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왕오천축국전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2:07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왕오천축국전

우리나라 기행문학의 효시, 노정기와 서정시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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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한국문학사 최초의 문헌작품 『왕오천축국전』

혜초() - 혜초()라고도 적는다 - 의 『왕오천축국전()』은 완전한 문헌 형태로 남은 가장 오래된 여행기다. 여행을 테마로 하였다는 사실, 시와 문을 함께 엮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위대한 여행기는 신라시대의 문인 최치원(857∼?) 이 당나라에서 활동한 시기보다 무려 110년 이전에 작성되었다. 곧, 신라에서 당나라로 들어가 밀교()를 공부한 혜초는 다시 천축국이라고 알려진 인도를 여행하고 이 위대한 기행문학을 낳았다. 권자() 형태로 된 필사본의 잔권 1권이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여행기가 존재하기에 한국 문학의 역사는 문헌상 8세기 이전으로 소급된다. 또한 그 속에 삽입된 서정적인 한시들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매우 이른 시기에 한자와 한문을 받아들여 자신의 생활감정과 사상을 동아시아 보편문학의 형태로 표출할 수 있었음을 분명하게 증명해준다.
그런데 이 여행기에 대해서 한국학 연구자들이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 여행기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aul Pelliot)가 1905년에 중국 간쑤성() 둔황()에서 권자 형태로 발견하였을 때, 겉장과 앞부분이 훼손되어 있어서 제명이나 저자명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펠리오는 당나라 승려 혜림()이 작성한 『일체경음의()』 100권 - 이 책의 초고는 817년에 완성되었다 - 의 뒤에 『왕오천축국전』 3권의 음의의해() 84조를 부기한 것이 있음을 알았으므로, 1908년에 그것을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라고 판정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1915년에 이르러 일본의 다카구스 준지로()는 당대 밀교 최성기의 문헌인 원조()의 『대종조증사공대판정광지삼장화상표제집()』1) 속의 사료를 이용하여 이 여행기의 저자 혜초가 신라 출신이며, 유년기에 당나라로 들어가 남천축 출신으로 밀교의 시조였던 금강지()2)의 제자로 있으면서 밀교의 진흥에 활약하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의 현존본은 잔본이다. 글자는 6천여 자 남짓이다. 어떤 학자는 현전본은 절략본이고 장편의 원본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본 학자 다카다 도키오()는 현전본의 한문을 검토한 결과 그 어법이 여러 면에서 한국한문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음을 밝혀내고, 현전본이 곧 8세기에 혜초가 필사한 원본이라고 주장하였다. 펠리오의 9세기 전사본설을 부정한 것이다. 이 현전본에는 결락자가 160여 개나 있고, 107개 글자는 이론이 분분하다. 정밀한 주석이 앞으로도 필요한 실정이다.
『왕오천축국전』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첫째, 주 활동 무대가 우리 강역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작품을 한국 문학사 속에서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 둘째, 우리 연구자들은 한국의 고대 문학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텍스트 교감학과 문체비평론 등의 방법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한국문학사 최초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의 기록은 노정기의 형태로 되어 있어서 서술이 간단하다. 짧은 글로 40여 개 지역의 견문과 전문을 개괄하였으므로, 내용이 소략할 수밖에 없다. 지명·국명 등이 없는 부분도 있고, 언어·풍습·정치·산물에 대해서도 간단한 기술밖에 없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거의 유일한 기록으로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당시 혜초 이외에도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난 승려가 적지 않았다. 6세기 무렵 백제의 겸익()은 배로 인도에 가서 율종()을 배웠다. 7세기 초 신라승 아리야발마(),혜업(), 현조(), 현각() 등은 당나라를 거쳐 인도로 가서 거기서 세상을 떴다. 또한 1215년에 고려 승려 각훈()이 기록한 『해동고승전()』에는 인도에 간 승려들의 이야기가 많다. 그들도 여행기를 적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 혜초의 여행기 이외에는 전하지 않는다.
혜초는 신라 성덕왕() 때인 704년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어느 지방 출신인지, 어떻게 불교에 귀의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723년, 20세 때 당나라 광주()에 도착한 그는 남천축 출신 승려 금강지의 제자가 되었다. 금강지는 그의 제자 불공()3)과 함께 실론 - 현재의 스리랑카 - 과 수마트라를 거쳐 719년에 중국 광주에 도착해 있었다. 혜초는 금강지의 권유로 723년에 배를 타고 광주에서 인도로 떠났다. 그는 일단 수마트라 섬과 그 서북부의 파로(Breueh)을 거쳐 동천축 - 현재의 콜카타 지방 - 에 상륙하였다. 그 뒤 약 4년 동안 인도와 서역의 여러 지방을 여행하고, 727년 11월 상순에 당시 안서도호부가 있던 구자() - 즉, 현재의 중국 신강성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쿠차 - 에 이르렀다.
천축이란 중국에서 인도를 가리키던 이름으로, 산스크리트어인 신도(Shindo), 즉 인더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한자로는 '신독()'이라 적는데, 우리 발음으로는 연독이라 읽는 것이 관례다. 동천축이라고 표기한 콜카타 지방, 중천축이라 한 룸비니 일대, 남천축이라 한 테카탄 고원, 서천축이라 한 봄베이 일대, 북천축이라 한 차란타라의 다섯 지방을 오천축이라 하였다. 혜초는 인도의 이 다섯 지방을 실제로 다 돌아보지는 않았으며, 특히 남천축에는 전혀 들어가지 못했다.
현존본 『왕오천축국전』은 폐사리국 - 바이샬리(Vai??l?) - 의 풍습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한다. 혜초는 인도 동북 해안에 상륙한 뒤 폐사리국 부근을 거쳐, 한 달 만에 중천국의 석가 열반처 쿠시나국 - 쿠시나가라(ku?inagara) - 에 이르렀다. 그는 쿠시나국에서 다비장()과 열반사() 등을 보았고 다시 남쪽으로 향해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어 삼·칠일()에 다섯 비구를 제도했다는 녹야원()에 이르렀다. 거기서 동쪽 라자그리하로 가서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를 참배하고 『법화경』의 설법지인 영취산()을 돌아본 다음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에 이르렀다. 이어 중천축국의 사대영탑()과 룸비니를 방문하고 서천축국·북천축국을 거쳐 지금의 파키스탄 남부와 간다라문화 중심지, 카슈미르 지방 등을 답사하였다.

