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마의태자는 금나라의 시조이다?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0:19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했을 마의태자는 동의하지 않았다.
마의태자는 신라부흥운동의 길을 갔다.
과연 경순왕은 이러한 마의태자의 길을 동의했을까?

 

아니 오히려 마의태자의 금나라 건국은
경순왕의 신라부흥에 대한 복안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증거들이 강원도 인제에서 발견된다.
인제의 금부리 등에는 김부(金富, 경순왕의 이름) 등의 이름에서 보듯이
경순왕과 관련된 유적들이 남아 있다.

 

흔히 지금까지 경순왕의 고려투항은 비겁한 것으로 보며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은 경순왕의 뜻을 거역한 거역한 것으로 보아왔다.
과연 천년사직을 마치는 경순왕이 개인의 안전만을 위하여 투항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리혀 신라부흥운동을 위하여 그의 아들 마의태자 등을 도주케 하여
마의태자의 모든 행적은
경순왕의 내밀한 밀명이 함께 따라다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를 마의태자의 금나라 건국의 배경과 함께 강원도 인제에 남아 있는
경순왕의 행적들과 관계된 유적들에서 있다.
이러한 사실은 마의태자를 따라 그곳에서 신라부흥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경순왕에 대하여 반감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경순왕과 관련한 유적지 이름들이 남아 있다는 것에서다.

 

그런 면에서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설' 강원도 인제의 설악산 인근의
마의태자 관련 유적 금부리, 금부대왕동 등의 이름에 남아 있는
경순왕과 관련한 이름들은 재해석될 있다.
글은 금강산 인근의 마의태자 유적들에
경순왕과 관련된 명칭들이 나오는지에 대한 고찰이 것이다.  

 

1. 강원도 인제의 마의태자 유적들에는 왜 경순왕의 이름들로 되어 있을까?

 

신라 왕실이 고려에 투항한
마의태자의 행방은 여러 곳으로 이동한 것으로 주장되어 왔다.
중에도 금강산 입산설이 가장 많았고,
뒤에 강원도 인제에 남아 있는 여러 유적들이 드러나면서
금강산이 아닌 인제(설악산 기슭)라는 주장이 대두되기도 했다.

 

가운데 마의태자의 후손이라는 부안김씨들의 주장에 따르면 
마의태자가 고려의 추적을 피해 후백제 세력들과 연대하는 의미에서
부안 변산반도로 피신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유로 전북을 비롯하여 경주김씨들이 산재해 있다든지
후백제 궁중 제사터인 전주의 성황사에는
경주김씨들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지내왔다는 내용들이 거론된다. 

 

아마도 신라 왕실 귀족들인 경주김씨들이
상대적으로 위험한 고구려지역보다는 신라가 아닌 백제지역으로
숨어들어갔을 가능성은 있었을 것이다.
변산반도의 '변산'이라는 말이 본래 '변한'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설까지
의미를 부여받아 '마의태자측' 그곳으로 이동했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의태자 '변산 거주설' '금강산 입산설'처럼 신라부흥군들의 게릴라
활동에서 여러 곳에서 신라부흥군들이 활약했거나 아니면
오히려 여진족 지역으로 마의태자에 대한 혼동을 주기 위한
전략적 프로파겐다로 그런 루머를 퍼트렸을 수도 있다.
따라서 '여러 마의태자를 가장한' 게릴라 전략의 결과였을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흔히 역사적으로 관군에 싸우는 '홍길동들' 숫자가 복수인 것이다.  

 

또하나의 가설은
금나라를 건국한 신라 왕실의 후예에 대한 의미를 축소시키기 위하여
고려 왕조가 마의태자의 '국내 활동 거점설 굳히기' 홍보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신라 부흥운동을 위하여 신라 왕실 또는 귀족세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앞세우게 되면 부흥군 모병에 대단히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신라 왕실 귀족의 김씨 후예들은 곳곳에서 일어나 활약했다.
후고구려 전신인 태봉의 궁예도
신라 왕족의 김씨 혈통이었다는 것을 주장한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읽힌다

 

고려가 신라세력을 완전히 괴멸시키지 않고 항복 과정을 순조롭게 하면서
신라의 전통과 문화들을 상당히 전승 유지시킨 것도 정치적으로 신라 체계를
완전히 벗어날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라 왕실의 김씨 왕실의 후예와 박씨 왕실 후예는
각각 다각도의 문화적 역사적 영향을 남겼을 것이다.
신라시조 박혁거세 신화는 보다 문화적 신화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들은경순왕을 지킨다 의미로
왕통의 혈통을 이어받는다는 정신이 신라부흥운동 속에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금나라의 건국을 낳았고 그에 따른 고려왕조 내도록
금나라와 신라의 후예라는 문제가 국제적 국내적 난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묘청의 등에서도 일면 남아 있는 것을 있다.

 

흔히 신라의 멸망과 김씨왕인 경순왕에만 치중되는 수가 많다.
그러나 경순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박씨왕조가 다시 일어나
여러 대를 이어온 결과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나라 안록산의  때에 당나라 원군으로 신라측의 인물들에
장보고와 함께 박예철이 등장한다
그들이 돌아와서 장보고가 암살된
진성여왕 때에 박예철이 각간으로 다시 일어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신라 왕실의 金씨와
하나의 왕계를 이어온 朴씨의 역할이 신라말기의 왕실에 변수로 등장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박씨 왕조는 초기에 등장하고 김알지계 세력이 권세를
잡은 이후에 박씨 왕조는 신라 왕실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것이다.
서기 154 8 아달라왕이 마지막 박씨 왕이었으나
그로부터 750 뒤에 다시 박씨 임금이 신라 왕실에 등장한 것이다.

 

김씨왕이었던 효공왕이 제위 14년만인 912 사망하자
다음으로 박씨 임금으로 등장한 임금이 신덕왕이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그후 경명왕, 경애왕도 박씨 왕이었듯이
경순왕 직전까지 모두 박씨 왕조이다
경순왕 앞의 박씨 왕조는 912년부터 927년까지 15년간이 이어졌다.
그뒤  김씨 왕인 경순왕(敬順王재위: 927~935) 재위기간 8년만에
고려에 투항하게 것이다.

