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경영 통찰력의 원천은 '인문학 삼매경'
디지털 혁명의 상징적 인물인 구글 슈미트 회장은
졸업식 축사에서 디지털 기기를 끄고 아날로그적 삶을 살아볼 것을 권유했다.
경영에 필요한 통찰력이 바로 독서를 통한 사색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끄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라. 아날로그 시대에 좀 더 머물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먼저 찾아야 한다."
세계 최대 인터넷 검색업체 구글을 이끄는 에릭 슈미트 알파벳(구글 모회사) 회장이 200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졸업식 축사에서 한 말이다. 그는 6000여명의 졸업생에게 컴퓨터의 가상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아날로그적 삶'을 살아볼 것을 권유했다. 많이 생각하고 고민해 스스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색하는 능력'을 최대한 기르라는 주문이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더불어 디지털 혁명의 상징적 인물인 슈미트 회장이 이런 연설을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세계적인 정보기술(IT) 선구자들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사색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경영에 필요한 상상력과 통찰력이 바로 독서 등을 통한 사색에서 나온다는 점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고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 에릭 슈미트 알파벳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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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통해 고민 간추려 '결정 체계화'
스티브 잡스는 "타인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면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하라"고 했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는 "인문학 없이는 컴퓨터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데이먼 호로비츠 전 구글 부사장은 "이제 IT 전문 개발자도 칸트를 읽어야만 하는 시대"라고 말하기도 했다.
리더인 최고경영자(CEO)는 외롭다. 회사의 명운이 걸린 결정을 자신이 책임지고 내려야만 한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으로 무장한 회사의 수많은 신기술들은 많은 도움을 주지만 결정의 영역 만큼은 예외다. 그렇기에 세계적인 경영자들은 AI가 자신을 대신해 자료는 수집하게 하지만, 결정을 내리게 하지는 않는다. 손발은 맡겨도 머리만큼은 내주지 않는 셈이다.
그런데 사고의 깊이는 속도나 효율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단편적인 정보를 얻는 것보다는 때로는 여유롭게 보내는 시간이 사유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창의성과 통찰력은 즉각적,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디지털 사고에서는 나오기 어렵다. 오히려 모호함과 우연성, 직관, 은유와 같은 아날로그적 사고가 인간의 지적 기반을 풍요롭게 한다.
MBA에서는 사색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인문학 강의 강조
독서는 통찰력의 원천
이에 미국 경영대학원(MBA)에서는 사색하는 능력을 최대한 키워주기 위해 젊은 경영학도들에게 인문학 등의 강의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리처드 셸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MBA 와튼스쿨 교수는 "학생들에게 재무관리나 마케팅 등의 공부를 하기 전에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고 답을 찾아가도록 돕고 있다"고 했다.
CEO들이 사색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지만 독서와 인문학에 대한 강조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이지만 여전히 독서는 통찰력의 원천으로 꼽힌다. 세상을 읽고 분석하는 능력의 핵심을 바로 인문학과 독서를 통해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CEO들은 독서를 통해 저자의 서술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면서 결국 실타래처럼 얽힌 고민을 간추려 체계화한다. 아울러 독서로 수많은 간접 체험을 하면서 다양한 가치 규범과 문화를 습득한다. 이 때문에 매 순간 의사결정을 해야 하고 그 결정에 따라 회사의 미래가 바뀔 수 있음을 가장 잘 아는 CEO일수록 바쁜 시간을 쪼개 틈틈이 책을 읽는다. 그야말로 '책 읽는 사람이 지도자(Readers are leaders)'인 것이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과 MS 창업자 빌 게이츠는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책 애호가들이다. 손 사장은 미래에 대한 통찰력과 비전의 원천이 바로 독서에서 비롯됐다고 수차례 밝혔다. 그는 과거 만성 간염으로 3년간 병원 신세를 지면서 무려 4000여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때의 독서량과 사색이 지금 손 사장 경영 통찰력의 바탕인 셈이다.
