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신과 심훈 그리고 상록수와 최용신 기념관
심훈의 상록수! 그 주인공 최용신!
최용신은 심훈의 상록수로 더 빛을 발하고
최용신이 있었기에 상록수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습니다,
심훈은 경성방송국의 아나운서의 꿈을 안고 1931년 공개 채용에
응시했지만 31명 가운데 필기고사로는 1위를 했어도 실기에서
워낙 출중했던 축구중계방송의 창시자 박충근님에게 밀려
아나운서의 꿈을 접었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방송국에 들어와 프로그램을 제작했지만
이곳은 잠시 동안이었습니다 .
당대의 명사 심훈님보다 11살 위의
큰 형님 심우섭님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경성방송국 우리말 방송의 책임자였습니다. 심훈
(본명 심대섭)과 천풍 심우섭 두 분 다 방송에 인연이
깊었습니다. 제가 심훈이나, 최용신, 상록수 에
더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79-4
상록수역에서 걸어 10분정도의 거리에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 최용신의 묘가 있고 최용신의 활동
중심지, 1907년부터 있었던 청곡교회가 우리말 이름
샘골교회로 이름이 바뀌고 새로운 모습으로 지어
졌습니다, 또 2007년에 지은 최용신 기념관도 있고
다른 유적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들린 것은
2010년 4월 7일이었습니다 .
최용신의 농촌계몽운동은
기독교계통의 농촌운동의 일환으로
계획되고 추진된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YWCA의 농촌파견교사로 임명되어 1931년
10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리에 파견되면서
그녀는 농촌을 사랑하고 농민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
농촌 아동을 민족의 동량으로 키우는 구국
교육운동에 발 벗고 나섰습니다.
신여성으로서의 자긍심과 처녀로서의
수줍음과 부끄러움도 버린 채 직접 발을 벗고
논에 들어가 모를 심고 김을 매며 농촌부녀자들과 함께
밭을 매면서 구슬땀을 같이 흘리고, 밤에는 한글강습의
야학을 열고 아동들과 한글·산수·재봉·수예 등을
가르치는 강습소를 운영하는 등 1인 4역
또는 5역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천곡(샘골)에서 가르치고 배우고자 해도
마땅한 교육장이 없어 강습소 설립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천곡에 온지 8개월 만에 강습소 인가를
받고 1년 3개월 만에 강습소를 신축해서 110명의
아동들을 교육시키는 학교로 키웠습니다.
천곡강습소의 교장 겸 교사로서,
마을 주부들의 주부회 지도자로, 마을
청년회 후원자로, 천곡교회 교인으로 천곡의
온 마을에 그녀의 손길과 마음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최용신님 생애
1909년 8월 12일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崔昌熙씨 차녀로 출생
2남 3녀( 언니 - 시풍 - 시항 - 용신 - 용경) 원산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마을 두남리는 일찍 기독교가 들어오고
학교가 세워져 1918년 3월 20일 9세살로 두남학교 입학했고
1920년 4월(11세) 元山 樓氏女子普通學校로 전학 1924년
3월(15세) 원산 루씨 여자보통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24년 4월(15세) 元山 樓氏女子高等普通學校 입학
1925년(16세) 한동네 건너 살고 교회 회장이던 김학준군과 약혼
1928년 3월(19세)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최우등 졸업.
(루씨학교는 선교사 루씨 컨닝킴
(Lucy Cuinggim)의 이름을 따 세워진
우리나라 5대 여자 사립(배화,이화,호수돈,
숭의여고)중의 하나입니다.)
1928년 4월(19세) 서울 여자협성신학교 입학
(현 감리교 신학 대학교). 학제가 변경되어 (4년제,남녀공학)
1929년 새로이 뽑은 남학생과 이미 입학한 여자신학생이 합해져
남녀공학이 된 협성신학교 다님1929년(1학년)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 농촌 실습
1930년(2학년) 포항 옥마동 농촌 실습
1931년 4월(3학년) 교내 스트라이크 사건 주도
1931년 10월(22세) 경기도 청석골에 옴
1931년 10월 11일 청석골 예배당을 빌려
한글, 역사, 산술, 초보의 재봉, 수예 가사, 노래공부,
성경공부 등 시작. 1932년 5월 샘골 학술 강습소 창설인가 받음
1932년 7월 경성 YWCA회관에서(제10회 Y전국대회) 샘골활동 보고
1932년 8월 학원건축 발기회 조직. (샘골부인 친목계, 염석주 등
지역 유지, YWCA 재정후원)
1932년 10월 강습소 짓는 계기 마련을 위해 추석놀이 개최
1932년 10월 27일 강습소 정초식 거행
1933년 1월 15일 2개월여만에 강습소 낙성식
1933년 10월 5일 학부형, 지역유지들이 참석한 운동회 개최
1933년 10월 YWCA의 재정 후원 절반으로 삭감
1934년 YWCA의 재정 후원 완전히 끊김
1934년 10월 30일 '여론' 잡지에 도움을 호소하는 '농민의 하소연' 기고
(재정도 어려워지고 주재소등 감시의 심해졌으며 때로는
경찰에 끌려가 곤욕을 당하는등 어려움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1934년 3월(25세) 일본 유학, 고베 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 입학.
1934년 7월 고베신학교 학내잡지인 푸른 하늘에 나의 소감 기고
1934년 9월 각기병의 악화로 6개월만에 귀국
1935년 1월 장중첩증으로 수원도립 병원 입원.
1935년 1월 23일 0시 20분 운명 (26세, 만 25년 6개월)
외용신님과 약혼한 김학준님은
대학의 강단에서 활동하면서 농촌 계몽등의
활동을 하다가 1975년 세상을 뜨셨습니다. 최용신님
묘 옆에 안장해 달라는 김학준님의 유언에 따라
최용신 기념관 옆 따뜻한 곳에 두 분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나는 2011년 6월에 처음으로 최용신기념관에 갔다..기념관 안팍 경내를 두루 살피다 묘소에 이르자 약혼자의 묘가 함께있는것을 보고 놀랬다... 약혼자였지만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자녀 5명을 둔 사람이..... 또 그런 유언을 하다니 ..... 도대체 어떤분들이 이런 일을 이렇게 했나....... 수고하는 기념관 직원에게 톤 높은 이야기를 나누웠다...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 자기네 일을 자기네 뜻대로 한 일을 보고 내가 기분이 언짢은 것은 무슨 뜻일까..!!!! ....
나는 2011년 6월에 처음으로 최용신기념관에 갔다..기념관 안팍 경나는 2011년 6월에 처음으로 최용신기념관에 갔다..기념관 안팍 경내를 두루 살피다 묘소에 이르자 약혼자의 묘가 함께있는것을 보고 놀랬다... 약혼자였지만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자녀 5명을 둔 사람이..... 또 그런 유언을 하다니 ..... 도대체 어떤분들이 이런 일을 이렇게 했나....... 수고하는 기념관 직원에게 톤 높은 이야기를 나누웠다...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 자기네 일을 자기네 뜻대로 한 일을 보고 내가 기분이 언짢은 것은 무슨 뜻일까..!!!! .... 내를 두루 살피다 묘소에 이르자 약혼자의 묘가 함께있는것을 보고 놀랬다... 약혼자였지만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자녀 5명을 둔 사람이..... 또 그런 유언을 하다니 ..... 도대체 어떤분들이 이런 일을 이렇게 했나....... 수고하는 기념관 직원에게 톤 높은 이야기를 나누웠다...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 자기네 일을 자기네 뜻대로 한 일을 보고 내가 기분이 언짢은 것은 무슨 뜻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