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 영화 ‘밀양’을 통해 생각해보는 기독교
집사님 ‘밀양’ 보셨나요?
- 영화 ‘밀양’을 통해 생각해보는 기독교
제가 참 좋아하는 배우, 송강호와 전도연이 나오는 영화여서 개봉전부터 기대를 갖고 기다렸습니다. 지방 도시 밀양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영화제목으로 뽑혀지니 이름이 참 이쁘네요. ‘Secret Sunshine' 영어 제목도 좋구요.
굳이 유명 영화제에서의 수상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오랜만에 만나는 좋은 영화입니다. 탄탄한 각본과 영화속 인물들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한 성숙한 연기들, 특히 저에게는 세상살이의 많은 것을 깊이 생각하게끔 하는 영화여서 더 그렇게 느꼈습니다. 개봉전 사전 홍보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며 영화를 만든 것 같습니다.
‘밀양’을 보는 내내 저는 참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몇몇 장면들에서는 불편한 심정에 어기적거리기도 했구요.
인생의 좌절을 겪은 후 아이와 함께 밀양으로 살러 온 신애, 좁은 동네라 쉽게 신애의 이야기를 알게 되는 이웃집 약사는 신애를 교회로 전도하려고 합니다. 이 영화대목에서 약간의 웃음과 끌끌거림으로 반응하는 관객들, 기독교의 전도 모습을 특별히 희화화한 것도 아니고,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전도 풍경임에도 보고 있노라니 무언가 불편합니다.
이 약사는 새 이웃 신애에게 관심을 표현하고 또 나름대로 지극한 심정으로 다가갑니다. 아마 먼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예수만 믿으면 신애의 아픔이 치유되고,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었겠죠.
성실하고 착한, 많은 기독교인들을 보아온 저로서는 신애를 전도하고자 하는 영화속 약사의 진정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정말 좋은 것, 진리를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이겠죠. 하지만 이 전도의 과정에 상대방의 생각과 처지에 대한 고려와 존중이 빠져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행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또 확신이 있다 해도, 받는 사람에게는 불편하고 기분 나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보통 우리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배워왔기 때문에, 종교적인 관점에서 비기독교인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재단을 갖고 있습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각자의 종교적 심성과 생각에 대한 존중없이 나만 옳다는 생각으로는 비기독교인과의 진정한 대화와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사상의 역사를 조금만 들춰보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기독교 교리는 시대와 공간에 따라 여러 모양과 내용으로 변화되어 온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신앙, 특히 교리가 완전한 것일 수 없다는 전제속에, 종교적 진리를 찾아가는 동반자로서 이웃을, 비기독교인들을 만나는 겸손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영화 ‘밀양’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중 하나는 기독교의 구원관(회개와 용서)에 대한 문제입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고통속에 방황하던 ‘신애’는 기독교 신앙을 통해 살인자를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고 감옥으로 살인자를 면회하러 갑니다. 그런데 막상 살인자를 만나보니, 그 또한 감옥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아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총을 ‘신애’와 함께 나눌 수 있어 참 감사하다고 오히려 권면의 말까지 전합니다.
희생자와 살인자, 모두가 구원받았으니 해피엔드로 다 잘된 것인가요? 하지만 ‘신애’는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희생의 당사자인 자신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범죄자가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느냐며 하나님과 맞서게 됩니다.
우리의 기독교 교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극악한 살인자라 하더라도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 되었으니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굳이 살인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인간 자체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요?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살인자라 하더라도 그저 믿기만 하면, 아니 믿는다는 자기선언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요?
저는 흔히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직 믿음으로’라는 명제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에 대해 생각할 때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말한 성서(사도바울)의 표현만을 중심에 놓는데, 야고보서나 여러 다른 성서의 구절들은 행위(생활)가 없는 믿음은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에 대한 사도바울의 강조는 율법적 행위에 매여있던 당시 유대 전통과의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중요한 구호였던 ‘오직 믿음으로’ 역시 부패한 당시 교회가 ‘공덕을 통한 구원’이라는 자력구원론으로 빠질 수 있는 것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강조였지, 행위를 부차적인 요소로 놓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삶은 복음을 추상적으로 선언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일반적 생활인 율법적 전통을 몸으로 깨뜨리고 바로 세운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가치 추구를 ‘행위(생활)’가 전제되지 않은 ‘믿음’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가치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화 ‘밀양’에서,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살인범 스스로의 고백은 자기 위안의 선언일 수는 있지만, 용서와 구원의 완결이라 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나치치하 히틀러 암살사건에 참여하였다가 사형당한 신학자 본회퍼는 실천없는 신앙에 대해 ‘값싼 은혜’라고 경고합니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 상품 같은 은혜이며, 싸구려 죄의 용서, 싸구려 위로, 싸구려 성만찬입니다. 교회의 무진장한 창고에서 생각도 없이, 끝도 없이 경박한 손으로 털어내는 은혜입니다. 가격도, 경비도 없는 은혜입니다. … 값싼 은혜는 교리, 원리, 체제로서의 은혜입니다. 일반적인 진리로서 죄의 용서이며, 기독교적인 신론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도 죄를 용서하는 설교요, 공동체 훈련도 없이 베푸는 세례요, 죄의 고백도 없이 참여하는 성만찬이요, 인격적인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입니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시고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 이것이 값싼 은혜입니다.」
본회퍼『나를 따르라』, 채수일, "디트리히 본회퍼의 깊이와 넓이", <기독교 사상>에서 재인용
최근 새로운 교회모델로 주목받고 있는 미국 세이비어교회는 150명밖에 안되는 작은 교회지만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70여개의 복지 사역에 연간 1,000만불이상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생활속에서 철저하게 신앙과 섬김의 훈련을 받아야만 교인으로 등록할 수 있다고 하네요. 세이비어교회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기 결단이 필요한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교회는 겸손한 ‘신앙’과 사랑의 ‘행동’을 어떻게 실천해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훈련보다는 그저 배가운동으로 ‘우리만의 교회’ 규모 키우기에만 전력을 기울이며 ‘값싼 은혜’를 뿌려대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야 할 지점입니다.
단지 영화 ‘밀양’의 질문뿐만 아니라, 최근 한국교회의 모습과 기독교교리, 기독교인의 일상생활 등 한국 기독교 전반에 대한 다양한 문제제기들이 던져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고백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자기실존으로서의 각자의 기독교적 삶과 신앙에 대한 진지한 학습과 성찰을 통해 자신있게 홀로서기하는 결단이 필요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