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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5년 만에 스크린 돌아온 윤정희

오늘행복스마일 2019. 1. 22. 14:39

15년 만에 스크린 돌아온 윤정희

 

아주 특별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제목: 시(詩), 감독: 이창동, 주인공: 60대 할머니, 개봉예정일: 2010년 5월 물신주의만이 찬미되는 요즘 세상에 영화제목이 ‘詩’라니. 잠깐 시놉시스를 훑어보자.

‘주인공 미자는 딸이 맡기고 간 손자를 혼자 키운다. 간병인으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 이런 힘겨운 삶을 살던 미자가 어느날 문화원에서 시를 가르친다는 광고를 발견하고는 어릴 적 꿈이었던 시 쓰기에 도전한다.’

제목은 그렇다고 치자. 60대 여성을 겁없이 주인공으로 내세운 한국 영화를 들어본 적이 없다. 로맨스 그레이 영화도 아닌데. 60대 여성 미자 역(役)을 맡은 이는 프랑스에 체류 중인 배우 윤정희(65)씨. 그가 1994년의 ‘만무방’ 이후 15년 만에 선택한 작품 ‘시’. 윤정희의 본명은 ‘손미자’. 우연인가, 이름이 영화 주인공과 똑같다. 윤정희씨와 인터뷰를 하려고 문자 메시지를 남겨놓았지만 보름 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던 지난 11월 8일(일요일) 밤 연락이 됐다. ‘미자’는 강원도, 충청북도, 서울을 오가며 촬영 강행군을 하는 중이어서 짬을 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장소 헌팅이 안되어 내일 하루 촬영이 빈다. 내일 오후에 남편 연습실에서 만나자.”

11월 9일 오후 3시 서울 한남동의 한 신축빌딩 로비. 잠시 뒤 윤정희씨가 나와 기자 일행을 공연장으로 안내했다. 윤정희씨는 뉴욕에서 연주회가 잡혀 있어 11월 11일에 남편과 함께 출국한다고 했다. 작은 공연장 무대 위에는 그랜드피아노가 놓여있었고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씨가 계단을 내려왔다. 기자가 윤정희·백건우씨 부부를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은 지난 5월 한 모임에서였다.

무대 뒤쪽에 있는 출연자 대기실에서 윤정희씨와 마주 앉았다. 의자에 앉아 잠시 어색함을 풀고 있는데 백건우씨가 종이컵에 커피를 따라 탁자에 두 잔 내려 놓는 게 아닌가. “천천히 커피 마시면서 얘기하세요.” 한국의 대표 피아니스트가 손수 따라주는 커피라! 커피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백건우씨가 나가고, 조금 뒤 대기실 문틈으로 피아노 반주가 은은하게 새어들어왔다.

photo 이경호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15년 만의 영화촬영인데, 체력적으로 견딜 만한가요. “아니, 스태프들이 그런 걱정을 하던데요. 저는 왜 그런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어요.(웃음) 체력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이 감독님한테 여쭤보세요.”

대사는 많은가요? 나이 들면 암기력이 떨어진다고 해서요.  “내가 착각하고 사나? 스태프들은 ‘선생님 괜찮아요?’ 하고 걱정하던데. 대사는 무조건 외워요. 무슨 일이든지 정신력이 중요하다고 봐요. 내가 즐겁게 하니까. 오로지 어떻게 하면 미자 역할을 잘 소화할까만 고민하고 있어요.”

‘시’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것은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였나요. “아뇨, 이창동 감독과는 교류가 없었어요.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없었고요. 부산영화제에서 인사를 나눈 정도였죠. (감독님이) 어느 날 저희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어요. 그래서 저희는 답례로 음악회에 (감독님을) 초대했죠. 그런데 저녁식사에서 저를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말을 꺼내더라고요. (그런) 말을 안하고 시나리오를 쓰는 게 마음이 무겁다면서. 세상에 이처럼 고맙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있어요. 시놉시스만 보고 믿음으로 하겠다고 했죠. 완성된 시나리오는 아주 늦게 받았어요.”   

