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10월 8일. 명성황후께서 시해당하신 날.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1:18

좀 늦게 올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네요...

그래도 올려봅니다...

(본문 내용 가운데 오해가 있을까 싶어 적으면, 원제는 '10월 8일. 명성황후 사망하다' 입니다...)

 

「그저께 석주명에 대해 쓰면서, 인물 선정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떤 날은 쓸 인물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고,

어떤 날은 쓸 인물이 보이지 않아서 고민이고.

 

오늘은 인물이 보이지 않아서 한참 헤맨 날이다.

명성황후가 있는데 왜 고민했냐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잘 알려진 분에 대해 쓰는 건 조금 부담스럽다.

 

아니, 객관적이라는 이유로 제목에 집어넣은 단어인

'사망' 이라는 단어를 써야 하나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좀 더 정중한 표현을 써야하는거 아닌가 하면서...

 

...어쩌다 보니 영양가 없는 서문이 되어버렸지만,

지금부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삶을 산 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명성황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명성황후의 초상화.

글을 다 쓰고 사진을 집어넣는 지금 털어놓자면,

이 글을 쓰는 내내 왠지 조심스러웠다.

너무 잘 알려진 우리나라의 근현대 인물이라서 그런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1851년 음력 9월 25일~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황후다.

 

 

1851년 경기도 여주에서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다.

8세 때인 1858년에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으로 이사해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이후 생계가 어려웠지만, 장손이었던 덕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이때까지의 명성황후는, 평범한 양반집 규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1866년에, 그녀의 인생이 급변하게 된다.

 

홀어머니를 섬긴 외동딸이므로 외척으로 인한 폐해가 없으리라 기대한 흥선 대원군의 뜻에 따라 고종의 왕비로 간택된 것이다.

 

하지만 고종의 사랑을 그다지 받지 못하는 등, 불우한 신혼 초기를 보냈다.

 

1868년, 고종이 아끼던 궁인 이씨가 완화군을 낳았는데, 이것이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의 시작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완화군을 세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명성황후는 이것을 막기 위해 대원군의 반대 세력을 규합해 세력 기반을 다졌다.

 

1871년 명성황후는 첫 아들을 낳았지만, 태어난지 나흘 만에 사망한다.

그리고 이어서 태어난 둘째 아이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둔다.

명성황후 측은 이를 흥선대원군의 탓으로 돌려,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1874년에 태어난 셋째 아들 척이 세자가 된다.

척이 바로, 조선의 27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순종이다.

 

명성황후가 포섭하는 데 성공한 유학자 최익현은 1873년, 임금이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원군 계열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한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후원했고,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대원군 계열의 음모를 막아내기도 했다.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흥선 대원군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결과 1873년 11월.

대원군의 11년간에 걸친 섭정은 종결된다.

 

은퇴 이후에도 대원군은 수시로 복귀를 노렸고,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일족과 수시로 충돌했다.

 

흥선 대원군.

전에 네이버 지식 in에서, '만약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이 손을 잡았더라면?' 이라는 질문을 본 적이 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몇 번 쓴거 같고, 외세에 대한 입장 차이 등으로 손을 잡을 수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만약 손을 잡았더라면... 이라고,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다.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명성황후는 민씨 집안 사람 몇몇을 조정의 요직에 앉혔다.

이어서 1876년에 종래의 쇄국정책을 버리고 강화도조약을 맺어, 개화정책을 시행한다.

 

고종을 움직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게 하고 대원군이 부활시켰던 삼군부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해 신식무기, 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황쭌센의 <조선책략> 을 접하고서는, 조 ․ 미 수교를 시도하기도 했다.

 

대원군과의 대립이 심화된 가운데, 1882년에 사건이 터진다.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에, 급여로 지급되던 곡식의 횡령으로 폭발한 구식 군대가 들고 일어난 임오군란이다.

 

민겸호, 민창식 등 민씨 일족이 살해당하자, 명성황후는 궁녀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궁녀 행세를 하며 이천, 장호원을 거쳐 충북 충주로 피신했다가 여주로 피신했다.

 

국내가 혼란해지자 고종은 대원군의 힘을 빌렸고, 명성황후가 오랫동안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자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국상을 선포하려 했다.

 

이때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했다.

결국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는 수모를 당했고, 민씨 중심의 정권이 다시 수립됐다.

 

임오군란의 원인을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는 별기군.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조금은 초라한 군복이지만,

이게 이 당시 최고의 정예부대였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국상을 치르려고 했다는 점 등은,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이 얼마나 극심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또 하나의 유명한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갑신정변이다.

이 사건으로 조정의 실력자였던 민씨 일족 상당수가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 개화파의 살생부에 올라 살해당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명성황후는 일본과 급진 개화파를 경계하게 됐다.

 

명성황후는 임오군란 때와 마찬가지로 청나라의 지원을 요청해서 개화당을 붕괴시켰으며, 이후 청나라의 횡포에 대응하기 위해 러시아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영국이 군함을 보내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장악했고, 청나라도 흥선 대원군을 돌려보내는 등의 조치를 취해 국제정세는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김옥균, 박영효 등, 갑신정변의 주역들.

