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은희
여배우 열전(1) -최은희
그녀가 선택한 탈출은 어디로부터 탈출일까?
최은희와 신상옥은 지금 같이 살고 있다.
같은 사람끼리 결혼도 두 번 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처녀 총각으로 만난 것이 아니다.
두 사람에게 어떤 사이냐고 물으면 애인 사이라고 답한다.
최은희가 1926년생이니까 올해로 80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스스로 애인사이라고 말 할 만큼 젊게 살고 있다.
최은희(崔銀姬).
그녀를 빼놓고 우리나라 연극 영화를 얘기한다는 것은 무의미 하다.
경기도 광주 초월면 지월리에서
농사꾼 아버지의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최은희는
해공 신익희 선생과 동문수학한 아버지가 우체국 공무원이 되어
서울 신당동에 살면서 종로 효제보통학교를 나왔다.
순진무구한 소녀 최은희가 일생의 전기를 맞이한 것은
배우 문정복(문정숙 언니)을 만나고 가출한 사건이다.
그녀의 나이 16세에 문정복의 소개로 극단 아랑에 입단한 최은희는
연습에 열중하다 완고하신 아버지에 붙잡혀 집으로 끌려가 금족령이 내려졌다.
배우의 길로 나가겠다는 딸의 의지를 확인한 어머니의 도움으로
극단에 나가 연습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고
그녀의 첫 데뷔 영화 새로운 맹세(신경균감독)를 찍었다.
최은희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인생전기를 맞이한다.
언니처럼 따르는 김연실(김학성의 누나)의 권유도 있었지만
촬영감독 김학성의 적극적인 구애에 그만 넘어가고 만 것이다.
이들은 결혼했지만
김학성은 총각이 아니라 전처소생 아이들이 둘이나 있는 홀아비였다.
그 당시 연예 활동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궁핍한 생활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녀가 녹원다방 마담으로 일하게 되자 남편 김학성의 행패가
손찌검으로 까지 발전하여 그들은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와중에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미쳐 피난 가지 못한 최은희는 정보도 파악하고 식량을 구하러 거리에 나왔다가
그녀를 알아 본 북한군에게 붙잡혔다.
그녀가 끌려간 곳은 명동 성당에 진을 치고 있던 북한 내무성 경비대 합주단.
서울 시청 앞에 가설무대를 마련해 놓고
인민재판 하던 북한군을 위한 식전 공연 무대였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본의 아니게 부역한 셈이다.
이때,
낙동강까지 남하하여 조국통일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 북한군은
충청북도 수안보에서 축하 파티가 열렸다.
김일성까지 참석한 이 파티에 차출된 것이 최은희였다.
이것이 그녀가 홍콩에서 납치된 원인이라고 회자 되었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으로 패주하던 북한군은 최은희가 속한 합주단을 이끌고
3.8선을 넘어 이북으로 끌고 갔다. 걸어서 평안북도까지 간 것이다.
청천강에 이르렀을 때 탈출에 성공했다.
국군에 투항하여 서울에 온 최은희는 정훈공작대에 배속되어
이제 국군으로 옷을 갈아입고 국군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나섰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났다.
조국은 조국대로 전쟁의 참화에 피폐해졌지만
여자 최은희도 여인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파란을 겪었다.
이때, 그녀 앞에 등장한 것이 잘생긴 젊은 영화감독 신상옥 이었다.
국군홍보 영화에 삽입할 춘향전을 같이 찍자는 것이었다.
흔쾌히 승낙한 그녀는 같이 작업하면서 사랑도 뜨거워졌다.
하지만 남편 김학성이 잠자코 있을 리 없었다.
간통죄로 고소한 것이다.
시중의 여론도 그들에게 차가웠다.
"선배 마누라를 가로챈 나쁜 감독"
"병든 남자를 버리고 젊은 남자를 찾아간 여자"
그들에게 던져지는 돌팔매는 매서웠다.
이러한 역경을 헤집고 그들은 결합했다.
남편 김학성과의 결혼 생활을 5년 만에 청산하고 결혼했다.
그녀의 나이 26세였을 때이다.
인생과 영화에 승승장구하던 그들의 분수령은 1961년 설 무렵이다.
공교롭게도 김지미가 주연하고 홍성기가 감독한 <춘향전>과
최은희가 주연하고 신상옥이 감독한 <성춘향>이 설 극장가에서 맞붙은 것이다.
결과는 성춘향의 압승이었다.
황금기를 맞이한 그들은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상록수><폭군 연산> 등
불후의 명작을 쏟아내며 대한민국 영화계를 평정했다.
그렇지만 행복도 잠깐,
신인 여배우를 발탁한 신상옥이 여배우와 하룻밤 풋사랑이 아니라
오수미가 신상옥의 아이를 낳게 되자 그들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곧 정리 하겠다”는 신상옥의 약속과는 달리
오수미가 둘째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신상옥과 이혼했다.
이후 신상옥의 그늘을 벗어나 안양예술학교 운영과
독자적인 영화 제작과 감독을 병행하던 최은희는
영화 합작 사업을 하자는 김규화와 이상희의 꾐에 빠져
홍콩에 들렸다가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그들은 북한 공작원이었다.
1978년 1월 4일.
홍콩 퓨라마 호텔에서 눈이 가리운 채 납치된 그녀는
북한 공작선에 태워져 황해도 해주에 내리게 된다.
이후, 북한은 그녀의 납치사실마저 부인해오다
미국과 일본의 정보당국이 언론에 흘리는 정보 때문에 사실로 실토했지만
북한의 폐쇄성 때문에 그녀가 간간이 영화에 출연했다는
단편적인 소식만 한국에 전해졌을 뿐
북한에서 그녀의 행적은 그녀만이 알 뿐이다.
최은희 그녀가 최근 자신의 치부까지 드러내는 회고록을 집필 중에 있다니
인민군에 끌려 다닐 때
<일개 소대에게 당했다. 그래서 애도 못 낳는다>는 소문과
<수안보에서의 최은희를 잊지 못하는 김일성이 김정일을 시켜서 그녀를 끌어갔다>는 납북당시 소문을 긍정할 것인지 터무니없는 헛소문에 불과하다고
일축할는지 두고 볼 일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북한에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신상옥도 북한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북한당국의 요구에 순응하며 영화를 만들던 신상옥은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최은희를 데리고 탈출에 성공했다.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인생역전이다.
탈출 후, 한국으로 곧바로 오고 싶었으나
정치적인 여건상 미국에 한동안 머물다 한국에 들어왔다.
돌아와서 영화에 손을 대었으나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간간히 연극무대에 오르면서 조용히 살고 있다.
철없는 나이 열여섯에 집을 나온 가출 사건으로 시작한 그녀의 탈출 행로는
김학성이라는 아내로부터 탈출.
끌려가던 인민군으로부터 탈출.
신상옥이라는 남자로부터 탈출.
납치됐던 북한으로부터 탈출의 행로였다.
이다음 그녀가 선택한 탈출은 어디로부터 탈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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