‘시’ 이전에도 영화 출연 제의가 있었겠죠. “물론이죠. 그런데 작품이 마음이 안 들었어요. TV 드라마도 있었고, 연극도 제안이 들어왔어요. 영화를 찍지 않은 15년은 공백기간이 아니었어요. 청룡영화제 심사도 해왔고 MBC영화제 심사위원도 해왔잖아요. 저는 늘 영화 속에 살고 있었어요.”

혹시 ‘시’의 주연으로서 개런티를 공개할 수 있습니까. “(웃음)아이, 그건 좀. 그건 너무 현실적이 되는 것 같아서 곤란하네요.”

이창동 감독은 소설가로 활동하다 영화감독이 된 사람이라 아무래도 다른 감독과 연출 스타일이 다를 것 같습니다. “굉장히 철저한 분이세요. 카메라 워크와 장소 설정이 무척 사실주의적이고요. 꾸미고 가상적인 게 없어요. 연기도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에서 하는 것처럼 하라고 주문하세요. 보통 연기가 들어가는데 ‘연기’를 빼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는 여태까지와는 다른 ‘윤정희’가 나올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어요.”            

지금 영화판에는 1970년대와는 전혀 다른 세대가 진출해 있습니다. 새로운 세대의 스태프들과 일하면서 느낀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늘 남편에게 이야기하는 게, 기막히게 뛰어난 젊은이들이에요. 예를 들면 카메라 감독은 경제학을 전공한 친구인데 정말 영화가 좋아서 뛰어든 거예요. (젊은이들이) 예의 바르죠, 불평 하나 없이 열심히 하죠. 다들 예뻐 죽겠어요. 과장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이건 진심이에요.” 

그렇다면 한국 영화산업의 미래를 밝게 보시는 겁니까. “전체적으로 밝게 보는데 조심할 점도 있죠. 제가 청룡영화제 심사위원을 10년째 하고 있잖아요. 걱정이 되는 모멘트가 있었어요. 일부 작품에서는 자만하거나 겉도는 영화들이 보여요. 제가 남편과 함께 여행을 많이 다니잖아요. 외국 여행 가보면 한국영화 팬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돼요. 영화에 대한 관심이 일본, 중국, 대만을 거쳐 지금은 한국이 대를 잇고 있잖아요.”   

‘겉도는 영화’란 어떤 영화를 말합니까. “무성의한 영화를 말하죠. 저러면 안 되는데 하는 작품들도 있어요.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만들었으면 해요.”

그 말은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란 뜻인가요. “그렇죠.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시나리오이고, 그 다음이 감독의 연출력이죠. 이창동 감독처럼 한 컷 한 컷을 그렇게 철저하게 하는 분, 전 처음 봤어요.”   

피아노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피아니스트의 아내’라는 자리는 일상생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떤가요.  “제가 원하는 결혼생활이에요. 저는 인생은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봐요.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음악을 들으며 자라서 음악 없이는 못사는 인생인데, 러키(lucky)하게 음악하는 사람을 만났지요. 제 마음을 행복하게 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약인 것 같아요. 제가 여행을 무지하게 좋아하는데 남편도 여행을 좋아하니까 연주 여행을 함께 다니죠. 또 외국에서는 영화배우라고 하면 굉장히 존경해주잖아요. 피아니스트 와이프로서 저는 아주 자연스러워요.”

피아니스트는 어떻게 돈을 법니까. “연주 때마다 계약을 하죠.”

연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어느 정도됩니까. “(웃음) 남을 대접할 수 있는 정도는 돼요.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정도. 저희가 사치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여행도 연주 여행을 다니는 거잖아요. 우리의 생활이 사치스럽게 보이는 거지. 알다시피 저희는 프랑스에서 자동차도 없이 살잖아요. 그래도 아무 불편이 없어요. 대신 주변에 30년 이상이 된 변함없는 친구들이 많아요. 저희는 마음이 부자예요.”

두 분이 연주 여행을 통해 가본 나라와 도시는 몇 개쯤 되나요.  “아휴, 그건 셀 수가 없죠. 우리는 연주가 끝나면 그 도시에 남아 이틀 이상을 여행합니다. 운동화 신고 다 돌아다녀요. ”

이제까지 가본 도시 중 가장 좋아하는 곳은 어디인가요. “프라하는 말할 것도 없고. 스페인은 갈수록, 알수록 좋아지더군요. 이탈리아의 시실리는 너무 아름답고 상트 페테르스부르크도 좋지요.”

