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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청백리 고불 맹사성의 생애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2:01

           청백리 고불 맹사성 

 

 

 


I. 고불 맹사성의 출생과 성장과정

 

1. 맹자님 54대 후손 고불

 

고불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9년(1360년) 7월 17일에 송도(지금의 개성)에서 맹희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릴적 자는 자명이요, 이름은 사성이며, 호는 고불이다.

우리나라 성씨의 대부분이 중국에 그 연원을 가지고 있듯이 신창맹씨도 맹자(B.C372~B.C.289)의 후예다.


맹씨가 중국에서 언제 우리나라로 건너왔느냐를 간단히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즉, 맹자님의 38대손 맹방립의 둘째아들 맹승훈이 당나라 희종조 한림원 오경박사로 공자님의 상을 모시고 유교철학을 전파하고자 신라 진성여왕 2년(888년)에 들어왔는데, 그후 경명왕이 여러번 초청하여 정부에 들어와 일해줄 것을 권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오직 신라인에게 유교철학을 전파했을 뿐이라는 기록이 있다.
위와 같이 맹자님의 39대 후손인 맹승훈이 한국땅에 건너와 여러 대를 거치면서 맹자님의 54대로 태어난 분이 곧 맹사성이다.

 

2. 고불의 출생과 그 동기

고불의 어머니는 흥양조씨다. 송도와 가까운 농촌에서 살았는데, 고불의 아버지 맹희도와는 일찍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과거준비 때문에 송도시내 서당에서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은 했어도 과거에급제할 때 까지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혼자 살아야 했다. 남편은 진사초시와 복시는 합격을 했으나, 정작 출세의 관문인 문과(대과)에는 급제를 못하고, 동갑내기인 정몽주는 1359년(공민왕 8년) 문과에 급제했다.그래서 1년을 더 공부하게 되었는데, 이때 부인 흥양조씨가 "뜨거운 태양을 삼키는 "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 내용이 하도 이상하여 시어머니인 능성구씨에게 꿈이야기를 하였고, 시어머니는 남편인 맹유에게 며느리의 꿈 이야기를 전하였다. 당시 이부상서 자리에 있던 맹유는 며느리의 꿈이야기를 듣고 생각하는 바가 있어 급히하인을 시켜 아들의 귀가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고불이 잉태하게 되었고 남편 맹희도는 정몽주보다 한 해 늦게 문과에 급제 하였는데, 그 해가 1360년(공민왕 9년) 바로 고불이 태어난 해이다. 결국 1360년은 과거에 급제하고 득남하고 이중으로 맹씨가문에 경사가 난 것이다.

 

3. 고불의 수업과정

 

1) 최영장군과의 인연

고불과 최영장군은 한 마을에 살았다. 최영장군의 집앞에는 배나무가 몇그루 있었다. 고불이 다섯 살 때의 일인데,최영장군은 아직도 햇볕이 따가운 초가을 날씨에 곤히 낮잠을 자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용이 짙은 안개속에 배나무 꼭대기에서 용트림을 하며 승천하려고 하는 꿈을 꾸어 깜짝 놀라 깨어보니 고불 맹사성이 집앞 배나무에올라가 배를 따고 있었다.


"거 배를 따고 있는게 뉘집 아들인고"하고 점잖게 물으니 그 아이는 대답하기를 "아버지가 맹 희자 도자입니다"하고 겸연쩍어 하면서 배나무에서 내려와 정중히 절을 하고 가는 것이 아닌가.
최영장군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아버지가 맹희도라면 5년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온 동네가 떠들썩했던 바로그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꿈에 배나무에서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 아이가 정중히 사과하는 모습 또한 예사 아이가 아니어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집 아래쪽에 사는 이부상서 맹 유(고불의 조부)의집을 방문하여 꿈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뒤에 고불은 최영장군의 손녀딸과 결혼하게 되었다.

