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70년대에서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책은 노동자들과 기업가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아무리 투쟁해도 개선되지 않는 노동 여건에 노동자들은 비뚤어진 사회 전체와의 충돌도 서슴지 않는다. 급기야 살인과 매춘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엄청난 빈부의 격차를 바탕으로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두 계층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부딪힌다. 뜻밖에도 나는 이와 비슷한 갈등을 아주 가까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2014년을 맞이하는 지금, 그 당시에 비해 노동 여건은 분명히 개선되었다. 선조들의 투쟁으로 근로기준법이 올바르게 시행되고, 노동자들의 인권은 지켜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제 색다른 곳으로 손을 뻗어 또 다른 계층을 옥죄고 있다. 장차 나라를 짊어지고 갈 학생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은강 공장의 노동자들과 지금 우리 학생들은 공통점이 많다. 이상적인 생활을 꿈꾼다는 것, 바람이 사회의 현실과 충돌한다는 것, 그리고 사회가 그것을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닮았다. 은강 공장의 노동자들이 살인과 매춘을 선택하듯 벼랑 끝에 선 학생들은 자살을 택했다. 철없는 어린 학생들의 생각 없는 결정이라고만 여기기에는 이미 우리나라의 교육 체제는 사회적 문제로 고려되어야 할 지경에 다다른 것이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근로 환경을 개선하고 임금의 인상을 원했다. 우리 학생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기를 꿈꾼다. 국가는 국어, 영어, 수학 위주의 공부를 강요하고 시험 성적으로 학생들을 줄 세우며 이렇게 만들어진 서열에 따라 차별대우한다. 학생 각각의 개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틀에 박힌 교과목들만을 학습하길 강요하며 자꾸만 친구들과의 경쟁을 부추긴다. 이런 사회 풍조에 따라 집에서도 압박은 계속된다. 더 똑똑한 아들, 딸을 키워내기 위해 밤늦게까지 학원에 보내는 모습은 어느새 모든 학생들의 집안 풍경이 되었다. 자식을 사랑해서 한 행동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줄 수 있는지 고민하는 부모는 얼마 없다. 이렇게 학생들은 점점 기댈 곳을 잃어간다. 공부를 하러 간 학교에서는 나와 맞지 않는 학습만을 강요하고 마음을 털어 놓을 친구들은 경쟁자의 칼을 세워 더욱 몰아세울 뿐이다. 학생들은 점점 절박해진다. 학교는 야간 자율 학습을 시킨다. 분명 ‘자율’학습인데 정작 본인이 하고 싶은 공부는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수학 문제집을 푸는 것만 공부는 아니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사회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벽보를 쓰는 것도 공부이며,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도 어떤 학생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한 공부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제멋대로 공부의 틀을 짜 억지로 학생들에게 끼워 넣는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매우 기본적인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얻어낼 수 없었다. 당시 사회 지도층은 그들이 속한 공장의 사장들이었고, 그들은 손해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노동자의 편의를 봐 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시위하는 노동자들은 군기를 잡아야 하는 일부 하급 직원들에 불과했다. 우리 학생들의 바람 역시 지금 당장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시험 제도를 없애고 학생들이 원하는 공부를 하도록 장려하기에는 우리 사회 전반에 지금의 공부 방식이 깊이 뿌리내려 있다. 갑작스런 변화를 맞이하기엔 아직 이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어렵다고 해서 미래를 방치할 수는 없다. 몇 십 년 전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끊임없이 투쟁한다면 지금의 그들이 그렇듯 학생들도 공부에서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회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당장의 혼란을 잠재우려 할 뿐이다. 노동자가 공장 간부를 살해했을 때 재판장에서는 그가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아픈 배경을 듣지 않으려고 했다. 설령 들었다고 한들 판사는 자신은 아마 평생을 살아도 겪어보지 못할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공장 아들이 그러했듯 ‘일자리에 월급까지 받으며 이렇게까지 하는 그들은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단정 지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최고의 두뇌가 모여 있는 카이스트와 특수 목적 고등학교에서 자살 사건이 일어나는 까닭이 무엇일까? 학업 관련 스트레스이다. 그들의 죽음으로 우리의 교육 체제는 달라졌을까? 아니다. 많은 학교들은 학교의 인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해 학생의 자살을 쉬쉬하려 했고,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려하지 않은 채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풀 곳이 필요하다며 예체능 수업 시간을 늘리기만 했다. 조금 더 달리고, 조금 더 노래한다고 해서 공부를 덜 해도 되는 것이 아님을 학생들은 안다. 임시방편은 말 그대로 임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다. 힘이 있는 어른들부터 근본적인 원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 학생들은 갑갑한 경쟁구도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자신과 잘 맞는 자유로운 공부를 하는 꿈을 꾼다. 더 이상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희생양이 생기기 전에 우리나라의 교육 체제에서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 좋은 예로 자유학기제가 도입되고 있다. 자유학기제로 갈등이 모두 해소되지는 않지만 그것은 우리 사회가 점점 학생들의 꿈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학업으로 인한 걱정을 속으로만 삼키지 말고 외쳐야 한다. 현실에 자신을 애써 끼워 맞추며 울고 있지 말아야 한다. 난장이가 달을 향해 공을 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