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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루가 너무 권태로와 불현듯 누가 보아도 권태에 푹 빠질 만한 시를 쓸 수는 없을까? 하고 엉뚱한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1999년 우연찮게 프랑스 문화원을 들렀다가 '권태'라는 영화를 보았다. 권태를 영화로 만들다니! 아니, 과연 만들 수 있는 거 맞어?
세드릭 칸, 그는 프랑스의 40대의 젊은 감독이다. 프랑스가 감독을 만드는 주된 방식인 영화학교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프랑스 영화의 전통적인 틀 안에 서 있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정체된 프랑스 영화에서 별안간 솟아난 희망이다.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 '권태'는 프랑스에서 1998에 개봉한 영화다. 그런데 2003년 뒤늦게 한국에서 개봉하였으나 일부 영화학도들을 제외하고는 누구의 입에서도 거론되지 않는, 말하자면 흥행에 실패한 작품일 뿐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그의 영화는 늘 주목의 대상이다. 일정한 마니아와 관객층을 탄탄하게 두르고 있어 흥행실패로 다음 영화를 찍는데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하는 고통만은 용케 비켜 나 있는 감독이자 흔치 않은 감독이다.
밀양의 이창동 감독은 1954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대 사범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부터 1987년까지 교단에 국어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2년 중편소설 '전리(戰利)'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해 한국문단에 이름을 새긴다. 우리나라에서 영화 감독이 된다는 거, 프랑스식의 일정한 루트가 없다. 어쨌거나 이창동은 한국 영화의 풍토에서는 흔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다. 아니, 그런 이력으로 영화 감독이 된 경우는 유일하다.
너무 억진가? 세드릭 칸과 이창동은 어떻게 해서 별안간 영화 감독이 된 거야? 하는 질문 앞에서 공통의 태생적 레토릭이 풍긴다고 말해야겠다.
영화 <권태>는 이탈리아의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가 1960년에 발표한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들이 있는가? 세드릭 칸은 이 원작에서 어떤 것을 유용하고, 또 어떤 것을 교체했는가?
우선 영화의 주인공 마르땅이 철학자인 것에 비해, 원작에서의 주인공 디노는 화가다. 마르땅이 실패한 것이 결혼생활이라면, 디노가 실패한 것은 삶의 즐거움 자체다. 영화에는 마르땅의 전 부인이 등장한다. 그녀의 역할은 원작에서 디노와 어머니가 맡았던 에피소드를 교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원작은 주인공 디노와 어머니의 에피소드로 시작하고, 영화는 주인공 마르땅과 전 부인 소피의 신으로 시작한다.
세드릭 칸은 주인공 마르땅의 생각을 설명하는 캐릭터가 필요해서 전 부인을 만든 것이었다. 한편 원작에서 화가 디노는 그가 생각하는 ‘권태’를 “권태의 감정은 현실의 부조리함에 의해 나의 내부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현실은 자신의 실제적인 존재를 내게 확신시키기에는 너무나 불충분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권태는 소통 부재,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무기력함이라고 할 수 있다” 라고 말한다. 원작에서 권태라는 낱말이 지시하고 있는 것은 세계를 빠르게 채워가고 있는 부의 권력, 정치적 권력을 조롱하는 말이며, 그것들과의 소통 부재이거나 혹은 거기에서 오는 권태이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권력관계나 권태는 정치적 뉘앙스가 배제된 일반화된 감정이다. 육체를 통해 사랑의 권력관계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세드릭 칸은 알베르토 모라비아가 60년대 이탈리아에서 느꼈던 정치적 권태감을 '권태'라는 제목하에 보편적 인간 감정 사이의 ‘소유욕’으로 각색해 낸 것이다.
원작과 영화가 주고받는 이러한 각색의 과정을 즐기는 마니아들에게는 드러난 차이보다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차이'를 발견하게 될 때, 스스로를 무척 대견스러워 한다. 소설 '권태'와 영화 '권태', 이들이 숨긴 차이는 특수성과 보편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다. 특수성이 일정한 주제라면 보편성은 일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의 첫머리에 시로 '권태'를 노래할 수 있을까? 였는데 나의 이 의구심은 시는 이미 특수성의 범주였고 권태는 일상이라는 보편성 속에 녹아 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의구심이었다. 그런데 나는 '밀양'에서는 이 의구심의 당연함이 깨진다. 권태와 밀양 사이에서 나는 무려 7년만의 깨달음을 밀양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밀양'은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벌레이야기'는 아이의 유괴와 살인이라는 사회적이고도 묵직한 소재를 통해, 용서와 구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질문하는 소설이다. 작가 이청준은 특유의 철학적이고 집요한 시선과 문체로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짓밟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갓 벌레로 전락하는지, 절대자 앞에서 어디까지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소설에서의 설정은 약국을 운영하며 살고 있는 평범하고 행복한 한 가족에게 어느 날, 불행이 닥친다. 초등학교 4학년인 알암이 하굣길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실종신고를 비롯해 '알암이 찾기 운동' 등 모든 사람들의 노력에도 알암의 행방은 종무소식이고, 차츰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도 멀어져간다. 한 아이가 사라져가는 과정과 아이의 사라짐으로 인해 남은 자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반면에 영화 '밀양'은 서른 셋, 아들 준과 함께 자신을 아는 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을 신애의 새 출발지로 설정한다. 피아노를 배웠던 이 도시 여자는 학원을 연다. 피아니스트의 꿈도 남자의 사랑도 모두 잃어버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저 불행하지 않아요’ 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애벌레처럼 웅크린 그녀의 등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을 듣게 된다. 신애는 소설과는 달리 울음을 통해 소설의 주제를 드러낸다. 전도연으로 하여금 칸 여우주연상을 받게 한 그녀의 탁월한 연기는 이 울음의 연기다.
이제 '밀양'을 봐야겠다면 십여 차례 펼쳐지는 전도연의 울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녀의 울음은 각기 다르다. 사건 전개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심리적 상황의 차이를 절묘하게 담아낸 눈물의 연기. 이 각기 다른 울음들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우는 극한의 모든 슬픔들을 절절히 보여준다. 그런데 이 울음들에는 공통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래도 살겠어요?"
여기서 소설과는 전혀 새로운 카센터 사장, 종찬의 등장은 소설과 영화의 현저한 차이를 보여준다. 이 드러난 차이는 동시에 숨어 있는 차이를 발견하는 열쇠가 된다. 그는 일관되게 이렇게 말한다. “뜻보고 삽니꺼? 그냥 사는거지예.” 과연 이창동이다. 이창동은 전도연 분의 신애에게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세상의 문제를 맡기고 송강호분의 종찬을 통해 짓밟힌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열쇠를 맡긴 것이다.
몇 편 안 되는 영화로 일정한 지지계층을 만든 이창동은 내가 아는 한 모든 이야기의 주제의식, 곧 특수성의 범주를 일상, 곧 보편성의 범주로 대응시킨 세드릭 칸에 이은 두 번째 감독이다. 우리를 벼랑 끝에 내모는 그 무수한 이념과 뉘앙스들을 모두 제거하고 지극히 보편적 인간적 감정을 갖게 한 영화 '밀양'은 하수구에 비친 한줌의 햇살로 천연덕스럽게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사족이다.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드는 이창동 감독의 절제가 부럽다. 아니다. 너무 냉정해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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