 

2) 고불의 수업과정

고불이 태어난 해부터 고려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원나라 홍건적이 계속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여 소란을피우고, 일본의 침입 또한 잦아 국내외 정세가 복잡다단했던 때였다. 그 당시는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의 일대 전환기였다고 볼 수 있다. 중국대륙에서는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었던 만큼 원과 명의 신구세력에 대한 고려의 반응에 따른 여파로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이 미쳤으며, 중국대륙의 동난의 여파인 홍건적의 침입 등으로 인하여고려는 실로 복잡다단한 사태가 계속 발생하였으며, 이에 덧붙여 왜구의 침해 역시 오랜동안 혹심의 도를 가했던때였고, 국내적으로도 오랜동안 누적 되어오던 정치의 부패와 전제 및 세제등의 문란, 관리의 기강의 해이,권신들의 세력다툼 등의 쇠인으로 고려왕조를 위태롭게 하였다. 더욱이 공민왕은 1365년(공민왕14년)왕후인 노국공주가 죽자 실의의 도가 지나쳐 나라일에는 관심이 없고, 왕후의 죽음만을 슬퍼하니 나라사정은 엉망이 되고만 것이다.

 

그리하여 요승 신돈에게 정치를 맡기었는데 그는 유능한 신하들을 모두 쫓아내어 크게 원망을 사게 되었다. 형세가 이렇게 되자 이부상서이던 고불의 조부 맹유도 이때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으나 고불의 아버지는 다행히 수문전 제학이었기에 정치와는 관계가 없어 쫓겨나는 것은 면하게 되었다. 더욱 불행한 것은 1369년(공민왕 18년) 11월 왕의 섭정을 맡고서부터 신돈의 섭정정치가 횡포와 사악한 행동으로 변신하여고려 왕조의 붕괴를 가중 시켰고 송도는 가무음곡과 주지육림의 도시로 변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크게 사게되었다. 고불은 양촌 권근(1352~1409년)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권근은 고불의 아버지와 선후배 관계로서 친형제나 다름없는 아주 절친한 관계다. 아버지의 후배 권근은 고불과 같은 수재를 처음 보았기에 스스로 스승이 되겠다고 자원을 했다.

 

고불은 겨우 5살 때에 한학의 초보인 천자문을 암송할 정도로 머리가 좋아서 하나를 배우면 열을 추리하는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이처럼 비상한 재능을 지닌 고불을 자진해서 가르쳐 보겠다고 한 권근은 어떠한 사람인가. 권근은 삼봉 정도전과 더불어 이성계를 도와 교육입국의 기초를 세우는데 공헌한 유학자이다.그는 성리 학자이면서도 시부사장의 대가이며 경학과 문학을 조화시킨 대 학자이고 교육사상가였다. 그의 교육사상의 수양덕목은 뭐니뭐니 해도 공. 근. 관. 신의 4가지 덕목인데 이 덕목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公 : 私가 없고 마음이 맑아 욕심이 없으니 이것이 정직이다.

勤 : 일에 게으름이 없고 부지런히 최선을 다하니 이것이 충실이다.

寬 : 까다롭지 않고 모두가 인후함이니 이것이 군자의 덕이요 선비의 덕이다.

信 : 거짓이 없고 성의로써 뜻을 지켜 스스로 변경하지 않으니 이것이 신의 이다.

 

이상 네 가지 덕목을 설정하고 교육적 인간성을 제시했다. 양촌은 교육의 목적을 인재양성에 두었다.
인재는 국가의 명맥이요 학문은 국가의 원기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마도 고불과 같은 머리좋은 제자를 스스로택한 것 같다. 따라서 권근의 입학도설은 교육방법의 원리가 구체화되어 있는 오늘날의 시청각교재의 구현이며, 이해하기 쉬운 실체교육의 근본이 된다고 본다. 고불은 생원 진사 초시 복시까지는 권근선생으로부터 수학하여 통과되었으나, 생원 진사시험 초시와 복시과정도 그리 순탄치 못했다. 그 이유는 고불이 공부하는 동안 조부가 신돈의 횡포로 이부상서에서 쫓겨났고, 아버지마저 수문전 제학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으니, 가정사정도 일시에 불행의 연속이었다. 엎친데 덮친다고 어머니마저 장기간의 투병끝에 고불이 10세때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그 긴투병과정에서 어린 고불이 효심이 지극하여 온갖 뒷바라지와 약을 얻기위하여 별별 고통을 다 경험한 사실은 뒤에 [고불의 효행]에서 언급하겠다.