오랜 옛날부터 동서양의 통행로가 되어왔던 실크로드의 한 풍경.

오랜 옛날부터 동서양의 통행로가 되어왔던 실크로드의 한 풍경.

그 뒤 혜초는 이른바 실크로드를 따라 가다가 동·서양 교통의 중심지였던 토화라(, Tokhara)에 이르렀다. 그는 토화라의 서쪽에 파사국() - 페르시아(Persia) - 과 대식국() - 사라센(Saracen) - 이 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혜초는 실제로 대식국까지 갔다고도 한다. 그 후 파미르고원을 넘어 727년 11월 상순에 쿠차에 이르게 되었다. 『왕오천축국전』에서는 호탄 - 우전국(?) - 을 언급하였으나, 거리로 볼 때 그곳으로 되돌아갔을 리 없다. 그 다음, 구차에서 동쪽으로 언기국() - 카라샤르(Kharashar) - 에 이르러 기록은 끝난다.

산문과 시의 직조 방식

『왕오천축국전』은 노정을 한문의 산문으로 적었다. 직접 경유한 곳은 '종()-지명', '방향-행()', '경()-숫자-일()[월]', '지()-지명'의 형식으로 적었다.

우종차도란달라국(?), 서행(西), 경일월(), 지일사탁국(?).
(다시 사란달라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서 탁사국[원문의 사탁국은 탁사국의 오기로 본다]에 이르렀다.)

그 다음에는 그곳의 자연지리 및 인문지리와 풍습, 불교의 성황 정도를 기록하였다. 서술문은 4언체를 중심으로 정돈하려 하였고, 어구의 중복을 꺼리지 않았다. 요컨대 충분히 정련한 문체가 아니다. 탁사국(원문의 사타국)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언음초별(), 대분상사(). 의()[저()]인풍(), 토지소출(), 절기한난(), 여북천상사(), 역족사족승(), 대소승구행(). 왕급수령백성등(), 대경신삼보().
(언어만 조금 다르고, 다른 것은 [사란달라국과] 대체로 비슷하다. 의복과 풍속, 풍토와 소출, 절기와 기후 등이 북천축과 비슷하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왕과 수령 및 백성들은 삼보를 크게 경신한다.)

