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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국유사 열전(39) 진성여왕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0:00

삼국유사 열전(39) 진성여왕과 거타지

황원갑 <역사소설가>


진성여왕(眞聖女王)은 이름이 김만(金曼). 신라 제51대 임금이며 세 번째요 마지막 여왕이다.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은 작은 오라비 정강왕(定康王) 김황(金晃)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897년 6월에 조카 효공왕(孝恭王) 김요(金嶢)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까지 9년 11개월간 신라를 다스렸다.

진성여왕은 제48대 임금 경문왕(景文王)의 딸이다. 그녀의 위로 두 오라비가 있었는데, 큰 오라비 김정(金晸)이 제49대 임금 헌강왕(憲康王)이다. 헌강왕이 죽을 때 그의 유일한 혈육인 요가 너무나 어렸으므로 아우 황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정강왕이 불과 1년 만에 죽으면서 누이동생 만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신라는 무슨 까닭에 진덕여왕(眞德女王) 사후 233년 만에 다시 여왕을 맞이해야만 했을까. 더구나 진성여왕이 즉위할 무렵 신라의 형편은 국운이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할 때였다. 진성여왕은 선덕여왕(善德女王)이나 진덕여왕처럼 혈통의 신성과 왕통의 정당성이 보장된 성골(聖骨)도 아니었다. 그때는 백년 넘게 이어져온 진골들의 왕위쟁탈전으로 왕권은 약화될 대로 약화된 시기였다.

이러한 난국에 여자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진성여왕은 숙부인 김위홍(金魏弘)과 간통하고, 위홍이 죽자 미소년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음란한 짓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나라를 망국에 이르게 했다는 악평을 듣기에 이르렀다. 사방에서 도둑들이 설치고 백성들은 유리걸식하는데 임금 자리에 앉아서 일신의 쾌락만 추구하다가 결국 나라를 망쳤다는 진성여왕에 대한 평가는 과연 틀림이 없는 것인가.

역사의 평가는 잣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법이다. 진성여왕에 관해서도 음탕했다느니 나라를 망쳤다느니 하는 단순히 평가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그녀의 일생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진성여왕의 즉위는 선왕인 정강왕의 유조(遺詔)에 따른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정강왕 2년 조에 이렇게 나온다.


여름 5월. 왕이 병이 위중하매 시중 준흥(俊興)에게 말하기를, “내 병이 위독해지니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라. 불행히도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나 누이동생 만(曼)은 천성이 명민하고 골법(骨法)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옛일을 본받아서 그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자식이 없어서 누이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말인데, 정강왕은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누이동생이 천성이 총명하니 임금의 자질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골법, 즉 체격이 사내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셋째는 옛날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도 여자로서 임금 노릇을 한 전례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와 셋째 이유는 그렇다고 쳐도 둘째 이유는 좀 이상하지 않은가. 뼈대가 사내처럼 굵직굵직하게 생겼다는 것이 왕위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궁색하게 들리는 것이다. 이는 진성여왕 즉위에 제동을 걸고 나섰던 세력이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리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고사를 들먹인 것도 진성여왕의 아버지 경문왕의 즉위 때의 사정과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헌안왕 5년(861년) 정월에 왕이 위독하자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내가 불행히도 아들이 없어 딸만 둘을 두었노라. 우리나라 옛일로 선덕왕과 진덕왕 두 여왕이 있었으니 이는 가히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같으므로 이를 따를 수는 없도다. 내 사위 응렴(膺廉)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노성한 덕을 갖추었으니 그대들이 임금으로 모시고 섬긴다면 조종(祖宗)의 훌륭한 후계를 잃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죽더라도 마음을 놓을 것이니라.”

이처럼 경문왕은 장인인 헌안왕이 ‘여왕이 임금노릇을 하는 것은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같기 때문에 사위의 자격으로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문왕의 아들 정강왕은 이와 반대로 누이동생이 비록 여자이지만 총명하고, 또한 체격이 사내 같으니 왕위를 물려준다고 했던 것이다.