 

흔히들 말하기를 문과(대과)보다 어렵다고 하는 진사 초시 복시는 고불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장기간의 어머니의 투병생활의 뒷바라지가 그렇고, 섭정 신돈의 무작정 횡포가 정부나 백성들의 불안심리를 더욱 부채질했고, 홍건적은 원나라의 명나라가 교체기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침입하여 백성들의 불안과 공포분위기는 극에 달한데다, 일본의 한국 침략은 계속되어 고려말 우리나라의 장래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가없었던 것이다.

 

나라가 이 지경이고 가정마저 조부의 이부상서 퇴출, 아버지의 수문전 제학에서의 퇴출 등 고불의수업에 큰 심리적 불안으로, 전념해야 할 학문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런 일들로 해서 고불은 25세에 뒤늦게 성균관에 입학하여 일년을 열심히 공부하여 전과목 조흘첩(照訖帖 : 일종의 과목 합격증서)을 따냈으니 가히 경적인 수업과정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이러한 실력으로 고불은 문과 전시에 장원급제의 영광을 안았다.그해가 1386년(우왕 12년)이며 고불이 27세때다.

 

 

II. 고불의 벼슬살이

 

1. 고불의 관력(官歷)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고불은 1386년(우왕 12년) 27세에 문과 전시에 장원급제하고, 곧바로 춘추관 검열로 벼슬길에 올라 1435년(세종 17년) 2월 1일 세종대왕에게 늙어서 더 이상 나라 일과 왕을 모실 수 없다고 간청하여 76세에 벼슬을 마감하였으니 장장 49년간 벼슬살이를 한 셈이다. 49년간이나 벼슬살이를 하였으니 그가 역임한 직종 또한 다양하였다.


처음 직종이 춘추관 검열(정 8품)이었으니 지금의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인 셈이다. 춘추관에 근무하려면 왕조실록을다뤄야 하는데, 실록의 편찬사업은 높은 학문과 다양한 지식이 요구되는 전문직이어서 문과에 장원급제한 인물이기에 적재가 적소로 발탁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1386년(우왕 12년) 춘추관 검열로 발탁되어 전의승기거사인 . 우헌납등 벼슬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나, 태조(이성계)가 1392년(공양왕 4년) 7월 조선을 창업하면서 맹씨가문은 큰 환란을 당해야 했다.

 

즉 고불은 이성계의 적인 최영장군의 손녀사위이고, 이부상서를 지낸 고불의 조부는 서두문동72현으로 순절하여 시신도 못거두고, 고불의 아버지 맹희도는 동두문동에 숨어 있다가 태조가 건국하자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을 하였다. 그 후 고불의 아버지와 친형제같이 우정이 두터웠던 정몽주마저 이성계일파에게 1392년 4월 송도 선죽교에서 격살당하였다. 그러니 이성계의 혁명과 그 당시 맹씨가문과는 견원지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정이 피의 숙청으로 얼룩지자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고불의 아버지는 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을 보고 최영장군의 빈집인 현재의 아산시 배방면 중리 300번지 행단(사적 109호)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독신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태조가 1394년 10월 한양으로 궁궐을 옮기고, 세상이 평온해지자 아들 고불을 불러 새정부에 나가 일하도록 권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최영장군의 집에 기거하는동안 멀리 송도를 우러러 보며 두문동에서 순절한 선친을 생각하고 쓸쓸히 일생을 그 집에서 혼자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금곡서원을 세워 후배양성을 낙으로 삼았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불은 이성계의 혁명과정 기간에는 벼슬을 할 수 없었다. 혁명이 끝나고 조선이 건국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외직인 수원판관을 거쳐 충남당진에 있는 면천현감이 되었다.

 

그 후 고불은 1396년 예조의랑이 되어 승승장구 진급을 거듭했다. 다음으로 고불은 1406년(태종 6년) 8월에 이조참의가되었다. 참의는 정 3품으로 당상관이며, 지금의 중앙관서 국장급이다. 1407년(태종 7년) 4월 18일 고불은 예문관 제학을겸하였다. 이날 문신(지금의 중앙관서의 과장급, 종 3품)들에게 친시를 실시했는데, 고불은 황희와 함께 대독관이었다.


