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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 다시 읽는 한국 인물 열전 (14)-진성여왕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09:54

[역사] 다시 읽는 한국 인물 열전 (14)-진성여왕
2003.8.4.월요일 딴지 역사부

1. 요새 "진성여왕 살리기" 바람이 솔솔 분다

오늘은 진성여왕(眞聖女王) 디빈다. 순서대로 따지면 선덕여왕→진덕여왕→진성여왕 일케 나와야 한다. 허나 사정상 순서 뒤바꾼다. 아~ 참. 이번에 최치원 다룬다고 했었다. 근대 돗자리 두 손 들었다. 돗자리 실력으론 아직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대신 오늘 진성여왕 다루며 곁다리로 살짝 살펴보련다(괜히 예고까정 해놓고 못지켜 무척 죄송스럽다).

요새 들어 진성여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들이 자주 보인다. 또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어리버리한 여왕(노현희 분)으로 나오셨지만, 올가을 개봉될 영화 '천년호'에서는 또리또리한 여왕(김혜리 분)으로 나오신단다.

어떤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는 건 재미있고 유익하다. 그래서 돗자리도 직싸리 욕먹으면서 이 짓 하는 거 아닌가. 그치만 기존의 평가를 바꾸고 싶지 않은 인물도 있다. 진성여왕이 그런 분이다. 미리 까놓고 말하자. 돗자린 진성여왕 나름대로 동정한다. 성적(性的)으로 문란했던 '탕녀(蕩女)'라고 보지도 않는다. 심성도 고왔던 거 같다. 허나 무능하고 유약했다. 그럼 왕으로선 꽝이다.

지난번 '백결선생 편'에서도 말했다. 정치가는 정치적 공과(功過)를 놓고 평가해야 한다고. 성격이 개안튼 행실이 드럽든 그거 부차적인 거다. 쉽게 말해, 백성들 잘먹고 잘살게 해줬으면 그걸로 땡이다. 그치만 진성여왕은 그거 못했다. 그래서 돗자린 진성여왕 비판론자다. 인간적으로야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2. 울나라의 3번째이자 마지막 여왕

진성여왕(재위 : 887~897)은 신라 제51대 왕이다. 제48대 경문왕의 딸이며, 제49대 헌강왕과 제50대 정강왕의 누이다. 재위 2년만에 병으로 죽게 된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성명은 김만(金曼)이다('탄<坦>'이라고도 하네). 선덕여왕은 김덕만, 진덕여왕은 김승만이었으니 우연 치고는 좀 희한하다.

근데 여러분의 취향이나 수준이 돗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여왕' 했을 때 젤 먼저 떠오르는 건 '미인'과 '결혼' 여부여야 한다.

* 미인 여부 : 모른다. 텍스트에 안나온다. 근데 골격이 '장부'와 같았단다[骨法似丈夫]. '떡대'였단 말이다 (이 점에서, 올가을 개봉될 영화 '천년호'에서 김혜리씨가 진성여왕 역을 맡은 건 캐스팅 미스다). 또 하나, 진성여왕의 형제는 골격이 남달랐으니, 등쪽에 뼈 두 개가 튀어나와 있었단다[背上兩骨隆起]. 호곡~ 골격이 헐크인데 미인이면 뭐하냐(참고로, 제28대 왕인 진덕여왕은 얼굴이 이뻤고 키도 7척, 그러니 최소한 170cm는 넘는 장신 미인이었다. 게다가 여왕 아닌가. 그치만 말이다. 옥의 티랄까... 팔이 길어 손을 늘어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내려갔단다). 아... 근데 말이다. 정말로 그 형제들이 등뼈가 두 개씩 튀어나왔을까. 잘 모른다. '골상(骨相)'이나 '골법(骨法)'이 남달랐다고 하는 건 뭐 그만큼 비범한 집안이란 걸 강조하려는 수작인 경우가 많아서다.

