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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지주의란 무엇인가?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5. 21:12
민영진 박사의 글입니다.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말이 있다. 그노시스파 이단을 두고 하는 말이다. 기원 후 2세기에 그노시스(gnosis)의 개념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하려던 이단 기독교이다. 여기에서 그노시스란 영지(靈知), 곧 신비적이고 영적인 지혜를 뜻한다. 그리스어 그노시스를, 신령 영(靈) 자에 지혜 지(知)자를 쓴, 영지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그노시스 이단 사상의 중요한 핵심을 잘 지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영지주의에서는 영(靈)과 지(知)를 강조한다. 영적인 것과 지적인 것은 언뜻 보기에 상반되는 것 같지만, 영지주의에서는 이 두 요소가 서로 잘 어울린다. 영지주의에서 영적이라고 하면, 그것은 세 가지를 부정하는 특징을 보인다.

첫째는 육체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성(性) 구별이 되어 있는 것이라든가, 남녀가 성 생활을 하는 것 등은 모두 구원의 길에 이르는 방해물이다.

둘째는 물질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 창조된 이 물질 세상은 영지주의자들에게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세계를 창조한 신은, 여러 신들 가운데에서도 좀 모자란 열등한 신이다. 사람이란 그저 이 세상을 지나가는 나그네이지(어록 42), 세상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주인이 아니다.

영지주의에서 영적인 것이라고 하면, 셋째는 부모나 형제 자매와의 가족적 유대관계를 부정하고서, 홀로 되어 종교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상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영적인 것의 세 가지 국면을 지적한 것이다.

영지주의는 영적인 것뿐 아니라 지적인 것도 말한다. 거기에서 말하는 지혜나 지식은, 예수께서 은밀하게 말씀하신 비밀어록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을 일컫는다. 기독교는 예수께서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하신 복음서를 가지고 있지만, 영지주의에서는 아무나 알 수 없는 예수의 비밀어록인 <도마복음서>를 가지고 있다.

이 복음서는, 예수께서 비밀로 말씀하신 것을 도마가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어록을 해석할 수 있는 신비한 지식을 가진 자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 구원은 지식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것이다. 하늘나라도 지식 없이는 가지 못한다.

그러기에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예수는 무엇보다도 은밀한 말씀을 계시하는 자, 구원을 이루는 지식의 중재자이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예수는 많은 청중에게 말하지 아니 하고 다만 제자들이라고 하는 폐쇄된 소집단에게만, 은밀한 구원의 지식을 전한다는 것이다. 그 소집단에 입회하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예수의 말도 감추어진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2세기에 성행하던 이런 유형의 신앙을 기독교는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예수님의 비밀어록이라고 하는 <도마복음서>도 성서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렇다고 하여서 정통교회가 영적인 요소, 혹은 영성(靈性)과 지적인 요소, 혹은 지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경전 안에는 지혜 문학이라고 하여 욥기, 잠언, 전도서 같은 생활지혜를 가르치는 책들이 있다. 다만 지혜를 말하는 이런 책들은 어떤 비록(秘錄)이나 은밀한 말씀을 깨닫는 신비한 지식을 구원의 길로 가르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지혜,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생활지혜를 가르친다.

정통 기독교 역시 성령의 능력, 성령의 은사를 강조한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은 성령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잘 보여준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성령은 영지주의가 말하는 육체를 벗어난 영혼의 세계에서 작용하는 신비한 힘을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어울리어 누리는 삶 속에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하고(사랑),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고(희락), 평화를 이루어갈 수 있게 하고(화평), 고통과 분노 속에서도 자제력을 잃지 아니하고 참게 하고(오래 참음),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게 하고(자비), 선행을 베풀 수 있게 하고(양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하고(충성), 온유할 수 있게 하고(온유), 절제하며 살 수 있게 하는(절제) 힘이다(갈 5:22).

결코 가족관계를 떠나서 물질세계를 버리고 남녀의 성 구분이 없어지는 자웅동체(雌雄同體)의 상태에 이르러 성 생활도 하지 않는 것은 영성이 아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이상 아홉까지 결실이 생활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영지주의의 유혹이 있다. 이 무섭고 갈등 많은 세상, 살기에 자신이 없는 이 세상을 피하여서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리려고 한다. 방언과 방언해석과 입신의 은사가 이런 수단으로 오용되기도 한다. 나름대로의 신비한 지식도 동원된다. 방언을 해석하고 속기록(速記錄)처럼 이상하게 받아 쓴 것 안에서 계시를 읽어내려 하고, 그것을 이 시대에 주어진, 혹은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 말씀보다 더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제도교회의 영적 빈곤에 대한 반발로 이런 영적 추구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런 것이 합법화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지주의의 위험에 직면한다.

이것에 반하여 아주 지성적인 교회가 있다. 거기에서는 수준 높은 성서연구와 지적인 설교가 교회의 중심이 된다. 신앙생활에서 지식과 지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신도들은 은연중 성경을 열심히 '연구함으로써', 그러한 '지식'을 갖춤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아주 이지적이고 지성적인 사람들도 특수하고 신비한 지식을 찾다가 영지주의에 빠지는 위험에 직면한다.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방법이 바로 '해석과 순종' 관계의 균형을 잡는 것이다. 여기에서 '해석'이란 말씀의 해석을 말하고 '순종'이란 말씀의 뜻을 듣고 그대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의 <도마복음서> 어록에 보면, "이 비밀어록을 해석하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이 있다(어록1).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는 것은 "구원받는다"는 뜻을 지닌 관용구이다. 예수께서 은밀하게 하신 비밀 말씀을 해석하는 영적 지혜를 가진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요한복음서에 평행 구절이 있다. 요한복음 8장 51절에서는 "내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영지주의에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아는 자'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즉 구원받은 자이다. 구원의 조건으로 '지식'을 강조하지만 기독교의 정통 신앙에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하여, 복음서는 구원의 길로 윤리적 '순종'을 강조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근본적으로 예수께 '순종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결단코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은밀하게 하신 것이 있는데, 그 뜻을 해석하거나 알아낸다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 아니라 순종이다. '해석'이 구원의 길이 아니고 '순종'이 구원의 길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에게는 '해석'만이면 충분하다.