1407년 7월 11일 세자 양녕대군의 혼사를 위해 납징사가되어 양녕대군의 처가에 예물을 보내는 행사에 참여했다.
1407년 9월 25일 세자 양녕대군으로 하여금 명나라 정조(正朝 : 설날)에 진표사로 갔는데, 고불은 시종관으로 따라갔다.
그 당시 고불은 예문관 제학을 겸하였다. 1407년 11월 9일 고불은 한성부윤이 되었다. 세자시강원 우부빈객(右副賓客 :세자의 스승) 이 되었다. 1408년 11월 7일 고불은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사헌부란 지금의 감사원과 검찰총장 같이 공무원을 규찰. 감사하는 기관으로 대사헌은 그 책임자이다. 그러나 지금의 감사원의 직무한계와는 달리 사헌부는 검찰권과 재판권까지도 가능했다.

 

 1408년(태종 8년) 12월 5일 고불은 헌부 대사헌이 되자마자 큰 일을 당했다. 즉 태종의 사위 부마 조대림을 취조한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조대림은 개국공신이며 영의정 조준의아들인데, 태종의 딸과 어린 나이에 결혼시켰다. 원래 자질이 좀 모자라는 편이어서 관노출신 목인해가 영리하여 호군이되었는데, 그의 아내는 곧 조대림의 집 여비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목인해는 부마 조대림의 집에 자주 드나들 게 되고, 조대림으로 하여금 큰공을 세워 태종의 신임을 받도록 음모를 꾸미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것이다. 즉 무고한 군인을 시켜 발병범궐(發兵犯闕)하는 모사를 꾸며 이를 조대림이 사전 발견 처결하여 공을 세우도록 음모를 꾸며 일을 저지르게 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사건을 사헌부에서 맡게되고, 사헌부에서는 조대림을 불러 사실을 확인하느라 문초를 했다.


부마 조대림이 목인해의 꼬임에 빠져 저지른 사건임이 백일하에 들어나자 사헌부로서는 법의 심판을 가할 수밖에 없는실정이었다. 즉 법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소신대로 사헌부의 직권으로 조대림을 처벌한 것이 태종의 노여움을 산 것이다. 즉 왕실을 가벼히 여기는 모독행위라는 것이고, 이 사건을 비약시켜 역적행위라고까지 규정짓고, 고불을 비롯하여 이 사건에 관련된 사헌부 직원 모두를 벌을 주게 되었는데, 특히 책임자인 고불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이 일이 이렇게 법률을 초월한 왕권침해 차원으로 급선회하자 고불의 스승이자 일등공신인 길창부원군 권근, 영의정 하륜, 좌의정 성석린, 영삼군사 조영무등이 대궐뜰에 나와 아뢰기를 "맹사성은 모반한 것도 아니며 무고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공사에 실수한 것으로, 극형을 당한다면 정리에 맞겠습니까?"하고 또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왕께 아뢰니 태종도 "인주가 혼자서만 나라를 다스릴 수 없고, 경들도 어찌 나를 불의에 빠뜨리고자 하겠는가? 경들의 말을 따르겠다. 경들도 왕실이 약해지지 않도록 도모하라" 하였다.

 

이렇게 해서 같은 달 12일 고불은 극형만은 면하고 장(杖) 1백대를 맞고 한주(충남 한산)에 있는 향교의 재복으로 유배됐다. 1409년(태종 9년) 8월 7일 중신을 잃을 뻔한 태종은 고불에게 직첩을 도로 주어 외직으로 전근시켰다. 그리고 동 9일에는 미두 20석을 하사 했으며, 1411년 태종 11년) 12월9일에는 맹사성, 유정현(대사헌) , 형조판서 이승상 등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1412년(태종 12년) 5월 3일 악보에 밝은 고불을 황해도 관찰사로 발령하였는데, 영의정 하륜이 상언하기를 "오직 고불만이 악보에 밝아서 오음을 잘 어룰리게 합니다.