피아니스트와 결혼 정말 잘하셨네요. “그렇죠. 건우 백도 결혼 잘했죠.”   

유럽이 다 그렇지만 특히 파리는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도시입니다. 가끔씩 한국에 들어와 보면 변화에 대해 현기증을 느끼지 않나요. “우리나라의 발전상은 기가 막힐 정도예요. 변화가 기뻐요. 영화촬영 때문에 강원도와 충청도 일대를 가봤는데 경치가 참 아름다웠어요.”

변화는 좋은데, 도시나 사회 전체가 품격을 잃고 경박해져가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요. “그렇게 단정적으로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젊은 친구들을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영화판뿐만 아니라 음악회 관련된 일을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칭찬해주고 싶어요. 저는 ‘경박’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네요. 다만 사치에 대해선 말하고 싶군요. 사치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제게 사치는 피곤해요. 저한테 맞는 게 필요할 뿐이죠. 왜 명품이라고 맞지도 않는 옷 입고 다니면서 그 회사 선전을 해줘야 하나요. 가끔 저에게도 명품을 선물해주는 분이 계신데 그럴 때면 다른 분에게 줘버려요. 자기에게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 흐르듯 하던 피아노 반주가 갑자기 열정적이고 격정적으로 변해갔다.  

피아니스트는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인데 남편은 무슨 취미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나요. “건우 백은요, 영화를 참 좋아해요. 우리집에 DVD가 많아요. 그런데 제 남편은 수준이 낮은 영화까지 그냥 봐요. 내가 ‘아니, 저런 영화까지 왜 보냐’고 말하면 ‘이런 걸 봐야 긴장이 풀린다’고 해요. 또 시장 보는 걸 좋아해요. 아침과 저녁 시장을 다 혼자 볼 때도 많아요. 동네마다 재래식 시장이 잘 발달해 있는 게 파리의 매력이잖아요. 그리고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잘해요. 파리 집에 있을 때 식사의 절반은 남편이 만들어요. 우리는 친구처럼 모든 음식을 나눠 만들곤 해요. 물론 내가 피곤해 하면 본인이 다할 때도 있고요.”

특히 어떤 요리를 잘합니까. “스파게티를 너무 잘해요. 딸 말이 엄마와 아빠가 음식을 잘해 너무 행복하대요.” 

윤씨는 이렇게 말하곤 파리의 아파트 얘기를 꺼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장만한 아파트의 벽지를 부부가 사람을 쓰지 않고 직접 도배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도배를 너무 잘 발랐던지 30년 동안 끄떡없었어요. 그런 벽지를 2년 전에 바꾸었죠. 남편과 ‘우리 나중에 직업이 없어지면 도배 일 해도 되겠다’고 농담한 적이 있어요. 저는 이제까지 결혼 이후 파리에 살면서 한번도 메이드(maid·가정부)를 둔 적이 없어요.”    

혹시 외동딸이 배우나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바란 적은 없나요. “근데 참 이상해요. 저희들이 (딸에게) 피아니스트나 배우가 되기를 강요한 적이 없거든요. 제 딸이 피아노로 시작해 지금은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어요. 연주활동하면서 파리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경제적 자립을 이룬 상태죠. 딸은 대단한 영화 매니아예요. 자기 꿈은 단편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네요. 몬트리올영화제에 딸을 데리고 간 적이 있고 부산영화제에도 함께 참석했어요. 딸은 모든 장르의 영화를 다 보고 있죠. 그래서 영화를 보는 눈이 높아요.”     

20세기 통틀어 최고의 배우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20세기 통틀어서요? 그건 힘들죠. 프랑스 배우로는 장 가방(Jean Gabin·1904~1976)을 들고 싶어요. 우리나라 배우로는 김승호씨와 황정순씨가 훌륭한 배우죠.”  

후배 여배우 중에는 누구를 최고라고 생각하십니까. “전도연이 주연한 ‘내마음의 풍금’을 여러 번 봤어요. 정말 연기력이 뛰어나요. 전도연은 적당히 예쁜 배우지요. 주인공에 맞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오래 가요. 연기력도 있고 자연미가 있어서 기대하고 있어요.” 

