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
감독 : 강제규, 주연 : 장동건, 원빈, 이은주
글: 고영훈
영화의 첫 장면은 발굴현장에서 시작된다. 감독은 실제로 그 현장에서 전체 줄거리의 감을 잡았다고 한다. 두꺼운 역사서를 만들 수 있는 고고미술사학의 유물처럼 녹슨 철모와 질긴 군화바닥이 얼마나 많은 상상을 불러왔겠는가.
영화 전말을 제외하면 6.25의 전체 상황이 순서대로 펼쳐지면서 보다 더 격정적으로 변해가는 형제애가 광기와 함께 그려진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늘 듣고 자랐던 그 시대 내 가족사가 스크린 위에 오버랩 되면서 남북상씨름의 그 비극이 더욱 생생하게 가슴으로 전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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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회상해 본 우리집안의 가족사
그저 동생의 성공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구두를 닦고 구둣방을 꿈꾸던 진태(장동건)와 가족의 미래를 책임지리라 기대되던 동생 진석(원빈)이 대구역에서 한국전의 마지노선이었던 낙동강 전선으로 끌려갈 즈음,
이미 점령당한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교회도 절도 없는 내 고향 마을에서는 통과의례적인 인민재판이 한창이었다.
나의 작은 할아버지는 일제에 의해 버마까지 끌려가 2차대전을 치렀는데, 5형제를 두었던 증조할머니께서 겨울 새벽에도 시냇물로 목욕하며 칠성님께 기도했던 덕인지 작은 할아버지는 우연히 만난 두 마리의 구렁이를 피하려다 포탄을 피하게 되어 다행히 살아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인민군측의 경찰을 하게 되었다. 그 기록으로 우리 친척들은‘연좌제’로 묶였고 경찰이 되려했던 내 숙부는 적재용 나무깔판 만드는 공장을 하는 것으로 꿈을 접어야 했다.
곧 처형당할 운명에 놓였던 당시 면장이었던 큰 할아버지. 경찰인 작은 할아버지도 어쩌지 못하는 인민재판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처형자 명부>에 적힌 그 이름이 호명된 순간, 그 명부를 빼앗아 찢은 후 논바닥 진흙 속으로 밀어 넣어버린 분이 바로 나의 친할아버지였를 보고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다. 워낙 급하고 거친 성격 탓에 어려서부터 애꾸눈이 된 할아버지는 5형제 중 가장 형제애가 깊었다. 그 일로 할아버지는 몰매를 맞고 피를 한 동이나 흘린 후 감옥에 들어갔고 집단 사형은 공문 유실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광기, 역사를 움직이는 한 힘이 아닐까?
그럴 무렵, 낙동강 전선의 진태는 대대장으로부터 동생을 집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을 듣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태극무공훈장’을 타는 것이었다.
‘6 25전쟁’이 터지기 전에 그 형제들이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가끔 밖을 향한 그 어미의 시선, 그것은 아이들 앞에‘현고학생부군신위’란 위패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건 낯익은 내 어머니의 시선이기도 했다. 제사로만 아버지를 만났던 내게‘현고학생부군신위’에서의‘학생’이란 한자는 내내 이상했다. 그것이 인간은 죽어서도 공부한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었다니!
내 어머니는 월남전에서 남편을 잃고 여러 개의 무공훈장을 아버지 대신 받았다.
글쎄, ‘사후 약방문’같은 느낌을 느꼈는지, 언제부턴가 내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자 어머니는 그 훈장들을 다시는 꺼내지 않으셨다.
나는 훈장보다는 아버지의 흑백 사진과 제복을 좋아했고, 아버지의 겨울 전투모를 자랑스레 쓰고 다니면서 월남전에서 아버지가 이룬 작은 신화를 자주 생각했다. 후에 그것이 조금 과장된 스토리였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아무튼 그것은 내게 막연하게라도 이타성의 가치를 심어놓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동생을 사랑한 진태가 대좌(최민식)를 무모하게 생포하려는 바람에 진태를 죽을 위기에서 구한 후, 영만은 치명상을 입고“나 죽는 거냐?”라고 어떤 말보다도 진리에 가까울 수 있는 말을 남기고 죽어간다. 그 진태와 진석 형제처럼 또 나처럼, 아버지 없이 커야하는 영만의 아이를 생각하는 진석의 말, “영만이형 죽여서 받은 훈장이야!”이 한마디가 내 가슴에도 여지없이 꽂혀왔다.
그러나 진태의 마음은 한결같다.
“너 살려서 집에 보내야 해. 넌 가족의 전부고 희망이야!”
자존심이 상해서였을까? 진석은 형의 절대적 사랑이 광기로 변질됐다고 생각한다.
‘광기’, ‘학도의용군’들의 애국심도 매우 역사적인 광기일 것이다. 역사를 움직인 광기는 어김없이 새로운 문명이나 왕조가 싹트기 전에 나타난다. 그러나 역사적 결과만이 그것이 긍정적인 역할이었는지 부정적인 역할이었는지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싸우는 전쟁의 비극
보다 치열한 광기는 보다 이질적인 새 문명을 만들어 낼 것인가?