지금 감사의 임명을 받아 황해도로 가게 되었는데 원컨데 머물러서 악공을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상언하니 태종은 대답하기를 "교대되기를 기다려 바야흐로 악곡을 가르치도록 허락하겠다."라고 하였다. 1416년(태종 16년) 9월 27일 예조판서가 되다.(지금의 문교부 장관) 1417년(태종 17년) 2월 12일 생원시를 관장하여 권채등 100명을 뽑았다. 1417년(태종 17년) 3월 16일 고불 등에게 문과 초시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8일 에는 경복궁 경회루아래에서 문 .무과 복시를 시행했다. 1417년(태종 17년) 4월 22일 고불이 부친의 병 때문에 사직하고자 하니 윤허하지 않고 시병하고 돌아 오라고 하다. 1417년(태종 17년) 6월 16일 고불을 호조판서(지금의 재무장관)로 임명하였다.


1417년(태종 17년) 12월 3일 고불을 충청도 관찰사로 전근 발령을 내리다. 이는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태종이 약까지 주며 아버지가 사는 충청도 온양쪽 가까이로 발령한 것이다. (이 항목은 뒤에 [고불의 효도]에서 자세히언급한다.) 1418년(태종 18년) 아버지가 작고하심. 1418년 6월 5일 공조판서가 됨. 공조는 지금의 상공부장관이다.
겸하여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이 되다. 세자면 양녕대군을 말함. 같은 해에 폐위되고 충녕대군 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1419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조판서는 지금의 내무부 겸 총무처 장관에 해당된다. 1419년 11월 10일 세종대왕은 맹사성에게 말하기를 "경이 관습도감제조가 되어 영인(음악을 맡아보는 관리)에게 새로 지은 사곡을 가르쳐서 율조에 합하게 하였으므로 부왕께서 기뻐하셨다"고 하였다. 1419년(세종 1년) 12월 7일 고불에게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하다.
1421년(세종 3년) 12월 7일 의정부 찬성사가 되다. 1424(세종 6년) 12월 4일 고불이 판좌군 도총제부사가 되다.


1425년(세종 7년) 고불은 명나라에 성절사로 가 있었다가 동년 7월 27일 돌아왔다. 1427년(세종 9년) 1월 25일 고불이우의정이 되었다. 이날 황희는 좌의정. 1427년 3월 14일 인정전에서 베푼 전시 문과에 독권관이 되었다. 1429년(세종 11년) 6월 24일 우의정 맹사성. 여천부원군 민여익. 찬성 권진등에게 궤장을 내리고 맹사성에게 교지를 내리기를 "기영의 구덕은 나라에서도 의지하여 튼튼하게 여기는 바이며, 임금의 예절로서 공경하는 바이다. 지난 옛날을 상고해 본다면 모두 이도리를 따랐던 것이다. 경은 겸공하고 온아한 미덕이 있어 조종을 두루 섬기며, 임직은 재상의 지위에 처하여 모든 관원을 모범하여 거느리며 나의 정치를 도왔었다. 나이와 덕이 모두 높으니 예수(禮數)를 마땅히 더해야 되겠으므로 이에 궤장을 내려 달존을 나타낸다. 경은 힘에 부지하고 화기를 수양하여 더욱 나를 도와 치적을 올릴 것에 마음을 쓰라" 하였다. 궤장은 중신들이 70이 되어 늙어서 일하기가 어려우니 더욱 분발하라고 격려하는 뜻에서 [방안석]과 [지팡이] 를 왕이 하사하는 행사다. 1431년(세종13년) 9월 3일 고불이 좌의정이 되다. 1435년(세종 17년) 나이가 많아 건강이 좋지 않아 나라일과 왕을 모시는 일을 못하겠다고 간청하여 좌의정과 모든 부직을 내놓고 자진해서 은퇴했다. 76세때이며 벼슬살이 49년째이다.