 

8세기 동안 김씨 왕실이었던 신라왕조에서 박씨 왕조가 등장하는 과정을
<
삼국사기>에는 보여주고 있다
김씨 왕인 효공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박씨인 신덕왕을 추대했다.
그를 이은 경명왕 때에는 신라삼보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강조한 만큼
신라의 정통성 의식이 고조된 때로 보인다.

 

신라삼보 신라의 세가지 보물에 대한 것은
<
삼국사기> 경명왕 조에 자세히 나타난다.
후고구려의 왕건이 신라 사신 김율에게 언급한  장륙(丈六)불상과 황룡사 9층탑
그리고거룩한 라는 진평대왕의 성대(聖帶)' 그것들이다.

 

이때의 '후기 박씨 왕조' 왕들은 
남아 있던 김씨 세력들의 알력이 작용한 것처럼 보는 사람들도 있다.
경애왕 4(927) 후백제 견훤이 서라벌을 침입해 전사하는 일이 벌어진 것은
박씨왕계를 견제하기 위한 김씨들과 견훤의 내통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신라 멸망을 자체 내의 괴멸로 강조하기 위한
후대의 왜곡으로 보인다.

 

흔히 포석정에서 '술자리를 벌였다' 주장도
신라가 멸망 뒤에 고려왕조에서 왜곡시킨 것이라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
화랑세기>에서 언급하듯 오히려 포석정은 '포석사'로서
신라의 중요한 국가적 신사가 존재했던 자리였다.
그러한 국가 정신의 중요한 성지를 경애왕은 지키려 했을 것이고 
견훤은 그것을 파괴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나중에 고려왕조에서도 포석정에 대한 파괴를 당연시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한 의도로 신라멸망을 합리화하기 위한 선전으로 '포석정 연회장설'
등장하여 신라 멸망의 마지막 국가 권위를 죽이기 위한 역사 왜곡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마치 의자왕의삼천궁녀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이
본래는 백제의 국가적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을텐데 백제 멸망을
통일신라가 부패한 백제로 호도한 것과 같은 역사왜곡으로 있다.

 

사실상 신라 말기의 후삼국 초기에는 신라 왕실의 박씨 왕조가 힘이 강했다.
그러나 김씨들이 박씨들에 대한 알력으로 후백제의 견훤을 사주하여
경애왕을 제거한 김씨왕인 경순왕이 등장했다는 주장도 있다.
외세와 연대하여 박씨왕조를 몰아낸 김씨 경순왕이
결국 외세인 고려에 투항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라 왕실에서 박씨와 김씨 사이의 알력이나
갈등관계로 보는 것은 지나친 시각이라 있다.
왜냐하면 박씨 왕조이든 김씨왕조이든 신라에는 750년이 지나도
박씨와 김씨의 왕조가 서로 교차하고 있을만큼 박씨와 김씨들은
왕실의 중요한 파트너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씨왕조에서 다시 김씨인 경순왕이 등장한 것도 박씨나 김씨들이
서로 위험한 경계선을 긋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가 멸망한 뒤에 신라부흥운동 또한 신라 왕실의 후예들인
김씨들과 박씨들은 연합전선을 구축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권위가 중요했을 것이기 때문에
마의태자와 경순왕의 이름들이 신라 부흥운동 지역에서 크게 부각되었을
것이다.   

 

신라부흥운동은 신라가 935 멸망된 2백년이 지나서도
언급이 되고 있을 정도로 고려왕조의 골치아픈 일이었다.
고려왕조에서 펴낸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런 면에서
철저히 반신라적인 관점에서 기록되었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  

 

특히 신라 부흥운동을 약화처리하기 위하여 이미 타지역으로 망명하여
새로운 국가인 금나라를 세운 마의태자 계열에 대한 반사적 대응으로
마의태자 금강산 입산설은 강조되었을 수가 있는 것이다.

 

<三國遺事> 2 김부대왕(경순왕) ()에는 
"
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베옷과 채식으로 세상을 마쳤고,
계자(季子:막내 아들) 김덕지는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 중이 되어
법명을 범공(梵空)이라하고 법수사에 귀의했다.
그는 해인사에 드나들면서 산승(山僧)으로 일생을 마쳤다."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신라가 마치 순조로이 멸망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고려왕조 내부에 소요를 막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마의태자는 불승도 아닌 '베옷과 채식'이라는 표현을 것만큼
금강산에서 임종을 마쳤다는 기록은 어딘가 어색하게 보이기에 알맞다.
다만 경순왕의 막내는 경북 성주군에 있는 법수사에 불승으로 들어간 것으로
나타난다.

 

<해인사지(海印寺誌)>에도 경순왕의 계자 김덕지가 신라가 망한 뒤에 
법수사에 들어가 중이 뒤에 해인사를 드나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범공(梵空) 스님의 이름이 <삼국유사>에서는 김덕지로 표기되어 있지만,
범공의 이름이 김황(金皇)이라는 주장도
제수천 성주문화원장에 의하여 제기되기도 했다

 

범공 스님이 여생을 보냈다는 성주군 수륜면 백운동의 법수사(法水寺)
인근 지역은 
전두환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여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법수사는 신라가 멸망한10세기 당시에는 해인사와 함께
성주의 대가람의 하나였다.
법수사는 폐사가 되어 있다가 최근 몇개의 가람 건물이 다시 세워졌다.

 

신라의 마의태자 형제들 막내왕자인 김덕지가 불승으로 들어가
범공스님이 되었다는 법수사(法水寺) 인근에는 월광사(月光寺) 있다.
경남 합천군 야로면과 해인사 사이에 위치해 있다.
범공스님으로부터 4백년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인 월광태자 전설이
그곳 월광사에 남아 있다.

 

가야산 일대가 대가야의 마지막 왕자에 이어 신라의 마지막 막내왕자까지
4
백년의 간격을 망국의 태자들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라는 의미가 흥미롭다.
그러나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설과 신라부흥운동의 결과라 있는
마의태자의 후예가 세운 금나라의 건국은 망명왕자가 아닌 신라의 마지막 임금
이었던
경순왕 자신이 세운 최후의 차선적 계획에서 이루어졌을 수가 있다.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자
그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져 오는 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고려왕조의 조작으로 보인다.
그러한금강산 입산설 금나라를 건국한 마의태자(본명, 金鎰)
또는 그의 아들의 역할로서 신라 유민들을 세뇌시키려는 목적으로 있다.

