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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지주의란 무엇인가?(위키백과)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5. 21:07

개요[편집]

영지주의는 나스티시즘(영어: Gnosticism)을 뜻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 음을 따라 그노시스파 또는 그노시즘이라고도 한다.

 '영지주의자' · '영지주의파' 또는 '영지주의적'이라고 번역되는 나스틱(Gnostic)이라는 낱말은

그리스어로 '신비적이고 계시적이며 밀교적인 지식 또는 깨달음'을 뜻하는 그노시스(γνῶσις gnosis[*])로부터 따온 것으로[1][4][8][9],

이 낱말은 고대의 영지주의 종교 운동의 반대자들이 이 운동에 속하는 사람 또는 단체를 지칭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8]

당시에 이 종교 운동의 분파들 중 기독교 계통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단순히 기독교인이라 불렀다.[4][8]

 

"나스티시즘(Gnosticism)"이라는 낱말은 고대에 존재하였던 이 종교 운동을 특별히 가리키기 위해 현대 학자들이 '나스틱(Gnostic)'이라는 낱말로부터 만든 말이다.[1][10][11]

 

한글 번역어인 '영지주의(靈知主義)'라는 낱말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영지(靈知)'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영적 지식', '영적' 또는 ' 프네우마(Divine Spirit)를 아는 것'이다.

영지주의 운동은 특정한 한 형태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1][4] 영지주의는 다양한 신앙 체계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물질 우주 데미우르고스(야훼)라고 불리는 불완전한 하위의 최고신스피릿, 프네우마의 일부를 사용하여 창조한 세계라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분파와 무관하게 대체로 견해가 일치하였다.[12]

 

이 교의에서, 불완전한 하위의 신 데미우르고스 종종 아브라함 계통(야훼)이나  그리스 신화제우스와 동일한 신으로 여기며,

최고신으로부터 발출되어 형성된 상위의 세계인 플레로마나 지고한 존재인 최고신을 뜻하는 신성(神性)과는 대비된다.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견해는 분파 사이에 큰 차이를 보였다. 어떤 분파는 데미우르고스가 악의 물질적 화신이라고 주장한 반면,

다른 어떤 분파는 최고신에 비해 불완전한 선한 신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바실리데스파데미우르고스에 대해 다른 분파들과는 더 뚜렷이 구분되는 견해를 가졌다.[13][14]

이 견해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는(야훼) 불완전한 선한 신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예수복음 기뻐하고 이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최고신이라 주장했던 이전의 무지를 반성하고

 우주의 전 체계 속에서의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겸손한 존재였다 [13][14](

영지주의 운동은 헬레니즘 철학 · 유대교 · 기독교와 영향을 주고 받았다.[4][15]

학자들은 대체로 영지주의가 이원론적인 종교 운동이었다고 보고 있으나[15],

한편, 가장 유력했던 영지주의 분파인 발렌티누스파를 비롯한 후대의 영지주의 운동들에서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졌다.[16]

데미우르고스 대한 다양한 견해와 함께 이러한 세계관의 다양성은 영지주의 운동에 여러가지 다양한 입장들이 서로 공존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지표로 간주되기도 한다.

 

영지주의자들과 정통파 기독교인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믿음이 아니라 (그노시스)구원의 수단이라고 여겼다는 것에 있었다.

영지주의 운동가들은 그노시스를 통해 인간의 참된 기원이 지고한 신성(神性)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해탈,도통,경지)

깨달음을 통해 인간의 성품 중 영적 요소물질계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된다고 주장한다.[4][11][9]

따라서, 영지주의 운동에서는 그노시스(지식,앎,깨달음)를, 영적 요소(영성)물질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해탈)된 상태를 얻고자 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요인이자 구원의 수단과 도구라 여겼다.[11]

 

한편, 다른 하나의 큰 차이점으로, 많은 영지주의자들이 윤회를 믿었다.

