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7궁제와 그 제례 및 제관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2. 11:05

 

7궁 風月軒, 松竹齊 지붕위로 北岳山이 보인다.

<아래 사진은 고태환님이 찍은 자료를 메일로 보내 줘 편집을 하였습니다.>

 

2011년 10월17일날 칠궁제향 봉행이 있었다.

환구대제를 지내는 날 청와대 안에 있는
칠궁에서 제향 지낸다는 소식과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출입허가를 받아야 하니 그에 필요한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알려 드렸다.

촌눔이 청와대를 구경한다는 말에 마음이 솔깃해져서...

우선 칠궁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를 하자면...

종로구 궁정동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 때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일곱 후궁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궁을 지어 신위를 모신 사당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한많은 생을 보낸 분들의 제사를 봉행하는 날이다.

사진을 찍으며 또 색다른 역사 공부를 병행하니 이도 일거양득이 아닌가 하고...


경복궁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하여...
요즘은 누구나 관람이 가능한 경복궁 앞을
마음 놓고 지나 다니지만 조선시대 때의 백성들은
서슬퍼런 이곳 앞을 얼마나 가슴 졸이며 지나 다녔겠는가?
청와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서 들어가는 길에도
죄지은 것도 없으면서 검문을 당할까 괜히 마음을 졸이며 지나고...

좌측 광장은 군사정권이 물러난 후 안가와 부속시설을 헐고 공원으로 조성.

청와대 앞 광장, 관광객들이...

중국 관광객들이 이른 아침부터
청와대 앞에서 기념촬영하기에 여념이 없다.

7궁 정문

우선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인적사항을 확인된 후에
명찰을 달고 칠궁제 봉향 안내 책자를 받고 안으로....

잘 가꾸어진 소나무 길이 이어져 있고....

















칠궁은 이런 모습이다.
다른 인터넷에 소개된 내용을 베껴와서 역사 공부도 해 보고...



1700년대에 심어졌다는 느티나무와 주목은 오랜 세월동안 칠궁에서 일어난 일을 내려다 보았을 것이다.







저경궁 인빈 김씨:
본관은 수원으로 원래는 궁녀 출신이었다.
당시 선조임금에게는 의인왕후 박씨와 공빈 김씨가 있었고,
공빈 김씨 다음으로 인빈 김씨를 총애했었다.

인빈은 자못 용태가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명종의 후궁 숙의 이씨의 외종 조카로,
그녀의 천거로 어릴 때부터 궁궐에서 자라났는데
명종비 인순왕후 박씨가 그녀의 용태와 영리함에 탄복하여
선조에게 그녀를 가까이 두라고 일렀다.

그래서 그녀는 14살의 나이로 선조의 승은을 입고,
처음 소용이라는 직책을 부여 받아 귀인이 되었고,
처소의 이름이 '양화당'이라 짓고 선조는 그녀를 양화당이라고 불렀다.

성품이 매우 단아하고,
착하여 공빈이 광해군을 낳고 일찍 죽자
그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위하면서 키웠다고 전해진다.

소생으로는 신성군(임진왜란 피난 도중 사망),
정원군, 의안군, 의창군, 정신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휘옹주 등의 4남 4녀를 낳았고,
오랫동안 선조의 총애를 받다가 1613년에 죽게 된다.

후에 영조 임금이 자신의 생모 숙빈 최씨를 기리는데
대신들의 눈치를 보아 인빈의 가문도 함께 높여주고,
저경궁이라는 궁호를 내리게 되었다.

인빈 김씨의 시호는 인조임금으로 인해 경혜라는 시호가 내려지게 되었다.



대빈궁 희빈 장씨:
본관은 인동 장씨, 이름은 옥정.
아버지는 장형, 어머니는 장형의 계실 윤씨.
아버지가 일찍 죽어 장안 최고의 거부이자 역관인
숙부 장현의 집에서 유복하게 성장했다.

장옥정(1662-1701)이 궁녀로 입궐하게 된 데에는,
당시 서인의 세력이 커지자 위협을 느낀 남인 세력이
장옥정을 의도적으로 궁궐에 들였다는 것이다.