 

마의태자의 마의(麻衣)
개골산에서 () 옷을 입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여
신라의 마지막이 금강산에서 종말을 고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것으로 있다.
특히 비로봉 밑에 태자릉(太子陵) 있다는 자체가
지극히 조작적인 냄새가 난다.

 

인제군 설악산 기슭에 마의태자의 유적을 언급한 최초의 사람은 19세기 초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었다이규경에 따르면 이곳의 지명을 그 당시에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이라는 것과 내용이 '인제 읍지(邑誌) 실려 있으며 경순왕은 신라의 항왕(降王) 김부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김부 유적명 해석으로 마의태자의 유적을 보존하기 위하여 고려에 투항한 경순왕의 이름으로 둔갑시켰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들이 있는 것은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마의태자 김일이 아닌 그의 아버지 경순왕 '금부(신라 때는 '금부'로 발음)'의
이름을 따서 나중에 '김부리' 또는 '김부대왕동'으로 칭한 것은
고려조정에 반역의 의미가 없다는 뜻을 전하려는
지방 사람들의 정치적 윤색이라고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필자의 생각은 또 다른 주장을 해 두려한다.
김부리(金富里)’, 또는김부대왕동(金富大王洞)’ 등으로 남아 있는
마을 지명들의 유래는 마의태자의 행로에
경순왕의 뜻이 함께 있었다는 증거이다.

 

다시 말하면 김부리의 김부대왕각의 위패에는 '김부대왕 1'
명기돼 있다는 것은 이들 부자를 숭앙하던 사람들이
경순왕의투항 마의태자의망명이라는
갈래 엇갈린 결과 사이에서 헤맨 것이 아니라
마의태자의 활동에 경순왕의 뜻이 동반 숨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있는 것이다.

 

김부리 또한 본래 '금부리'였을 것이다.
() ''으로 발음하게 것은
이씨왕조인 조선시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김부리는 처음에 금보왕촌, 금보왕동, 금보리 등의 이름을 거쳤던 같다.

 

지금도 이곳 김부대왕각에서 , 가을에 동제를 지냈는데,
지역에 곳의 마을에 각각 대왕각이 있었다고 한다.
마의태자
동제를 지낼 때에 동제의 제상에는
미나리떡과 취떡이 제물로 바쳐지는데 마의태자가 좋아했던 음식이라는 것이다

 

특히 마의태자 동제 제례 때는 천자(天子)에게 절하는 4배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마의태자에 대한 동제 전승은 실제적인 역사일 수도 있으나
이곳을 지나간 마의태자가 무속적 전통으로 남아
무당들이 최영장군을 숭상하듯 '뜻을 못다 이룬 인물 숭배' 의식을 바탕으로
그와같은 무속적 의식으로 만들어졌을 개연성도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마의태자의 유적에 남아 있는 오층석탑도
'금부수명장존가
(金富壽命長存家)'라는 비명(碑銘) 함께
() 성종 태평16 병자(서기 1034, 고려 정종 2)”라는
간지(干支)가 있는 것을 보면 그때까지 마의태자의 후손이
지역에 남아 있었거나 마의태자가 이곳에 한동안 머물렀던 영향으로
지역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있다.

 

대왕각 제단에는 철마상(鐵馬像) 배설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모형만이 남아 있다.
철마상이 경주의 천마총 천마상(天馬像) 혈통적 계승을
의미한 것이 아닌가하는 해석들이 있다
철마상이 철로 되었다는 것만큼
지역에서 철제 무기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부리 인근의 갑둔리(甲屯里)  이름이 갑옷 () 진칠 ()이다
다분히 군사적인 진지 이름이다.
갑옷을 만들었다기 보다 진을 첫번째 진으로 '갑둔'이고
다른 곳에 '을둔리' 등이 있었을 개연성도 배제할 없다.
그곳의 항병골이라는 골짜기 이름도 항병(抗兵) 의미하는 것이
신라부흥운동과 관계가 있을 있다

 

진부령 유래도
어쩌면 경순왕의 이름인김부령에서 와전된 것으로 있다.
풍물놀이 악기인 징(金)에서 보듯이
신라 발음으로 김은 진으로도 발음되었기 때문이다.
인제의 '행차고개' 임금의 행차가 있었다는 의미가 있듯이
신라의 마의태자 일행이 넘어가던 고갯길이
오늘날 '진부령 고개' 이름으로 남아 있을 있는 것이다.

 

대관령으로 대표되는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으로 가는 길은
고개인 한계령, 진부령, 대관령 가운데
진부령은 본래 '김부령(金富嶺)'이었다고 전하는 것은 
'
김부' '진부' 발음될 있다는데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김부령이란 경순왕이 또는 경순왕의 명을 받아 부흥군을 이끌었을
마의태자가 넘던 고개라는 의미에서 나왔을 있는 것이다.

 

지역의단지(斷指)이라는 골짜기 이름 또한 안중근 의사의 단지에 남아
있는 화랑들의 결의의 의미가 그런 장소 명칭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행차고개처럼 지역의 다른 고개 명칭인 '수거넘이' 거대한 임금이나
왕자의 수거(왕의 수레) 행렬 지명으로 있다는 해석은 타당성이 있다.
한편 지역에서 다물리(多勿里)라는 지명도 영토회복의 옛 의미를
사용했다는
것도 마의태자가 지역에서 신라부흥운동을 위하여
거처갔거나 한동안 머물렀을 개연성을 보여준다.  