윤정희씨가 가장 닮고 싶어하는 배우는 누군가요.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1915~1982)이에요. 나이를 먹고도 늦게까지 연기를 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요. 거의 70세 때까지 연기를 중단하지 않았잖아요. 버그만이 ‘겨울 소나타’를 찍었을 때가 64세였어요.”

‘카사블랑카’ 등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잉그리드 버그만. 그녀의 마지막 작품은 ‘골다 메이어’. 버그만은 67세에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를 연기해 에미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1905~1990)는 중년 이후 대중의 눈을 피해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버그만과 대조적인데요. “나중에 늙은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였죠. 배우관(觀)이 다른 거죠. 안타까운 건 뉴욕에서 그레타 가르보를 만날 뻔했어요. 남편 팬인 미국 작곡가가 뉴욕에 오면 가르보와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는데….하지만 캐서린 햅번 같은 경우는 자신이 늙어가는 모습도 다 보여줬지요.”  

파리에서는 영화를 찍을 기회가 없었나요. “아, 있었죠. 그 얘기 못들으셨나요? 폴 클로댕의 작품을 알랑 퀴니가 영화화하면서 저한테 제의가 왔죠. 언니가 여동생을 찾기 위해 희생하는 그런 역할이었는데 문제는 눈동자를 블루렌즈로 끼고 블론드 머리로 해달라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영화를 찍을 수는 없잖아요. TV 드라마에서도 베이징오페라의 가수 역할을 해달라고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윤정희는 1967년 ‘청춘극장’에서 오유경 역을 맡으면서 배우로 데뷔했다. 김내성의 장편소설 ‘청춘극장’을 영화화하면서 영화사 측이 50만원을 내걸고 주연배우를 공모했는데 윤정희가 1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여주인공에 발탁된다. 데뷔작으로 스타덤에 오른 윤정희는 이후 한국영화 황금기에 문희, 남정임과 함께 한국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구가한다. 그는 전성기 시절 보통 하루에 2~3편의 영화를 촬영했다. 1994년 ‘만무방’까지 300여편의 영화를 찍었다.

윤정희가 스스로 뽑은 영화 베스트 10 - 왼쪽부터 청춘극장`(1967), 안개`(1967), 장군의 수염`(1968), 독짓는 늙은이`(1969), 분례기`(1971), 무녀도`(1972)
`화려한 외출`(1977), 신궁`(1979), 위기의 여자`(1987), 만무방`(1994)

20대 때 출연한 영화를 보면 혹시 얼굴이 화끈거리거나 부끄러운 작품은 없나요. “당연히 있죠. 지금 다시 보면 왜 저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죠. 사실 그때는 하고 싶지 않은 영화를 찍어야 할 때가 있었어요. 제작자와 감독이 매달려서 인정 때문에 찍은 경우가 더러 있었으니까요.”     

요즘 톱배우들의 ‘재산’이 종종 화제가 됩니다. 당시 톱 여배우들도 큰돈을 벌 수 있었나요. “그때 당시는 개런티가 괜찮았죠. 광고(CF)가 들어와도 배우들이 되도록이면 안 하려고 했어요. (배우로서) 이미지가 나빠진다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지금처럼 엄청난 수입은 아니었어요. 또 지금은 광고가 더 많은 것 같데요.” 

후배 여배우들을 보면 시대를 잘 만났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두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봐요. 영화계 전체로 보면 지금이 분명 좋은 시대죠. 하지만 우리시대는 배우들의 황금기(黃金期)였어요. 우리 때 세 배우가 100편 이상에 출연했으니까요. 그 영향력이 대단했어요. 배우로서 그 시대를 산 게 행운이라고 봐요. 지금 시대는 외국영화제 같은 데 진출할 기회는 많지만 한 여배우가 여러 작품에 출연하는 게 어렵잖아요. 그리고 청룡영화제 심사위원을 해보니 할 때마다 배우들이 바뀌어요. 배우 수명이 몇 년 못가는 것 같기도 하고.”    
  
서울에 오면 한국 TV를 자주 보십니까. “시간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뉴스만큼은 꼭 보려고 노력합니다.”