헌강왕은 재위 12년 만에 죽었는데, 그때 아들이 있었지만 갓난아이라 왕위를 이을 수가 없었다. 헌강왕의 서자 김요는 뒷날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 효공왕이다. 그가 태어난 사연은 이렇다.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한 여인을 보고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수레 뒤에 태워 그날 밤 임시거처-행재소에서 관계하여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니 바로 요였다. 길에서 만났다고 하지만 요의 어머니 김씨도 아마 진골 신분이었을 것이다.

헌강왕에게는 정비인 의명왕후가 있었지만 나중에 제53대 임금인 신덕왕의 부인이 되는 의성공주만 낳았을 뿐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아우 황이 즉위하니 정강왕이다. 그런데 그렇게 즉위한 정강왕은 불과 1년 뒤에 병으로 죽고 누이동생 진성여왕이 뒤를 이었던 것이다.

김부식은 사대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지독한 여성 혐오자였던 모양이다. 진성여왕의 왕위 계승이 매우 못마땅했던지 노골적으로 악평을 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여왕 2년 조의 기록을 보자.


- 왕이 그 전부터 각간 위홍과 더불어 간통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위홍으로 하여금) 언제나 궁중에 들어와서 일을 보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명해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 편찬토록 하여 이를 <삼대목(三代目)>이라고 했다.

위홍이 죽자 시호를 추증하여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했다. 그 뒤로부터 미소년 두세 명을 가만히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정사를 맡기니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고 총애를 받는 자들이 제 마음대로 방자하게 날뛰고, 재물로 뇌물을 먹이는 짓을 공공연히 했으니 상벌이 공정하지 못하고 풍기와 규율이 문란해졌다. -


이 기록을 참조했는지, <삼국유사> ‘진성여대왕과 거타지(居陀知)’ 조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 제51대 진성여왕이 정치를 한 지 몇 해 동안에 그의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인 위홍 잡간 등 왕의 총애를 받는 서너 명의 신하가 세도를 부려 정치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으므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걱정하여… -

 

김부식은 이에 앞서 선덕여왕 조에서도 여왕의 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저주에 가까운 혹평을 쏟아냈다.


- …하늘을 두고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운 것이요, 사람을 두고 말한다면 사내는 높고 계집은 낮은 것이다. 어찌 늙은 할미가 안방으로부터 튀어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신라는 여자를 잡아 일으켜 임금 자리에 앉게 하였으니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에나 있을 일이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서경>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에 운다’하였고, <주역>에는 이르기를 ‘암퇘지가 껑충거린다’고 하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겠는가. -


김부식의 이 글은 헌안왕이 죽기 전에 사위 경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한 말과 어쩌면 그렇게도 같을까. 헌안왕이 말하기를,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두 여왕이 있었던 것은 가위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일과 비슷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필자의 의견이지만 선덕여왕의 악평을 고려하면 헌안왕이 했다는 이 말도 사실은 김부식이 헌안왕의 입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의 유학자 김부식은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 못지않게 여성을 천대하고 비하했다. 게다가 신라 상류사회의 개방적인 성풍조가 너무나 못마땅했기에, 또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근친혼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진성여왕과 위홍의 관계를 음란으로 단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김부식도 신라 왕실의 모든 근친혼 사실을 말살할 수는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지소태후이다. 지소태후는 법흥대왕의 공주로 숙부인 김입종(金立宗) 갈문왕에게 시집가서 진흥태왕을 낳았던 것이다.

또한 선덕여왕이 공주 시절 ‘삼서제(三壻制)’에 따라 남편으로 삼았던 김용수(金龍樹)와 김용춘(金龍春) 형제도 촌수로 따지면 당숙이 아닌가.