 

마의태자의 신라부흥군과 관련된 곳은 인제 외에도
경기도 양구군의 북면에 있는 군량리(軍糧里)라는 마을 이름도 거론된다
그곳의 전승에 의하면 마의태자 부하인 맹개골 장군이 
마을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징발했던 곳이라는 것이다.
마의태자는 단순한 걸색으로 금강산에 입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있다.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龍門寺은행나무는
마의태자가 심었던 나무라는 전설이 있거나
인제 인근의 홍천군 동면에지왕동(至王洞)’
마의태자가 횡성군 탑산(塔山) 거쳐 마을에 머물렀다가
인제로 떠났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구체적인 마의태자 행로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왕자가 아닌왕이 머물렀다至王 의미는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고
마의태자는 이상태자 아닌 위치에서 추앙받고
그렇게 활동했을 수가 있다는 의미가
그러한임금 명칭에 남아 있다고 필자는 해석한다.
행차고개’, ‘수거넘이등에서 마의태자의 행렬이
태자가 아닌으로서 그러한 지명을 낳았을 있는 것이다.
마의태자가 '왕'이라는 의미는 '신라의 왕계는 계속된다'는 것을
강조했던 의미가 들어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동시에 아버지 경순왕 김부대왕의 뜻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김부리, 김부대왕동 등의 이름으로
마의태자가으로 받들어졌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에
경순왕에 대한 의미도 부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필자의 생각은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는 왕실의 종말 상황에서
그의 아들 마의태자까지 아버지와 동행하여 투항하게 하지 않고
따로 빼돌려 신라를 위한 재기의 기회를 다시 보았을 것이라고 풀이하는 것이다.
오백년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고하던 고종황제의 마지막 밀사파견,
밀서 송신들의 역사는 천년 신라왕조의 최후에서 왜 일어나지 않았겠는가.

 

흔히 마의태자가 아버지 경순왕의 고려 투항을 반대하였다고 하지만,
실제의 역사에서 경순왕은 자식들을 모두 산개시켰을 것이고
함께 투항하면 가문이 어떻게 될지 불투명한 위험한 상황에서
마의태자까지 투항하라고 권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협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역사에서 멸망하는 왕조의 마지막 왕은
자식들을 뒤로 도주시키고 부흥군을 일으키도록 독려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마의태자가 신라 부흥운동을 위하여
강원도 또는 금강산으로 향했다는 것에는 마의태자만이 아니라
아버지 경순왕의 뜻이 함께 들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김부리' 또는 '김부대왕동' 등의 지명에
'
경순왕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경순왕이 망국의 왕일지라도 마의태자에 대하여 '갈라서는 모습' 아니라
'
밀명을 모습'으로 파악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사관이다.

 

일국의 왕이 천년 사직을 그렇게 간단히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의태자는 경순왕의 숨은 차선적 전략하에 움직였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을 왜곡하고 싶었던 것이 고려왕조였을 것이다.

 

고려왕조때에 반신라적으로 김부식이 <삼국사기>에는
마의태자가 경순왕의 투항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하늘의 (天命)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 의사들과 더불어 먼저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지키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야 그만둘 일이다.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이러한 내용은 경순왕을 저주하는 내용이 아니라
마땅히 마의태자가 지녀야 자세인 것은 물론이며
의중에는 아버지 경순왕의 말하지 못하는 의사까지
들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마의태자 동생이자 막내인 범공스님이 머리를 깎고
해인사에 들어가 버렸다는 것도 윤색되었을 수가 있다.
모든 왕자들은 신라부흥운동에 어떤 역할을 했을 것이다.
요주의 인물로 잡히거나 유배되었을 수가 있는데
'전두환의 백담사 퇴거'와 같이 절간으로
보내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도 마의태자만 잡지 못하고
나머지 왕자들은 모두 고려왕조에 의하여 신변이 확보된 까닭에
<
삼국사기>에는 여진족 쪽으로 가서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마의태자만이
투항을 반대한 것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신라의 ((() 삼성 족보로 가장 오래
<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1642 간행)에는 
신라가 멸망했을  자결한 왕자도 있었다고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경순왕의 투항과 신라 멸망에 대하여
왕자들의 분루는 여러 방향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있다.

 

경순왕은 당시에 석씨와 박씨 부인 사이에 8명의 왕자를 두었다고 했다
가운데 명의 왕자가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것을 보면
마의태자가 여진족 방향으로 가서 아들 또는 후손이 금나라를 세우고 
나머지는 땅에 남았다는 기록들과 일치한다
이러한 내용을 위의<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 족보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10 고려에 귀순할
석씨의 막내 () 박씨의 맏아들 () 분이 극력 ()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더니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족보란 가장 친권력적이며
왕조에 거슬리지 않도록 윤색될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왕자 김일(마의태자) 김분이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초식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것은 고려왕조의 관찬역사에 호응한 결과일 수 있다.

 

경순왕의 박씨 부인에게서 맏아들 김일(마의태자)과는 달리
석씨 부인에게서 막내 김분에 대한 내용은 경주김씨 족보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일제시기 평안도에서 간행된
<
경김족보(慶金族譜)>에는 기록되어
이것은 경주김씨 족보가 오히려 고려왕조의 영향을 받았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자가 금강산으로 갔다는 것은 그만큼 경순왕의 왕자들 가운데
여러 왕자들이 신라부흥운동을 위하여 떠났다는 것을 시사한다.
경순왕과 왕자들은 화랑도의 가문을 잇고 있었다.

 

경순왕 직전의 경애왕은 박씨 임금이었을
경순왕의 아버지 마의태자의 할아버지인 효종랑(孝宗郞)
1
화랑을 거느리는 화랑도(花郞徒) 지도자였다고
<
삼국유사> 기록하고 있다.
마의태자가 무가의 자손이며 신라부흥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금강산(정확하게 인제 인근의 설악산 기슭) 거쳐
금나라를 건국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랑들이 찾아와 제사하고 수련하던 금강산은
그래서 마의태자 일행이 거쳐갔 수가 있고 신라부흥운동의 거점으로서
한동안 역할을 했을 수가 있는 것이다.
태자의 계마석(繫馬石), 마구간(馬廐間) , 태자성(太子城) 등의 명칭들은
그러한 의미로 남은 그
잔재라 있다.