* 결혼 여부 : 했다. 우선 즉위 당시 나이가 만만챦다. 진성여왕의 아빠인 경문왕은 860년(헌안왕 4년) 9월에 결혼해서 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을 낳았다. 그럼 연년생으로 쉴새 없이 낳았다 해도 진성여왕은 빨라야 863년생이다. 근데 여왕으로 즉위한 건 887년이다. 끽해야 25살이지만, 혼인적령기는 한참 넘긴 때다. 글고 재위 기간(887~897) 중에 중국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막내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니 기혼으로 봐야 한다.

3. 숙부 위홍, 남편인가 정부인가

진성여왕 얘기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분이 계시다. 상대등 위홍(魏弘)이다. 위홍은 경문왕의 동생이니 진성여왕의 숙부가 된다. 근데 진성여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위홍과 사통(私通)했으며, 여왕이 된 뒤엔 위홍이 늘 궁궐에 들어와 사무를 봤단다[王素與角干魏弘通 至是 常入內用事]. 따라서 진성여왕 즉위 초의 실권자는 여왕의 숙부이자 연인이자 상대등인 위홍이었다. 문제는 위홍이 남편인가 정부인가 하는 점이다.

위홍은 '부호부인(鳧好夫人=오리부인)'이라 불리는 아내가 있었다. 부호부인은 진성여왕의 유모였다. 그러니 위홍은 진성여왕과 부호부인 두 여자들 데리고 산 셈이다. 이 경우 위홍을 진성여왕의 남편이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삼국유사』에서는 위홍을 진성여왕의 '짝[匹]'이라고 했는데, 이게 공식적인 결혼을 뜻하는 것일까.

암튼 옛날엔 이거 갖고 진성여왕 많이 씹어댔다. 그치만 요새는 별로 문제삼지 않는다. 신라의 왕실이나 귀족들 사이에선 근친혼이 흔했기 때문이다. 김유신도 조카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이지 않았는가. 당시 관습이 그랬다는데 뭐 어카겠나. 그러니 진성여왕이 삼촌이랑 살았든 말았든 우리가 신경쓸 바 아니다.

진성여왕이 즉위하자 위홍과 그 아내 부호부인, 그리고 3~4명의 총신(寵臣)들이 정권을 쥐고 정사를 휘둘렀단다. 근데 진성여왕 2년 2월 위홍이 죽는다(텍스트가 쫌 애매해서 정말 이 때 죽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흔히 말하길, 위홍이 진성여왕과 정사를 벌이다 마초들의 영원한 꿈인 '복상사(腹上死)'했다고 한다('태조 왕건'에서도 아마 글케 나왔었지?) 허나 이 얘기가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다. 텍스트엔 그런 말 안나온다. '복상사'했다는 게 고인에게 '영광'인지 '모독'인지 잘 몰겠다만, 출처가 분명치 않으니 별로 믿기지 않는다.

4. '소년 미장부', 이 넘들이 대체 누구냐

위홍이 죽자 진성여왕은 2~3명의 '소년(少年) 미장부(美丈夫)', 쉽게 말해 '꽃미남'들을 불러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 이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맡겼다. 그 때문에 이 넘들이 방자해지고 뇌물이 횡행하며 상벌이 공평치 못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단다[此後 潛引少年美丈夫兩三人 淫亂 仍授其人以要職 委以國政 由是 倖肆志 貨賂公行 賞罰不公 紀綱壞弛](진성여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기 땜시 원문을 그대로 옮긴다).

이 얘기가 맞다면 진성여왕에 대한 평가는 더 할 것도 없다. 음란/무능/부패한 여왕이었으니 말이다. 그치만 진성여왕 옹호론자들은 이걸 후대 사가들이 꾸며댄 거란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만, 돗자린 일단 기록에 나오는 대로 믿는다. 100%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 때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진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럼 이 '꽃미남'들은 대체 언 넘들이었을까. 신라는 쫄딱 망할 때까정 '골품제' 하난 악착같이 붙들고 있던 사회였다. 아시다시피 요직을 맡으려면 관등이 높아야 한다. 글타면 그 넘들은 당근 진골이다. 진골이면서 '소년 미장부'라... 그럼 우린 '화랑'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경문왕과 그 자녀들이 왕위에 있던 시절엔 화랑들의 정치적 진출이 두드러진단다. 경문왕 자신도 화랑 출신이었다.

