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나무와 에로티시즘과의 연관은 과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다. 누에는 뽕잎만을 먹고 단백질 덩어리인 비단을 토해낸다.
이는 뽕잎이 콩 다음으로 단백질이 많은 식품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용해 지난 2001년에는 누에의 수나방과 번데기를 원료로 하여 성호르몬과 정자 수,
지구력을 현저히 증가시키는 한국형 발기부전 치료제가 개발되기도 했다.
또 중앙아시아에서는 양고기를 구울 때 뽕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면 보양 효과가 증진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야기를 다시 살인사건이 벌어진 조선의 밤섬으로 되돌려 보자.
당시 밤섬은 오늘날처럼 무인도가 아니라 꽤 많은 가구가 거주하고 있던 유인도였다.
한글학회가 편찬한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밤섬은 고려 말기 때 죄인을 귀양 보내는 곳이었다.
그 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밤섬에 정착했다.
이들의 배 만드는 기술은 상당히 뛰어나 한강 상류로는 단양과 영월까지,
한강 하류로는 강화도와 서해에서까지 배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였다.
동국여지비고라는 옛 문헌에 의하면 당시 율도는 길이가 무려 7리나 되는 큰 섬이었다.
또 섬의 복판에는 암수 두 그루의 큰 은행나무가 서 있었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는 고려 말의 충신 김주가 심었다고 해서 충신목으로 받들여졌는데, 밤섬의 상징목이기도 했다.
배를 만들거나 물고기를 잡고 채소를 키우는 등 밤섬 주민들의 생활은 비교적 풍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외부와 단절되어 있어 도둑이 없는 마을로도 유명했다. 다만 한 가지 근심이 있었다면 물난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밤섬은 큰 홍수가 나면 섬이 물속에 거의 잠겨 버린다.
그래서 밤섬주민들은 궁리끝에
부군신당에 모여 함께 무사 안녕을 비는 제를 올렸다. 때문에 밤섬 주민 간의 유대는 어느 마을보다도 깊었다.
그런데 이런 섬 마을에서 처참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니 아마 섬 전체가 발칵 뒤집혔을 만했다.
▼ 굉음과 함께 사라진 밤섬
근대에 들어서 밤섬은 두 차례나 큰 위기를 겪었다.
1925년 일어난 사상 최대의 을축년대홍수로 인해 주민들은 거의 모든 재산을 잃었다.
6?25전쟁 때는 폭격으로 밤섬의 집들이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밤섬이 지금처럼 무인도로 변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밤섬에는 1968년까지만 해도 62가구 443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밤섬 주민들은 호롱불을 켜고
한강물을 그대로 떠다 밥을 지어 먹고 식수로 마셨지만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은 않았다.
하지만 1968년 2월 10일 오후 3시 밤섬은 굉음과 함께 폭파되었다.
그 후 하루 687명씩 연 7만 명의 인부와 수많은 중장비가 투입되어
트럭 4만대 분의 돌과 그보다 더 많은 흙을 밤섬에서 걷어냈다.
그 결과 그해 5월 말 밤섬은 강물 높이인 표고 4미터까지 깎여져 완전히 물속에 잠겨버렸다.
밤섬에서 나온 흙과 돌은 그대로 바로 옆의 여의도로 옮겨갔다.
밤섬이 사라진 것은 바로 여의도 때문이었다. 여의도의 윤중제를 쌓아올리고,
한강 흐름이 막히지 않도록 하구 쪽을 넓히기 위해 밤섬을 폭파 해체한 것이다.
밤섬에 살던 주민들은 모두 밤섬이 잘 내려다보이는 마포 창전동 와우산 기슭의 연립주택으로 이주했다.
그 후 1986년 무렵부터 밤섬에 새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강관리사업소가 생겨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면서부터였다.
결국 서울시는 1999년 밤섬을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밤섬에는 조류 41종 이상, 식물 189종 이상, 곤충 15종 이상이 서식하고 있다.
청둥오리와 해오라기, 개개비, 쇠물닭, 도요새, 비오리 등의 새가 밤섬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
또 원래는 겨울철새였으나 아예 밤섬에 정착해 텃새가 되어버린 흰빰검둥오리도 흔히 볼 수 있다.
생태계의 맨 위자리를 차지하는 사냥꾼 황조롱이도 밤섬에서 먹이사냥을 할 정도이다.
▼ 도심 한복판의 철새도래지 장관
1999년 밤섬은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예전과 달리 지금 밤섬에서 가장 많이 자라고 있는 나무는 버드나무이다.
버드나무는 홍수에 강해서 뿌리가 뽑혀도 물이 빠지면 곧바로 땅에 뿌리를 내려
다른 식물이 서식할 수 있는 1차적 환경을 만들어준다.
때문에 밤섬에는 버드나무를 비롯해 느릅나무, 억새, 갈풀, 환삼덩굴 등이 정글처럼 우거져 있다.
또 밤섬은 잉어나 붕어, 누치, 쏘가리, 메기, 뱀장어 등의 산란장소로서도 매우 적합하다.
이런 환경적 요소가 수많은 새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셈이다.
특히 겨울에는 시베리아나 몽골 등의 북방 지역에서 수천 마리의 겨울철새들이
모여들은 밤섬은 장관을 이룬다.
덕분에 서울은 전 세계적으로 도심 한복판에 철새도래지가 있는 유일한 수도가 되었다.
그럼 폭파 해체되어 물속으로 사라져버린 밤섬이 어떻게 이처럼 많은 생명을
불러 모으는 생태계 보전지역이 될 수 있었을까?
폭파 전 총 5만2천여 평(주민 거주지는 약 1만7천여 평)이었던 밤섬은
폭파 뒤 약 4만7천여 평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주민 거주지 중 많은 면적이 날아가 버려 강물이 불어나면
섬 전체가 거의 물에 잠겨버리는 쓸모없는 땅이 되었다.
그러나 밤섬은 1985년 5만3천여 평, 1991년 6만여 평, 1996년 7만여 평,
2002년 7만5천여 평으로 차츰 늘어났다. 특히 폭파 전 마포 쪽의 윗밤섬은
1천여 평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4만여 평으로 늘어나 아랫밤섬보다 오히려 더 커졌다.
밤섬이 이렇게 커진 이유는 밑바닥이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1968년의 폭파에도 불구하고 섬의 기저를 이루는 암반은 그대로 남아서
상류로부터 떠내려 오는 흙과 모래들을 품안에 켜켜이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때 조선업과 뽕밭으로 번성했던 밤섬이 이제는 도심에서 보기 힘든
온갖 생명들이 번성하는 생태보전지역으로 변했으니 이 또한 상전벽해((桑田碧海):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라는 뜻으로, 세상(世上)이 몰라 볼 정도(程度)로 바뀐 것. 세상(世上)의 모든 일이 엄청나게 변해버린 것)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이야기 실록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