 

인제 설악산 기슭에는
 '하늘 아래 동네' 할만  곳에 한계산성(寒溪山城) 있다.
한계령 고개가 내려다 보이는 그곳의 내성에는
제왕이 하늘에 제사하는 천제단(天祭壇) 있다
천제단은 삼신단(三神壇) 중심으로 신선도가적인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삼신단(三神壇) 비명(碑銘)에는
김성진, 김세진, 신광택 사람이 나오는데 직함들이 선도적이다.
의선운장(義仙雲將) 김성진(金成鎭), 선천주(仙天主) 신광택(申光澤)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보듯이 신라 화랑도의 '仙道' 천주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라 화랑도 즉 선도와 관련된 이
비명들을 보면 이들은 마의태자와 관련된
신라 김씨 왕족일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삼신단(三神壇)이라고 것은
분명 김성진, 김세진, 신광택 화랑들을 의미했을 것이다.
삼신은 신라의 선도성모를 비롯한 신라 화랑 선도의 이름으로
지리산에도 모셔졌던 신라 문화의 잔재이기도 하다.
신선도가 사상을 받들었던
 시대의 사당이나 신사는
살아 있을 때 유명했던
무공들이 신으로서 제사를 받드는 곳이었다.
신라의신국의 도사상을 이어받은 일본 신도의 신사들에도
이와같은 인간 무사들을 신으로 받드는 전통이 남아 있다.

 

한계산성의 역사가 삼국시대 이전 맥국(貊國) 성이었을 수도 있으나
모든 성은 사람들이 다시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에
마의태자는 이곳을 부흥군의 저항 성으로 삼았을 수가 있다.

 

그곳의 비명에서 발견된 간지인 '경오년', '신미년'은
신라가 멸망한 935 마의태자 때로부터 세대쯤 지난
고려 광종 20(970), 21(971)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신라가 멸망하고도 '최소한' 40여년간
신라부흥군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을 개연성을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관찬 역사서에서 신라의 투항을 공식화하기 위하여
이러한 신라부흥운동을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에 끈질긴 신라 부흥군
특히 마의태자 김일의 '金衣' '麻衣'로 표현하여
저항군의 입지를
왜곡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金富(경순왕) 잇는 신라회복에 대한 신라 金씨 왕권 회복운동을
의미하는 금강산이
고려 조선시대의 국가적 제사에서 누락되었다.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불가적인 '金綱山' 이름이 강조된 것은
많은 신라의 왕실 귀족들과 화랑들이 수도를 닦던 그곳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승이 되었던 영향일 있다.

 

그러나 금강산은 그 '金'이 신라왕실의 성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만큼
고려와 조선왕조에서는 경계와 안도 사이의 갈등의 이름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금강산'보다 '개골산'이 기록에 선호되었을 수 있다.

 

금강산이라는 칭호보다 개골산은겨울 금강산 명칭이라는
단순한 계절적 명칭이 아니라 죽음의 산의 의미를 가졌던 면이 있다.

 

마의태자가 갔다고 하는 이름을 '개골산(皆骨山)'이라 것은
개골이라는 이름이 '모든 것이 해골'이라는 죽음의 골짜기를 의미한다.
그만큼 고려시대에서 신라의 마지막 왕자의 신라부흥운동을 죽음으로
인지시키려 노력한 흔적이라 있다.
고려시대에 금강산이 모반죄를 지은 역모자에게
유배지로 나오는 것과도 의미가 통해 있다.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과 금나라 건국에 대한 배경의 역사를
철저히 매장하기 위하여개골산 입산설 지어냈다고 있는 것이다.
아니 금강산을 거쳐간 뒤의 이야기를 생략하는 수단으로 삼았을 것이다.

 

마의태자가 금강산에서 초식을 하다 죽었다는 설에 대하여
최초로 제동을 사람은 육당 최남선이다.
이규경이 마의태자의 무덤이 금강산에 있다는 것을 언급했었지만
20세기에 최남선은
금강산의 마의태자 유적지를 둘러본 뒤에 
<
금강예찬(金剛禮讚0>(1927)이란 기행문에서
마의태자 금강산 은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신라 태자의 유적이란 것이 전설적 감흥을 깊게 하지만
그것과 역사적 진실과는 딴것입니다.
첫째 세상만사를 끊고 깊은 산골에 들어온 태자에게
성이니 대궐이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태자의 계마석(繫馬石)이니 마구간(馬廐間) 터니 하는 것은
옛날 예국 때의 천제단이요,
태자성(太子城)이란 것도 제단으로 들어가는 성역 표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최남선의 지적은 분명한 타당성이 있다
최남선은 태자성을 옛날 예맥국의 천제단의 흔적으로 보려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고려왕조 치하에서 금강산으로 귀의한 신라의 귀족들이
그와같은마의태자의 나라 같은 지명들을 바꾸어 불렀을 수도 있었지 않았
을까
?

 

불교를 강화한 고려 때는 신라의 선도 산신 전통을 차단하여 신라역사를
제거하기 위하여 팔도의 산마다 7천개의 비보사찰이라는 절간을 세웠다.
동시에 신라의 이미지를 강하게 가졌던 금강산
계곡마다 사찰을 세워
신라 전통의 산신단은 불단으로 만들게 된 것이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그리하여 금강산의 유명한 봉우리 이름들마저 불교적인 이름으로 변형되었다
이러한 불교적인 개명의 역사에는 그곳에서 불승이 신라의 왕족 귀족들이
신라에 대한 향수에 젖어 신라의 신선도를 배경하여 곳곳마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를 그리는 지명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마의태자의 태자성이 둘이나 있다든지, 망군대와 장군봉이라는 지명 등이
의도적인 왜곡이라기보다 신라 멸망으로 금강산으로 숨어 들어가서
사찰에 귀의한 신라 귀족들의 염원이 그렇게 지명등을 바꾸었을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고려가 멸망했을 때 70인의 충신들이 두문동에 들어갔던 것은
오백년 후의 일이었다.

 

금강산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신라의 이미지가 강조되자
고려왕조에서는 물타기 작전이 나왔을 수가 있다.
'단발령'이 고려 태조 왕건이 금강산의 명승에 취하여
중이 되려고 머리를 깎았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전해질 정도로
금강산 불사에 대한 종교적 열정으로만
그 의미를 새기고자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의태자의 유적이 금강산과 인제의 설악산에 남아 있다면
오히려 더욱 많은 사료들이 신라 왕실의 후예가
여진으로 가서 금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설이나 금강산 경유설은
신라 화랑들의 전통적 금강산의 관계에서 조명되어져야 한다.
금강산은 화랑들의 풍류도를 실행하며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신라 때는 금강산에 대한 명칭은 상악(霜岳)이라 했다.