뜻을 알아내는 행위가 해석이다. 그들은 이것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순종이란 별 의미가 없다. 그러기에 그들의 삶에 윤리적 결단은 별로 중요하지 아니하다. 역사 앞에서 책임지는 삶을 살려 하지 아니한다. 정통 기독교는 이러한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해석과 순종'이라고 할 때 무엇이 해석이고 무엇이 순종인가? 성서읽기, 말씀명상, 성서연구, 설교, 기독교교육, 신앙강좌, 부흥회, 사경회(査經會), 이런 것들은 모두 말씀을 해석하는 행위이다. 교회에서 말씀을 해석하는 목적은 지식의 축적에 있지 아니하다. 말씀을 해석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말씀을 주신 분께 '순종'하여 그 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연구하는 목적은 성서에 관한 지식을 쌓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성서 연구를 하고 나서 시험을 친다고 하여 성서 지식만을 물어본다면, 좀 충격적으로 말한다면 성서 지식만을 확인하는 시험은 어떤 의미에서는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성서를 공부하고 깊게 연구하는 것은, 성서에 반영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 시험을 친다면 우리의 잘못의 고백과 순종의 결심을 유도하여 내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같은 논리로, 설교 역시 말씀의 해석일 뿐이다. 설교를 듣는 이들은 설교를 듣고서 신학적 유산을 물려받거나 기독교적 상식을 쌓아 가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을 고백하고 순종을 결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목사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설교를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환자를 낫게 하려고 기도를 하고, 때로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보인다고 하여도, 이것은 우리와 같은 목사들이 구원받는 길이 아니다. 심판 받는 날에 목사들이 주님 앞에 서서 자기들이 한 설교와 마귀 축출과 기적을 자기들의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미리 딱 못박아 놓으셨다.

(21)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야 들어간다. (22) 그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마 7:21-23)

말씀의 해석이 순종으로 연결되지 아니하고 하나의 지식으로만 남을 때에, 그것은 오히려 '불법'(anomia: 사회적, 도덕적 무질서)이다. 순종과의 연결이 없이 해석만을 반복하는 사람은 '불법을 행하는 자'(hoi ergazomenoi ten anomian)이다. 애노미 현상을 일으키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가 말하는 '해석'이란, 신비한 암호를 푸는 해석이 아니다. 글로 쓰여진 이 성경의 말씀을 읽고, 이 말씀이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 움직이고 작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권위를 지닌 말씀은 반드시 순종의 행위로 실천되어서, 말씀이 지닌 그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말씀을 해석하거나 해석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순종'을 전제로 하는 행위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해석은 '순종을 전제로 하는 해석'이다.

'순종을 전제로 하는 해석'이란,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 있는 요소, 기독교의 용어로 말하면, 나를 죽음으로 이끌고 가고 있는 죄, 나를 지배하고 있는 타락한 가치관, 이러한 것들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삶, 새로운 질서를, 성서의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 성서의 말씀이 어떻게 그러한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가치를 나에게 말하여 주고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를 파멸로 이끌고 있는 그 다양한 악마적 요소들은 각자가 다를 수도 있다. 다만 사도 바울이 성령의 열매가 아닌, 육체의 일(갈 5:19-21)이 어떤 것인지 예를 든 것을 그대로 나열해 보면,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것이 악마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마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이기심), 분리함(분열), 이단(분파), 투기(질투), 술취함, 방탕(흥청거리는 연회), 이와 비슷한 것들이다.

바울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 각자를 파멸로 이끄는, 각자에게 서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위협의 요소를, 우리가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면, 그런 위험을 불안하게 감지하고 있다면, 역설 같지만 그것은 은총일 수 있다. 해석되는 성경말씀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대치할 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아직 허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석된 말씀'의 도전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간성과 도덕성을 파괴하는 위험한 요소, 부부관계를 위협하는 요소,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위협하는 요소, 신도들끼리의 관계를 위협하는 요소, 이웃끼리의 관계를 위협하는 요소, 이러한 위험 요소들이 우리 안에 들어 있음을, 우리는 해석된 말씀의 도전 앞에서만 감지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의 해석에 늘 귀를 기울여야 할 까닭이다.

거꾸로 '순종'이란 성서가 말하여 주는 하나님과 내가 맺은 계약의 내용을 따라서 살려는 행동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순종은 해석된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실천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실을 맺을 것인지를 나열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다만 사도 바울이, 육체의 일이 아닌 성령의 열매가 어떤 것인지를 예로 든 것이 있으므로 그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제시한 성령의 열매가 바로 그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삶, 기쁘게 사는 삶,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는 삶, 고통과 분노 중에서도 자제력을 잃지 않고 오래 참는 삶, 사람들에게 친절과 선행을 베풀며 사는 삶,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온유한 성품, 절제하는 삶, 이것이 바로 실천이요 순종의 좋은 본보기이다. 바울은 이러한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산으로 물려받는다고 하였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는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육체의 일에 빠져 있던 사람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던 사람도 바뀌어서 육체의 일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동안만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성령을 모시지 않으면 그 때부터 육체의 일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 말씀을 듣고 해석할 때에도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일이 성사되고, 순종할 때에도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일이 성사된다.
출처 : 김상수목사와 함께(안흥성결교회)
글쓴이 : 김상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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