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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왕실 여자들은....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25. 08:10
신라왕실 여자들은....|


신라 24대 진흥왕(서기540.7~576.8 재위)이 7살의 나이로 보위에 오른 후,  섭정을 하던 母后 지소태후와 왕비인 사도부인朴氏는 왕이 親政을 앞두었을 즈음, 고부간 갈등이 나날이 극심해져서 나중에는 지소태후 계열의 진골정통과 사도왕후 계열의 대원신통이란 파벌이 생깁니다.

 

이와 같은 파벌은 왕비를 배출하기 위해 왕족간의 갈등에서 출발하는데,  신라왕실의 왕족은 朴,昔, 金氏로 구성되었고,  당시 족벌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 제도가 대세를 이루던 시절이었습니다.  숙질간이나 사촌간 결혼이 예사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요즈음 유교적 윤리관이나 가치관의 기준으로 볼 때 도대체 용납되지 못할 일인 것입니다.

 

진흥왕 모후 지소태후는, 할아버지인 22대 지증왕 재위시절에 國公 지위에 있던 원종태자(법흥왕)와 보도부인 金씨(21대 소지왕의 딸)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동생 입종이 있었는데,  할아버지 지증왕을 비롯한 어른들이 입종과 지소를 결혼시켰고, 지소는 서기 534년 입종과 사이에서 후일 진흥왕이 되는 삼맥종을 낳습니다.

 

지소는 남편 입종이 병석에 있을 때, 왕족의 일원이었던 朴이사부를 정부로 삼고 있다가 남편이 죽은 뒤, 아버지 법흥왕은 그녀를 아끼는 재상 박영실에게 재혼을 시켜 형식상 부부가 되었을 뿐  그녀는 박이사부와  관계를 끊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서기 540년 7월 법흥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삼맥종이 7살 나이로  제 24대 진흥왕으로 즉위하게 되면서 지소는 태후(왕의 어머니)의 신분이 됩니다.

 

지소는 진흥왕 즉위를 전후하여 朴이사부와 사이에 1남 3녀(세종, 황화, 숙명, 송화)를 낳으므로써, 진흥왕에게는 4명의 異父동생이 생겼습니다.  법흥왕이 사망하기 전 왕실에서는 차기 왕으로 옥진궁주가 낳은 법흥왕의 서자 비대가 거론되었으나, 왕실내 실세인 지소공주와 박이사부가 손을 잡고,  비대왕자의 외조부인 김위화랑까지 끌어들이는 바람에 왕위는 진흥왕에게 승계되었고, 지소는 태후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진흥왕은 동갑네기인 재상 박영실의 딸 사도와 결혼하였는데,  그 결혼이 성사된 것도 조정 실권을 쥐고 있던 법흥왕의 총신 박영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삼맥종을 왕위에 올려 놓기 위한 지소태후의 철저한 계산 때문이었습니다.  박영실은 법흥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한 때 지소의 남편으로 거론 되었던 인물입니다. 아무튼 목적을 이룬 지소태후는 사도왕후를 내쫒고 그 자리에 자신이 이사부와 사이에서 낳은 딸 숙명 왕비로 만들기 위해 진흥왕의 후궁으로 만듭니다.  씨 다른 남매간을 부부로 만든 것이지요.

 

보이지 않는 알력과 계략이 난무하는 가운데, 진흥왕이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했고,  박영실 사후에 지소태후가 사도왕후를 내쫒을려는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지만, 진흥왕이 사도왕후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여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왕의 모후와 왕비 사이는 악화일로에 치달아 저마다 자기 편을 만들기 위해 태후와 왕비는 경쟁하듯 왕의 후궁들을 들여 앉혔습니다.

 

진흥왕의 후궁은 1숙명궁주 朴씨, 2백제공주인 소비 부여씨, 3월화궁주 김씨, 4금진궁주, 5보명궁주, 6미실궁주등인데, 이들은 대부분 지소태후가 정략적으로 끌어들인 후궁들이고, 미실궁주만 예외적으로 사도왕후의 편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왕족 여자들은 지소태후가 이끄는 眞骨正統, 사도왕후가 이끄는 大元神統으로 나뉘어 신라 말기까지 왕비 또는 후궁들을 배출하기 위해 경쟁하는 파벌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왕족 여자들이 남편 외에 자기 마음에 드는 남자와 동침하는 것은 특권중에 특권이었고,  심지어는 다른 남자의 자식을 잉태하여 낳아도 아무도 시비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편,  임금도 왕실내 여자들은 처녀나 유부녀 가릴 것 없이 마음대로 동침할 수 있었으며,  임신한 유부녀와 성관계를 하여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마복자라고 해서 출세가 보장되었다 하니 오늘날의 도덕 기준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풍습이 신라왕실에서는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 중년나침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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