 

금강산의 여러 명칭들 가운데
‘금강산’이라는 말은 <화엄경>에서 등장하는 말이다.
"동해 바다속에 팔만 유순(由旬)의 곳에 금강산(金剛山)이 있고
그곳에 1만2천 담무갈 (曇無竭) 보살이 항상 머문다"고 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금강산은
산천을 찾아 수도하던 화랑들의 신선산으로서 그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설악산과 금강산은
흰 색의 눈과 서리와 관련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신라 때는설악(雪岳)과 짝을 이루는 의미에서
서리가 많은 산이라 하여 ‘상악(霜岳)’이라 불렀다.
흰 색은 산과 관련하여 산신의 의미를 지닌다.

 


3. 화랑들이 제사하던 금강산과 마의태자

 

산신에 대한 의미는 태양숭배시대에서 눈이나 서리가 많이 내리는 동지 즉
‘옛 새해’의 의식에서 흰 눈 덮힌 산에 그 의미를 부여하고 산신제를 지냈다.
금강산 해돋이는 신선도가 또는 화랑 풍류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삼국사기> 권32 제사(祭祀)조에 보면
강원도 고성군의 상악(霜岳 오늘날 금강산)과
강원도 수성군(지금의 간성군)의 설악(雪岳)에서
소사(小祀)의 산신제를 지냈다는 것은
금강산이 풍류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음을 의미한다. 
비록 신라의 도읍 경주에서 너무 멀어 소사(小祀)를 지냈다고 했으나
거기에서 산신제를 지냈다는 것은 산악의 장엄성과 함께
상악과 설악의 ‘흰 눈, 흰 서리’에 대한
산신제의 의미가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금강산의 흰 서리는 ‘명사십리’의 모래 빛 흰색의 신비함과 함께 읽혀야 한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동해안의 모래는 눈같이 희고 사람이 밟으면 소리를 낸다.’라고 쓰고 있다.
명사십리는 간성, 고성, 통천에 이르는 모래 해변으로서
특히 소리를 내는 모래라는 뜻으로 명사(鳴沙)로 불려 왔다.

 

‘모래소리’는 옛날 신비한 신선의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오늘날도 필자가 직접 현장에 가본 하와이의 최북단 섬인
카우와이섬의 해변이나 고비사막의 모래언덕들이
바람에 의하여 소리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갈 때 실크로드의 상인들은
'귀신 우는 소리, 아기 우는 소리' 등을 들었다는 것은
마른 모래가 바람에 한꺼번에 지속적으로 무너지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아름다운 명승 모래 길에서 들렸을 때 과학이 발달되지 못하던
옛시대에는 신선의 소리로 들렸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흰 모래 산 위의 흰 눈, 흰 서리와 바닷가의 흰 소금과 흰 모래는
신화적으로 서로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라 때 금강산을 ‘흰 서리가 많은 산’ 즉 상악(霜岳)으로 불린 것은 것은
그만큼 신선도가적인 명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상악에 화랑들의 지도자들이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금강산과 지리산은 화랑들이 찾아다니는 수련장이 되었다는
증거들은 많이 남아 있다.

 

화랑은 본래 원화라 한 것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 어머니인
선도성모와 연관하여 시작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 화랑이 무속적 의미로 남아진 무당이 여성적인데 비하여
남자 무당은 오히려 후대적 부속적인 의미가 되어 남무(男巫:覡) 또는 무격 
즉 남자 무당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을 보면 원화(源花)의 의미는
원천적으로 모계적 여신 문화의 무속적 원류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랑은 신라 후기 때에 선랑(仙郞), 국선(國仙) 등으로도 불렸으며,
화랑도는 국선도, 풍월도, 원화도, 풍류도라고도 했다.
이러한 신선도가적인 칭호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불교적인 명칭으로 변이된다.
그래서 선랑은 팔관회(八關會)의 무동(舞童)을 의미하게 되었고
국선은 충렬왕 후 양반출신의 '군병'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화랑의 존재는 유교의 영향으로 더욱 변화되어
무속적인 존재로 남아지게 된다.
조선시대 후기에 ‘화랑이’, 무부(巫夫), 걸립승(乞粒僧)의 무동,
사당(寺堂)의 거사(居士) 등의 칭호는 신라 화랑의 전이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의 화랑이 단순하게 명산대천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본래 산신제를 지내던 의미를 가진 선도(仙道)의
제천의식에 연관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런 명산대천에는 선도성모와 같은 신라 신화에 나오는
아니 그보다 오래된 우리 민족의 토속적 여산신이 살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신라 때에 금강산 즉 상악(霜岳)은
특히 화랑들의 중요한 제의적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금강산에는 화랑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신라가 망하자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갔다거나 거쳐갔을 개연성은
그래서 충분한 역사적 근거를 가지는 것이다.

 

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의 단서(丹書)와 마애단서(磨崖丹書) 및 36 봉비(峰碑),
강릉(江陵) 한송정(寒松亭)의 사선비(四仙碑), 통천(通川) 총석정(叢石亭)의
애상비(崖上碑)와 동봉고갈(東峰古碣) 및 동봉비(東峰碑) 등은
화랑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산의 봉우리 가운데 영랑봉은 화랑 영랑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海東高僧傳》에는
신라의 200여 화랑들 가운데 최고 화랑인 사선(四仙)이 나온다.
영랑, 술랑, 남랑, 안상 등 이들 사선(四仙)이 금강산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신라의 신선도와 금강산 즉 ‘상악’과의 인연은
아주 오래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661년, 김수로왕 후손이 금강산에서 속절제사로 차를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사선(四仙) 화랑들의 금강산 순유(巡遊)는
총석정의 사선봉, 금란굴, 삼일포에 그 전설이 남아 있다.
특히 삼일포의 경치에 감동하여 이들 사선이 3일 동안 머물렀다고 해서
삼일포라 칭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곳의 <동유기>에 의하면 삼일포의 작은 섬의 동북쪽 벼랑의 바위 벽에
‘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했다.
안축(安軸 : 고려 충숙왕 때의 학자)의 <삼일포기문(三日浦記文)>에는
그것을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으로 쓰고 있다.
어느것이 맞는지 알 수 없으나 술랑이든 영랑이든 낭도의 행적임을 알 수 있다.

