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 앞에서 희석되지 않는 기억이란 없는가보다. 어린 시절 보았던 처참한 광주의 사진들로 한껏 달구어진 가슴, 그 욱신거리는 가슴으로 거리에 선 적이 있었지만, 어느 사이 그것들은 그렇게 희미해져 ‘문득’ 조차 떠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80년 광주의 그 일이 있고 삽십여년이 흐르고, 가슴 뜨거웠던 그 시절로부터도 이십여년이 흘러 다시금 ‘문득’ 스크린을 통해 미약하나마 그 때를 다시금 떠올린다. 물론 새삼스럽게 다시 눈이 시큰거린다.
영화는 80년의 봄 5월, 신록은 푸르고 바람은 좋기만 한, 남도의 한 도시 광주에서 택시를 모는 민우로부터 시작된다. 부모님은 없지만 공부 잘 하는 남동생이 있고, 선량한 동료들이 있고, 그리고 보기만 해도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여인이 있는 민우에게 5월은 이제 막 절정으로 치닫는 계절이다. 그러나 자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줄 알았던 시위의 한 켠에서 스스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순간, 울려 퍼지는 애국가와 함께 쏟아진 총탄이 동생을 관통하는 것을 바라보는 순간, 모든 것은 꿈결이었던 듯 사라지고 내팽개쳐진 시신들 사이에 총을 부여잡은 시민군 강민우가 남겨지게 된다.
조금은 상투적인 드라마와 어딘가 미진한 연출력으로 아쉬움을 남기지만 영화를 보는내내 콧등에 손을 올려놓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속 신애가 도청으로 떠난 (이제 막 시작할 수도 있었던 연애의 상대인) 민우와 도청에서 시민군을 지휘하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고 새벽 도심의 거리에서 절규할 때, (비록 영화관의 넓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어도) 나의 심기는 당시 광주의 시민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죄책감과 수치와 분노의 심정에 가서 닿는 것만 같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 뿌려진 너의 붉은 피 / 두부처럼 잘리워진 / 어여쁜 너의 젖가슴 /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 트럭에 싣고 어디갔지 / 망월동의 부릅뜬 눈 /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산자들이 동지들아 / 모여서 함께 나가자 / 욕된 역사 투쟁없이 / 어떻게 헤쳐 나가랴 /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대머리야 쪽바리야 / 양키놈 솟은 콧대야 / 물러가라 우리역사 /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
영화를 보면서 해마다 5월이 되면 입에서 떠나지 않고는 했던 오월가가 떠올랐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기억들로 인하여 마음 편하게 환히 웃을 수조차 없는데, 또 다른 이들은 그저 침묵과 도리질로 일관하면서도 부른 배로 씁쓸한 공명의 소란 일으키며 잘만 살아간다. 시간은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다. 세상은 순리대로 흘러가고 있는 듯하지만 아직도 간간히 역류하는 것들의 냄새는 인상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이 그렇다...
(영화의 완성도에 가타부타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현실이 주는 무게감으로) 어떤 이는 해석이 아닌 재현으로서의 영화를 옹호한다. 또 다른 이들은 영화가 아닌 현실로서의 80년 광주를 옹호하며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는 나름의 이유를 갖다 붙인다. 하지만 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영화의 모든 미숙함을 용서하기로 한다. 죽은 이들이 모두 환하게 웃는 장면, 그곳에서 홀로 형용할 수 없는 애매한 표정을 짓는 살아 남은 신애로 하여금 우리들 살아남은 자들의 감정을 통째로 대변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들 고통 받은 사람들의 웃음이 우리들 살아남은 자들의 무거운 마음을 위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 보라구, 우리들 모두는 이렇게 환하지 않느냐고,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영화는 죽은 자들을 증거하기도 하지만, 살아 남은 자들을 토닥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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