그럼 진성여왕은 정말 이 '꽃미남'들과 놀아났을까. 모른다. 그치만 그랬다 한들 뭐가 문제냐. 그 넘들이 요직을 맡아 나라를 말아먹은 건 잘못된 일이지만, 성적(性的)으로 놀아났다는 건 걍 그랬나보나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화랑세기』 보면 더 화끈한 얘기 많다).

요컨대 숙부인 위홍과 관계를 가졌든 '꽃미남'들과 음행을 벌였든 그것들이 진성여왕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되진 않는다. '르윈스키사건'으로 개망신 꽃폈지만 정치가 클린턴을 평가할 때 그게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박통께서도 말년에 여자문제 복잡하셨다지만 누구도 진지하게 시비걸진 않는다. 옛날 여왕이라고 해서 더 엄격한 기준을 들이댈 이유는 없다.

5. 진성여왕에겐 실권(實權)이 없었다

진성여왕 때 특이한 현상 중 하나는, '상대등'과 '시중'이 바뀌지 않는단 거다(상대등과 시중, 하나는 귀족을 대표하고 하나는 왕권을 대변한다고들 배우셨겠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왕 담으로 높은 자리들이다. 경문왕서부터 효공왕까정 상황을 보면, 왕이 바뀌면 상대등이나 시중도 바뀌는 게 관례였다. 중간에 관두면 바로 새로운 넘을 임명했다. 드럽게 귀찮지만, 그래도 '표'로 정리하는 게 알아보기 쉽겠다(『삼국사기』).

(시기 - 상대등 - 시중)

① 경문왕 2년(862) *김정 *위진
② 경문왕 14년(874) *위진(김정 사망) *인흥
③ 헌강왕 1년(875) *위홍 *예겸
④ 헌강왕 6년(880) (계속 위홍) *민공(예겸 사직)
⑤ 정강왕 1년(886) (계속 위홍) *준흥
⑥ 진성여왕2년(887) ?(위홍 사망) (계속 준흥)
⑦ 효공왕 2년(898) *준흥 *계강
⑧ 효공왕 6년(902) (계속 준흥) *효종
⑨ 효공왕 10년(906) *김성 (계속 효종)
(*표는 신임(新任)을 뜻함)

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왕/효공왕은 이른바 '경문왕가'의 왕들이다(헌강왕/정강왕/진성왕이 경문왕의 아들, 딸이고, 효공왕은 헌강왕의 아들이다). 근데 진성여왕 때는 상대등과 시중이 모두 바뀌지 않고 그대로다. 진성여왕이 즉위했는데도 상대등과 시중은 모두 정강왕 때 그대로고, 진성여왕 2년 상대등 위홍이 죽었는데도 그냥 공석으로 남겨둔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혹시 진성여왕에게 정치적 실권이 없었기 때문은 아녔을까. 앞서 나왔던 '꽃미남'들 얘기, 즉 그 넘들이 정권을 농단했단 것도 바로 그 넘들이 실세였음을 보여주는 건 아닐는지.

6. 왜 『삼대목』을 펴냈을까

진성여왕의 업적이라면 뭐 내세울 만한 게 없다. 기껏해야 향가집(鄕歌集)인 『삼대목』의 편찬 정도다. 격들 나시나? 국어시간에 틀림없이 배우셨을텐데... 진성여왕 2년 2월, 위홍에게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鄕歌)를 모아[修集鄕歌] 책을 맹글게 했으니 그게 바로 『삼대목(三代目)』이다.

근데 이 때 『삼대목』 편찬에 착수했단 건가 아님 편찬을 완료했단 건가 헷갈린다. '착수'보다는 '완료'로 보는 게 좋을 듯 하단다. 향가집인 『삼대목』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그 내용을 모른다. 그럼 대체 왜 진성여왕은 향가집을 맹글려 했을까. 향가를 글케 좋아하셨나.

