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군의 수염
우리 영상도서관에 몇 개월 전부터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과 만화 등이 서비스되고 있다는 사실은 웬만한 고객들이라면 아실 터이다. 선정작 레파토리의 고갈에 시달리고 있던 필진으로서는 새로운 보고가 생긴 셈인데, 본 필자 역시 아무래도 그쪽으로 눈이 간다. 오늘 선정한 작품은 영화 <장군의 수염>(1968, 이성구)과 원작이 된 이어령의 동명 소설이다.
1966년 『세대』를 통해 발표된 소설은 당시 꽤 높은 관심을 받았다. 평론가가 쓴 소설이라는 사실이 관심을 받은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기실 문학평론가가 직접 창작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심판이 직접 필드에서 뛰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와 같은 어려움을 방법론적인 새로움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소설론을 비평이 아니라 직접 소설 형식으로 써보겠다는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어 결국 그러한 모험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소설로 쓴 소설론이라고 할까? 속된 말로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서였다.(본문 중 저자의 말)”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자면 이 소설은 소설에 대한 소설, 즉 메타소설인 셈이다. 모더니즘적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자살인지 타살일지 모를 한 사진기자 철훈의 의문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타살을 의심하는 경찰이 등장했다 사라지고 나면, 철훈이 구상하던 소설 ‘장군의 수염’의 의논상대로 잠시 인연을 맺었던 소설가 ‘나’가 등장한다. 그리고 ‘나’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채 철훈의 죽음을 쫓기 시작한다. 철훈의 죽음의 원인을 쫓으면서 ‘나’는 철훈의 전 인생과 내면을 탐사하게 된다. 철훈의 가족, 헤어진 전 애인 신혜를 통해 듣는 그의 인생은 전쟁과 분단의 비극에 개인의 고독이 절절히 배어있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철훈의 죽음의 원인은 끝내 명확히 밝혀지지 않지만, 그의 삶 자체가 죽음의 원인임이 암시된다.
1960년대 소설과 문예영화에서 발견되는 당대 지식인은 일종의 ‘문학적 자아’로 형상화되는데, 그들은 예외없이 세상과 거리를 두고 섞이지 못하며, 세상에 대한 혐오를 자아에 역투사하는 인물들이다. 그것은 물질적으로 발전할수록 내면은 퇴락해가는 한국사회의 흐름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하는 수동적인 방어본능일 터이다. 예컨대 이 소설 속에서 철훈이 구상하는 소설 ‘장군의 수염’은 독립 투사인 장군이 기른 수염이 멋있다고 모든 국민들이 수염을 기르는 세태에 홀로 저항하는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이 소설을 포함한 당대 예술은 끊임없이 반성하고 고뇌하지만 실천하지는 못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마조키즘적인 주체성을 양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당대 한국사회에 대한 뚜렷한 비판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필자가 문학 분야의 문외한이라 그런지 몰라도 ‘장군의 수염’ 하면 역시 영화부터 떠오른다. 한국영화사에서 <장군의 수염>은 한국식 모더니즘, 문예영화의 대표격 작품으로 거론되지만 <만추>(이만희, 1966), <안개>(김수용, 1967)나 <귀로>(이만희, 1967) 등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아마도 이 영화의 감독인 이성구의 지명도가 김수용이나 이만희만 못했기 때문일 듯하다. 그러나 이성구 감독은 다작도 아니고 엄청난 ‘걸작’들을 만들지도 못했지만, 꾸준한 수준의 작품을 낸 감독으로 반드시 재발견되어야 할 분이라는 생각이다. 아무튼 이 영화는 당시 쉽사리 만들어지는 대량생산적 영화들과 달리 기획 단계에서부터 꽤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독은 원작자인 이어령과 수차에 걸쳐 작품에 대해 논의하였고, 시나리오는 당대의 대표적 작가인 김승옥이 맡았으며,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씬인 영화 속 소설 ‘장군의 수염’의 줄거리는 신동헌 화백이 애니메이션으로 형상화했다. 거기에 당대의 배우 신성일, 윤정희, 김승호가 가세했으니 나름 드림팀이었던 셈이다.
영화에서는 원작과 달리 소설가가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 자리를 원작에서 큰 비중이 없었던 경찰이 대신한다. 아마도 영화라는 대중 매체의 속성 상 지나치게 문학적 자아가 강조되는 것에 대한 부담을 피하고 미스테리 장르 영화적인 외양을 갖추도록 하기 위함일 듯 싶다. 그리하여 영화는 소설에 비해서는 그 복잡한 내면성을 일정 부분 단순화한다. 시종일관 진지했던 소설과 달리, 페이소스와 풍자가 가미된 신동헌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소설의 진중함을 완화시키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복잡한 등장인물과 서로 중첩되는 증언들을 플래시백의 중첩구조로 배치함으로써 당대에 보기드문 복잡한 서사체계를 구축해낸다.
원작과 영화를 함께 감상하게 되면 아무래도 그 차이와 변주에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이 영화는 원작을 대체로 살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는 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설가 화자가 없다는 사실이고, 그 외에도 원작에 없던 박형사의 부하(김성옥 분)의 등장, 철훈의 죽음을 프로이트식으로 해석하는 소설 마지막 부분의 축약, 정보의 배열 순서 등을 들 수 있겠다. 예컨대 영화가 소설과 달라지는 지점 중 소소하지만 시선을 끄는 부분은 한국전쟁 피난길에서 신혜를 강간하는 주체가 소설에서는 미군(흑인), 영화에서는 중공군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대 친미 반공의 체계가 문학보다 영화에서 더욱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설정으로 흥미롭다.
요컨대 소설 ‘장군의 수염’과 영화 <장군의 수염>은 60년대 후반 점점 더 획일화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지식인의 존재 의의와 무력감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들로 당대 사회를 증언하는 흥미로운 역사적 텍스트이다. 물론 이들 작품들이 단순히 역사적 가치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들의 세련된 구성과 작법, 영상미는 오늘날 소설이나 영화에 비해서도 손색없으며 작품 그 자체로 즐거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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