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
기타 치는 본회퍼
본회퍼가 수감됐던 테겔감옥
나치 히틀러
고난을 당하고도 깨닫지 못하면 더 큰 고난이 온다는 것이 함석헌의 경고였다. 한민족이 36년 동안 일제 아래서 그토록 고통을 받고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6·25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300만 동포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각자가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고난을 개과천선과 새출발의 에너지로 삼은 나라론 20세기 들어 독일만한 나라가 없다. 독일은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였지만 스스로 통일을 했고, 경제적 번영을 이뤄 유럽의 맹주가 되었다. 같은 2차대전 패전국인 일본이 주변국 침략과 악행에 대해 후안무치로 일관하는 데 반해 독일은 나치 전범들을 최후의 1인까지 쫓아 처벌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났을 때는 17개 원전 전체를 2020년까지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불과 70~80년 전 히틀러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낸 집단 광기의 나라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독일 양심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백교회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조차 “하나님이 이 시대에 새로운 구세주를 보내주셨다”며 “하일 히틀러!”를 외칠 때, 이에 저항했다. 그 가운데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가 있었다. 그는 나치가 모든 언론마저 통제하고 유대인을 학살하고 전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자 대법관인 매부 도나니 등과 함께 1942년 나치 전복 음모를 꾀했다. 이 계획이 발각돼 1943년 4월5일에 잡혔고, 1945년 4월9일 새벽에 교수대에서 세상을 마쳤다. 히틀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3주 전이었다.
본회퍼는 전사도 투사도 아니었다. 궁정목사의 딸인 어머니와 정신과 의사였던 아버지가 꾸린 다복한 가정에서 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그는 피아노 치는 것을 즐겼다. 21살엔 베를린대 신학부에서 카를 바르트로부터 “신학적 기적”이란 칭송을 받으며 박사학위를 받고, 24살에 교수가 된 천재 신학자였다. 그가 신학적 고뇌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랬다.
“만일 미친 사람이 큰길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목사로서 나는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그 가족을 위로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핸들을 빼앗았어야 옳지 않았겠는가?”
그가 3년간 참혹한 나치의 감옥 속에 있으면서 남긴 <옥중서간>에 이런 글이 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 내가 매 맞는 것, 내가 죽는 것, 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세월호 아이들을 바다에 수장시켜 죽인 한국 사회는 조용하지 않다. 그러나 6월엔 지방선거와 월드컵이 있고, 8월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온다. 정치권력은 또 어떤 이슈를 만들어낼지 알 수 없다. 분노하기는 쉽다. 눈물 흘리기도 쉽다. 그럴듯한 계획을 공언하기도 쉽다. 그러나 고난을 잊어버리기는 더 쉽다. 함석헌의 말대로 고난은 망각의 틈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다. 본회퍼 못지않게 위대한 것은 독일 정치인과 국민들이다. 그들은 고난을 70년 동안이나 잊지 않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행동을 멈추지 않고 전진하고 있다.
조현 논설위원 겸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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