 

<동유기>에 의하면
사선(四仙) 기념비가 삼일포, 총석정, 한송정 세곳에 있었는데,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벼슬을 했던 호종단(胡宗旦)이란 사람이
금강산에 갔을 때 삼일포와 한송정의 사선비를 파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삼일포의 안상정(安祥汀)은 사선 중의 안상 화랑의 이름에서 연유하고 있다.
조선시대 연산군 때의 홍귀달(洪貴達)은
“바람은 영랑호에 높고 달은 안상정에 떠 오르네(風高永郞湖 月上安祥汀)”
라고 노래한 것은 조선시대에도 신라의 화랑들과 금강산과의 관계에 대한 의미가
깊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설은 이러한 화랑도와 금강산과의 오랜 교류의 밀접한
역사에 이어진 내용이며 마의태자가 여진족 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금강산을
거쳐간 배경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선도적인 금강산 즉 상악(霜岳)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급격히
불교적인 명칭들로 변화해 갔다는 것은 앞장에서 다루었다.
그 결과가 <화엄경>에 근거하여 금강산이라고도 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칭호는 '풍악산'이었다는 것은 단풍이 좋다는 의미 이상
신라의 '풍류도'의 의미가 그 속에 숨어 있다고 필자는 풀이한다.

 

금강산을 흔히 '1만2천봉'이라고 한 것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1만2천 보살’에 근거하여 나온 것이며
본래는 산봉우리마다 신선들이 사는 선도적 의미를
불교의 보살로 윤색 변형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왕조와 불교의 합작으로
본래의 신라 전통의 풍류도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마의태자 금강산 입산설에서
끝내 불승이 되지 않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죽었다는 표현은
그 당시에는 금강산에는 불사들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의태자가 금강산을 거쳐갔을 개연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앞선 장에서 다루었듯이 오늘날 강원도 인제에서
마의태자의 역사적 흔적이 상당히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인제의 유적들이 마의태자의 이름인 ‘김일(金鎰)’로서가 아니고
그의 아버지 경순왕인 '김부(金富)'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곳이 많다는 것에서
이 글은 집중하고 있다.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름의 차선적 최후를 대비했으니
그것이 마의태자의 행보이다.

 

 

4. 金나라를 건국한 '金衣太子'와 금강산에 입산했다는 '麻衣太子'

 

금나라 건국에 신라의 마의태자 후예가 세웠다는 설에는 몇가지로 나뉘어진다.

그중 마의태자 자신이 금나라를 세웠다는 설이나
마의태자 아들이 세웠다는 설도 있지만,
가장 유력하게 보이는 것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는
마의태자의 5대손’이라는 기록이 필자에게는 가장 유력하게 보인다.


마의태자는 결국 금강산에 남아 죽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위에서 충분히 논했다.
마의태자가 신라부흥운동을 완성하기 위하여 여진족 세력들을 업고
만주로 들어가 그의 아들 김준이 결국 금나라를 세웠다는 설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가 김준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순암 안정복은 김준의 형제가 삼형제였으며 김준(金俊)이 여진으로 들어갈 때
두 형제는 뒤에 두고 혼자서 넘어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고려사>에는 금나라에 대하여 지금의 흑룡강 일대로 기록하고 
땅을 파서 집을 짓던 풍습이 있었으나 신라 왕실의 후예가 그곳으로 옮겨 간 뒤에
지상에 집을 짓게 되었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김준은 김행이라는 이름으로도 나타난다.

 

"흑수(黑水), 즉 흑룡강의 옛 습속에는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水草)를 찾아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 김행의 후손 극기라는 인물이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집 짓는 제도가 생겼고
사람들이 그 지역을 납갈리(納葛里)라 이름했다.
그 말은 한자로 거실이란 뜻이었다."

 

마의태자(김일)의 아들 김준(金俊)이 金나라를 세웠다는 주장은
<고려사>의 금준(今俊)이 金나라 시조라는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金나라 시조 아골타에 대하여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조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金나라의 시조다'라고 하며.."

 

여기에서 '시조'라는 말은 나라를 건국한 임금 자신보다
그 임금의 조상이라는 의미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위의 <고려사> 기록에서 김준은 발음이 '금준(金俊)이었을 것이다.
金이 木인 李씨에 상극이 된다하여
'김'으로 발음을 고치게 한 조선시대 이전에는
'금'으로 발음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금준 = 아골타' 설은
마의태자 아들 金俊에 대한 그 발음의 한자표기가
금준(今俊)'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해오고 있다. 
금준이 마의태자의 아들이라는 학설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록한 <고려사>는 바로 이어서
이와는 다른 전승도 함께 싣고 있다.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 장자)이라 하고
계자(季子 막내)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호걸이어서 민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그 자리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오아속 아우)가 섰다고 한다."

 

여기에서 김행(金幸)은
마의태자 아들 김준(金俊)과 동일인이거나 형제로 해석되어 왔다.
<고려사>에서 말하는 마의태자 아들 김행에서 아골타까지의 혈통을
직계 아닌 형제들을 제하면 모두 6대가 된다.
즉 <고려사>는 金나라의 시조 아골타의 조상을 기록하면서
전통적인 '시조의 육조(六祖)'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의 독특한 사관인 '시조 육조론'을 전개하고자 한다.
아골타로부터 마의태자까지 7대가 되며 아골타의 조상은 육조(六祖)가 된다.

 

 마의태자(1) - 김행(金幸) - 극기(克己) - 고을(古乙) - 활라(活羅) - 영가(盈歌) - 오아속(烏雅束)

                                                                                                                 아골타(오아속 아우)

  

마의태자가 아골타의 6대조가 되는 것을 말하며
모든 왕조들의 '시조의 조상들'을 다룰 때에 6조(六祖)
즉 시조를 포함하여 7대(七代)를 포괄하는 시조 숭배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오래 전에 쓴 필자의 시리즈글의 한 주제로 
<신화이야기83: 여섯 이야기 - 六祖의 돌림항렬과 창세기의 아담의 '조상'
창조 六日>에서 다룬 바가 있다.
더불어 필자의 <역사산책:
칠지도(七枝刀)와 신라 금관은
六祖 이은 7대 시조왕 숭배 상징
>에서 구체적으로 논하였다.