신라 당대의 성 관념에 따르면 숙질간, 사촌간, 심지어는 이복 남매간의 혼인과 연애는 보통이었다. 근친혼을 두고 불륜이니 뭐니 하고 떠들지도 않았다. 사실 고려시대 초기만 해도 황실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숙질이나 이복 남매간의 근친혼을 오히려 장려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화랑세기>에서 말한 이른바 ‘신국(神國)의 도(道)였다. 진성여왕 당시 신라 사회의 성도덕이 근친혼을 혐오하는 분위기였다면 진성여왕이 ‘남편’으로 섬긴 숙부 위홍에게 혜성대왕이란 시호를 추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위홍은 단순히 조카 진성여왕과 불륜관계에 있던 숙부가 아니라 진성여왕의 남편이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위홍이 부호부인의 남편이라고 하면서도, ‘진성여왕의 배필은 위홍 대각간, 추봉한 혜성대왕’이라고 분명히 썼다.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떳떳한 부부관계였다. 부호부인은 진성여왕의 유모라고 했으니 신분이 당연히 진성여왕보다 아래였고 당연히 정부인의 자리도 여왕에게 양보했을 것이다.

진성여왕에게는 아들도 있었다. 그것도 둘 이상이었다. <삼국유사>에 진성여왕이 ‘막내아들 양패(良貝)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양패가 위홍의 아들인지 다른 남편의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

또 진성여왕이 정말로 음탕하여 대신들이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면 11년 동안이나 왕좌에 버티고 앉아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전에 진지왕이 정사는 제쳐두고 여색만 밝힌다는 구실로 폐위된 경우도 있었다.


진성여왕의 치세는 어떠했던가.

진성여왕은 886년 즉위 직후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전국의 주․군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였다. 난데없는(?) 여왕의 즉위로 민심이 흔들릴까봐 취한 조치였다. 또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고 설법을 들었다. 그러나 그해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예부터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으면 이듬해 농사가 흉작이란 징조라고 했는데, 과연 그 이듬해에 불길한 일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남편인 위홍이 죽었던 것이다. 진성여왕이 위홍과 대구화상으로 하여금 향가집 <삼대목>을 편찬토록 한 것은 단순히 문화사업의 차원이 아니었다. 향가는 주로 화랑이나 고승들이 지은 당대의 노래가 아닌가. 그 향가를 최초로 수집하여 책으로 묶었다는 것은 문화적 자부심을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그보다는 여왕의 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국정을 좌우한 사람은 위홍이었다. 믿고 기대던 기둥을 잃은 여왕은 한동안 정신의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미소년 두세 명을 궁중으로 불러들였다는 기록은 그런 사정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 어떤 사람이 서라벌 관청거리에 시국정책을 비방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달아났다. 보고를 받은 여왕이 노해서 범인을 빨리 잡아들이라고 했으나 오리무중이었다. 한 벼슬아치가 여왕에게 아뢰었다.

“이것은 아마도 거인(巨人:居仁)의 짓인가 하옵니다.”

“거인이란 어떤 자인고?”

“성은 왕씨인데, 대야주(합천)에 숨어사는 학자이옵니다.”

거인은 당장 붙잡혀 와서 옥에 갇혔다. 거인은 억울하고 원통하여 이런 시를 읊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 우공이 통곡하니 3년이나 가물었고

추연이 슬퍼하니 5월에도 서리 내렸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 옛일과 다름없건만

하늘은 말도 없이 푸르기만 하구나! -

 

그러자 그날 저녁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천둥번개가 치며 우박이 쏟아졌다. 보고를 받은 여왕은 겁을 먹고 거인을 빨리 풀어주라고 했다. 그리고 여왕은 병이 들었는데, 죽을죄를 지은 자를 제외한 모든 죄수를 석방하고 60여 명의 승려에게 도첩을 내려 속죄를 한 뒤에야 병이 나았다.

