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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광종 - 500년 고려왕조의 기틀을 세운 왕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1:26

 

고려사에서 광종(光宗, 925~975, 재위 949~975)은 어떤 왕이었을까.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관복 제정 등 왕권 강화를 위해 그가 이룬 정책들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고 중요한 업적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재위 중반부터 시작된 공신과 왕실에 대한 피의 숙청 때문일 것이다. 고려 성종 대 이후 유학자들은 광종을 평가하는데 인색하였다. 당대의 유학자 최승로(崔承老)나 고려 말의 이제현, 그리고 도의(道義)를 중시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비친 광종은 참소(讒訴)를 좋아한 왕이었고 광기의 왕이었다.

 

 

피의 군주인가 수성의 군주인가

광종은 흔히 왕권강화를 위해 힘쓴 왕으로 잘 알려졌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호족의 힘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개국공신은 3,200명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개국공신들은 나라를 건국할 때는 한편이 되지만, 건국 이후에는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나라를 세운 왕에 이어서 공신들을 제거하여 왕실과 나라를 지키는 수성(守成)의 군주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광종은 고려왕조의 수성 군주였고, 이를 위해 피의 군주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949년 정종의 뒤를 이어 고려 제4대 왕이 된 광종은 태조의 3남(확실하지는 않다)으로 이름은 왕소이다. 3대 왕 정종의 친아우이며 태조의 세 번째 부인인 신명순성왕후 유씨 소생이다. 신명순성왕후는 충주를 대표하는 호족 유긍달의 딸로 태조의 부인들 가운데 가장 자식을 많이 낳은 왕후이다.

 

충주를 외가로 한 광종은 형인 정종보다 정치적 세력이 더 막강하였다. 그 배경에는 황주를 기반으로 한 대목왕후 황보씨의 탄탄한 후광이 있었다. 광종은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부인인 대목왕후 황보씨는 신정왕태후와 태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광종은 이복누이와 결혼하였지만, 이로 인해 막강한 호족세력을 얻었다. 또 다른 부인인 경화궁부인 임씨는 2대 왕 혜종의 맏딸로 광종에게는 조카가 된다. 광종은 동생 및 조카와 결혼한, 말하자면 왕실 족내혼을 한 첫 번째 왕자였다.

 

 

 

고려왕실의 족내혼은 사실 신라왕실의 족내혼 풍습과 같은 것으로 외척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족외혼과 달리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일면이 있었다. 실제로도 완벽한 족내혼을 통해 광종은 26년간의 치세기간 동안 외척세력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튼튼한 방어막을 가질 수 있었다.

 

즉위 무렵 광종은 25살의 혈기왕성한 젊은이였다. 혜종이나 정종보다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세력 또한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호족세력이었고,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혜종은 배다른 형제들에 의해 제거되었고, 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정종도 불과 4년 만에 세상을 등졌다. 서경 건설의 꿈을 이루고자 한 정종이었지만, 돌아온 것은 민초들의 원망이었다.

 

호방한 성격의 혜종, 겉으로는 강인하였다지만 벼락 치는 소리에 놀라 몸져눕는 유약한 정종과 달리 광종은 준수한 외모에 영리하고 부드러우면서 기회 포착력이 강했던 외유내강의 인물이었다. 호족을 비롯한 공신들을 제거하여 왕권과 고려의 기틀을 다질 피의 군주로서 광종은 최고의 적임자였다.

 

 

황제라 불린 군주

광종은 즉위와 함께 덕을 밝게 비춘다는 의미의 ‘광덕(光德)’이란 연호를 선포하였다. 연호는 군주가 자신의 치세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이름이다. 그러나 한국은 지정학적 위치로 중국 문화를 수용한 탓에 연호와 황제 칭호를 사용한 군주가 많지 않다. 고려의 경우 연호를 사용한 군주는 태조와 광종, 경종에 불과하고 조선은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처음으로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을 뿐이다.

 

연호를 사용하고 대내외에 황제국임을 선포한 광종은 자주적인 군주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과 왕권 강화라는 목적이 작용했을 것이다. 칭제건원은 광종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호족과의 전면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즉위 당시 25살에 불과했던 광종은 형제들과 공신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고 왕위를 차지했을 무렵에는 능숙한 정치가로 변모해 있었다.

