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영화 밀양(비밀스러운 햇빛)
영화: 밀양(密陽)
일요일 날 나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영화 밀양을 보러가자고 했다. 제자들이 영화를 보러가자고 한 그 이유는 칸 영화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작품으로 개봉 15일도 채 안 돼 100만 관객 돌파라는 보기 드문 흥행기록을 세우고 있다는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너무나 재미도 없을뿐더러 무슨 내용인지 조차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법보신문 데스크컬럼에서 <밀양과 불교>라는 글을 읽고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여기 <밀양과 불교>라는 글을 옮겨보겠다.
** 남편과 사별한 후 아들과 함께 밀양으로 발길을 돌린 <신애> 미망인이라는 위축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자신의 부(富)를 부풀려 말합니다. 그의 허풍에 누군가는 미망인의 아들을 유괴해 살해하지요.
연이어 터진 비통을 견디지 못한 신애는 교회를 찾아가 신을 받아들이지만 다시 비난하고 맙니다. 유괴 살인범을 용서하겠다고 교도소를 찾아갔건만 그 죄수는 평화로워보였는데, 옥중에서 <하나님>을 만나 회개함으로써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랍니다.
“내가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신애는 분노는 죄수 뿐 아니라 신에게까지 가고 맙니다.
아들 잃은 슬픔에 신을 찾고 신에 의지해 분노를 삭이고 죄인을 용서 하려 했던 그녀가 다시 신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관객은 이 순간 구원과 용서는 과연 누가 하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합니다. 그리고 영화를 따라가며 진정한 구원과 용서의 의미를 찾아갑니다.
죄수, 신애, 신 이 삼각구도 속에서 도출된 구원 문제를 불교는 어떻게 바라볼까요? 우리는 신도, 죄수도, 아닌 신애에 초점을 맞추며 인연법에 따라 자비와 참회의 의미를 상기할 것입니다. **
<법보신문에서 발췌>
“영화 밀양이라는 뜻이 무슨 뜻이지?”
내가 묻자 한 제자가 대답을 하였다.
“비밀스러운 햇볕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한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비밀스러운 햇볕? 그렇다면 우리 그 비밀스러운 햇볕을 찾으러 가볼까?”
그렇게 해서 우리는 모처럼 영화관에서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왔다.
영화를 보고나서 한 제자가 나에게 물었다.
“비밀스러운 햇볕을 찾으셨습니까?”
“찾았지, 너희들은?”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하니 찾으신 그 비밀스러운 햇볕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내가 보기에 이 밀양이라는 영화는 종교적인 영화가 아니다. 영화의 각본상 기독교라는 종교의 설정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 밀양이란 영화는 오직 자기 자신의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영화라고 보면 된다.
까뮈가 쓴 <시지프의 신화>에서 시지프가 신들의 노여움으로 큰 바위로 높은 산꼭대기 위로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그 큰 바위는 산꼭대기에 올려 놓는 순간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시지프는 밑으로 떨어진 바위를 다시 산꼭대기를 향해 밀고 올라간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무서운 형벌이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당당하다. 왜냐하면 그 형벌 속에서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밀양의 여주인공도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았던 것이다.
봐라, 그녀를 쫒아 다니던 사내도 그의 삶의 방식이고, 교회에서 상처 난 영혼을 위한 기도를 하는 목사님도 자신의 삶의 방식이고, 살인자가 교도소에서 그녀하고는 상관없이 하느님으로부터 회개하고 구원을 받고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는 것도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다.
교인들이 서로 모여서 서로 위로하고 찬송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주께서 모든 죄를 다 사하여 주셔서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자신들의 삶의 방식일 뿐이다.
그녀가 처음 밀양이라는 곳에 와서 기 죽기가 싫어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허풍을 치는 것도 자신의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 자신이 지금 어떤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자신의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허풍으로 인하여 생긴 그 가슴 아픈 사건을 당하면서, 주변사람들이 자신들도 잘 알지 못하는 삶의 방식대로 그저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누구에겐가 이끌려가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시지프스처럼 당당한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하여 신(神)에게 반항도 해보고, 그 반항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가슴으로 부여안고 자살까지 시도해 본 것이다. 죽음의 직전까지 간 그녀는 순간 깨닫게 된다. 신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설사 신이 있다고 해도 신은 신의 방식대로 구원을 하고, 인간은 인간의 방식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머리를 자르기 위해 미장원에 들렀다가 살인자의 딸이 소년원에서 미용기술을 배워가지고 와서 자신의 머리를 자르려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밖으로 뛰쳐나온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자른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동안에 많은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살인자의 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자신은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알게 된다. 그것이 현실이고, 그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상황에 따라 변할 뿐이지, 그 밖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다만 그 삶의 방식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깨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깨달은 자도 깨닫지 못한 자도 자신만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기는 하나, 깨달은 자는 그 삶의 방식이 무엇을 위함인지를 잘 알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삶의 방식이 무엇을 위함인지를 잘 모른다.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차이는 단지 그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밀양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한 마디 더 하자면 그 살인자를 구원해준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인지 궁금하다. 하느님이 인간들을 구원할 때 그 구원은 인간들의 죽어 있는 양심을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이 살인자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자신의 양심이 회복되었다면 그녀 앞에서 통곡을 하고 울고 또 울면서 빌고 또 빌어야만 했다. 도대체 어떤 하느님이기에 살인자로 하여금 그녀 앞에서 당당하게 구원을 받았다고 양심 없는 소리를 하게 하는가?
그리고 누군가 그녀가 받은 고통을 불교적으로 해석에서 전생이든 이생이든 인과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살인자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스스로 마음에 평안을 얻는 자와 똑같다.
물론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그러나 이 밀양이라는 영화는 어떤 구원이나 인과응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닥쳐오는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그 누구에게도 매달리거나 끌려가지 않는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 또한 참으로 중요한 것이니까.
** 지금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은 무엇을 위함인가? **
자문하고 또 자문해 보라, 그러면 비밀스러운 햇볕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