물론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다 그랬지만,

명성황후는 우리나라의 격변기를 살아간 인물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청일전쟁이 벌어진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은 막대한 이익을 챙기려 했다.

 

하지만 여기에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간섭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한다.

이것이 유명한 삼국간섭이며, 그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위도 흔들리게 된다.

 

이런 사태를 주시하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보다 훨씬 강하게 여겨지는 러시아와의 친분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즉 일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 한 것인데, 이는 당연히 일본에 불리한 것이었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일본 낭인들을 궁중에 잠입시켰다.

낭인들의 목적은 하나. 명성황후의 시해였다.

 

결국 명성황후는 처참하게 시해됐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옮겨져 소각됐다.

이것이,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인 을미사변이다.

 

명성황후 추모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를 가정에 비유해보면,

이웃집이 우리 집에 다짜고짜로 쳐들어와 어머니를 살해한 꼴이다.

그런데도 고종은 일본에게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분을 삭여야 했다.

 

 

만행에 가담한 미우라를 비롯한 48명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을미사변은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이었고, 의병 봉기의 계기가 된다.

 

명성황후는 시해된 후 일본측의 압력을 받은 고종에 의해 일시적으로 폐위되지만 같은 해에 고종에 의해 다시 복위됐고,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 능을 조성했다.

 

그리고 같은 해인 10월.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황후에 책봉, 추증됐다.

 

고종 황제.

이 글에서는 '명성 황후' 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정작 그녀 본인은 이런 칭호를 받지 못했다.

 

 

명성황후는 친일 급진개화파와 수구적 척사파, 일본 측으로부터 모두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러한 좋지 않은 평가는, 명성왕후의 정책 노선이 그만큼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는 반증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대원군에 의해 척결된 세도정치를 다시 불러들였다는 비판과, 외세를 이용하려 하여 국내에 일본의 침입을 촉진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다.

 

명성왕후에 대해,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들은 좋게 평가했다.

 

영국 왕립지리학회회원이기도 한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명성왕후를 '대화내용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눈부신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 으로 묘사했다.

 

어의였던 언더우드 여사도, 명성왕후는 우아하고 근엄했다고 표현했다.

 

이 두 사람은, 명성황후가 순수하면서도 뛰어난 기지와 매력을 지닌 분으로,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도 완벽한 귀부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는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으며, 시대를 추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 이라고 평가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영국의 여행가, 작가, 지리학자로서 세계 각지를 여행했으며, 흑인과 인디언들의 인권운동에 앞장섰다.

한국을 현지답사하며 체험을 기술한 여행기록문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을 남겼고,

그 책에서 명성황후를 높게 평가했다.

 

 

우리나라의 위인들을 조금만 살펴봐도, 남성에 비해 여성이 훨씬 적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여성 위인들을 대강 꼽아보자면,

유관순 열사, 신사임당, 명성황후, 신라의 세 명의 여왕 정도다.

 

이 가운데 정치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명성황후와 선덕여왕, 진덕여왕이라고 생각한다.

(유관순 열사는 정치적... 과는 거리가 좀 있다고 생각하고 신사임당은 정치와 관계가 없으며, 진성여왕은 실정을 반복했기에 업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조금 유치한 생각이지만,

이 세 사람 가운데

제일을 꼽아보자면 누가 제일일까?

 

외세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조선을 지키려 고심한 명성황후와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한 선덕여왕,

그리고 당나라와의 국교를 다져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진덕여왕.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제일을 꼽는다면 명성황후를 꼽고 싶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상승기의 신라를 물려받아 잘 건사한 것이지만

명성황후는 쇠퇴기의. 아니, 망하기 직전의 조선을 구하려다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외세에 의존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지만,

일본에 맞서 오랜 시간 버틴 끝에 스러진 명성황후는

결코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하다...

 

 

<명성황후의 연표>

1세 - 탄생하다.

8세 - 아버지 민치록이 죽어, 홀어머니와 함께 살다.

16세 - 흥선 대원군에 의해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다.

18세 - 궁인 이씨가 완화군을 낳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갈등이 시작되다.

23세 - 명성황후 측 인물인 최익현의 상소로, 흥선 대원군의 섭정이 종결되다.

26세 - 강화도 조약을 맺어 개화정책을 시행하다.

32세 - 임오군란이 일어나 여주로 피신하다. 청군을 개입시켜 정권을 되찾다.

34세 - 갑신정변이 일어나 민씨 일족 상당수가 살해당하다. 청군을 개입시켜 개화당을 붕괴시키고, 청 견제를 위해 러시아에 접근하다.

44세 -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삼국간섭으로 그다지 이득을 보지 못하다. 명성황후와 고종은 러시아와 친교를 강화하려고 시도하다.

45세 - 사망하다. 대한제국의 수립으로 황후에 책봉되다.」

출처 : 철조망 학교
글쓴이 : 201000255 허창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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