 

2. 청백리 맹사성

 

 고불 맹사성은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1435년(세종17년) 2월1일 76세때 늙어서 더 이상 나라 일과 왕을 모시는 일을못하겠다고 세종에게 간청하여 49년간의 벼슬살이를 마감하였다. 벼슬을 그만둔 뒤에 때로는 온양에 있는 집에서 태평한 민이 되어 산수와 벗을 삼아 한적한 생활로 노후를 달랬고, 세종이 나라 일을 의논하자고 부를 때는 한성에 올라가 국정 자문역할도 하였다. 이렇게 세월을 지내다가 벼슬을 그만 둔 3년 뒤인 1438년(세종20년)10월 4일 한성에서 병든 몸을 치료하다가 악화되어 향년 79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당시로서는 장수한 셈이다. 세종은 고불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거애하시고 조회를 정지시키고 관에 명하여 장사를 도와 주게 하는 등 특별대우를 하였다. 그리고 고불에게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증시하였다. 즉 [충신접례왈 문 (忠臣接禮曰 文]이오 청백수절왈 정(淸白守節曰 貞]이라 했다. 이는 거관생활에 있어서 청렴결백의 표상이었다는 바로 그의 청백리상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세종은 고불의 성격을 평하기를 타고난 성격이 어질고 온후자애해서 무릇 조정의 과단성있는 큰일이나, 거관처사에 과감하게 결단하는데 단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고불은 비교적 학술과 교육이 요구되는 판서를 역임한 셈이다. 즉 예조판서. 호조판서. 공조판서. 이조판서가 그것이고 병조나 형조는 역임한 일이 없다. 관리들에게 귀감이될 수 있는 고불의 청백리 사례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사례1]

재산이라고는 사는집 조차 없었던 고불 : 고불은 벼슬살이를 해서 받은 봉급을 생활비만을 남기고 그 대부분을 헐벗고 굶주리는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고불이 살던 한성에 있는 집도 실은 채가(債家)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있는 행단고택(사적 109호)도 처조부인 최영장군의 집이다. 이성계의 조선 창업당시 최영장군이 그들의 손에 살해당했고, 고불의 조부가 두문동 72현으로 순절당했고, 고불의 아버지마저 정부에서 퇴출당하여 잠시 동두문동에 숨어 있다가 송도에 있는 집에 가서 아버지의 유물과 소요되는 자기짐만 싸가지고 먼길 한산(충남 서천군 한산)으로 피난을 떠나야 되는 신세가 되었으니 집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성계의 건국혁명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고불의 아버지는 피난지 한산에 비어있는 최영장군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래서 고불은 최영장군의 집을 인계받아 살았으니 집이 있을 까닭이 없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던 송도에 있는 집도 이성계의 창업과정 중에 당한 3년간의 수난으로 남의 집이 되어 고불은 사실상 집이 없었다. 그나마 처조부의 빈집이 있었으니 아버지는 그 집에 모셨고,고불은 한성에서 벼슬살이 할 때 남의 집을 얻어 살았다. 사실은 건국혁명과정으로 다 망하여 집살 돈이 없었던 것이다. 벼슬살이는 하였으나, 청백하기만한 고불은 집은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자기 직분에만 충실했다.

 

[사례 2]

1407년 (태종 7년) 고불은 한성부윤이 되었는데, 그때만 해도 한성에 작은집이지만 집이 있었다. 1918년 11월 7일 출간된 신문관에서 발행하고 이중화가 지은 [경성약기를 보면"지금의 가회동에 [맹현(孟峴)]이 있는데, 공이 이곳 경성에서 살던 집이 있었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맹현이라고 하는 지명이 맹사성과 연고 관계가 있어 맹현이라고  명명한 것이라고 본다.

 

고불은 맹현에서 살다 1년 뒤인 사헌부 대사헌 때 조대림(태종의 사위)을 심문한 것이 화근이 되어 역적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일이 있었다. 또 고불의 아들(외아들)이 사헌부 감찰직에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고불의 부자는 이 사건으로 태종에게 3족이 멸망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나라의 중신들이 "법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면서 만일 고불에게 3족을 멸하게 되는 중죄를 줄 경우 후세 사람들에게 왕권을 남용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는 상소문으로 일단은 선고된 사형은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주(지금의 충남 서천군 한산)에 있는 향교의 재복(지금의 사환)로 유배되었다. 그래서 맹현에 있던 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집이 없게 된 고불은 한주 유배지에서 풀려나 외방종편으로 잠시 지방에 가 있다가 태종 11년 12월 7일 충주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공안부윤으로 발령을 받았다. 위와 같이 고불은 청렴결백하고 매사에 곧은 마음으로 법대로 처리했기에 정부의 모든 중신들의 신임을 받아 그 지엄한 태종도 할 수 없이 고불에게 윤허를 베풀어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례 3]