『삼대목』은 세종 때 '용비어천가' 생각하심 된다. 취약한 정권의 정통성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의 일종이라 보심 된다. 화랑 출신인 경문왕 때 일이다. 화랑인 요원랑/예흔랑/계원/숙종랑 등이 유람하며 왕을 위해 나라를 다스릴 뜻을 은근히 품고[暗有爲君主理邦國之意] 향가 3수를 짓고, 다시 대구화상으로 하여금 3수를 지어 왕에게 바치니 왕이 디따 좋아해서 이 넘들에게 상을 줬단다(『삼국유사』). 이 때 바친 향가 역시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정치적 내용이었음이 분명하다. 경문왕이 글케 좋아했다니 구미에 맞았나보다. 대구화상도 경문왕의 비위를 잘 맞춘 모양이다.

그럼 진성여왕 2년의 『삼대목』 편찬도 이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텍스틀 보면 이 때 향가를 '수집(收集)'한 게 아니라 '수집(修集)'했다고 나온다. 일종의 취사선택을 한 거다. 그럼 무슨 내용을 골랐을까. 뻔하지 않겠는가. 헌안왕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경문왕이나, 여자로서 왕위에 오른 진성여왕이나 정치적 기반과 위상이 취약했을 거고, 나중에 세종이 그랬듯이 '문화사업'으로 그걸 카바하려 한 거다. 진성여왕의 최측근인 위홍과 경문왕 때 이미 비슷한 일을 했던 대구화상이 콤비를 이뤘다면 뻔한 거 아닌가. 향가의 작자가 화랑 아님 승려라고 알려져 있으니, 뭐 내용도 대충 짐작할 수 있으리라.

글타고 해서, 문화나 문학을 정치에 이용하는 게 나쁘단 말 절대 아니다. 그것도 다 민심을 잡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테크닉이니 말이다. 다만, 『삼대목』 편찬을 놓고 진성여왕과 위홍이 문화를 사랑했네 어쩌네 하고 평가하는 게 우습단 말일 뿐이다.

7. 진성여왕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치받는다

앞서 분명히 말했듯이 돗자린 진성여왕 비판론자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치받아야 한다. 그들이 진성여왕을 옹호하는 근거는 대략 담과 같은데, 여기에 대해 딴지 걸어본다.

* 즉위하자 백성들의 1년치 조세를 덜어주었다

왕이 즉위하면 죄수들을 왕창 풀어주는 게 관례였다. 물론 진성여왕도 그랬고, 한술 더 떴다. 주군(州郡)의 1년치 조세를 덜어준 거다. 그걸 갖고 진성여왕이 민심을 헤아릴 줄 아는 '성군'이라 하는데, 그럼 이전 왕들은 모두 '폭군'이라 그거 안했을까. 사정이 여의치 못했으니 그런 거다. 1년치 조세를 안받아? 그럼 나라 살림은 대체 뭘로 하냐. 그럼 진성여왕 3년에 조세 독촉을 해서 농민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는데, 이 때 진성여왕은 '폭군'이냐.

'효녀지은 편'에서도 말했듯이 진성여왕은 물정엔 어둡지만 맘씨는 좋은 기분파였을 수도 있다. 따뜻한 가슴을 가진 여왕으로도 보인다. 허나 정치인으로서 진성여왕을 평가할 때 그건 부차적인 거다. 능력도 안되고 형편도 모르면서 조세를 덜어줬다면 이건 실정(失政)이다.

* 신라는 이미 진성여왕 즉위 이전에 망조가 들었다

진성여왕은 이미 삭아가는 나라 물려받았으니 책임이 없다고? 거 편하구먼. 그럼 김영삼 대통령 때 IMF로 경제 거덜냈으니 김대중 대통령이랑 노무현 대통령 때 경제 죽쒀도 걍 봐줄텐가. 싫든 좋든 최고 국정 책임자가 되었으면 책임질 건 져야 한다. 어쨌든 11년간 나라를 다스리지 않았는가.

