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
(비극 부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
일본 시모노세키를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이
쓰시마섬 옆의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바다를 지나고 있었다
양장을 한 한 여자와 신사가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바다에 몸을 던졌으니 이들은 승객명부에 가명으로
등록돼 있었지만 여자는 윤심덕이고 男子는 김우진으로 밝혀졌다
윤심덕은 한국최초의 소프라노이자
대중 가수로 1920년대 新女性의 대표인물이다
김우진은 신극운동을 하던 전라도 巨富의 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1897년생
동갑내기였지만 윤심덕은 미혼이였고 김우진은 유부남이었다
이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다 동반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식은 한국과 일본에서 대대적인 스캔들로 회자됐다
평양 출신의 윤심덕은 가난하지만 기독교 신자인
부모 덕에 신식교육을 받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음악성이 뛰어났던 윤심덕은
일본총독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는 최초의 조선인 유학생이 됐다
1921년 윤심덕은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만든
순례극단 동우회에 들어가면서 김우진을 만나게되었다
당시 김우진은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재학중이었다
두사람은 조선에서 두 달여 순회공연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1923년 귀국한 윤심덕은 여러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정통 서양 성악으로는 곤궁한 삶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윤심덕은 결국 대중가수의
길로 접어들었고 연극단체 토월회에 들어가 배우를 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윤심덕은 함경도 출신 재력가와 결혼한다“
“장안 거부의 애첩이 됐다” 등 각종 스캔들에 시달렸다
비슷한 시기에 귀국한 김우진은 문학과 연극을 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고민하다 1926년 가출해 일본으로 가고 만다
윤심덕도 그 해 7월 일본 오사카의
닛토레코드회사에서 음반 취입 의뢰를 받고 일본으로 향했다
윤심덕은 레코드 취입을 마친 8월 1일
음반사 사장에게 특별히 한 곡을 더 녹음하고 싶다고 청했다
서양 노래 다뉴브강의 잔물결“이라는 곡에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붙인 것으로 제목은 “사의 찬미”였다
앞서 윤심덕은 김우진에게 오사카로 오라는
전보를 보냈었는데 오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둘은 결국 다시 만났고 1926년 8월 3일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에 함께 올랐던 것이다
윤심덕이 남긴 마지막 레코드는 불티나게 팔려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10만장 판매 기록을 세웠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자살로 가장하고
이탈리아로 도피해 살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1991년 김호선 감독이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의 찬미> “死의 讚美” 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장미희가 윤심덕 역을 故 임성민이 김우진 역을 열연했었다
인물이야기 글 김준기 님 착한사슴 옮김
sa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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