짧은 글 속에 '상사()'라는 어휘를 중복하였고, "절도 많고 승려도 많다"를 정격 한문과는 거리가 있는 '족사족승()'으로 표현하였다.
『왕오천축국전』에는 다섯 수의 한시가 들어 있는데, 그 형식이 완정할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3수는 매우 서정적이다. 그 중에서 혜초가 인도에 도착한 뒤 얼마 되지 않아 파라나사국()에 이르렀을 때, 구도 여행의 바람이 충족된 것을 기뻐하여 지은 시를 살펴보자.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 않거늘
어찌 녹야원(鹿)을 멀다 하랴.
다만 험준한 길을 시름할 뿐이요
사나운 바람이야 염려하지 않는다.
여덟 탑을 보기는 진실로 어렵구나
오랜 세월 겪으며 어지러이 타 버렸으니.
어쩌다 그 사람은 원만(滿)하였던가
직접 눈으로 오늘에 보겠네.4)

위에서 '여덟 탑'이라고 한 것은 여래탑·보살탑·연각탑·아라한탑·아나함탑·사다함탑·수다원탑·전륜성왕탑 등으로 팔종탑()이라고도 한다. 여덟 성인이 입멸한 뒤에 각각 탑을 세웠으므로 이러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당시 여덟 탑은 오랜 세월 동안 타 버리고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여덟 탑이 없더라도 녹야원은 이제 곧 가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원만(滿)은 신만성불(滿)의 뜻이다. 성불한 분들이 사적을 이제라도 목도하게 되었다는 기쁨을 토로한 것이다.
그 뒤 남천축국에 이르렀을 때 혜초는 객수()를 느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바람 타고 돌아가네.
편지 봉해 그 편에 부치지만
바람 급해서 화답이 돌아오지 않네.
우리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이곳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
해 아래 남방에는 기러기 없으니,
누가 나를 위해 계림으로 전해 주랴.5)

신두고라국()에서 지은 시는 구도의 불안감을 담아내어, 전체 시 가운데 가장 심각한 주제를 담고 있다. 우선 시를 짓게 된 동기에 대해 혜초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산 중에는 절이 또 하나 있는데, 이름은 나게라타나() - 나가라다나(Nagaradhana) - 라고 한다. 여기에 중국인 승려 한 분이 있었는데,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그 절의 대덕이 말하기를, 그 승려는 중천축에서 왔으며 삼장()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환히 습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그만 천화()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 상심하여, 사운()의 시를 적어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오언시다.
고향의 등불은 주인을 잃고
객지의 보배나무는 꺾이고 말았구나.
신령스런 그대 영혼은 어디로 갔는가
옥 같은 용모가 재가 되다니.
생각하면 슬픈 마음 간절하거니,
그대 소원 못 이룸이 못내 섧구나.
누가 고향 가는 길을 알리오
돌아가는 흰 구름만 부질없이 바라보네.6)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의 본질, 존재를 회복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당시()의 고향상실 주제와 매우 닮아 있다. 구도의 길을 다 나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함께 담아, 고도로 철학적이다.
신라시대의 불교시는 원효(, 617∼686)의 『대승기신론소()』, 의상(, 625∼702)의 『화엄일승법계도()』, 태현() - 경덕왕 재위기인 742년∼765년경에 활동했던 승려 - 의 『성유식논학기()』·『보살계본종요()』 등의 저술 끝에 붙인 게송(), 사복()의 게송,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삽입시로 이어진다. 그 가운데서도 혜초의 시들은 구도()에 따르는 불안감과 향수의 절절함을 담아내어 서정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서 다섯 수가 모두 오언율시다. 오언율시는 칠언율시와 달리 질박한 풍격을 지니면서도 내면의 생각을 곡절 있게 드러내는데 유효하다. 아마도 생각과 서정을 곡진하게 펼쳐 보이기 위해서 시 양식을 선택한 듯하다.
더구나 혜초의 시는 공간적 배경이 광대하여, 그 이후 한국 한시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풍격이다. 토화라국에서 동쪽으로 호밀() - 와칸(Wakhan) - 왕의 거성에 이르렀을 대 이역으로 들어가는 중국 사신을 만나, 혜초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그대는 서쪽 이역이 멀다고 한탄하고
나는 동쪽 길이 멀다고 탄식하네.
길은 험하고 눈 덮인 산은 굉장한데
험한 계곡에는 도적이 길 앞을 막네.
새도 날다가 아스라한 산에 놀라고
사람은 기우뚱한 다리를 난감해 하네.
평생 눈물을 훔친 적 없는 나건만
오늘은 하염없이 눈물을 뿌린다오.7)