글고 말이다. 진성여왕 때 농민 봉기가 자주 일어난 점도 지나쳐선 안된다. 경문왕~진성여왕 때 정권 탈취를 위한 '정변'과 지방 농민들의 '민란' 상황을 정리하면 담과 같다(『삼국사기』).

(시기 - 정변 - 민란)

① 경문왕 6년(866) 이찬 윤흥 등이 모반 -
② 경문왕 8년(868) 이찬 김예 등이 모반 -
③ 경문왕 14년(874) 이찬 근종이 반란 -
④ 헌강왕 5년(879) 일길찬 신홍이 반란 -
⑤ 정강왕 2년(887) 이찬 김요가 반란 -
⑥ 진성왕 3년(888) - 원종, 애노가 봉기
⑦ 진성왕 5년(890) - 양길의 부하 궁예가 10여 군현 공격
⑧ 진성왕 6년(891) - 견훤이 후백제 건국
⑨ 진성왕 8년(893) - 궁예가 강릉 진입
⑩ 진성왕 9년(894) - 궁예가 10여 군현 격파
⑪ 진성왕 10년(895) - 적과적이 경주 서부 공격

봐라. 정국이 '정변'에서 '민란'으로 넘어가는 터닝뽀인트가 진성여왕 때다. 이건 진성여왕 성품의 문제가 아니고 능력의 문제다. 국정 운영 능력이 없었다. 무능했던 거다. 또 농민들의 불만이 이 때 터져나왔음을 보여준다.

물론 모든 책임을 진성여왕에게 돌리면 안된다. 글타고 해서 진성여왕도 희생자라 옹호해서도 안된다. 적어도 재위 11년 동안의 책임은 분명히 물어야 한다.

* 최치원의 '시무10여조'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최치원이 '시무10여조'를 올리니 진성여왕은 그걸 기쁘게 받아들였단다[王嘉納之] (어떤 분들은 진성여왕이 먼저 최치원에게 시무책을 연구해 보라고 했다는데 돗자린 그런 기록 못찾겠다).

근데 그 '시무10여조'의 내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뭐 과거제도와 같이 능력에 따른 인재 선발이나 불합리한 신분제도 철폐 등이 들어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하는 정도다. 그 내용이 대단히 개혁적인 것이었을 텐데, 그만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신라는 계속 쇠락의 길을 걸었고, 실망한 최치원도 정치에 뜻을 잃었다고 흔히들 말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우린 역사공부를 통해 6두품을 "불우했던 신분"으로 알고 있단 거다. 그치만 6두품, 이거 대단한 거다. 장관은 못되지만 차관까진 오를 수 있다. 그게 어딘가. 6두품 밑인 1~5두품들 봤을 땐 그야말로 대단한 신분이다. 그러니 불쌍할 거 별로 없다.

최치원 이분도 만만챦은 분이다. 유능했지만 골품제 땜시 능력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단 건 맞다. 그럼 이 분은 마냥 피해자인가. 아니다. 나름대로 수혜자다. 당나라에서의 화려한 경력 땜시 여왕의 총애도 받았고 요직은 아니지만 관직도 얻었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한 거다.

최치원 이 분, 5두품과 4두품은 엿으로 봤다. "4, 5두품은 말할 꺼리도 안된다(성주사낭혜화상비)"는 분이다. 6두품이 진골과 맞먹은 건 개안치만 4, 5두품이 6두품한테 개기는 꼴은 못본단 거다. 글쎄, 이런 분이 올린 개혁안이 과연 신분제도 전체를 뒤흔들 만한 파격적인 것이었을까.

최치원이 신라뿐 아니라 울나라를 대표할만한 천재요 문인이었다는 건 의심할 수 없다. 그치만 천재나 문인으로서 뛰어났다는 것하고 인간성이 좋다거나 훌륭한 정치가라거나 하는 것하곤 전혀 관계가 없다. 돗자린 최치원의 인간성이 좋거나 훌륭한 정치가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현실사회에 불만 가득한 야심가로서의 모습을 더 많이 본다. 그 자체가 나쁠 건 없지만, 그리 좋게 평가받을 일도 아니다.