 

 

 

공신과의 대충돌 -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의 실시

즉위 당시의 연호가 ‘광덕(光德)’이어서 그랬을까. 광종의 치세 초반은 피의 군주라는 호칭이 무색하리만큼 평화로웠다. 그러나 956년(광종 7년) 노비 해방에 가까운 이른바 ‘노비안검법’이 시행되면서 공신과의 정면충돌이 시작되었다. 노비안검법은 노비의 신분을 조사해서 전에 양민이었던 자를 해방하려는 가히 혁명적인 조처였다. 당시 귀족들이 소유한 사노비에는 전쟁 포로나 가난한 양민 출신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귀족들의 개인 소유 재산이었다. 광종은 노비를 풀어 주어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신장시키고자 했다. 광종이 노비를 안검하자 공신세력들의 불만은 엄청났다. 공신 세력을 대표하여 배우자인 대목황후가 그 처지를 대변하였지만, 광종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노비안검과 더불어 광종은 대륙의 후주(後周)와 유대를 강화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후주에서 956년(광종 7년)에 사신으로 설문우를 고려로 보냈는데, 이때 설문우를 따라 온 사람이 쌍기(雙冀)였다. 설문우를 따라온 쌍기는 그만 병을 얻어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서 치료를 받다가 광종을 대면하였다. 쌍기의 식견에 매료된 광종은 후주에 요청하여 그를 귀화시키고 관직을 내려주었다. 쌍기를 총애한 광종은 그를 한림학사로 승진시키고 문한(文翰)에 대한 직권을 맡겼다. 고려 조정은 쌍기의 고속 출세에 불만이 많았다.

 

서기 958년인 광종 9년, 쌍기는 과거제도의 시행을 건의했다. 혜종과 정종이 왕위계승 문제로 희생당한 것을 본 광종은 널리 재야의 젊은 지식인들을 모아 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한림학사 쌍기의 건의로 이루어진 과거제도는 노비안검법보다도 귀족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고려시대에 벼슬길에 오르는 방법은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공식적인 시험이 아닌 명성이나, 집안 배경이었다. 이에 반해 시(詩)·부(賦)·송(頌) 및 시무책을 시험하여 선발하는 과거제는 비록 권문세가의 자제가 아니더라도 관리가 될 수 있는 혁신적인 조처였다. 과거제도의 시행은 권력층의 개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고려는 공신시대가 종식되고 유교적 교양을 갖춘 문사들이 등장하는 문치주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권력구조의 개편, 이것은 광종이 꿈꾸던 왕권 신장의 발판이었다. 광종이 국내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후주 출신의 쌍기에게 과거제 선발을 맡긴 것도 따지고 보면, 새로운 사람들을 등용하여 종래의 권문세족들을 누르기 위해서였다. 쌍기는 과거 시험장에서 스스로 지공거(知貢擧 : 과거를 주관하는 직책)가 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였다. 광종은 위봉루(威鳳樓)에 친히 나가 합격자의 이름을 손수 발표했다. 과거 합격자들은 자연스레 왕을 위해 충성하는 친위세력이 되었다.

 

 

 

관복을 제정하여 위계질서를 바로잡다

광종의 혁신적인 조치는 계속되었다. 광종은 신하들의 예복 문제를 놓고 심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까지 예복이 따로 없었고, 심지어 임금보다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입궐하는 신하들도 있었다. 신하들은 주로 신라나 태봉 또는 후백제 시절의 예복을 그대로 본떠 입고 다녔다. 신라계의 호족들은 구 신라 관복을, 태봉계의 호족은 그들 나름의 관복을, 불도에 정진하는 신하는 가사를, 중국계 일부는 그들의 옛 복식대로 입고 입궐했다. 위계질서가 없으니, 왕권의 강화는 요원한 문제였다.

