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예술문화

[스크랩] 잃어버린 아름다운 시절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15. 16:46

 

6.25 전쟁이 막 끝날 무렵, 이야기는 어느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극 중 창희(김정우분)는 개성에서 내려온 성민(이인 분)네 집 아래채에 세 들어 산다.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큰 딸의 주선으로 일자리를 얻은 최씨(안성기 분)의 살림살이는 나날이 좋아진다. 그러나 아버지가 의용군으로 끌려간 뒤 창희 네는 집세도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렵다. 가난에 찌든 창희어머니를 보다 못한 최씨의 주선으로 안성 댁(배유정 분)은 미군들의 빨랫감을 맡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강가에 널어놓은 미군들의 빨래가 없어진다. 안성 댁은 곤경에 처하고 빨래 값의 변상조건으로 미군 병사와의 정사를 받아들인다. 둘도 없는 친구인 성민과 창희는 동네를 기웃거리다가 방앗간에서 안성댁과 미군 병사를 보게 된다. 다음날 미군과 정사를 벌이던 정미소에 불이 난다. 미군이 죽고, 창희는 갑자기 마을에서 종적을 감춘다. 이듬해 여름 정미소 근처 늪에서 심하게 부패한 아이의 시체가 발견된다. 성민은 그 시체가 창희라고 생각한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상여를 만들고 장례식을 치러 준다. 창희와 자주 가던 느티나무 밑에 가묘도 하나 만든다.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던 창희의 아버지가 마을로 돌아온다. 그는 실종된 아들의 가출 이유를 수소문한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일하게 사건의 전말을 아는 성민은 입을 굳게 다문다. 성민의 누나는 미군 장교의 아이를 임신한 채 버림받는다. 성민의 아버지 최씨(안성기 분)는 미군부대에서 몰래 물건을 빼돌리다 발각되고 온몸에 붉은 페인트칠을 당한 채 부대에서 쫓겨난다. 미군의 추가적인 보복을 피하기 위해 성민이네는 마을을 떠난다.

이 작품은 섬세한 구성으로 그 시대 우리들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줬다. 영화‘아름다운시절’의 사실적이면서도 빼어난 영상미는 신예 이광모 감독에게 해외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다. 감독은 이 작품을 위해 많은 장소를 수개월 동안 찾아다니는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느 자동차 회사 동호회 소식지에 실린 사진을 보고 그가 찾아간 곳은 경남 의령의 한우 산이었다. 시대적 배경을 담는 영화에서는 극적 리얼리티의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우선 현대적인 구조물이 없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우산은 이러한 요건에 부합된 적절하고 카메라 구성에 잘 어울리는 곳이다. 영화의 마지막 롱 테이크 장면에서 우마차에 짐을 싣고 산자락을 굽이굽이 내려와 떠나가는 모습은 내게 긴 여운으로 남아 있다. 경남 의령의 한우산 비포장의 구불구불한 산길은 길을 나서는 가족의 모습과 교차되면서 인생길도 이런 굴곡 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오래전, MBC 드라마‘영웅시대’촬영장소를 찾으러 난 이곳까지 왔었다. 경남 의령에는 남강이 흐르고 그 강물 위로 한강철교와 비슷한 정암교가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5.16 군사혁명 당시 쿠테타 세력들이 한강철교를 건너는 장면을 촬영했다. 극중 차지철(정흥채 분)의 지휘 아래 검문소를 통과하는 장면이었다. 난 의령군청에 들러 드라마‘영웅시대’의 촬영계획에 대해 소상히 알려줬다. 군청관계자는 정암교 차량통제를 관계기관과 협의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경남 의령에는 촬영할 곳이 많다면서 나를 한우산으로 데리고 갔다. 때 마침 잘됐다싶었다. 영화 ‘아름다운시절’ 마지막 장면에서의 잔영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아야겠다고 내심 생각하던 차였다.

군청을 빠져나온 관용지프는 한우산으로 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 정곡면 어느 마을길로 접어들었는데 그는 눈앞에 보이는 집이 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 회장의 생가라고 했다. 난 대대로 이어져 온 부농이었다는 그 안이 궁금했다. 난 그의 안내에 따라 그 집으로 들어섰는데 앞에는 사랑채, 뒤의 건물이 안채라며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집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안채 오른쪽 암벽을 가리키며 그 형태가 돈을 쌓아놓은 모양이라고 했다. 그리고 뒤의 나지막한 산이 노적봉 형상인데 주변에 있는 산이 모두 여기에 모이는 혈 자리라고 했다. 난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으로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별 느낌이 없었다.

