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숨긴 명당, 천장산
북한산성의 대동문과 보국문 사이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칼바위능선은 화계사의 주봉을 이루고 수유리 고개를 넘어 ‘북서울 꿈의숲’이 있는 오패산을 이루고 다시 동남쪽으로 장위동 고개를 넘어 천정산에 이릅니다. 이어 동쪽으로 의릉을 감싸고 서쪽으로는 경희대의료원이 들어선 ‘회묘터’를 감싸고 다시 뻗어 나와 회기동 고개인 안화현(安禾峴)을 넘어 청량사가 기대고 있는 바리봉을 지나 떡전고개를 넘어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을 이루고 촬영소 뒷산 기슭에서 중랑천과 청계천을 만나 그 산줄기의 뻗음을 마감합니다.
천장산은 이 산줄기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회기동, 청량리동, 석관동에 걸쳐서 있습니다. 회기동은 ‘회묘터’에서 유래됐고 석관동(石串洞)은 천장산의 한 지맥이 돌을 꽂아 놓은 듯이 보여 돌곶이마을이라고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옮긴 것이며 청량리동은 청량사(淸凉寺)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천장산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상의 명당 터로 손꼽히는 곳인데 특히 연화사의 삼성각 상량문에 따르면 “진여불보(眞如佛寶)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시방삼세에 두루 하지만 드러나 보이지 않으므로 절의 뒷산을 천장산이라 부른다”고 하였듯이 사찰의 입지조건으로 가장 빼어난 명당 터로서 ‘하늘이 숨겨놓은 곳[天藏]’이라는 산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천장산 일대는 조선 왕족의 묘지가 많이 조성되었는데 조선 20대 왕인 경종(景宗)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의 쌍릉(雙陵)인 의릉(懿陵)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또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도 이곳에 조성하였는데 훗날 연산군이 왕릉의 규모를 갖추고 회릉(懷陵)으로 격상시켰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다시 회묘로 격하되었지요. 이후 연산군의 왕비였던 신씨의 묘까지 이곳에 조성되었다가 지금은 모두 이장되어 ‘회묘터’라는 한자 이름이 전해오는데 그것도 ‘회묘터[懷基]’가 아니라 ‘돌아온 터[回基]’로 바뀌어 동네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묘가 고종(高宗)의 승하로 남양주 홍릉(洪陵)으로 합장되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습니다. 고종의 계비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 귀비 엄씨의 묘인 영휘원(永徽園)과 영친왕의 아들 이진(李晉)의 묘소인 숭인원(崇仁園)이 있으며 이를 모두 아울러 ‘홍릉’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주변에는 전씨(全氏)의 시조묘(始祖墓)와 단소재(壇所齋)가 있는데 전씨의 시조묘는 원래 북한에 있었던 것을 이곳에 옮겨와 새로 조성하였고, 단소재는 1925년에 의친왕 이강(李堈)이 전씨 종가의 세 공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입니다.
의릉,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
의릉(懿陵 eureung.cha.go.kr)은 조선 제20대 경종(景宗)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의 능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앞뒤로 배치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입니다. 조선시대 왕릉 가운데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가 묻힌 여주의 영릉(寧陵)이 같은 구조이며, 이때 왕은 위쪽, 왕비는 아래쪽에 모시게 됩니다.
능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으며 난간 석주에는 12지를 넣어 방위를 표시하였고 위쪽에 놓인 왕의 능에만 곡장(曲墻)을 두르고 있는데 이것은 부부의 예로서 한 곡장 안에 두 봉분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경종은 숙종(肅宗)의 장남으로 계비인 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숙종에게는 희빈 장씨 외에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가 있었으나 이들에게는 후사를 이어줄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인지 경종은 태어난 지 두 달여 만에 원자로 봉해지는데 이것은 당쟁으로 이어지고,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인현왕후가 아직 젊기에 후궁의 아들을 원자로 삼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펴다가 유배되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사건으로 서인은 대거 축출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며 경종은 3세의 나이로 다시 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종의 나이 14세 때,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하기 위해 취선당 서쪽에 마련해놓은 신당이 발각되어 ‘무고의 옥’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이때 사약을 받은 희빈 장씨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만나면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들의 하초를 잡아당겨 기절시키는 이해하지 못할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 때문인지 경종은 어릴 때부터 병약하였으며 임금이 된 후에도 병치레가 많았으며 더하여 후사가 없어 즉위년(1720)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는데 이는 노론과 소론의 당쟁 속에서 신축, 임인 옥사를 야기하였고 마침내 경종 4년(1724)에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니 춘추 37세였고 재위 4년이었습니다.
선의왕후는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영돈녕부사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1718년 세자빈이었던 단의왕후 심씨가 병으로 죽자 같은 해 15세로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가 경종의 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으나 소생 없이 26세에 승하하였습니다.