 

이러한 왕조의 시조의 육조(六祖)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기록은 조선왕조의 세종대왕의  '시조'에 대하여서
다루는 <용비어천가>에서 '해동육룡'만이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고려사> 金나라 시조부분 아골타 육조(六祖) 손자로 7대째


마의태자(1) - 김행(金幸) - 극기(克己) - 고을(古乙) - 활라(活羅) - 영가(盈歌) - 오아속(烏雅束)

                                                                                                                      아골타(7)

 

 <용비어천가> 세종은 '해동육룡' 육조(六祖)의 손자로 7대째


목조(穆祖) (1) - 익조(翼祖) - 도조(度祖) - 환조(桓祖) - 태조(태祖) - 태종(太宗) - 세종(世宗)(7)

 

오행사상에서 오대조까지 제사를 한다. 돌림자도 오대만에 바뀐다.
6조는 일반 서민용이 아닌 용 즉 왕조와 선승 계보에서 강조된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칭송하면서
그 시조는 목조(穆祖) · 익조(翼祖) · 도조(度祖) · 환조(桓祖) · 태조 · 태종까지
6대조를 <용비어천가>는 칭송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골타의 6대조가 마의태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육조(六祖) 전통에 대하여서는 앞서 소개한대로
따로 된 필자의 글들에서 상세히 다루어져 있다.    

 

<고려사>의 앞선 인용에서 말한 아골타가 마의태자의 아들이든지 
아니면 위의 6대손이든지 金나라는 신라의 후예가 세웠다는 것은
분명한 방증들이 많이 등장한다.
<고려사> 예종 4년(1109) 6월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여진 사신이 와서 한 말을 <고려사>에 거짓으로 쓸 필요는 없다.
금나라는 신라의 후예가 만든 것이 분명해진다.
여기에서 '대방'이란 한사군의 이름이 아닌
'큰 나라' 또는 '위대한 나라'라는 의미의 고려를 말한다.
금나라가 우리의 핏줄을 가진 나라라는 것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합병되었을 때에도 언급되었을 정도다.

 

백암(白岩) 박은식은 일제때에 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꿈에 금태조를 만났다(夢拜金太祖)’는 글에서
꿈에 금태조가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한 꾸지람을 했다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너는 조선의 유민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고향이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라. 지금 조선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볼 때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자분자강(自奮自强)하는 자를 돕고
자포자기하는 자를 싫어하시나니 이것이 천의(天意)다.
너희 조선민족은 아직도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구나."

 

이것은 나라가 망해가자 그를 안타까워 하면서
같은 신라 왕실 혈통을 가진 금나라의 후신인 후금
즉 청나라가 조선을 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표현한 면이 있다.
비록 꿈을 빌었던 글이지만 박은식이 가졌던
금나라에 대한 견해를 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는 <신단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히고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신라 종실의 김준(금준)의 아들 극수가
완안씨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왕은 성씨를 쓰지 않고 '왕'이라는 의미의 고을 이름 '완안' 으로 대신하여
왕의 성을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실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금나라의 '완안씨'에 대하여 재확인하여 
"옛날 金나라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라고 했다. 

 

납북 사학자 손진태는 <금태조는 황해도인야>라는 논문에서
"금태조 아골타가 스스로 고려는 '부모 지방(고향)'이라 했고,
중국측 기록 <금지>에는 금나라 왕은 본시 신라인이요
호가 완안인데 완안은 한어로 왕이란 뜻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썼다.

 

결론적으로 신라 멸망과 함께 고려왕조에서 '麻衣太子'로 표현되었던
신라의 마지막 왕자는 사실상 金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6대조 할아버지이며
金씨 왕국을 건설한 '金衣太子'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라를 창건한 시조의 신화들에는 언제나 그 발원이 하늘이 아니면
보다 큰 나라의 왕실에 핏줄이 닿아 있는 것을 강조하는
왕조실록들의 기록 습관이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고려시조 왕건은 당나라 황제의 핏줄을 이어받았다든지
궁예가 신라 경문왕의 서자였다는 기록들은 그 한 예이다. 
그것은 사실을 바탕할 가능성도 있고
출신 배경이 만만치 않음을 선전하는 윤색일 수도 있다.
태봉(후고구려 전신)을 세운 궁예는 신라 왕실의 후예라는 것으로
이승휴는 다음과 같이 궁예가 신라 왕실의 서자임을 기록하고 있다.  

 
羅王景文生庶子(나왕경문생서자) : 신라 경문왕이 서자를 낳았는데

齒有兩重含付聲(치유양중함부성) : 두 겹으로 이가 나서 어물어물하는 소리

相是害君乃放逐(상시해군내방축) : 임금을 해칠 상이라 방축되어

託迹浮圖潛遊行(탁적부도잠유행) : 종적을 절에 의탁하여 돌아다녔다네.

                                                                       - < 제왕운기> -

                                      

 

이미 필자는 앞선 장에서 궁예는 후고구려 계승 이전 처음에는 
'신라복원'을 의도로 병사를 모으고 있었을 개연성을 제기한 바 있다.
고려왕조가 신라를 포용적으로 받아들인데는
왕건이 이러한 궁예의 세력을 바탕했기 때문이리라.

 

신라왕실은 분명 후고구려처럼 금나라 시조에게도 그 혈통적 아니면 
국제적 권위를 가졌던 나라의 왕실임은 분명한 것이다.

 

신라 왕실의 마지막 망명 왕자의 후손인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운데 이어
나중에 조선시대에 들어와 금나라 왕실의 후예를 자처한 누르하치가
後金(청나라)을 세운 것은 신라의 '망명동포'의 역사가 조선에 대한
또다른 형제지국을 건국하는 역사를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배경에는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이 있었고
그 배후에는 경순왕의 철저한 왕자들을 빼돌리며 당부한 밀명이 
역사의 물밑에 함께 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는 간단히 ‘투항’한 것이 아니었다.
금나라와 후금(淸)에 이르기까지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을 위한
화랑의 기상이 역사 속에 이어져 온 것이다.
필자가 지난 90년대 초 처음 제기한 '朝-淸남북국시대론'은
근년에 관심을 받기 시작했지만, 
그 원천은 신라와 금나라에서부터 그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거기에는 경순왕의 한과 밀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출처 : 우리철학 아카데미
글쓴이 : 유토피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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