텔레비전 뉴스를 포함해 드라마, 예능, 쇼, 토론프로그램 등이 지나치게 젊은층에 편향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진 않으셨나요. “자주 볼 기회가 없으니 그건 모르겠네요. 하지만 영화를 공부한다는 젊은이들 중에 배우 김승호와 황정순을 모른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어요. 유명한 한국 감독들도 모르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영화계의 전통과 단절된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파리에서 남대문 불타는 모습 보고 남편과 함께 울었어요. (우리나라에) 역사적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으면 해요. 있는 것을 잘 보존했으면 합니다.”   

1974년 파리로 영화유학을 떠난 이래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고 계신데, 파리라는 도시는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예술과 역사가 함께 하는 장소지요. 예술을 호흡하고 언제나 꿈을 꿀 수 있는 곳이 파리예요. 그래서 저희들에게 맞고 편안해요.”

만일 예술가가 아닌 사업가를 배우자로 만났다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즘은 사업가를 존경합니다. 저는 인생을 (배우자와) 같이 만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삶을 함께 할 사람에 더 매력을 느껴왔지요. 내가 할 것이 없는 사람과 살면 인생이 재미없잖아요. 그런 꿈은 꿔본 일이 없어요. (그런 인생은) 상상도 못했어요. 저는 작가나 음악가 같은 예술가가 좋았어요.”

대중이 보기에 백건우·윤정희 부부는 그 흔한 스캔들 한번 없고 아름답게 사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인생 철학 같은 게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아름답게 살고 싶어요. 다른 욕심이 없어요. 저희는 같은 걸 공유하는 게 많아요. 즐겨 먹는 것도 같고 어디 여행 가자고 하면 거의 대부분 같이 가요. 둘이 똑같은 게 많아요. 사치를 싫어하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사는 것을 좋아해요. 남이 어떻게 보는가 하는 데 신경쓰지 않는 것도 같고요.”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던데. “제가 6남매의 큰딸이잖아요. 아버지는 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점을 강조하시곤 했죠. 어렸을 때 아버지는 화장실 등 집안 곳곳에 ‘인내와 용기와 희망’이라는 글을 붙여놓으셨어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맑은 물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살았죠.”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던데 그동안 스캔들 한번 없었지요. “(남편에게) 그런 유혹이 없는 것 같던데.(웃음) 그런 기회가 없었겠죠. 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24시간 같이 있으니까. 제가 결혼 이후 작품을 20개 했는데, 남편이 제게 ‘나는 자기를 믿어’라고 말하곤 했죠.”   
    
1967년에 배우로 데뷔해 42년째 현역으로 활동 중인데, 배우란 어떤 직업입니까. “배우는 삶을 그리는 직업이지요. 삶에 10대와 20대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60의 삶도 있고 80의 삶도 있는 거죠.”

저는 나이 40을 넘기면서 인생에 대해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윤 선생님은 인생에 대해 훨씬 많이 알 것 같은데요. “(웃음) 저는 아직도 인생을 모르겠던데. 저는 너무 현실적인 것 싫어해요. 꿈꾸면서 살고 싶어요. 이번에 ‘詩’를 찍으면서 경험한 게 있어요. 극중 미자가 시 낭송을 하는 장면에서 내 인생처럼 느껴져 펑펑 울었어요. 예전에는 눈물 대신 안약을 넣는 경우도 있었거든요. 이게 인생을 알아서 그런 건가요?”

만일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 다시 영화배우를 선택할 겁니까. “저는 처음부터 배우가 되려고 하진 않았어요.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외국에 나가고 싶어 외교관을 꿈꿨던 적이 있었죠.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저를 프랑스에 유학 보내고 싶어하셨어요. 어제는 밤에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분이 저를 알아보고 너무나 반갑게 인사하시더군요. 영화배우는 대통령부터 부랑자까지 누구하고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직업입니다. 친구의 한계가 없는 직업이죠. 저는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할 겁니다. 자랑스러운 배우, 자존심이 있는 배우로 말입니다.”  

인터뷰가 끝나 대기실을 나섰을 때, 백건우씨는 계속 피아노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지나가며 슬쩍 악보를 훔쳐보았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였다. 백건우의 피아노 소나타 선율이 배경음악으로 울려퍼지는 가운데 윤정희와 영화 같은 인생을 이야기한 지 두 시간.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출처 : 스마트북,원페이지북
글쓴이 : kabb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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