* 아들이 있었는데도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물러났다

진성여왕은 재위 11년 만에 오빠 헌강왕의 서자인 조카 요(嶢)에게 왕위를 스스로 물려준다. 그가 바로 효공왕이다. 참 울나라 역사에서 보기드문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근데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도 이거 비슷한 일 있긴 했다. 담에 나오는 감동적인 성명서를 읽어보시라.

나는 오늘 대통령의 직에서 물러나 헌법의 규정에 의거한 대통령 권한대행권자에게 정부를 양도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민주국가의 평화적인 정권이양에 있어서는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국익우선의 국가적인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히 정치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 얘기냐고? 울나라 얘기다. 지도자가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났다는 감격적인 얘기다. 대체 뉘시냐고? '곰탱이' 최규하 대통령이다.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에서 '스스로' 물러나셨고, 몇일 뒤 '구국의 영웅' 전두환 장군이 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뽑힌다.

이거 애매한 문제다. 함 물어보자. 최규하는 정말 '스스로' 대통령에서 물러난 거냐? 정치는 깽판쳤지만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해서 '성군'이라면 최규하도 '성군'이다. 물론 '스스로' 물러난 것도 아니다. 전두환 일당이 총칼로 옆구리 쑤셔대며 관두라니까 이 겁많은 양반 시키는 대로 한 거다.

뭔 소린가? 스스로 물러났다고 해도 그대로 믿기 어려운 사례가 많다는 거다. 왜? 정권을 놓기가 그만큼 힘들고 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 사례가 있으면(뭐 별로 없다. 태종처럼 상왕이 되어 일선에서 물러난 건 빼야 되고... 아~ 이승만이 있구나. 이 분도 '성군'이시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는 거다.

그치만 진성여왕의 경우는 그대로 믿고 싶다. 자신의 아들이 있는데도 조카에게 스스로 왕위를 넘겨주는 거... 이런 거 '선양(禪讓)'이라 하는데... 정말 쉬운 거 아니다. 그럼 왜 글케 했을까. 짜낼 수 있는 이유는 대략 담과 같다.

① 자기 무능을 깨달았다
② 건강이 아주 나빠졌다
③ 헌강왕의 아들 요가 많이 컸다
④ 실세들이 자꾸 물러나라고 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①로 나온다. 뭐 그럴 만도 하다. 진성여왕이 물러나기 1년 전에 '빨간바지' 유니폼을 입은 '적고적(赤袴賊)'이란 도적떼가 경주 서쪽까지 들어올 정도로 치안이 엉망이었다.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지 무능을 인정했을 수도 있다.

②도 사실이다. 진성여왕은 재위 3년(889)에도 많이 아팠던 적이 있으며, 재위 11년(897) 6월 물러난 뒤 그 해 12월 죽는다. 그러니 극도로 악화된 건강 때문에 물러났을 여지도 크다. 당나라에 보낸 글에서도 건강 얘기가 자주 나온다.

③은 쫌 애매하다. 『삼국사기』 진성여왕 9년조에 보면, 진성여왕은 이 때야 비로소 오빠인 헌강왕의 서자 요(嶢)를 만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썰이다. 같은 『삼국사기』 진성여왕 즉위년조에 나오는 최치원이 쓴 '사추증표(謝追贈表)'를 보면 "신의 조카 요는 출생 후 아직 돌이 되지 못하여..."라고 나와, 진성여왕이 즉위 당시 이미 오빠의 아들 요를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진성여왕 즉위년이 887년인데 아직 조카 요가 돌이 안되었다면, 왕위를 넘겨준 897년 요의 나이는 12살 정도이다. 진성여왕은 당나라에 보낸 글에서 요의 나이가 거의 '지학(志學)', 즉 15살에 가깝다고 했지만 12살과 15살은 차이는 초딩 6학년과 중딩 3학년 정도로 크다. 안심하고 왕위를 스스로 물려주기엔 이른 나이다. 그래서 쫌 수상쩍기도 하다(근데 뭐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진성여왕 3년 촌주 우련이 도적들과 싸우다 전사하자 10여세 된 그 아들을 촌주로 삼도록 한다. 허허...).

