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별들의 故鄕 (1974)
낭만적 혁명세대, 그리고..
별들의 故鄕 (1974)
내가 '별들의 고향' 영화를 본때는 아직 미성년자였다.
1974년 봄에 개봉한 영화였는데 나는 1975년인 그 다음해 초였다.
아마도 고교시절의 겨울방학때 이었을 것이다.
지방의 작은 소도읍였으니 개봉된 영화가 들어오려면 일년쯤 걸렸다.
(그시절 극장에서 졸업식을 했다. 뒤에 극장 간판이 보인다)
내가 자란 고향에는 극장이 딱 하나뿐이었는데..그나마 그 극장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하나밖에 없던 그 극장엔 당시 '임검석'이라는게 있었는데...
그자리에는 간혹 순경(경찰관)이 앉아 있었고 선생님들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 극장에서 숨어다니며 숨죽이고 본 영화 '별들의 고향'이...그 시절이 그립다.
오랜간만에 같이 누워 보는군..
아...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 주세요...
여자란 참 이상해요 남자에 의해서 잘잘못이 가려져요
한땐 나도 결혼을 하고 행복하다고 믿었던적이 있었어요
지나간것은 모두 꿈에 불과해...아름다운 꿈이예요
내 몸을 스쳐 간 모든 사람이 차라리 사랑스러워요.
그들이 한때는 사랑하고 한때는 슬프하던 그림자가 내 살 어디엔가 박혀 있어요.
다들 뭣들을 하고 있을까? 아저씨만 여기 계시는군요.
행복하게 지내겠지. 술을 마시고 사랑을 하고 그리고 결혼도 했겠지.
며칠전에 엄마한테 편지를 했는데 오늘, 편지가 되돌아왔어요. 그런 사람이 없다는거예요.
경아에게서 어머니 얘기는 처음 듣는군.
그래요. 너무 오랜일이었었어요. 내일이나 모레쯤 엄마를 찾으러 가야겠어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찾을 수 있을까요?
찾을 수 있구말구.
잠이 쏟아져요...
자. 경아가 자는 걸 지켜보겠어.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눈을 뜨면 흔적도 없이 이별을 하고는 해요.
떠나야하니까.
날이 밝으면 아저씨도 떠나겠죠?
그럴꺼야. 자, 이제 그만 자.
별들의 고향
경아(안인숙)는 사랑했던 첫사랑에게 배신당해 상처받는다.
방황하던 그녀는 기품 있는 중년 남성과 결혼해 행복을 꿈꾸지만 낙태 경험이 빌미가 되어 거리로
내쫒기고 만다. 결국 경아는 거리의 여자가 되었고 악덕 포주에게 착취당하며 살아가다 무명 화가
문호(신성일)와의 사랑을 통해서 짧은 행복을 느끼지만, 눈 내리는 겨울 서늘한 거리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영화는 경아와 사랑을 나눴던 문호가 그녀의 죽음을 통보 받고 나서 회한에 가득 찬
사랑을 기억하면서 시작된다.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은 100만부 이상 팔려나간 희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이장호가
감독한 동명 영화는 1973년 국도극장 단관 개봉에 40만이라는 경이적인 관객 동원을 이룩한 신기원
으로 남아 있다. 『별들의 고향』을 호스티스 영화의 원조로 보는 시각도 있고, 『자유부인』이후 처음
나타난 능동적 여성 캐릭터의 의미를 강조하는(물론 영화에서 능동적 여성은 철저히 파멸 당한다)
관점으로 보기도 한다. 90년대에 들어서는 유치한 복고풍 애정 개그 소재로 사용되면서 한없는 구식
영화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별들의 고향』이 가지는 통속성은 70년대 젊음을 정확히 이해하게 해 주는 텍스트이다.
경아는 결국 근대화의 어두운 욕망을 공유한 우리 모두가 죽였다고 소설은 쓰고 있다. 하지만 소설의
전반적인 뉘앙스나 영화가 보여주는 세심한 미장센(전시대 영화들과 구분되는 탐미적인 미장센들이
많이 등장한다)은 순수했던 한 여인의 타락과 그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퇴폐적 예술가의 낭만적
사랑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치 사랑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었던 베르테르나 예술이 환각과
현실을 하나로 만들어 버린 도리언 그레이처럼 말이다. 이런 탐미적 낭만성은 이후 한국영화에서
일종의 클리셰로 자리 잡는다. 욕망에 타락하는 세상과 그 욕망에 희생당한 순수한 여자, 세상과 타협
하지 못하고 퇴폐적인 낙오자가 되어 있는 예술가…. 뭐 이런 구도 말이다.
그리고 이런 통속적 낭만은 강근식이 만든 OST에 결정적으로 녹아들어 있다.
경아(안인숙)는 간이역의 역부인 아버지와 양조장집 셋째딸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난 예쁘고 조그만 여자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공부를 포기하고 직장생활을 했다.
그리고 한 남자를 사랑하다가 임신을 하게 되는데, 중절수술 후 그와 헤어진다.
그후 아내를 잃은 부유한 남자와 다시 결혼하게 되지만 행복이 온 것은 아니었다.
그 남자는 죽은 아내의 넋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녀를 괴롭히다가 과거를 문제삼아 그녀를 쫓아낸다.
쫓겨난 그녀는 술어 절어 살다 또 다른 남자를 만나서 실컷 농락당하고, 결국은 호스티스로 주저앉는다.
경아가 문오를 만난것은 그 시절이다.
자신이 나가던 술집에서 대학 미술과 강사이자 화가인 문오(신성일)을 만난 것이다.
문오는 그녀의 재롱과 응석에 빠지고, 그녀는 따뜻하고 사람 좋은 그에게 푹 빠진다.