이제 선천 인간들의 패악은 극점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하다. 그 극점을 상징하는 키워드는 말 그대로‘핵’일 것이다. 그 핵을 6.25에서 쓰려했던 사람이 바로 맥아더장군이었다.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이루고, 그 덕인지 애꾸눈 우리 할아버지는 총살 직전에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영화에서 가장 안타깝게 목숨을 구걸하던, 강제로 의용군에 끌려간 꽤 시골스런 캐릭터였던, 딱새 용석이를 기억해보자.
진북 중 그와 형제의 만남에서 진태는 그야말로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폭력이 증폭되어가는 상극의 전쟁상황에 빠지면 그 누구도 증오와 광기를 잠재우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거듭 곱해지며 커가는 원한이 5만년 동안 쌓여 큰 불이 되었다면, 근 100년의 혼란과 전쟁도 작은 화, 즉 5만년 쌓여온 큰 불을 끄는 작은 불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붓으로 38선을 그으시며, 피할 수 없었던 이 모든 참화를 미리 아셨을 그 때의 상제님 마음은 어떠셨을까?
용석은 그를 살리려는 진석의 발악으로 겨우 살아나 포로가 되지만 결국 불쌍하게 죽고 마는데 그 전에 전쟁이 상극의 비빔밥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포로들은 단 며칠이라도 더 밥을 먹고 버티기 위해 거의 죽도록 싸워야 했다. 마치 사상같은 것은 아무 것도 모르던 진태의 약혼녀 영신이 보리쌀 두되로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배급쌀을 타기 위해 부역을 해야 한 것처럼 .
영신을 살리려는 안타까운 노력의 끝에, 결국 불에 그슬린 진석의 만년필이 남겨진 것을 본 진태의 눈은 이미 분노와 광기의 불로 변해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전투, 육박전에서 진석을 몰라 볼 정도로 돌아버린 상극(相克)과 상화(相火)의 불이었다. 그리고 진태의 광기와 상화의 불마저 순식간에 날려버린, 눈물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한 장면이 나온다. 동생의 생존을 확인한 후, 좀전까지도 북한의 깃발부대였던 진태는 진석을 위해 서슴없이 다시 총구를 북으로 돌린다. 잠시 잊고 있었던 이 영화의 꽃인‘형제애’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가슴저린 장면이었다.
그러나 진태와 진석의 형제애는 여전히 감독에게도 시나리오나 드라마로 남아있는 듯 했다. 특히, 마지막에 형의 뼈를 찾은 동생이 어찌 그리 태연하게 독백할 수 있단 말인가? 오열을 하며 형의 뼈를 가슴에 품고 비벼야 하지 않을까? 그 같은 형제애가 과연 50년 세월만으로 무뎌질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스크린을 찢고 나아가 대신 통곡하고 싶었던, 감독의 스타일과 선택에 대해 가장 열 받는 장면이었다. 전편에 흐르는 격동적이고 생생한 감동에 비해 너무도 미약한 마지막 장면이 큰 아쉬움을 남겼다.
과거를 그린 영화, 그러나 곧 닥칠 우리의 미래
하지만 극장을 나서는 사람들의 눈시울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엔 다양한 생각들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전쟁세대들에게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한 서린 과거의 한 기억으로, 전쟁의 아픔을 모르는 전후 세대들에게는 역사속의 가슴 아픈 한 사건으로. 그러나 상씨름의 마지막 끝매듭을 알고 있는 우리 상제님 일꾼들에게는 분명 너무도 생생한 미래의 현실로 다가온다.
<라이언 일병구하기>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그 처참한 장면도, <진주만>의 그 무시무시한 포격장면도, 어쩔 수 없는 영화의 한 장면으로만 다가왔었다. 그에 반해, 이 <태극기 휘날리며>가 나의 핏속으로 파고드는 이유는 상씨름의 마지막 대 격전지가 바로 나와 내 가족이 살고 있는 이 한반도 땅이기 때문이며, ‘서울은 피가 석동이다’라는 태모님 말씀이 더욱 현실로 절감되기 때문일 것이다.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역사의 현실로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막을 수 없다면, 피할 수 없다면, 이제 우리는 진태의 그 뜨거운 형제애, 가족애를 지금의 이 현실 속에 토해내야만 한다. 포교가 아무리 힘들어도 최소한 우리는 진태보다는 훨씬 수월하고 훨씬 유리한 상황에 놓여있지 않은가.
그리고 <태극기 휘날리며> 라는 영화의 제목도 좀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상씨름의 시작에서 진태가 백두산에 꽂으려 했지만 실패했던 그‘태극기’가 이제 상씨름의 끝매듭에서 대개벽기에 전세계에 희망의 상징으로 휘날리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천지의 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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