
구불구불 전망이 좋은 임도를 따라 가뿐하게 내려오다 보면 어느새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난동마을이 나온다. 마을 위의 오래된 솔숲도 일품이지만 마을 안의 솔숲이며 느티나무숲도 참으로 아늑하다. 남원시 주천치안센터에서 구례군 광의면 난동마을까지의 22km는 하룻길로는 좀 빡빡하다. 천천히 걸어서 숙성치를 넘고 밤재를 둘러보는 등 빈둥거리며 산동온천에서 하루 휴식하고 철쭉꽃 동산을 넘는 1박2일이면 딱 좋을 것이다.
마을 정자에 앉아 바라보면 아직 모내기가 끝나지 않은 드넓은 구례평야의 논마다 연기가 오른다. 보리와 우리 밀을 베고 난 뒤 논에 남은 짚들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저 보릿짚들이 다 타고 나면 마지막 2모작의 모내기가 시작되고 농부들은 한숨을 돌릴 것이다. 보릿짚 태우는 냄새가 구수하게 온몸에 밴 밤꽃 냄새를 지운다.
이 난동마을의 키 큰 소나무 아래 처마 낮은 집에 ‘지리산 여가수’ 고명숙씨가 산다. 지난해 이 마을로 이사를 와 혼자 살며 생활한복을 입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여자 장사익’이라고나 할까. 모든 장르를 소화하는 가수로 이미 두 장의 앨범을 냈으며, 지리산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까지 그의 목소리가 알음알음 퍼지고 있다.
내 고향과 같은 경북 문경 출신의 동갑나기인 고명숙씨는 자신이 직접 가사를 쓰고 곡도 만들고 싶다며 ‘지리산학교’의 시문학반에 입학했다. 말하자면 나의 제자인 셈인데, 물론 나 또한 그녀의 너무나도 슬픈 노래인 ‘꽃신’ 등을 좋아하는 팬이니 그녀는 나의 제자이고 나는 그녀의 팬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상하좌우 없이 지리산 둘레길처럼 환하게 이어지는 다양성의 관계라면 얼마나 멋질까.
지리산길, 과연 ‘느림’과 성찰과 생태적인 길로 이어질 것인가
지리산길 조성, (사)숲길서 지자체로 넘어가
지리산길 중 산림청과 (사)숲길이 조성한 경남 산청군 수철리~전북 남원시 주천치안센터 앞까지 70km 구간은 이미 개통되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옛 고갯길과 숲길, 마을길, 농로, 강둑길, 임도 등을 자연친화적으로 잘 이어 제주도의 올레길과 더불어 우리 시대의 새로운 길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모범적인 트레킹 코스로 거듭났다.
그러나 지난 5월 22일의 개통식을 끝으로 그 동안 애써온 (사)숲길은 손을 떼게 되었다. 그날은 말만 새로운 개통식이었지 사실은 좌초 위기에 직면한 지리산길의 마지막 잔치요, 만찬과도 같은 것이어서 마치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다. 지난해 말 산림청의 일방적인 약속 파기 이후 우여곡절 끝에 70km 구간만 간신히 개통되고 나머지 구간은 각 지방자치단체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 길의 초심은 지켜질 것인가. 지자체별로 막개발식 예산 따먹기 혹은 전시행정으로 흐르지 않고, 애초에 이 시대가 요구하는 ‘느림’과 성찰과 생태적인 길로 이어질 것인지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나 또한 2004년 도법·수경 스님과 더불어 맨 처음 지리산 둘레길을 제안한 사람으로서 모르쇠로 외면할 수도 없고, 또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월간山>을 통해 행여 첫마음이 흐려질지도 모를 지리산 둘레길을 보다 올바로 여는 데 힘을 보태기로 했다. 수십억 원의 어마어마한 예산이 집행될 때는 지리산생명연대의 운영위원이면서도 애써 모른 체 피해왔지만, (사)숲길의 이사직을 거절하고 이제 좌초 위기에 처한 지리산길을 마무리하는 일만큼은 지리산인으로서 백의종군할 때가 왔다는 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게는 단 한 푼의 돈도 필요 없이 지리산 둘레길을 이을 수 있는 노하우가 있다. 길목마다 리본만 달아도 이 길은 금방 연결될 수 있다. 다소 건방진 말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아마 유사 이래 지리산을 걸어서 두 바퀴 돌아본 사람은 수경 스님과 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번의 도보순례 중 도법 스님과 박남준·이문재 시인 등 30여 명은 한 바퀴를 돈 적이 있다. 내가 순례단 대장을 맡았으니 미리 여러 차례 답사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2000년과 2004년 지리산 둘레를 850리와 1500리로 60일간 걸어서 돌아보았을 뿐만이 아니라, 지난 12년 동안 25000분의 1 지도를 펴놓고 지리산의 이 마을 저 마을 안 가본 곳이 없다. 또한 국립공원구역 바깥으로 오프로드 바이크를 타고 옛길이며, 농로며, 임도 등을 따라 수십 바퀴도 더 돌았기 때문에 지리산의 거의 모든 길이 익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이제 다시 새로운 길을 나서야 한다. 수많은 길 중에서 가장 생태적이고도 아름다운 길, 옛길과 숲길과 고갯길과 마을길과 농로와 임도와 강둑길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한국 최장의 트레킹 코스 300km를 이어야 한다. 행여 지자체들이 달려들어 국민의 혈세인 예산을 더 쓰기 위해 없는 산길도 만드는 등 지리산을 더 이상 훼손하기 이전에 전통과 현대의 가장 아름답고도 합리적인 지리산 둘레길을 제안해야 한다. 이후의 노선 확정은 지리산 사람들과 지리산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몫으로 남겨 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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