그러나 알코올중독에다 남자들에게 짓밟혀 온통 멍투성이인 그녀와
적당히 로맨틱하고 이지적인 문오의 사랑은 계속 유지될 수 없었다.
게다가 경아에게 문신을 새긴 남자가 나타나 소유권을 주장하며 문오와 그녀를 괴롭혔다.
어느 날 문오는 경아가 잠든 틈에 자신의 돈을 전부를 머리맡에 두고 사라져버렸다.
그 후 문오는 어느 술집에서 만신창이가 된 경아를 우연히 만나서 그녀와 밤을 지내게 된다.
경아는 오랜만에 누워보는 그와의 잠자리에서 갖은 콧소리를 내며 감격하지만
이미 그녀는 죽음을 각오한 터였다.
경아는 우중충한 대폿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눈밭으로 나가서는 약을 먹는다.
쓰려졌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그녀의 눈앞에는 문오가 달려오는 환영이 보인다.
그 환영조차 그녀에게는 환희였지만 도시는 그녀의 죽음을 방치하고 만다.
낭만적 혁명세대
흔히들 70년대 세대들을 가리켜 ‘낭만적 혁명 세대’라고들 한다.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나서 한글교육을 받기 시작한 첫 세대이며,
20대를 유신시대 속에서 보낸 이들이다. 물론 ‘낭만적 혁명 세대’라는 말은 조직적 연대를 통해 혁명을
꿈꾸었던 80년대 ‘투쟁적 혁명 세대’들이 붙인 별명이다.
유신체제, 군부독재에 대항하면서 현실 변화에 대한 필요를 인식했지만 실천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비판이 포함된 말이다. 이 낭만적 혁명 세대들은 현재 50대 로 접어들어 노년을 준비하고 있다.
세월도 무상하시지…, 파릇파릇한 나이였을 때, 그들은 이 땅에 통기타 문화, 청바지와 미니스커트,
장발로 환유되는 청년문화를 태동시킨 주역들이었다.
아무래도 이 세대의 ‘낭만적’ 성격에 대해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어차피 ‘혁명’이야 철 지난 무른 딸기 같은 것이 되었으니 삭혀서 쨈으로나 써먹으면 다행이니 말이다.
영화감독 이장호는 이 세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이장호가 가진 낭만성은 아이러니하게도 80년대 작품인 『바보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위에서도 잠깐 이야기 했지만 이 영화에서 현실은 그저 개인을 억압하는 대립 항으로 뭉뚱그려 위치
할 뿐이다. 그 토대 위에서 개인의 고민이 화려하게 부유할 뿐이다.
비판적인 현실이 원인이긴 하지만 그것을 애써 파헤칠 맘은 애시 당초 없었던 것처럼, 바보들의
몸짓들이 한없이 낭만적인 미장센과 함께 스크린을 흘러간다.
이장호와 동년배인 소설가 최인호 역시 70년대의 아이콘이다.
촉망받는 젊은 작가였던 그가 돌연 대중소설 『별들의 고향』을 발표하자 한국 문단 계는 발칵
뒤집히고 만다. 위대한 문학평론가 김현은 그에게 “당신은 참 좋은 작가였다.
그런데 『별들의 고향』으로 대중작가가 되려 한다. 당신은 우리가 옹호하던 작가였다.
그런데 당신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난처한 우리의 입장이 점점 코너에 몰리게 됐다.
그러니 양자 중에 하나를 택일해 달라.”고 단도직입하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보수적인 문학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겁대가리 상실한 핏덩이였던 것이다.
나는 최인호의 이런 태도가 대단히 낭만적인 대처였다고 생각한다.
가진 것 없이 저지르고 보는 펑크 록커 같지 않은가?
80년대 투쟁적 혁명 세대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뒤 뜻을 함께하는
조직을 꾸려서 한칼에 거사를 치루지 않았을까?
그렇다. 70년대는 이런 독고다이들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신감, 한없이 낭만적인 젊음의 패기들이 도처에서 흘러나오던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풍토 속에서 한대수의 아방가르드한 공연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었고,
김민기의 영롱한 한국어 가사들도 노래로 불려 질 수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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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고향' 시절엔 낭만이 있었다.
무턱대고 옛날이 좋다는 복고지상주의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때의 젊음은 비록 손에 잡히지 않는 형이상학이라고 하더라도 온 존재를 던져서 산산히 부서져야
해갈될 것 같은 이상을 쫓았다. 물론 꿈꾸기만 했을 뿐 열에 아홉은 좌절하고 상처받았을 게 뻔하다.
지금의 젊음도 그렇다. 지금의 젊음도 좌절하고 상처받는다. 때문에 우리는 모든 젊음을 선이라고 말한다.
물론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막무가내의 꿈도 꾼다.
하지만 그 꿈은 더 이상 밖으로 내보여서는 안 되는 무슨 터부가 된 것 같다.
밖으로 내보이는 꿈은 그저 상품과 물질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일 때만 허용되는 남루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어쩌면 그게 진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역사는 기록되어야 하는지 모른다.
결국 이 황폐한 시대에 70년대 낭만적 혁명 세대들의 하릴없는 상실과 허무는
정교한 상품이 되어가는 21세기 청춘이 벤치마킹해야 할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아무리 시장가치로 실존의 이유가 판가름되는 시대라고 하더라도 한명 한명, 개인 개인의 비밀스런 일상에서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수음을 하고 망측한 상상은 계속된다.
젊음의 고통, 청춘의 몸살이 계속되는 한, 언젠가는 또 다른 낭만이 예수처럼 재림할 것이다.
(글 일부를 가져온 곳 : http://cafe.naver.com/musi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