나를 태우고 한우산으로 가고 있는 그는 궁유라는 마을에 이르러서는 30년 전 비극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라고 했다. 하룻밤 새에 순박한 마을주민들을 이곳 파출지소에 근무하는 우씨 성을 가진 순경이 무차별 권총으로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이 평화로운 마을을 한순간에 초토화한 살인사건은 기네스북에도 올랐다고 말해줬다. 하룻밤 사이에 무려 수십 명의 주민을 그것도 별다른 이유도 없이 살해했으니 충분히 그럴만했다. 어렸을 때, 그 기억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라디오에서는 끔찍했던 상황을 전하는 방송이 흘러나왔고 흥분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까 탄식했다. 어린 나의 기억에도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이 쉽게 잊히지 않고 어느 한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다. 우리는 마을을 벗어나 궁유면 벽계저수지를 끼고 달리고 있었다. 암벽이 한가운데 있어 저수지 물을 꿈적 못하게 가두어 놓은 듯했다.

지프는 산의 초입에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비포장 된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내가 가본 많은 산과 비교해서 그다지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아름답다는 표현은 이곳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구불구불한 산길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구불구불, 인생도 구불구불, 그 누군가 삶의 굴곡을 얘기한다면 이곳에 와서 비교해 볼 일이다. 둘 중에 누가 굴곡이 많은지를!! 이 길을 따라 오르면 한우산 정상이 나오고 겹겹이 둘러싸인 산세가 자골산으로 이어진다. 현란하다거나 황홀한 맛은 없어도 고즈녁한 분위기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난 이 산이 주는 매력이란 인생을 닮아 있는 구불구불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이 재미있거나 황홀하지 않은 것처럼!

 

영화 ‘아름다운시절’에서 섬진강 양지바른 한 귀퉁이의 미군 군복들, 햇볕을 받아 은빛 물결에 반짝이는 기하학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아이들은 무더운 여름 한 낮 강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다. 미루나무 아래 흘러가는 냇가에서 뭔가 작전을 꾸미고 있다. 섬진 강가를 따라 난 마을길을 먼지를 훌훌 내며 달리던 군용차량, 미군 병사와 정사를 벌이던 정미소, 영화 ‘아름다운시절’의 또 하나의 촬영지인 섬진강 줄기의 임실군 구담마을이다.

난 임실군 강진면 작은 읍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를 타고 옥정호가 있는 마을을 찾아가겠다는 애초의 생각은 바뀌어 이내 구담마을로 행선지를 바꿨다. 임실 강진읍에서 출발한 버스는 좁은 도로를 따라 순창방면으로 가고 있었는데 버스 안은 두서 명의 노파와 여행 가방을 멘 나 그리고 뽕짝을 틀어대며 따라 부르는 기사가 전부이다. 텅텅 비어 있는 버스는 어느 시골길을 달리고 있을 때 난 버스기사에게 다가가서 “구담마을을 가려는데 어디서 내려야 하죠?” 라고 물었다. 버스기사는 구담 마을까지는 버스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천담마을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천담마을 입구인 다리 앞에 날 내려 주었다.

1997년 가을, 영화‘아름다운시절’을 촬영할 당시 천담마을에서 구담마을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차가 통행하기에도 비좁은 길이었다. 갈대가 양옆으로 나있는 황톳길을 군용트럭들이 흙먼지를 훌훌 일으키며 달리고 있다. 아이들은 "할로 기브 미"를 외치며 초코릿을 달라고 다가가던 길이다. 마을 입구의 정미소에서 미군 병사와 정사를 벌이고 나오던 창희엄마(배유정 분)는 최씨의 자전거를 따라 그 길을 걷는다. 갈대가 하얗게 피고 황톳길을 따라 걷던 그 장면은 알 수 없는 회한이 묻어난다. 천담마을 입구에 있던 정미소는 어디론가 간데없고 지금 난 콘크리트로 새로 단장된 그 길을 걷고 있다. 서글픈 마음으로,.

가슴속에서만 남아 있는 풍경들, 수채화 같은 기억들이 그곳에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내 마음의 풍경들이 가슴 찌릿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내 마음에 덧칠됐다.

이곳 구담마을 강가는 섬진강 상류여서 폭이 좁고 유량도 적어 어찌 보면 개울처럼 보이는 곳도 있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도로 길섶에 매화나무가 길게 뻗어져 있었다. 아직 겨울이 채 가시지 않아 매화나무에는 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트릴 것 같은 봄기운이 느껴졌다.

꽃샘바람이 강물을 스쳐갈 때 남녘엔 꽃 소식이 전해져 온다. 봄이 오면 사람들은 전남 광양 섬진강가 다압마을의 눈부신 매화꽃에 현혹되는데 그와 비할 바는 아니지만 구담마을로 이어지는 이곳의 매화꽃은 소박하다. 난 강가를 따라 걸으며 어느 매화나무에 푯말로 걸어 놓은 글귀를 들어다봤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매화꽃도 거져 보았죠. 매실 향도 그냥 맡으세요. 섬진강 흐르는 물 천천히 바라보시면 가진 것도 버리고 싶은데 왜 매실 열매까지 따시렵니까! 늙고 지친 우리 부모님들의 한해 식량입니다. 오늘도 참으로 아름다운 날입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섬진강 자락을 따라 2km쯤 되는 산길을 꼬불꼬불 돌아가니 마을회관이 나타났다. 난 마을회관에서 비탈진 길을 따라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느티나무 아래 창희의 가묘가 있었던 곳인데 이곳에서 바라다보는 섬진강 물굽이는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영화 ‘아름다운시절’에서 아이들이 물놀이하던 장소이다.