‘자못 아름다웠다’는 기록이 숙종실록에 남을 정도로
그녀는 빼어난 외모로 숙종을 매료시킨 듯하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지 14년만에 장옥정에게서
첫 아들을 보게 되고 곧바로 원자로 책봉한다.

왕자(경종)를 낳은 후 옥정은 희빈에 봉작,
끊임없는 모사로 인현왕후를 폐서인시키고 국모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양반도 아닌 후궁 출신의 여인이
왕비가 된 것은 조선 역사상 장희빈이 유일무이하다.

그녀의 전각 이름이 숙종이 세자시절
공부하던 취선당이었기에 그녀의 당호는 취선당이다.

5년 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비시킨
일을 후회하며 장씨가 질투가 심하다는 이유로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인현왕후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세자였던 경종은 인현왕후에게 입적시키고 말았다.
이로서 다시 정국은 서인세력이 잡는다.

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한 뒤,
희빈이 거처하고 있던 ‘취선당’에서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원한
사실이 발각되자 결국 희빈에게 숙종은 사약을 내리고
장희빈은 오빠 장희재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무고의 옥).
숙종은 그 이후 후궁출신이 왕비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후에 경종의 생모라는 이유에서 영조로부터 '대빈궁'의 궁호를 하사받았다.





하나의 궁에 두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연호궁과 육상궁이다.
연호궁 정빈 이씨:
이준철의 딸로, 영조의 첫번째 아들인 효장세자의 생모로,
영조에게 승은을 입고 소원(정4품)으로 봉작이 되었고,
아들 효장세자를 낳자 정빈이 되었다.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이미
그의 후궁이 되어 효장세자와 화순옹주를 낳았다.

하지만 효장세자가 10세 나이로 병으로 죽자
그녀 역시도 시름시름 앓다가 28살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는데
그녀의 딸 화순옹주 역시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 곡식을 끊고 일주일만에 세상을 떴다.

정빈 이씨는 아들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이 되자
연호궁(정조2 1778) 이라는 궁호를 얻었고,
묘소는 숙빈 최씨의 소령원 옆 수길원(또는 유길원)이다.


육상궁 숙빈 최씨:
시호는 '화경'이고, 한창 희빈에게
염증을 느끼던 숙종의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되었다.

아들 연잉군까지 낳아주어
정1품 빈의 직위에 오른 최초의 무수리 출신의 후궁이다.

무엇보다 인현왕후가 다시 궁에
돌아오게 된 데에는 그녀의 공이 크다.

그녀의 출생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아 출신으로 이리저리 동냥질하는 것을 인현왕후의
어머니(또는 아버지)가 이를 보다못해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인현왕후가 왕비의 간택을 받을 때 그녀의 몸종으로
궁궐에 들어가 궁녀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1689년에 "기사환국"사건으로 인하여
민씨가 폐서인으로 강등되어 궁에서 쫓겨나가자
왕비를 모셨던 최씨 역시 궁궐 안쪽으로 물러나
내명부와 외명부의 세숫물과 식수를 길러나르는 무수리로 지내게 된다.

4년 뒤인 1693년 1월, 최씨는
인현왕후의 생일을 맞아 무명을 위한 기도를 올리다
이 곳을 지나던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된다.

숙종에게 승은을 입고 처소를 얻을 때
처음 숙종이 가장 애용하던 보경당을 하사받았지만
그녀의 출신이 천출이라 대신들의 반발이 많아
숙종은 보경당을 다시 회수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보경당이라는 당호로 더 많이 불렸다.

기록에는 후궁이 된 이후에도 궁녀들에게
모진 핍박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아들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는 장면도 보지 못하고 49세로 천수를 다하게 되었다.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의 궁호를
육상궁으로 하고, 그 무덤을 소령원이라고 하였다.



이곳도 하나의 궁에 두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선희궁과 경우궁이다.