 

정통파 기독교교부로 알렉산드리아파를 대표하였던 오리겐에 따르면, 유력한 영지주의 분파 중의 하나였던 바실리데스파의 창시자인 바실리데스

사람이 구원(해탈)을 성취하지 못하고 죽었을 때 받는 유일한 이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17]

또한 오리겐은, 바실리데스가 가르친 윤회의 교의로 인해, 악한 행위를 하면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된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하여

결과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행위를 하게 만드는 '유익한 두려움'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고 불만을 제기하였다.[17]

 

영지주의 운동가들은 인간을 정신(영혼)과 물질(육체)의 두 요소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 정신(영혼) · 물질(육체)의 세 요소로 구성된 존재로 보았으며,

 

이에 따라, 현재의 영적 발달 정도에 따른 구분으로, 인간을 영적인 인간(Pneumatics· 정신적인 인간(Psychics) · 물질적인 인간(Hylics)의 세 부류로 구분하였다.[8][18]

 

이 구분에 따라,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이 세 부류 중 구원을 성취할 가능성이 가장 큰 영적인 인간의 부류에 들어가며,

다른 기독교인들, 즉 당시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인들은 정신적인 인간의 부류에 들어간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들 세 부류의 사람들 중 영적인 인간과 정신적인 인간만이 그노시스를 가질 수 있으며[18],

물질적인 인간은 이번 생에서 그노시스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영지주의에 물든 이단들의 특징) 

그 이유는 물질적인 인간은 물질에 너무 몰입해 있으며 따라서 더 높은 차원의 실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18][19]

 

예수에 대해서도 영지주의자들은 여러 견해를 가졌다.

 

다수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지상의 인류를 구원할 수단인 그노시스를 인류에게 가져다 주고 가르치기 위하여,

지복(至福)의 플레로마를 떠나 고통이 가득 찬 물질계에 탄생하는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 존재로, 지고한 존재의 물질적 화신이라 여겼다.[8][10][20]

 

반면 노쯔림만다야교 등의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거짓 메시아"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세례자 요한 특히 중시하였는데,

이들은 예수세례자 요한이 위탁하여 맡긴 가르침들을 타락시켰다고 생각하였다.[21]

 

어떤 영지주의 가르침에서는 예수가 아니라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인 이나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메시아(구세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22]

 

나그함마디 문서 포함된 영지주의 문헌들 중의 하나인 《이집트 복음서》에서는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인 예수의 전생들 중의 하나라고 보고 있는데,

물질계라는 감옥으로부터 사람들의 영혼구원하기 위해 이라는 메시아화신하였던 것처럼

동일한 목적을 위해 다시 예수라는 메시아화신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보고 있다.[23]

 

또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도 정통파 기독교와는 다른 견해를 주장하였는데,

예를 들어, 현존하는 대표적인 영지주의 성전(聖典)들 중의 하나인 《피스티스-소피아》에 따르면,

예수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다음 하늘로 승천하여 지상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이 일시적 승천 후 다시 지상으로 와서는 지상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11년간을 더 가르쳤는데

그 가르침은 첫 번째 신비(First Mystery)를 완전히 알 수 있게 하는 가르침(그노시스)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영지주의 운동은 기독교의 한 분파로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 탄생 이전, 즉 서력기원의 몇 세기 전에도 영지주의 체계의 자취가 존재하였다는 다른 학설이 제기되었다.[3][5]

 

영지주의 운동은 3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 제국고트족의 점령지, 또 사산 조 페르시아의 영토 등, 지중해 세계와 중동으로 전파되고 발전하였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와 여타 다른 칙령들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되는 등의 일이 있었던 4세기에는 가톨릭교회의 탄압으로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 시기에 영지주의 문헌들의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사라졌으며,

영지주의 반대자들이 영지주의를 논박하기 위한 문헌의 근거 자료로 소수의 단편들만이 살아남았다.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된 1945년까지 영지주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2차 자료들을 토대로 추론에 근거한 연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4][5]

4세기 이후에는 많은 수의 영지주의자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였으며,

남아 있는 유럽의 영지주의자들도 알비 십자군의 활동으로 인해 그 수가 크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만다야교 공동체들이 현대에도 남아 있다.[4]

 

영지주의 사상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유럽북아메리카에서 있었던 많은 밀교적 · 신비주의적 운동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4][8]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을 고대에 있었던 영지주의 운동의 부활 또는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1945년에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에 포함된 영지주의의 1차 문헌들은

영지주의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학자들의 이해에 있어 근본적인 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출처 :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글쓴이 : minima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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