새로 장만한 고불의 집은 청빈거사의 집답게 작고 허술했다. 고불의 우의정때의 일이다. 국사를 의논하기 위하여 병조판서가 고불정승의 집을 찾아왔다. 마침 7월장마때라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때가 많았다. 고불은 병조판서와 한시간 가까이 국사를 의논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소낙비가 쏟아졌다. 고불의 집은 비가 새어 가구등 세간살이가 모두 물에 젖었고 두사람은 삿갓을 쓰고 앉아 대화를 했다. 소나기가 멎자 병조판서가 즉시 고불의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귀가한 병조판서는 말하기를 "판서를 4조나 역임했고 우의정이라면 일국의 재상인데 비가 새는 집에 살다니" 하고 고불의 청백리 정신에 감탄하여 자기집 행랑채를 부수고 행랑들 모두를 내어 보냈다는 사례가 있다.

 

[사례 4]

고불은 효성이 지극하여 자주 온양으로 근친하러 갔는데, 그때마다 하인 하나만 데리고 소를 타고 왕래하였다.
왕래할 때마다 그가 고관인줄 모르게 허술한 옷차림이 소박하기만 하여 촌 늙은이와 같았다. 평소나 다름없이 개인적으로 나들이 할 때는 언제나 정장을 피했다. 온양에 근친하러 오고 갈 때에도 도중에 있는 지방관에게 폐가 될까봐 들리지도 않고 특히 날이 저물어 도중에 숙식할 때는 역리의 소개로 간편하게 숙식을 하는 편이어서 고불은 신분을 역리에게 단단히 경고하여 모르게  하고 다녔다.

 

하루는 양성과 진위 두현감이 고불이 온양에 내려 온다는 말을 듣고 한성에서 온양가는 길 도중에서 정승을 맞이하기 위하여 연못가 정자나무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융숭히 대접하여 승진이나 해볼까 하는 허영심에서였다. 이때 고불은 하인과 같이 현감들이 있는 앞으로 검은 소를 타고 어슬렁 어슬렁 가고 있었다. 이를 본 현감들은 마땅치 않게 여기고 하인들을 불러 소타고 가는 일행을 "무례하고 거만하다"하며 꾸짖게하였다. 현감이 보낸 하인의 말을 다 듣고 있던 고불은 그 하인에게 이르기를 "내소타고 내마음대로 나들이 하는데 무슨상관인가, 나를 알고 싶거든 온양 사는 맹고불이라고 가서 현감에게 여쭈어라"라고 말하면서 그대로 유유자적 먼산만 바라보고 지나갔다.

 

이 말을 들은 하인들은 맹꼬붕? 맹꼬불? 하고 중얼거리며 그대로 고불이 한말을 우스꽝스럽게 현감에게 일러바쳤다. 두 현감은 감이 잡힌 듯 맹대감의 호가 고불인 것을 알아차리고 혼비백산하여 연못가에 있는 평상에서 놀라 달아나다가 허리띠에 차고 있던 관인을 연못에 빠뜨렸다. 그래서 그 연못을 인침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인데, 고불은 개인적이거나  공적이거나를 막론하고 나들이를 할 때 일체 남의 신세를지지 않고 청백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3. 아마추어 음악가 고불

 

요새 교육심리학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적성검사 즉 특수능력을 재는 검사법에 의하면 그 종합점수가 높은 사람이 모든 분야에서 소질이 다양하다고 한다. 이와같은  교육심리학자의 이론적 근거가 맞는 것 같다. 고불은 다양한 학문에 소질이 있거니와 음악에도 그 조예가 깊어 당대(태종. 세종)벼슬살이를 할 때 아마추어 음악이론가로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음을 실록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가 있다. 같은  시대의 박연(1378~1458년)을 음악전문가라면, 고불은 학자이면서 지금의 부전공격인 아마추어 이다. 고불은 특히 당악을 틈틈이 연구하였다.