토화라에 눈이 온 겨울 날, 혜초는 파밀 고원을 쳐다보면서 구도 행로의 험난함을 되새겼다.

차디찬 눈은 얼음에 들러붙고
찬바람은 땅을 가르네.
큰 바다는 얼어서 단()을 흙손질한 듯하고
강물은 벼랑에 덮쳐 갉아먹는다.
용문()에는 폭포가 끊기고
우물 테두리는 뱀이 똬리 튼 듯하구나.
불을 벗삼아 계단을 오르며 노래한다마는
어찌 저 파밀을 넘을 수 있으랴.8)

종교사의 문제

혜초는 밀교 승려였다. 이 사실은 신라 불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밀교는 범어로 바즈라야나(Vajray?na)라 하는데, 현교()에 대응되는 명칭으로서 비밀불교 또는 진언불교라고도 한다. 인도 대승불교의 말기인 7세기 후반에 융성한 유파이다. 대승불교의 『반야경()』과 『화엄경()』, 중관파()·유가행파() 등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뿌리는 멀리 베다 시대에 만트라(mantra) ― 즉, 진언() ― 를 외고 양재초복()을 하였던 데에 있다. 원시불교의 교단에서는 치병()·연명()·초복 등의 주술이나 밀법을 엄금하였지만 그 뒤에는 그러한 것들을 인정하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진언밀교는 대일여래()가 비밀법을 금강보살에게 전수하고 그것이 용맹()·용지()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인도 밀교는 힌두교의 성력파() 등의 설을 도입한 좌도밀교(), 즉 탄트라 불교가 되어 13세기 초까지 전하다가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괴멸하였다. 또한 8세기 말에는 파드마삼바바에 의해 티베트에 전해져, 민족종교인 브라만교와 합하여 라마교로 되었다. 라마교는 1042년 아티샤의 개혁 이후 몽골과 중국 동북지방으로 확대되었다.

돈황 막고굴(莫高窟).