강 건너 지척에 보이는 곳이 섬진강 상류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장구목이다. 장구목은 무수한 반복의 시간이 그 바위 위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만들어 놨다. 누구라도 한 번 눈을 맞추고 나면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장구목 바위에 새겨진 물결무늬의 아름다움 중에서 단연 으뜸은 요강바위이다. 흡사 모양이 요강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장구목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여러 차례 등장했던 곳이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드라마 ‘허준’등 화면 곳곳에 장구목의 바위들이 담겨 있다. 특히 영화 ‘아름다운 시절’이 촬영하기 이전에는 장구목은 숨겨진 속살 같은 신비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영화 ‘아름다운시절’은 그 밖에도 여러 지역에서 촬영되었는데 운동회가 열리는 날, 마을 사람들이 힘차게 달리기를 하는 장면에서 너른 공터의 투박함과 역동성이 살아있는 경남 창녕 우포에서 촬영했다.

순천 낙안읍성 마을은 수개월의 걸친 장소 헌팅을 통해 최종 낙점된 곳이다. 옛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돌담길의 풍경, 이런 풍경들이 낙안읍성의 이미지들이다. 아름답고 정겨운 마을 풍경 때문인지 이곳에서는 수없이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됐다. 이처럼 영화 ‘아름다운시절’에서는 흑백필름 영사기의 배경처럼 정겨움이 곳곳에 묻어난다. 풍경이 영화의 중심이고 주연인 셈이다.

이 한편의 영화를 통해 우린 예술적 감흥과 추억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이미지 상품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지로 섬진강 상류의 구담마을과 장구목 등 아름다운 풍경들이 빛났지만 너무 지나친 관심인지 당시의 모습들이 많이 훼손되어 아쉬웠다. 영화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정미소는 이미 사라졌다. 이제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만 그 정미소는 존재한다. 몰이해인지 무감각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마을 입구에서 언덕 위 느티나무로 가는 길은 나무 테크로 조성해 놓아 공간적 특성이 크게 훼손됐다.

천담마을에서 구담마을로 가는 길은 넓고 평평하게 만들어 놓아 옛 정취를 느낄 수 없었다. 난 여행을 하면서 그때 촬영했던 영화 속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물거품으로 끝이 났다. 그 누가 이곳에 와서 시멘트로 포장한 길을 걷고 나무테크로 연결된 동산에 올라 섬진 강가를 바라보고 싶겠는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영화 속의 이미지를 찾아서 향수와 추억을 체험하는 공간이길 바라는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의 답사 여행이 더욱 활성화되고 대중화되려면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함은 물론 드라마 속의 가상체험을 할 수 있는 세심한 배려가 아쉬운 것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영화 속의 인물과 배경을 동일시하고 그 장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이미지가 추억이 되고 상품이 된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그곳에서 당시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져야 하는데 본래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된다면 결국 영화 속 느낌을 가져갈 수 없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특정 지역의 풍광이나 시설 등의 이미지를 상품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드라마 ‘모래시계’가 선풍을 일으키자 배경 중의 한 곳으로 쓰였던 동해안 기차 간이역 정동진이 연간 수백만 명이 찾는 유명관광지가 됐다. 그리고 내가 했던 드라마들 중에서 ‘그대그리고나’ 촬영지였던 영덕 강구항은 경제가 어려웠던 외환위기 때도 지역적 호황을 맞았다. 또한 ‘올인’이라는 드라마가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촬영지 중의 한 곳이었던 제주도 섭지코지 성당도 명소로 떠올랐다.

드라마와 영화가 새로운 관광자원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이바지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경우이다. 우리 주변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특징적인 장소들이 많이 널려져 있다. 곳곳에 크고 작은 사찰과 성당 심지어는 다랭이 논이며 느티나무 한그루도 우리의 중요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영화 ’아름다운시절‘은 배경 속에서 그 시절 삶의 고단함을 향수와 추억의 이름으로 아름답게 덧칠했다. 그러나 이젠 아름답고 빛나게 하려 했던 행위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음을 장구목은 알고 있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려 구담마을로 찾아갔는데 이제는 그때의 정서와 감흥을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단지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섬진강 줄기의 장구목이 아닐까!

 

출처 : 붉은 강가를 헤맬 때
글쓴이 : 흐르는강물처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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