경우궁 수빈 박씨:
그녀의 시호가 가순이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가순궁이라고 더 부른다.
그녀는 정조의 후궁으로 본관은 반남 박씨이고,
아버지 박준원은 영조의 서차녀인 화평옹주의 부마 박명원과 먼 친척관계이다.
그런데 하루는 그녀의 아버지 준원이
큰 비를 맞아 명원의 집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는데
그 때를 계기로 입궁하여 정조의 후궁이 되고 순조를 낳았다.

당시 정조에게는 의빈 성씨가 있었는데
의빈 소생의 아들 문효세자가 일찍 죽어 정조의 시름이 많았는데,
그녀가 입궁하여 아들을 낳으니 정조는 그녀를 무척이나 총애했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숙선옹주와 순조가 있다.

그녀는 궁궐 어른들을 잘 섬겼고,
성격이 매우 검소하였다. 정조의 왕후인 효의왕후 김씨와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고,
궁궐의 물품들을 함부로 쓰지 않았고, 낭비하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자신이 부리는 궁녀가 옷을 짓다가
천조각 하나를 버리는 일이 있었는데 수빈이 그것을 보고
그 궁녀를 호되게 야단쳤다고 한다.

게다가 수진궁(이름을 받지 못한 왕자나
옹주, 공주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과 어의궁의
재물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단속을 잘 했을 정도로
궁궐 살림을 알뜰하게 이끌어 나갔다.

1822년 창덕궁 보경당에서 여생을 마쳤고,
궁호는 가순, 시호는 현목,

원호(무덤)의 이름은 휘경원이며, 위패는 칠궁 경우궁에 모셔져 있다.

선희궁 영빈 이씨:
영빈 이씨는 침방궁녀 출신으로
천하디 천한 가문의 여자였으나 빼어난 미색으로
영조의 사랑을 받아 세 옹주를 낳고 귀인(종2품)이 되었고,
사도세자를 낳아 영빈이라는 빈호를 받게 되었다.

슬하에 화평, 화협, 사도세자, 화완, 그리고 이름조차
짓지 못하고 세상을 저버린 옹주 이렇게 1남 4녀를 얻었다.

효장세자가 죽은 후 후사가 없던
영조가 마흔이 넘어서야 아들을 낳아주어
영조는 매우 사도세자를 아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아들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뒤주에 가둬 죽이게 되는데, 영빈은 남편의
입장에 서서 아들의 죽음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시호는 의열이고, 정조로부터
선희궁이라는 궁호를 봉작받게 되었고,
죽을 때도 후궁 제일의 예를 다해 장례를 치루었다는 기록이 있다



덕안궁 순헌황귀비 엄씨:

순헌황귀비 엄씨는 고종의 법적인 계비로
알려져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후궁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명성황후를 무척이나 애지중지하던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어떠한 후궁도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고
친일파들이 소개하는 계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분은 중인으로 영친왕의 어머니이고, 이름은 선영이며 본관은 영월이다.

 

어린 시절부터 궁궐로 입궁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다가
아관파천으로 고종을 수행한 덕분에 승은을 입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 마흔을 훨씬 넘어있었고,
기록에는 생김이 못생겼다고 전해진다.

회임을 하고나서 고종은
그녀를 정식으로 후궁에 책봉을 했는데
종1품 귀인으로 있다가 영친왕을 낳고 순빈에 봉해졌다.

대한제국이 제후국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되자
순비에서 황귀비가 되어 실질적인 황후 노릇을 한 여인이다.

여성교육에 많은 관심이 있어
진명과 숙명여학교를 세워 조선을 개화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1911년 아들 영친왕이
일본 군대교육을 받는 장면을 보는 도중
영친왕이 맨손으로 주먹밥을 먹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실신했다.
그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하였다.
궁호는 덕안, 혹은 망월이라 부르며 시호는 순헌, 원호는 영휘이다.


이상으로 칠궁에 모셔진
왕을 생산한 생모들의 근항을 간략하게 알아보고...

너르디 너른 궁안에서...
온갖 음모술수가 이루어지며 자칫 말한마디
잘못 전해지면 목숨조차 부지 하지 못하며
살얼음판의 모진 생을 살아가며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극도로 긴장하며 불안한 일생을 보냈을까 짐작해 본다.