 

광종은 과거를 실시한 2년 뒤에 백관들의 예복을 네 가지로 정했다. 보라색·붉은색·연두색·자주색 소매 옷으로 정하고 등급에 따라 관복을 입도록 했다. 관복이 제정된 것은 고려가 통일되고 42년이 지나서였다. 과거제도를 통해 왕권이 강화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전에 관복을 제정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은 호족들의 반발이 거세어서였다. 과거를 실시함으로써 비로소 호족세력이 꺾이고 왕권 강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과거제 실시의 여파는 이렇듯 컸다. 광종은 말을 듣지 않는 호족들을 모조리 감옥에 가둬버릴 정도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고려 말기의 지식인 이제현은 광종이 쌍기를 등용하여 개혁정책을 추진한 것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했다.

 

“광종이 쌍기를 등용한 것을 옛 글대로 현인을 발탁함에 제한을 두지 않은 것이라 평가할 수 있을까. 쌍기가 인품이 있었다면 왕이 참소를 믿어 형벌을 남발하는 것을 왜 막지 못했는가.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은 일은 광종이 본래 문(文)을 써서 풍속을 변화시킬 뜻이 있는 것을 쌍기가 받들어 이루었으니 도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 화려한 글을 먼저 주장했으므로 후세에 와서 그 폐단을 감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광종 시대에 국정을 걱정한 최승로는 광종의 치적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으면서 쌍기의 등용을 문제 삼기도 했다.

 

광종은 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 및 과거급제자 출신과 함께 신라계 인물들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삼았다. 광종이 신라계를 중용한 데는 자신의 출신배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광종의 외조부인 유긍달은 신라 출신으로 알려졌으며 자신의 누이인 낙랑공주는 경순왕 김부에게 출가했다. 게다가 경순왕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으니 광종은 신라계의 외조부와 매부, 며느리를 각각 둔 것이다. 광종 대에 개혁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신라계는 이후 성종 대를 거치면서 고려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밖에 광종은 개경을 황도로 삼고 서경을 서도로 삼는 조치도 내렸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 작업들은 왕으로서의 자부심을 대내외에 나타내는 것이었고 뒤이어 일어날 대대적인 숙청작업의 신호탄이었다.

 

 

공포정치가 시작되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의 시행 그리고 관복의 제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개혁작업만을 두고 보면, 광종은 성군 중의 성군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특권을 박탈당한 공신세력들의 반발과 이어진 대대적인 숙청작업은 후고구려의 궁예를 연상케 했다. 공신들에 대한 숙청작업은 960년(광종 11년)에 발생한 참소사건에서 시작하였다. 사태의 발단은 평농서사 권신의 참소로부터 비롯되었다. 일개 하위직에 있었던 권신이 공신인 준홍과 왕동 등을 모반죄로 고발한 것이다. 공신세력을 대표하는 준홍 등이 반기를 들었다는 것은 광종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광종은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광종의 피의 숙청은 급기야 왕실 내부에까지 번졌다. 혜종과 정종의 외아들까지 비명에 죽어나갔고, 말년에는 부인인 대목왕후와 자신의 외아들인 경종마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본 광종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치적 적대세력의 반항도 만만치 않음을 느낀 광종은 자신을 지지하고 후원해주는 보다 광범위한 세력기반을 만들어야 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963년, 왕권을 지지하는 화엄종 계열의 귀법사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를 설치하여 각종 법회와 재회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펴나갔다. 귀법사의 승려 균여와 탄문 등을 통하여 호족세력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들을 끌어들이고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세력을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종의 공포정치는 여러 가지 폐단도 낳았다. 이 때부터 참소와 무고가 난무하고 심지어는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고, 아들이 아비를 참소하는 등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광종의 대숙청은 960년에서 975년 광종이 죽기 직전까지 이어졌고 이 때문에 감옥이 턱없이 모자라고 죄 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꼬리를 물었다.

 

광종은 양면성을 가진 군주였다. 공신세력을 축출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 고려왕조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업적을 세운 군주이면서 병적으로 숙청작업에 몰두한 피의 군주이기도 하였다. 취약한 왕권을 가진 혜종과 정종이 비참하게 몰락한 과정을 지켜본 광종으로서는 두 형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성희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글쓴이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이미지 연합뉴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인물사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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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네이버

출처 : 최철상의 역사교실
글쓴이 : 미스터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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