의릉은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중앙정보부가 자리잡고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능 주변에 중앙정보부의 축구장을 만드는 바람에 많이 훼손되었으나 ‘중앙정보부’가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세곡동 대모산 아래로 이전하면서 다시 원상 복구되어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으며 한쪽 귀퉁이에 그 당시 중앙정보부 강당 건물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영휘원과 숭인원
영휘원(永徽園)은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사친(私親)인 순헌 귀비 엄씨의 원소(園所)입니다. 엄귀비는 1854년 11월 증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태어나 8세에 경복궁에 들어가 명성황후 민씨의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아관파천 때 고종을 모시며 후궁(後宮)이 되어 1897년 영친왕 이은을 출산하여 귀인(貴人)에 봉해졌고, 1901년 비(妃)에 진봉되고, 1903년에는 황비(皇妃)에 책봉되었습니다.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참여하는 등 근대 여성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1911년 7월에 사망하자 8월에 안장하고 원호(園號)를 영휘라고 하였으며, 위패는 덕수궁 영복당(永福堂)에 봉안되었다가 칠궁(七宮)으로 이안(移安)하였습니다.
숭인원(崇仁園)은 영친왕과 이방자(李方子)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원손(元孫) 이진(李晉)의 원소로서 진은 1921년 8월에 태어나 그 이듬해 5월에 1년도 채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두 원의 묘역시설로는 곡장(曲牆), 상설(象設),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ㆍ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 홍살문(紅箭門),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 제실(祭室), 우물[靈泉], 사초지(莎草地) 등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담장 밖 북쪽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관이 있으며, 그 마당에는 구영릉(舊英陵, 內谷洞 獻仁陵)에서 수습해온 세종대왕신도비와 능호석(陵護石)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연화사(蓮華寺)는 1499년(연산군 5)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되었습니다. 1993년 자음(慈音)이 지은 <천장산연화사삼성각상량문>에 따르면,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화장(蓮華藏) 세계여서 연화사(蓮華寺)라 하기도 하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으므로 연화사(蓮花寺)라 했다고 합니다.
이후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이듬해 정담(淨潭)이 남화(南化), 완허(玩虛)의 도움을 받아 복원하였고 이때 궁인 박씨와 상궁 최씨, 김씨 등이 발원하여 탱화를 제작하였습니다.
1504년(연산군 10)에 윤씨의 묘를 회릉(懷陵)으로 승격시키고 석물을 조성하였고 1724년 경종이 죽자 그 이듬해에 회릉 근처에 의릉(懿陵)을 만들고 연화사를 원찰로 삼았는데 회릉은 의릉과 함께 이곳에 있다가 1969년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청량사(淸凉寺)는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1117년(고려 예종 12) 예종이 불교 거사(居士)였던 이자현(李資賢)을 불러 이 절에 머물게 하였다고 하며 원래는 홍릉(洪陵) 영휘원(永徽園)이 옛 절터였는데 1897년 명성황후의 홍릉을 만들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한용운(韓龍雲)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극락전(極樂殿)의 현판과 주련(柱聯)은 모두 박한영(朴漢永) 스님의 글씨입니다.
떡전고개는 서울시립대학교가 있는 전농동에서 청량리정신병원이 있는 청량리 쪽으로 넘어 가는 고개로서 지금은 철로가 가로지르고 있어 '떡전교' 또는 '떡전다리'라 불리는 철도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하지만 예전에는 이 부근에 떡을 만들어 파는 떡집이 많아 사람들이 그곳을 떡점(餠店)거리, 또는 떡전고개라 불렀습니다.
떡전고개는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경기북부, 강원도, 그리고 함경도에서 한양으로 올 때 도성(都城)에서 약 시오리 거리에 있는 이곳에 이르러서는 배고픔도 달래고 옷매무새도 고치면서 잠시 쉬었다 가거나 하루 밤을 묵어가기도 했던 곳입니다.
배봉산 자락의 영우원터·휘경원터
배봉산(拜峰山) 자락에는 영우원((永祐園)과 휘경원(徽慶園)터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우원은 조선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이며 휘경원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였던 수빈 박씨의 묘소입니다.
배봉산의 이름도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정조가 평생에 못 다한 불효를 한다며 날마다 부친의 묘소를 향해 배례하게 되면서 산 이름을 ‘배봉산‘으로 불렸다는 설과, 이곳 산기슭에 영우원과 휘경원 등 왕실의 묘원이 마련되면서 길손들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기 때문에 배봉(拜峰)으로 불렸다는 설과, 산의 형상이 도성(都城)을 향하여 절하는 형세를 띄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영우원((永祐園)은 정조(正祖)의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로서 원래는 수은묘(垂恩墓)라 하였으나 정조가 임금에 오르고 영우원이라 고쳐 부르다가 정조 13년(1789)에 화성(華城)으로 이장한 후에는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광무(光武) 3년(1899)에는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追尊)되면서 ‘융릉(隆陵)’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휘경원(徽慶園)은 조선 제22대 정조의 후궁이자 제23대 순조의 생모인 수빈(綬嬪) 박씨의 묘인데 수빈 박씨는 1770년(영조 46)에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박준원(朴準源)의 3녀로 태어나, 1787년(정조 11) 정조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고 수빈에 책봉되었지요. 1790년(정조 14) 순조를 출산한 후 1822년(순조 22)에 사망하여 1823년에 배봉산 아래 묻혔으나 1855년(철종 6)에 순조의 능인 인릉(仁陵)을 천장(遷葬)하면서 휘경원도 같은 진접읍의 내각리(內閣里)에 있는 순강원(順康園)으로 옮겼다가 풍수지리상 적당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다시 서삼릉(西三陵) 경내로 이장하였으며, 그 위패는 칠궁 안에 있는 경우궁(景祐宮)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휘경원은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고 휘경동이라는 지명으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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