남성이라고는 오직 왕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영욕의 삶을 어떻게 마무리했으며 어떤 생을 보냈는지...

누군들 자신의 꿈을 모두 이루고
보람찬 생을 보냈다고 자부하며 생을
마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만 극심한
당파싸움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도는 시대가 격변하는 가운데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을지 짐작이 간다.

왕 또한 많은 스트레스로 인하여
자식조차 순리대로 생산하지 못했던게 아닌가하고...


냉천

냉천정



<앞의 연못은 紫淵>

이곳은 냉천이라는 샘이고 냉천정이다.

영조가 어머니의 제삿날에 이곳에서
몸을 깨끗이 하고 정성을 가다듬어 제사를 준비했다고 전해지고...

이 냉천의 물로 시각 연못을 만들고...







이곳의 궁도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곳에 옮겨놓고 보수하는 절차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막새기와가 원래의 것이 아닌 것으로 바뀐듯하다.


풍월헌, 삼락당의 뒷곁

















우리의 고궁의 건축물은 언제 보아도 단아하고 미려하다.

<아래는 칠궁제 봉행하는 모습>

청와대쪽으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제관들이 이른 아침에 도착,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축함이 고이 진열되어 있고...
제물이 진설되고 손씻을 물이 준비되고 축문을 태울 곳도 준비되고...





모든 제관분들이 모였고
간단한 의레절차와 행동 양식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양복이나 잠바를 입고 와서 제수 준비에 바쁠 때는 그냥 평범해 보이더니
이렇게 의관을 정제하고 나니 의젖한 조선시대 관리가 되어 있다.


신위가 모셔진 궁별로 제관들이 출발

축함을 모신 제관만 神道로 오른다.



가운데 돌로 된 길은 사람이 다닐 수 없는 신의 길이다.
축문을 들었으니 신도를 걸어서 엄숙한 행진으로 사당을 향하고...




축문을 올리고 신께 정성을 다해
차려 올린 제물을 흠향하시게 개반시를 하고...











제관분들의 입궁이 끝나고... 이제 예를 올리면 되고..

제주를 어떻게 따르며
신께 잔을 어떻게 올리는지를 리얼하게 찍고 싶었는데...

엄숙한 장소에서 무례를 범했다고 혼이나고 내려오고 말았다.

아마.... 신께서도 이렇게 엄숙하게
예를 올리는 장면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면 좋아하실 것 같은데...











이렇게 모든 제향이 끝나고...
제관들이 사당에서 모두 나오고....



이렇게 예를 다하여 정성스럽게 제사를 올렸으니
이승에서 후궁으로 온갖 수모를 당한 서러움을 잊고
하늘나라에 편안히 계시고 나라에 복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신을 배웅하여 보내드리고....



모두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서
음복을 하고 백성의 맡은바 임무를 완수해야 할테고...



등에 새겨진 무늬에 따라 벼슬이 틀린다고...

학 여섯마리가 그려진 무늬는 당상관의 복장이고...
새가 그려진 무늬의 옷은 당하관의 복장이라고 한다.

당상관은?
조선시대 관리 중에서 문신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무신은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의 품계를 가진 이를 일컽으며
나라의 정책에 참여할 수가 있는 직위의 벼슬이고...

당하관은?
조선시대 관리 중에서 문신은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무신은 정3품 어모장군(禦侮將軍) 이하의 품계를 가진 이를 일컽으며
나라의 정책에는 참여 할 수가 없는 벼슬이라고 한다.



이런 재물이 차려져서 신께서 흠향하시고 가셨다.

간단하게 제사의 순서를 소개하자면...

이곳에서는 "칠궁제 홀기"라 표현하며...

전페례,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분헌례, 음복례, 망료례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의식이 너무 길고 복잡하여 한두번 읽어도 알기가 어려우니 생략하고...

<7궁제 홀기를 붙임>

 

 

 

출처 : ROTC14기 산악회
글쓴이 : 산객/이강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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