2016년 6월 29일 오후 서울 구로구 한국산업단지공단 키콕스 벤처센터 대회의실에서 문화체육관광부의 '찾아가는 직장인 인문콘서트'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강연을 듣고 있던 한 참석자가 휴대폰과 노트로 강연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장련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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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이겨낼 기회, 인문학에 있어"
"그간 '어떻게(How)'에 집중하던 우리는 이제 어려운 질문인 '왜(Why)' '무엇을(What)'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상대의 겉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을 읽으려는 관심과 이해가 바로 인문학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2014년 연세대 특강에서 한 얘기다. 정 부회장은 "사색하지 않고 검색만 하는 우리가 당면하게 될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기회가 인문학에 있다"면서 "공학적 사고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인문학은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
어떻게(How)보다 왜(Why), 무엇을(What) 집중
사람 마음을 읽으려는 관심
정 부회장은 어머니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으로부터 어릴 때부터 "경영을 잘하려면 사람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인문학과 예술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대학에서 서양사학을 전공했고, 그의 동생인 정유경 신세계그룹 부사장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했다.
정 부회장 남매 외에도 재벌가 자녀 가운데는 인문학을 전공한 이가 적잖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대학에서 동양사학을 공부한 뒤 일본과 미국의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을 배웠다.
최근 기업들은 임직원에게도 인문학 공부를 권장하는 추세다. LG전자는 사내 인터넷 교육사이트에 'EBS 인문학관'이라는 코너를 만들어 역사, 예술, 문학 등에 대한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2013년 직원을 대상으로 역사 강연 '히스토리 콘서트'를 10회에 걸쳐 열었던 현대자동차는 강의 범위를 더 넓혀 매년 문학, 심리학 등까지 포괄하는 '인문학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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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두 번 은둔하며 내공 쌓는 빌 게이츠
'빌 게이츠의 힘은 은둔 속 사색에서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마이크로소프트(MS)가 세계 '넘버 1' 소프트웨어 업체 지위를 유지한 비결이 바로 빌 게이츠 MS 창업자의 사색의 리더십으로부터 나왔다고 평가했다.
빌 게이츠는 자신이 읽은 책 서평을 개인 블로그에 올리며 주변에 독서하는 습관을 기를 것을 권유한다. /빌 게이츠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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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는 일 년에 두 차례씩 도시를 떠나 미국 서북부 몬태나주 별장에 은둔한다. '생각 주간(think week)'이라 불리는 일주일간의 은둔 동안 빌 게이츠는 MS 직원들은 물론 가족의 방문도 거절한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산밖에 없는 산골짜기 별장을 찾는 사람은 하루에 두 차례씩 식사를 넣어주는 관리인뿐이다.
여기서 빌 게이츠는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사색과 독서하는 데 사용한다. MS 직원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읽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관련자들에게 필요한 사항을 이메일로 지시한다. 빌 게이츠는 이 기간에 100여개에 달하는 보고서를 읽는다.
빌 게이츠가 읽을 보고서는 MS 직원이라면 누구나 작성해 제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아이디어가 빌 게이츠에게 전달되는 ‘생각 주간’은 MS 직원들에게는 흥분 속에 결과를 기다리는 기간이다. 빌 게이츠는 충분한 고민 끝에 새 기술의 개발이나 신규 사업 아이템을 결정한다. MS가 인터넷 브라우저 시장에 참여하게 된 계기 역시 바로 이 기간에, 이 방식으로 결정됐다.
빌 게이츠의 심사숙고하는 모습은 MS의 사풍(社風)에도 영향을 미쳤다. MS는 오랜 시간 회의를 거듭한 후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회의 시간이 한 번에 8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 빌 게이츠는 "앉아서 생각하라고 월급 준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빌 게이츠는 지금까지도 독서하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2010년부터 자신이 읽은 책 서평을 개인 블로그 '게이츠 노트(gatesnotes.com)'에 올려 독서의 힘을 널리 전파 중이기도 하다. 그는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마을의 도서관이었다"며 "하버드대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독서하는 습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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