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영화 `밀양`을 보고
아침밥상에서 불쑥 아들 녀석이
"아빠, 오늘 시간 있으셔요?"
한다.
"무슨 시간?"
"놀 시간"
"무슨 놀 시간?"
"엄마랑 영화보시라구요"
군에서 제대하자 마자 복학까지는 시간이 남는다며 제대 3일만에 영화관에 알바를 나가는 녀석이 공짜표를 2장 구해놨으니, 엄마랑 영화보고 오란다.
생각해보니, 아내랑 영화같이 본지도 10여년이 넘는 것 같다.
늘 바깥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같이는 물론 혼자서도 영화본지 오랜데, 아들 녀석이 둘이 보고 오라니 시간이 안된다고 할 수도 없고 꼼짝없이 봐야만(?) 했다.
아들 녀석은 밀양을 보라며, 인터넷을 뒤지며 몇시에 볼거냐고 묻는다.
저녁 8시30분으로 아들이 예약을 해놓아 출근한 후 영화관 앞에서 아내를 만나기로 하였다.
전도연이 칸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이라 기대를 갖고 실로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전도연의 여우주연상 수상 직후라서 그런지, 제법 객석이 거의 찼다.
이미 박하사탕으로 묵직한 주제를 가벼운 터치로 잘 그려낸 이창독 감독의 작품답게 소박하게 시작하는 '밀양'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무작정 유치원생 아들을 데리고 찾아가는 전도연.
밀양에 거의 도착하여 길에서 차가 고장나 차 수리하러 나타난 카센터 사장 송강호와 운명처럼 만나며 전개되는 이 영화는 조그만 시골 동네에서 마당발인 송강호의 촌스러우면서도 순박한 연기가 단연 돋보였다.
남편을 잃고 정착한 밀양에서 아들마저 유괴범에게 잃은 비극적인 여인.
피아노학원 앞의 약국 약사로보터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면서 새롭게 맞이한 신과 거기서 느끼는 평온함. 하느님을 알아 이렇게 행복할 수 없다며 교인들 앞에서 간증을 하고...
서울에서 온 피아노학원 강사를 짝사랑하며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이것 저것 도와주며 졸졸 쫓아다니더니 급기야 교회까지 쫓아와 더불어 교인이 된 카센터 사장 송강호의 코믹 연기가 제법 무거운 주제인 이 영화를 감칠맛나게 하였다.
마침내, 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유괴범을 교도소로 면회가서 용서해주겠노라고 선언하고는 교도소로 향하는 전도연.
목사님은 용서가 쉽지는 않은 거라며, 잘 다녀오라고 기도해주고.
교인들은 꼭 면회가서 용서해야하냐고 우려를 하고..
송강호도 운전해주면서 꼭 가야하냐고 물어보지만, 이미 전도연은 하느님을 알았기에 용서해주겠노라고 교도소로 향한다.
유괴범을 면담하며 난 하느님을 알아 당신을 용서하겠노라고, 당신도 하느님을 영접하라고 권면하는데,
유괴범은
"고맙습니다. 저도 이 교도소에 와서 무척 마음이 괴로웠는데 하느님을 알고 지금은 무척 마음이 평온합니다.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고 하느님께 용서받았습니다. 회개하고 용서받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평온할 수 없습니다. 용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미 하느님 한테 용서받았다는 이 말 한마디에 충격을 받고 쓰러지는 전도연.
"내가 용서하기 전에 어떻게 하느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어? "
라며, 신을 부정하고 교회 집회에 몰래 잠입하여 앰프에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노래를 틀고는 빠져나오고, 마침내 정신이 돌아 자신을 교회로 인도하였던 약사 장로를 유혹하여 섹스하자고 덤벼들고 하느님 알기 전보다 더욱 더 괴로워하는 전도연.
결국 자신의 팔에 동맥을 끊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퇴원 후 미장원에서 만난 유괴범의 딸을 보고 다시 괴로워하며 미장원을 뛰쳐나오는 전도연.
인간 실존, 신 등등 무거운 주제로 영화를 보고 나서도 한참이나 생각케 하였던 영화.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슬프고 무거운 주제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간간히 나오는 송강호의 코믹과 천방지축 나대는 시골 유지(?)의 순박한 촌스러움으로 웃음을 터뜨리면서 2시간1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재미있게 보았다.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 신을 알아 평온과 행복을 되찾고, 새롭게 알게된 신에 대한 근본적 회의로 몸부림치는 내면세계를 잘 표현한 전도연의 연기는 과연 세계 무대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 만큼 압권이었다.
전도연도 말했지만, 송강호의 뛰어난 연기력도 전도연을 부각시키기에 충분할만큼 돋보였고.
무엇보다 무거운 주제를 일상적인 삶의 가벼운 구도로 처리하면서 전도연, 송강호 2 배우를 캐스팅한 이창동 감독의 능력 또한 매우 훌륭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고 하겠다.
신적 존재와 인간 실존의 무거운 주제를 소프트하게 처리하면서 아무런 답도 제시하지 않고 그냥 던져주는 이창동 감독.
다시 한번 이창동 감독의 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 때 예수라는 존재를 알고 나가기 시작했던 성당에서 한때는 제법 남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던 나..
이제는 신앙적인 열정이나 감흥보다, 그저 습관처럼 미사에나 참여하고 있는 나.
이런 나에게 다시한번 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물음에 대해 섣불리 답을 내리기 보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삶은 영원히 이 질문을 해결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아무튼 아들 녀석 덕분에 오랜만에 아내와 극장에서 데이트를 하였고, 다람쥐 쳇바퀴처럼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의 삶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영화관 보러 가기 전, 아들 녀석이 영화보러 가라고 해서 거부할 수도 없고 오늘 저녁에 가야한다며 술 한잔 하자는 선배의 제의를 완곡히 거절하였는데, 선배의 대답이 계속 머리속에 여운이 남는다
"오늘 집에 가서 아들 녀석한테 이렇게 말해야지. 아버지가 꼭 엄마랑 영화보러 가고 싶은 건 아닌데, 누구는 아들이 영화표 끊어줘서 영화보러 간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