돈황 막고굴().중국 감숙성 돈황현 명사산에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다라니와 주술적 요소를 내포한 밀교 경전이 동진시대에 일부 번역되어 남북조()와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시대 초기까지 단속적으로 전해졌다. 그러다가 8세기 초엽부터 중엽에 걸쳐 선무외()9)와 금강지()가 차례로 당나라에 찾아가, 선무외가 『대일경()』을 한역하고 금강지가 『금강정경()』을 번역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해졌다. 그 뒤 불공()이 스리랑카에 가서 밀교를 배우고 80여 부의 밀교경전을 가져와 그 중 여러 경전을 번역하여 밀교를 대성시켰다. 그러다가 당나라 말엽에 이르러 밀교는 쇠미해졌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는 헤이안()시대에 밀교가 전래되었다. 특히 공해()는 진언종을 개창하였으며, 이후 일본의 불교는 밀교가 상당히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천축국의 구도 여행을 마치고 혜초는 중국의 장안에 돌아왔다. 그 뒤 혜초는 신라에는 돌아오지 않은 듯하며 오로지 중국에서 밀교의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곧, 혜초는 733년 정월 1일부터 약 8년 동안 금강지와 함께 천복사()에서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10)이라는 밀교 경전을 연구하였다. 740년 정월에는 금강지의 지도 아래서 이 경전의 한역을 시작하였으나, 741년 중추에 금강지가 입적하자 작업을 중단하였다. 773년 10월부터는 장안 대흥선사에서 금강지의 제자 불공()으로부터 『대교왕경』의 강의를 받았다. 774년 5월 7일에 불공이 입적하자 황제의 부조가 내렸는데, 혜초는 동료들과 함께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부조에 감사하고 스승이 세운 사원을 존속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혜초가 쓴 그 표문에 따르면 그는 불공의 여섯 제자 중 둘째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혜초는 대흥선사 등 밀교 사원에서 혜랑()과 함께 관정도량을 개최하였고, 대종() 때는 「하옥녀담기우표()」를 지어 올렸다. 780년 4월 15일에 산서성(西) 오대산() 건원보리사()에 들어가 5월 5일까지 20일간 『대교왕경』의 구 한역본을 얻어 다시 필수() ― 경전 번역의 역어를 전수하여 필기하는 일 ― 하였다. 그리고 그해 그곳에서 열반하였다.
동아시아의 종교사와 비교할 때 혜초의 밀교 연구는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반도에 밀교가 전파되고 독자적으로 이해된 과정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종래 신라 불교에 대해서는 말기에 발흥한 선종의 역사적 의의를 논하는 연구가 활발하였으나, 밀교의 영향에 대해서는 깊은 연구가 없었다. 하지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모두 실려 있는 왕거인()의 분원() 설화에 보면, 진성여왕 2년(888년) 누군가 다라니()의 은어인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하( )”라는 구절을 노상에 걸어 두었다고 하였다. 중앙귀족의 부패와 진성여왕의 실정을 풍자하였다는 이 다라니 은어의 작가로 대야주()의 왕거인이 의심을 받아서 옥에 갇히게 되었다. 왕거인의 시를 살펴보면, 그는 천인상관설을 믿은 유학자인 듯한데 어째서 그가 다라니 은어의 작자로 지목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다라니 은어의 존재는 민중의 참요()와 밀교의 주술적 언어가 결합된 양식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가 있다. 혜초와 그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의 존재는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밀교가 지녔던 민중종교적 위상을 재고하게 만든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왕오천축국전』은 한국 문학사에서 완결된 도서의 형태로 전하는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혜초는 신라의 승려로서 당나라에 들어가 밀교를 공부하고, 구도의 한 방편으로 천축국을 여행하였다. 그 여행의 과정을 노정기 식으로 적은 것이 이 『왕오천축국전』이다. 그런데 혜초는 천축 여행 뒤 당나라로 가서 밀교의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왕오천축국전』은 1905년에 둔황 석실에서 잔권의 형태로 발견되기까지 우리 문학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혜초의 문학 활동은 국내의 문학사와 실질적으로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우리 문학사의 처음 부분을 장식하는 작품으로서 높이 평가하여야 할 근거는 무엇인가?

2. 『왕오천축국전』은 노정기를 간단히 적은 책인데, 그 중간에는 개인의 심경을 노래한 오언율시 다섯 수가 들어 있다. 노정기와 한시를 함께 직조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고려시대 중엽까지의 기행문학은 단행의 형태로 전하는 것이 없으므로 잘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말엽부터는 기행문학이 단행되었다가 문집 속에 수록된 것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기행문학 가운데서도 산수유기()가 발달하게 된다. 고려시대 말엽과 조선시대의 기행문학 혹은 산수유기 가운데는 뒷날 문집에 수록될 때 시와 산문이 분리되어 별도의 부류 속에 놓인 예들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대체로 보아 종래의 기행문학 및 산수유기는 시와 산문을 직조하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바로 그러한 직조 방식의 조기() 형태로서 부각시킬 필요가 있지 않은가? 또 『왕오천축국전』에서 시와 산문 노정기는 각각 어떤 기능을 담당하였는가? 그 방식은 후대의 기행문학이나 산수유기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3. 혜초는 밀교 승려로서 당나라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의 스승 금강지()와 불공()은 당나라사회에 밀교를 성행하게 만든 주요한 인물들이다. 특히 그들은 『금강정경()』을 번역하여 유통시킴으로써 선무외()와는 다른 유파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금강지와 불공의 밀교 경전 번역 사업에는 혜초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및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혜초의 위치에 대해서는 그리 주목하고 있지 않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단순히 우리나라 문학사의 초기 작품으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사상사에서 일정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서 재해석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4. 『왕오천축국전』은 잔권인데다가 결락되거나 이설이 있는 글자들이 있어서 아직 완전한 주석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그 한문으로 된 문체는 중국의 문체와는 달리 우리나라 특유의 어법이나 표현들이 들어 있다고 한다. 또한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지명들에 대한 비정()도 여전히 미흡한 상태다. 앞으로 『왕초천축국전』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문문체론과 교감학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입하여야 한다고 보는가?

