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건 아가씨의 사랑에 환속(還俗)한 스님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어느 미남 승려와 폐결핵 환자 아가씨와의 청순한
러브 스토리.
원효(元曉) 대선사가 요석공주와 동침하여 파계한 끝에
설총(薛聰)을 낳았다는 천년 전의 로맨스처럼 지현(知玄)
스님의 로맨스는 물씬한 감동마저 준다.
지금은 환속하여 부산(釜山)에서 알뜰하게 살고 있다는
그들의 파계 장소 전남(全南) 여천(麗川)군 돌산도
(突山島) 향일암(向日庵)에 얽힌 얘기-.
전남(全南) 여수(麗水)시에서 배를 타고 1시간쯤 가면
돌산(突山)섬이 나온다.
여천(麗川)군 돌산(突山)면 율촌(栗村)리에서 1km쯤
북쪽에 금오산(金鰲山)이 있고 산에는 흔들바위란 게
있다.
집채만큼 큰 바윗덩이가 사람이 밀면 흔들거린다는
기묘한 바위다.
이 흔들바위 밑에 까치집처럼 앙증맞은 향일암(向日庵)
이란 암자가 있다.
하지만 이 암자의 유래는 거창하다.
신라 선덕(善德)여왕 13년(사기 639년)에 원효(元曉)
대사가 창건했고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이 곳을 본거지로 승군(僧軍)이
활약했다는 곳.
그 건 그렇고 이 일대 경치가 장관이다.
울창한 낙락장송의 솔바람 소리, 온갖 기묘한 모양의
바위, 그리고 남해바다의 장쾌한 파도가 기막힌 절경이다.
1957년이면 17년전. 키가 헌칠하고 미목수려한 스님
한분이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로부터 향일암(向日庵)
으로 왔다.
당시 나이 27살, 법명은 지현(知玄), 속명은 박영식(가명),
호는 호월(湖月).
경남 남해(南海)가 고향인 지현(知玄)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 하던 19살에 출가, 전국 유명 사찰을 돌아다니며
10년을 목표로 수도하다가 마지막 3년을 채우기 위해
향일암(向日庵)을 찾은 것이다.
지현(知玄)스님은 절 주변을 알뜰하게 손질한 뒤 백팔
염주에 사바세계 번뇌를 실어 깊은 사념의 경지를 거닐었다.
그동안 폐사처럼 버려져 있던 향일암(向日庵)에는
이로부터 여신도들이 몰려들었다.
낭랑한 목소리에 곡식 위의 제비같은 탈속(脫俗)의
지현(知玄)스님,
게다가 인물 좋고 경치마저 절경이어서 그는 인기스님
이 된 것이다.
세월은 흘러 59년 봄이 되었다.
향일암(向日庵)에서 1km 떨어진 해변가 율촌(栗村)마을에
양장 차림의 미인 아가씨가 찾아들었다.
광주(光州)에 산다는 박애희(朴愛姬)양(23·가명).
폐결핵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요양차 이모가 사는
율촌(栗村)에 왔다는 그녀는 발그레한 볼의 홍보가
요정처럼 기막히게 예쁜 미인.
아열대성 식물인 동백·산죽(山竹)·비화(飛花)가 온 섬을
뒤덮고 바위 틈에 도사린 석란(石蘭)의 향기는 십리
안팎을 뒤덮어 6순 환갑이라 해도 마음 설렐 판이었다.
박(朴)양의 병은 이런 절묘한 풍경의 탓(때문)이었는지
눈에 띄게 회복되었고, 차츰 힘이 생겨 산책 코스를
넓혀갔다.
그때 그녀의 눈에 띈 남성이 바로 지현(知玄)스님.
부처님 앞에 정좌하여 청아한 목소리로 독경하는 근엄한
모습을 취한듯 응시했다.
이로부터 그녀는 2개월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향일암
(向日庵)을 찾았다.
그녀의 시선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졌고 지현(知玄)스님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잠이 들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스님은 장승. 눈길 한번 주는 법이 없었다.
가을이 되었다. 사무친 가슴 속의 사연이 맺히고 맺혀
이번엔 폐결핵이 아닌 상사병에 몸부림하다가 농약을
마셔 버렸다.
위급한 그녀를 두고 이모 되는 여인은 조카의 애절한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지현(知玄)스님에게 달려가
『그 애를 구해 달라』고 애원했다.
스님은 그 요청을 거부하고『나의 손길보다는 당장 해독
시키게 녹두물이나 먹이시오』했다.
이모는 되돌아와 녹두를 갈아 먹였다.
의사 없는 갯마을에서 꼼짝없이 죽어야 했던 그녀는
신통하게도 살아났다.
59년이 저물고 새해 음력 1월14일 새벽 4시.
지현(知玄)스님은 화엄경(華嚴經)을 독경하며 새벽의
경내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뒷산에서 비통한 여인의 통곡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스님은 뒷산으로 달려갔다.
박(朴)양이 흔들바위에 맨발로 서서 바다를 향해 투신
하려는 찰나였다.
혼비백산한 지현(知玄)스님. 자기로 인해 원한을 품고
죽을 여자를 생각하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는『아가씨 소원은 뭐요? 다 들어 주겠으니 제발 뛰어
내리지만 말라』고 애원했다.
그녀의 소원이란 불을 보듯이 뻔한 것.『스님과 함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망설이고 더듬거릴
나위가 없었다.
『알겠으니 제발 그곳에서 내려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 소리를 듣자 박(朴)양은 바위 위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스님은 그녀를 구출해 냈다.
암자에 누이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그녀는 스님의
품안에 안겨 몸부림치며 울었다. 난생 처음으로
싱싱한 여인의 체취와 풍만한 마찰감에 스님도 얼이
빠져 버렸다.
29년동안 막혀 있던 정열이 용솟음 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10년 수도를 1년도 못남기고 거센 폭포수 속의
물거품이 되었다.
이날 새벽부터 지현(知玄)스님의 낭랑한 독경소리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지난 65년 여름. 대구(大邱)
D사에서 참회의 수도에 전념하던 지현(知玄)스님은
어떤 모녀의 방문을 받았다.
『이 애가 스님의 딸입니다』면서 모녀는 6살 귀여운
아기를 내보였다.
스님은 가가대소(呵呵大笑) , 『그렇습니다.
내 아이입니다』면서
즉시 승복을 벗고 딸을 한가슴 가득 안았다.
그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뒤로 스님 부부는 딸 하나에 아들 하나를 더 얻어
1남2녀를 두었다.
지난 71년 5월. 향일암(向日庵)을 중창할때 속인 지현
(知玄)부부는 찬조금 5만원을 보냈다.
그들은 현재 부산 영도구 봉래동에서 미곡상을 경영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살고 있으나 찾아간 기자에게 사진
찍기를 거부-.
그러나 한 여인의 억센 사랑의 집념으로 10년 수도승의
마음을 움직인「흔들바위」는 오늘도 의연하다.
- 麗水=金德鉉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