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예술문화

[스크랩] 영화 『밀양』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7. 19:37

 

 

 

 

 

 

 

 

영화 『밀양』

 

 

영화 「밀양」을 보았는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가.

 

종교가 “원수를 사랑하라” 말하니, 또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얻었다고 하여

진정 어린아이를 유괴하여 살해한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는가.

 

용서라는 것이 용서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되어지는 일인가.

종교에 심취하여 감동의 마음으로 혼신함으로써 용서는 생겨지는 것인가.

 

 

 

 

영화 「밀양」은 기성종교를 비웃는다.

하느님이 여기에도 존재하신다 하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며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던 영화 초반부의 신애가 차라리 신선하다.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러 교도소를 찾아갔을 때 너무 말쑥하고

평화로운 태도로 살인범이 하는 말...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못난 영혼을 용서하시고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

해 주셔서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한다.

용서하러 갔는데 하느님이 먼저 용서해서 그 사람은 너무나도 평온하고

구원을 받았단다. 기가막힐 노릇이다.

용서해 주러 갔던 죽은 아이의 엄마가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신애는 눈이 뒤집히고 종교도 끝이난다.

“용서한다”는 말과, “모든 아픔은 하느님의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함”

이라는 말도 한계에 도달한다. 그 말을 사용하는자가 무지하여..

어느 절대자가 있어 이웃을 사랑하라 하여 용서하고,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아픔을 준다는 말은 근본의 뜻이 왜곡되어 버린 지 오래다.

빈약한 종교인들이 사람을 오히려 암흑의 틀에 가두어 버렸다.

 

그들보다는

그냥 신애가 좋아 무조건 헌신하는 종찬이 신성하다.

그녀가 좋아하는 일이면 따지지 않는다.

종교도 율법도 종찬 앞에서는 무력하다.

담배도 피우고 싶으면 피우고 다방레지 팬티도 자연스럽게 보고..

 

 

 

 

용서는 누가 하는가.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천사가 되고 있다는 진실을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 자.

저 높은 곳 어딘가에서 내려다보고 심판하는 하느님이 있다는 황당한

종교를 넘어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된 자.

온 우주가 하느님의 섭리이고 생명이고 사랑이며, 나 스스로가 하늘의

생명을 지닌 위대한 영혼임을 알게된 자.

 

그래서 자신을 찾는 길에 들어선 자.

 

용서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진다.

용서는 "해줄 주체도 받을 객체도 없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인식하여

그 말씀이 몸이 되게 한 자"에 의하여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다.

 

「밀양」후반부에서 신애는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

종찬은 거울을 받쳐준다.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 나에게 돌아와야 한다.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에게 오라는 예수의 말을 들려온다.

들려온다.... 

 

 

                                                                  자유영혼

 

 

 

 

 

 

 

출처 : 사라진지평선
글쓴이 : 자유영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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