추천할 만한 텍스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혜초 지음, 정수일 옮김, 학고재, 2004

각주

  • 1) 이 책은 원조(圓照)가 당나라 정원(貞元) 16년(800) 무렵에 혜초와 불공(不空) 등 십 여 명의 승려들이 쓴 표제(表制)·사표(謝表)·답비제문(答批祭文)·비문·유서 등 180여 수를 집록한 것으로 모두 6권이다.
  • 2) 금강지(671~741)의 범어 이름은 봐지라보디(Vajrabodhi), 법명은 삼장(三藏)이다. 용지(龍智) 곧 나가보디 보살로부터 밀교를 전수받아 해로로 중국에 들어와 주로 『금강정경(金剛頂經)』 계통의 밀교를 선포하는 데 공적을 세웠다.
  • 3) 불공(705~774)은 인도의 바라몬 족의 혈통을 이어, 서역에서 태어났다. 범어로는 아모가봐지라(Amoghavajra)라고 한다. 숙부에게 이끌려 젊어서 장안에 들어가, 금강지의 제자가 되었다. 금강지가 죽은 뒤, 인도로 가서 수년간에 걸쳐 『금강정경』 계통의 밀교를 배운 다음, 수많은 경전을 가지고 746년에 장안으로 되돌아왔다. 불공은 수많은 밀교 경전을 번역하고 당나라 조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밀교를 선포하여, 밀교가 중국사회에서 비로소 인정받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당나라 현종이 도교를 더욱 존중하자, 밀교를 더 습득하려고 다시 인도로 도항하려고 하다가, 병에 걸려 입적하고 말았다.
  • 4) 이 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不慮菩提遠 / 焉將鹿苑遙 / 只愁懸路險 / 非意業風飄 / 八塔誠難見 / 參差經劫燒 / 何其人圓滿 / 目睹在今朝.
  • 5) 月夜瞻鄕路 / 浮雲颯颯歸 / 緘書?去便 / 風急不聽廻 / 我國天岸北 / 他邦地角西 / 日南無有? / 誰爲向林飛.
  • 6) 故里燈無主 / 他方寶樹? / 神靈去何處 / 玉?[貌]已成灰 / 憶想哀情切 / 悲君願不隨 / 孰知鄕國路 / 空見白雲歸.
  • 7) 君恨西蕃遠 / 余嗟東路長 / 道荒宏雪嶺 / 險澗賊途倡 / 鳥飛驚?? / 人去[難]偏樑 / 平生不?淚 / 今日灑千行.
  • 8) 冷雪牽氷合 / 寒風擘地[裂] / 巨海凍?壇 / 江河凌崖? / 龍門絶[瀑]布 / 井口盤?結 / 伴火上[?]歌 / 焉能度播密.
  • 9) 선무외(善無畏)는 중천축에서 태어나 8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장안에 들어가 경전을 번역하였다. 또한 『대일경소(大日經疏)』를 제작하여 『대일경』 계통의 밀교를 중심으로 교학을 일으켰다.
  • 10) 이 책은 모두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천비천비 천수실리 보살의 비밀삼마지(秘密三摩地)의 법을 설한 것이다. 무생(無生)·무동(無動)·평등(平等)·정토(淨土)·해탈(解脫)의 다섯 문으로 되어 있다. 현재 한역본은 불공(不空)이 번역한 것이라고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 - 우리나라 기행문학의 효시, 노정기와 서정시의 만남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 9. 18., 휴머니스트)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2033&cid=41708&categoryId=41736

출처 : 력사를 찾아서
글쓴이 : 야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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