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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맨발의 청춘, 드디어 별들의 고향으로 지다......영화배우 신성일 별세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24. 12:53

5098대 1 경쟁률 뚫고 배우의 길… 영화처럼 살다간 ‘맨발의 청춘’

입력 2018.11.04 09:31

수정 2018.11.04 20:29

21면 0단

                                                        
                    

영화배우 신성일 별세

지난 10월 4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신성일씨의 모습.

충무로의 가장 큰 별이 떨어졌다. 20세기 후반 한국영화의 대명사였던 영화배우 신성일(본명 강신성일)씨가 4일 오전 2시 25분 전남대병원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고인은 한국영화 99년 역사에서 첫손에 꼽힐 스타다. 출연작은 600여 편에 이른다. 507편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한복판에 있었고, 1970~1980년대 한국영화의 쇠퇴를 지켜봤다. 충무로가 부침을 겪어도 그는 언제나 일급 스타였다. 대표작을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9년 신필름 신인 배우 오디션을 통해 충무로에 발을 디뎠다. 오디션에 원서를 쓰지 않고 오디션장에 구경 갔다가 당시 충무로를 호령하던 신상옥 감독의 동료 이형표 기술감독의 눈에 띄어 오디션을 본 후 신 감독에게 바로 발탁됐다. 오디션 경쟁률은 5,098대1이었다. 한국영화계를 뒤흔들 이름 ‘신성일’은 이때 생겼다. 신 감독은 ‘뉴 스타 넘버원’이란 뜻으로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고인에게 지어줬다. 1960년 신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은막에 데뷔했다. 대가족 속의 고등학생 막내아들 역할이었다. 훗날 배우자가 되는 당시 최고의 청춘스타 엄앵란씨와 이 작품으로 첫 대면을 했다. 짧게 깎은 머리에 조각도로 다듬은 듯한 얼굴이 단번에 대중의 눈을 사로잡았다. 고인은 연기 경험이 거의 없어 엄씨가 자신과 함께 연기할 때는 싫다는 표정이 역력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연산군’(1961) 등을 거치며 연기이력을 쌓아가던 고인은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로 스타덤에 올랐다.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에서 밀수 일을 하는 폭력배 서두수를 연기하며 당대 청춘의 상징이 됐다. 실업이 넘치고 전쟁의 상흔을 채 못 벗은 시기, 불우한 사회계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위기에 처한 상류층 여인 요안나(엄앵란)를 구해준 후 그녀와 사랑에 빠지나 비극적 최후를 맞는 모습에 대중은 눈물을 흘렸다. 고인은 ‘맨발의 청춘’ 촬영 즈음 상대배우 엄앵란씨와 스크린 밖에서도 사랑에 빠졌고, 1964년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며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1964년 고인이 주연한 영화는 ‘맨발의 청춘’을 포함해 32편. 그나마 이는 적은 편이다. 고인은 전성기 때 1년에 40~50편씩 영화에 출연했다. ‘날개’ ‘만추’ ‘안개’ ‘군번 없는 용사’ ‘겨울여자’ ‘내시’ ‘길소뜸’이 그의 대표작 중에 대표작으로 꼽힌다.

1979년 신성일, 윤정희가 공연한 김수용 감독 연출의 '사랑의 조건' 의 한 장면.

연기를 넘어 대외 활동도 활발했다. 한국배우협회 회장,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을 역임했다.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1989년 성일씨네마트를 설립하고 ‘코리안 커넥션’ 등을 제작했다. 정치권에서도 활약했다. 대중문화인, 특히 영화인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서는 영화인의 정치 활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였다. 여의도 문을 세 번두드린 끝에 2000년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고인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치료에 전념해왔다. 투병 중에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발휘해 차기작 출연 의사를 강하게 밝혔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에 초청됐고, 건강한 모습으로 행사를 소화해 건강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지난달 열린 부산영화제 개막식에도 참석했다.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68, 1990), 아시아영화제 남우조연상(1980)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 부인 엄앵란씨와 아들 석현, 딸 수화ㆍ경아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 발인은 6일, 장지는 경북 영천이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영원한 '맨발의 청춘' 천상 스크린으로

입력 2018.11.04 15:47

수정 2018.11.04 20:26


                          
                    
4일 별세한 배우 신성일. 한국일보 자료사진

충무로의 가장 큰 별이 떨어졌다. 20세기 후반 한국영화의 대명사였던 영화배우 신성일(본명 강신성일)씨가 4일 오전 2시 25분 전남대병원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고인은 한국영화 99년 역사에서 첫손에 꼽힐 스타다. 출연작은 600여 편에 이른다. 507편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한복판에 있었고, 1970~1980년대 한국영화의 쇠퇴를 지켜봤다. 충무로가 부침을 겪어도 그는 언제나 일급 스타였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9년 신필름 신인 배우 오디션을 통해 충무로에 발을 디뎠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은막에 데뷔했다. 대가족 속의 고등학생 막내아들 역할이었다. 고인은 62년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로 스타덤에 올랐다. 64년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에서 밀수 일을 하는 폭력배 서두수를 연기하며 당대 청춘의 상징이 됐다. 고인은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 엄앵란씨와 1964년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며 장안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날개’ ‘만추’ ‘안개’ ‘군번 없는 용사’ ‘겨울여자’ ‘내시’ ‘길소뜸’이 고인의 대표작 중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연기 외 활동도 활발했다. 한국배우협회 회장,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89년 성일씨네마트를 설립하고 ‘코리안 커넥션’ 등을 제작했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의정 활동을 했다.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치료에 전념해왔다.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68, 1990), 아시아영화제 남우조연상(1980)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 부인 엄씨와 아들 석현, 딸 경아ㆍ수화씨가 있다. 장례식은 영화인장으로 엄수된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 발인 6일 장지 경북 영천.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영화배우 신성일 별세

애증의 남편 신성일을 '동지'라고 부른 엄앵란

입력 2018.11.04 11:57

                       
                    
영화배우 신성일, 엄앵란 가족

"우리는 동지야. 끝까지 멋있게 죽어야 한다."

