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신라의 달밤
신라의 달밤 현인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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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달밤 / 유호/작사, 박시춘/작곡, 현인/노래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옥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 간 주 ............
아 신라의 밤이여.
나루터의 추억이 새롭도다.
푸른 강물 흐르건만 종소리는 끝이 없네.
화려한 천년 사직 간곳을 더듬으며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 간 주 ............
아 신라의 밤이여.
아름다운 궁녀들 그리웁구나.
대궐 뒤에 숲속에서 사랑을 맺었던가.
님들의 치마 소리 귓속에 들으면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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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현동주(玄東柱)이다. 1938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우에노[上野]음악학교에서 성악과 플루트를 배웠다. 우에노음악학교 졸업 뒤 일본의 징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샹송과 칸초네를 부르며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직후 귀국하여 '고향 경음단'이라는 7인조 악단을 만들어 UN군 위문공연에 참여했고, 팝송을 레퍼토리로 하여 극장무대에서 활동했다.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가 유행가를 부를 수 없다며 자존심을 지키던 그는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신라의 달밤〉을 음반으로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하여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서양의 음악인 성악에 바탕을 둔 그의 창법은 신민요나 트로트 등과 달리 시원한 맛을 내며 해방 이후 가요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이어서 곧바로 내놓은 〈비 내리는 고모령〉은 일제시대 국민들의 아픈 실향의 기억을 되살린 노래로, 그는 일약 ‘국민가수’로 떠올랐다.
1947년 한 해 동안 그는 박시춘, 유호와 손잡고 무려 5곡을 히트시키면서 ‘현인시대’를 열었다. 1946년 2월 귀국선을 타다 중국 군인들에게 체포돼 4개월 동안 베이징 형무소에 있을 때 서울을 생각하며 그가 만들었던 탱고 멜로디는 유호의 가사로 〈서울 야곡〉으로 탄생했고, 그가 즐겨 부르던 중국노래는 〈꿈속의 사랑〉이란 노래로 만들어졌다. 1951년 흥남 부두에서의 이별을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전쟁 통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버티고 있던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의지를 심어주었으며, 월남 가족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그는 1952년 〈전우야 잘 자거라〉로 군인들의 사기를 높였고, 1953년에는 가사에 외국어를 처음 넣은 〈럭키서울〉로 서울 수복의 감격을 노래로 담았다. 그는 또 서구의 새로운 음악을 국내에 소개하는 전령사이기도 했다. 샹송, 칸초네, 탱고, 맘보 등이 그를 통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번안가요 제1호인 〈베사메무쵸〉나 〈고엽〉 등의 번안곡도 그의 입을 거치면서 히트곡이 되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던 그는 1947년 여름 무명가수가 천신만고 끝에 인기가수가 된다는 내용의 국내 첫 음악영화 〈푸른 언덕〉(감독 유동일)의 주인공 역을 맡았고, 1965년엔 악극 〈춘향전〉에서 이도령역으로 열연했다. 1974년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스라이트’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했지만 한국과 무대를 결코 잊을 수가 없어 결국 7년 만인 1981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1991년 〈노래하는 나그네〉·〈길〉 등 신곡을 발표하며 건재를 과시했으며, 1998년까지도 배삼룡·은방울자매·남진·김세레나 문주란 등과 악극 ‘그 때 그 쑈를 아십니까’를 비롯해 KBS ‘가요무대’ 등에 출연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였으나 2003년 지병인 당뇨로 활동을 중단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처음으로 음반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고 하여 '대한민국 가수 제1호'라는 별명이 붙었던 그가 남긴 노래는 1,000여 곡이 넘는다. 혀 짧은 소리에 턱을 떨며 부르는 독특한 창법의 그의 노래는 고난과 슬픔을 노래하되, 건강함과 감미로움으로 현실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9년 화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00년 8월 경주 불국사 앞에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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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신라의 달밤’ 가수 현인 별세
“아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국민가요라고 할 만한 ‘신라의 달밤’은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이 부른 곡이다. 무명가수이던 현인은 1947년 ‘신라의 달밤’을 발표하면서 스타가 됐다. 일제 강점기에 노래를 시작한 그는 ‘가수 1세대’의 대표주자였다. 또 현인은 당시에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예명을 사용해 화제가 됐다.
1919년 부산 태생. 현인은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의 징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샹송과 칸소네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직후 귀국한 그는 고향 경음단이라는 7인조 악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가 유행가를 부를 수 없다”며 자존심을 지키던 그는 작곡가 박시춘씨의 권유로 ‘신라의 달밤’을 취입했다. 이후 ‘신라의 달밤’은 트로트 가수 이미자, 나훈아, 재즈가수 말로 등이 불렀고, 2001년에는 김혜수·차승원·이성재 주연의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현인은 ‘신라의 달밤’ 외에도 피란민의 애환을 그린 ‘굳세어라 금순아’나 ‘비 내리는 고모령’ ‘청포도 사랑’ ‘전선야곡’ 등을 불러 한국전쟁으로 실의와 절망에 빠졌던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줬다. 또 번안곡인 ‘베사메무초’ ‘꿈 속의 사랑’ 등을 불러 이국적인 번안곡 열풍을 이끌었다. 현인은 성악가 출신답게 성악을 바탕으로 한 혀 짧은 소리에 턱을 떨며 부르는 독특하면서도 절도 있는 창법으로 유명했고, 당시 민요나 트로트 일색이던 대중음악계에 혁신을 일으켰다.
현인은 지병인 당뇨병을 앓다 2002년 4월13일에 별세했고, 장례는 한국연예예술인장으로 치러졌다. 향년 84세. 사후에 ‘굳세어라 금순아’의 무대인 부산 영도대교 남단에 현인의 동상과 함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가 세워졌고, 경주에도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세워졌다. 또 그를 기리기 위해 2005년부터 그의 고향인 부산에서 매년 현인가요제가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