④는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다. 최치원이 써서 당나라에 보낸 '양위표(讓位表)'와 '사사위표(謝嗣位表)'를 보면 왕위에서 물러나려는 진성여왕을 신하들이 몇 번씩 간곡하게 말렸다고 나온다. 정말 간곡하게 말렸으면 그대로 글케 썼을 것이요, 억지로 쫒아냈어도 일케 쓰기 마련이다. 정권을 잡은 넘들이 당나라에 글을 보내며 "제가 숙모인 진성여왕 쫒아냈어요" 하겠는가. 허나 '양위표'와 '사사위표'는 진성여왕의 총애를 받았던 최치원이 쓴 것이니 뭐 그대로 믿어보련다(만약 진성여왕이 쫒겨난 거나 마찬가진데도 최치원이 좋게 썼다면 최치원에 대한 평가는 영 달라진다). 진성여왕은 정말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고 말이다.

어떤 분은 진성여왕이 지 아들이 있는데도 그 넘이 아닌 조카에게 왕위를 넘겨준 걸 대단하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럼 과연 진성여왕은 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있었을까. 글케 하진 못했을 거라고들 본다. 신라의 여왕들은 엄마쪽이 아니라 아빠쪽 혈통 땜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장인쪽도 가끔...). 따라서 여왕의 아들은 왕위를 이을 수 없단 거다(물론 전례도 없다). 글타면 진성여왕이 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한 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셈이니 그것만 갖고 좋게 볼 건 못된다.

* 최치원이 진성여왕을 높게 평가했다

최치원은 "진성여왕의 은혜가 바다와 같이 넘쳤다(성주사낭혜화상비)"고 썼단다. 사극을 보면,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뻔질나게 외쳐대는 그 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거 정말 모두 진심이라고 생각하시나. 또 '성주사낭혜화상비'는 진성여왕 4년(890)에 세워졌다. 한참 진성여왕이 팔팔하던 때인데 최치원이 절케 안쓰고 대체 어케 쓸 거 같나.

8. 미안해요 진성여왕님...

요새 많이 팔리는 어떤 책을 보니 진성여왕을 놓고 "음녀(淫女)로 몰린 성군(聖君)"이라고 해놓았네. 이미 말했듯이 돗자리도 '음녀'로 보진 않는다. 뭐 요새 우리 눈으로 보면 '방탕'인지 모르지만 당시엔 그게 별 문제 아녔다면 그냥 넘어가면 된다. 백성들 죽이고 살리는 문제도 아녔으니 말이다.

허나 어케 진성여왕이 '성군'이 되는가. 대체 뭘 잘한 게 있다고 말이다. 여왕이기 땜시 왠지 모르는 애정과 연민이 팍팍 가는 건 숨길 수 없다. 그치만 여왕이라고 해서 깔보는 것이 나쁜 것처럼 대충 봐주며 넘어가는 것도 좋지 않다. 걍 남녀 가리지 말고 치적만 놓고 따지면 된다.

진성여왕 땜시 신라가 멸망했다고 하는 평가는 너무 지나치다. 그치만 신라가 멸망하는 데 진성여왕도 제법 크게 한 몫 했다는 정도는 인정해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농민 봉기가 격화된 것이 바로 이 때이기 때문이다. 아... 글을 맺으며 왠지 진성여왕에게 미안한 맘이 든다. '천년호'에서 진성여왕 역을 맡은 김혜리씨한테도 말이다. 부디 영화에서라도 '성군'의 모습을 맘껏 보여주시라.

딴지 역사부
돗자리 (e-rigby@hanmail.net)

출처 : 山海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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