조정의 형편이 이러니 나라꼴이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즉위 당시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조세를 1년간 면제시켰는데, 그 뒤부터 세금이 거의 걷히지 않았다. 여왕을 우습게 본 지방관들이 중앙정부에 보낼 세금을 착복한 것이었다. 국고가 텅 비자 다급해진 여왕은 각 주․군에 관리를 파견하여 조세납부를 독촉했다. 그러자 지방관들은 세금을 걷는다면서 힘없는 백성을 쥐어짰다. 이래저래 난세에 죽어나는 것은 백성밖에 없었다. 제 힘으로 걸을 수 있는 자들은 집을 버리고 도둑이나 거지가 되고, 움직일 힘도 없는 자들은 앉아서 굶어죽었다.

사방에서 도둑들이 일어나 떼를 지어 몰려다녔다. 무리지어 반란도 일으켰다. 진성여왕 3년(889년) 사벌주(문경)에서 일어난 우리 역사상 최초의 농민봉기인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난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농민군은 한때 사벌성을 점령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으나 조정에서 보낸 관군은 이를 진압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여기저기에서 군벌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군벌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후백제를 세운 견훤(甄萱)과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 두 사람이다. 역사는 이때부터를 후삼국시대라고 부른다.

여왕이 당대의 인재 최치원을 등용한 것이 재위 7년(893년)의 일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해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지방관까지 지내며 문명을 떨치던 인재였다. 그렇게 당나라에서 17년을 보낸 경력과 능력을 가지고 조국 신라를 위해 봉사하려고 귀국한 것인데, 최치원은 고질적인 병폐인 골품제(骨品制)의 높은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여왕은 귀국하여 태인․함양․서산 태수로 전전하던 최치원에게 나라를 바로잡기 위한 시무책(時務策)을 만들어 올리도록 지시했다. 최치원은 평소 생각했던 국정운영방안을 작성하여 여왕에게 올렸고, 여왕은 이를 실천하기 위해 그를 6두품 중 가장 높은 벼슬인 제6위 아찬에 임명했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의 반발에 부닥쳐 시무책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강력한 이익집단인 진골들에 의해 시무책이 좌절당하자 최치원은 은둔의 길을 택했다. 신라는 이미 무력혁명 말고는 구제할 길이 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해가 바뀌어 재위 9년. 여왕은 그동안 궁중에서 키운 헌강왕의 서자 요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다시 이태가 지난 재위 11년(897년) 6월에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출궁했다. 여왕은 양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사기는 전한다.

“최근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어진 자에게 자리를 물려줄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노라.”

그리고 당나라에도 이렇게 상주했다.

“저의 조카 요는 죽은 형 정의 아들인바 나이가 열댓 살이나 되었고, 자격이 종실을 부흥시킬 수 있겠기에 밖에서 따로 후계자를 구하지 않고 안에서 천거하여 근자에 이미 국사를 임시로 맡겨 국가의 재난을 안정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진성여왕의 마지막 승부수가 바로 양위였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친아들이 있었음에도 죽은 오라비의 아들, 적자도 아닌 서자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던 것이다. 측근들은 당연히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조서에서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고 강조했고, 그래도 신하들의 만류와 반대가 거세자 보따리를 싸서 궁에서 나가 살았던 것이다.

진성여왕은 왕위를 후삼국시대의 난세 속에서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을 거쳐 935년 11월 마지막 임금인 제56대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함으로써 신라는 망하고 말았다. 여왕은 그렇게 왕위를 넘겨주고 궁에서 나가 살다가 그해 12월에 죽었다. 여왕의 뒤를 이은 제53대 혜공왕이 박씨들의 쿠데타로 살해당하자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직계는 이로써 왕통이 단절되고 말았다. 이처럼 진성여왕 뒤로 다섯 명의 사내 임금이 더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 망국의 책임을 진성여왕 한 여자에게 모두 뒤집어씌워서야 될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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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황원갑의 역사와 문학
글쓴이 : 평해거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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