고(故) 신성일(본명 강신성일·81)이 폐암 진단을 받은 지난해 그의 아내 엄앵란(본명 엄인기·82)은 수천만 원의 병원비를 부담했다.

지난 3월 MBC TV에서 방송한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 두 사람의 딸 수화 씨가 밝힌 내용이다.

<스크린 60년 그안팎>결혼하던해인 64년 신성일과 공연한 '동백 아가씨'에서의 엄앵란(왼쪽). 60년대 스크린의 신데렐라. 1회 청룡상 연기상도 받아.

수화 씨는 엄앵란이 신성일에 대해 "내가 책임져야 할 큰아들"이라고 표현하며 "내가 먹여 살려야 하고, 죽을 때까지 VVIP 특실에서 대우받고 돌아가셔야 한다. 작은 방에 병원비도 없어서 돌아가시는 것 나는 못 본다. 내 남편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남편을 '동지'로 표현했다고 했다. 사랑과 원망, 슬픔, 연민 등이 함축된 뜻으로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54년 전인 1964년 11월 두 사람의 결혼식은 말 그대로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맨발의 청춘 (The Barefooted Young) 1964 | 감독 : 김기덕 | 관련인물 : 신성일, 엄앵란

당시 절정의 인기에 있던 신성일은 영화에서 만난 톱스타 엄앵란과 지금도 고급 예식장으로 꼽히는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을 보러온 하객과 시민이 4천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확연히 다른 생활 습관 때문에 1975년부터 이미 별거했음이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 밝혀졌다. 그리고 신성일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외도를 '자랑스럽게' 공개하면서 오랜 기간 마음고생을 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이 이혼한 줄 아는 사람도 많았지만, 엄앵란은 이혼만큼은 하지 않았다.

엄앵란은 2011년 12월 SBS TV '배기완 최영아 조형기의 좋은아침'에 출연해서는 "(사람들이) 심심하면 이혼했다고 한다. 신문에서 언급한 대로 이혼했으면 50번은 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도 있고 저렇게 사는 것도 있지 어떻게 교과서적으로 사느냐"며 "악착같이 죽을 때까지 (신성일과) 살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7월 채널A '명랑해결단'에서는 "과거 역술인들이 우리 두 사람의 궁합에 대해 제게는 최악이지만 남편에게는 최고라고 했다. 부모님도 결혼을 반대했는데 당시에 신성일에게 푹 빠져 있었기에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는, 두 사람의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의 뒷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도 "궁합이 안 좋다고 해도 부부가 서로 극복하며 헤쳐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엄앵란이 갑작스럽게 유방암에 걸려 부분 절제 수술을 받는 등 투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20여 년 넘게 집을 나간 신성일이 이를 계기로 돌아와 엄앵란을 간호했다. 이에 대해 수화 씨는 "현재도 각자 생활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별거 아닌 별거'가 됐다"고 했다.

이어 신성일도 폐암으로 투병하면서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서로의 희로애락이 담긴 삶의 과정을 모두 지켜본 '동지'가 됐다.

엄앵란은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방송 말미에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변하지 않고 의지하는 기둥입니다."

4일 저녁 수영만 요트경기장 야외특설무대에서 열린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개막식에 참석한 영화배우 신성일-엄앵란 가족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혼 생활 역시 영화처럼 보낸 두 사람은 신성일이 4일 병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연합뉴스


영화배우 신성일 별세

[화보] '충무로 큰 별' 신성일의 영화 같던 삶

입력 2018.11.04 12:37

                     

충무로의 가장 큰 별 신성일씨가 4일 오전 2시 25분 전남대병원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신씨는 한국영화였고, 한국영화는 신씨였다. 신씨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대중의 귀와 눈을 사로잡았다.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 엄앵란씨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는 등 스크린 안팎에서 늘 화제몰이를 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신씨의 삶을 사진으로 돌아봤다.

신성일(맨 왼쪽)의 데뷔작인 '로맨스 빠빠'(1960). 신상옥 감독 연출 작품으로 신성일은 대가족의 막내아들인 고교생을 연기했다. 당대 최고 청춘스타 엄앵란은 신성일의 여동생 역을 맡았다.
영화 '맨발의 청춘'(1964)에서 신성일(오른쪽)과 엄앵란이 신분차이를 넘어선 연인 사이를 연기하고 있다. 신성일은 이 영화로 충무로 최고 스타로 자리매김한다.
영화배우 신성일, 엄앵란 가족의 단란했던 모습. 신성일과 엄앵란은 세간의 화제를 뿌리며 결혼했고, 결혼 생활도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결혼하던해인 64년 신성일과 공연한 '동백 아가씨'에서의 엄앵란(왼쪽).
영화 '창공에 산다' (1968)의 신성일.
영화 '언제나 타인'(1969)의 신성일과 문희.
영화 '그밤이여 다시한번'(1969)에서 김지미와 신성일.
이장호 감독의 데뷔작 '별들의 고향'(1974)에서의 신성일.
./그림 9영화 '겨울여자'(1977)에 출연한 신성일과 장미희.
배우 신성일이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 봉송에 나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0년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신성일이 후보연설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7년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개막식에 참석한 영화배우 신성일-엄앵란 가족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의 주인공인 배우 신성일이 지난해 10월 14일 오후 부산 해운대 비프빌리지에서 열린 핸드프린팅 행사에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출처 : 꿈과 사랑이 익어가는 마을
글쓴이 : 초지일관위풍당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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