 

당악은 당. 송대의 속악의 총칭인데, 고려 이래로 궁중음악에는 아악. 당악. 향악이 있었다. 당악과 향악을 조선초기에는 속악이라고 하였다. 세종때의 당악을 보면 보허자. 낙양춘. 수룡음. 억취소. 하운봉 등의 악곡명이 있다. 이 가사는 악부의 일체인 사(詞 : 詩錄餘)인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 당악에대한 평소의 연구자는 고불밖에 없었던 것으로 안다. 고불이 가장 깊히 연구한 음악은 당. 송대의 음악이다. 그 예를 든다면 태종 7년 고불이 예문관 제학으로 있을 때 세자 양녕대군(당시 14세)을 그해 9월 25일 하정사(설날을 봉축한느 것)로 명나라에 보냈는데, 고불은 시종관으로 따라 갔다. 고불의 그때 나이는 48세였고 1407년(태종 7년) 9월 25일 출발하였으니 명나라 서울인 경사까지 가려면 3개월의 긴 여행길이기 때문이다. 1407년이면 명나라 제3대왕 성조 5년의 일이다.


세자 양녕대군이 귀국한 날짜는 확실히 모르나 1408년(태종 8년) 4월 2일에 명 황제가 세자 일행에게 금. 은. 옷감 등을하사했다는 기록(태종실록 8년 4월 2일자)을 보면 약 7개월이나 걸린 셈이어서 명나라에 오랫동안 체류했다고 볼 수 있다. 고불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하사품은 은 1정과 표의(表衣 : 옷감)이다. 그렇다면 시종관으로 따라간 고불은 여러달을 명나라에 체류하는 동안 주로 당악을 공부했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명나라 황제가 고불에게 하사한 것이 은 1정이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 맹씨가문에 세전지물로 귀중히 보관되어 있는 유물(고불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음)이 바로 옥저이다. 그 옥저 가운데에 은으로 봉합되어 있는 것을 보면 명나라 황제의 하사품이 바로 그것이라고, 보여진다. 그 후 고불은 당악에 심취되어 당악을 우리나라 음악으로 가사 및 음률을 개수하는데 큰 업적이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또 1425년(세종 7년) 7월 21일자 실록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 있는 맹사성이 베껴보낸 조서를 가지고 의주통사 이성부 등이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고불은 성절사로 명나라에 오래 머무는 동안 다른 학문과 함께 명나라 문화(주로 당악)를 많이 연구했으리라고 본다. 여기서 태종실록 및 세종실록에 명시되어 있는 음악에 관계된 기록을 발췌해서 날짜순으로 소개해 보기로 한다. 1412년 (태종 12년) 5월 3일 맹사성이 풍해도관찰사(황해도)로 발령이 났다.


영의정 하륜이 상언 하기를 "본국의 악보가 다 폐결되어 오직 맹사성만이 악보에 밝아서 오음을 잘 어울리게 합니다. 지금 감사(관찰사)의 임명을 받아 장차 풍해도로 가게 되었는데, 원컨데 머물러서 악공을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태종이말하기를 "교대되기를 기다렸다가 바야흐르 악곡을 가르치도록 허락하겠다" 라고 했다. 이때 맹사성은 공안부윤으로 재직중이었다. 1418년(세종즉위) 11월 10일 세종은 맹사성에게 말하기를 "경이 관습도감제조가 되어 영인에게 새로 지은 사곡을 가르쳐서 율조에 맞게 하였으므로 부왕(태종)께서 기뻐하셨다"라고 말하였다.

 

영인은 음악을 맡아보는 관리를 말하며 배우나 광대등도 이에 포함된다. 1419년(세종 1년) 1월 1일, 세종에게 설날 하례를 드리는 자리에서 상왕은 맹사성과 변계량, 허조들에게 말하기를 "후천진작은 그 곡조는 좋지만 그 가사만은 듣고싶지 않다" 라고 하니 맹사성등은 아뢰기를 "전하의 분부응 당연합니다. 지금 악부에서 그 곡조만을 쓰고 그 가사는 쓰지 않습니다. 진작은 만조, 평조, 삭조가 있는데, 고려 충혜왕이 자못 음탕한 노래를 좋아하며 총애하여 측근들과 후전에 앉아서 새로운 가락으로 노래를지어 즐기니 그 시대사람들이 후전진작이라 일컬었던 것입니다. 그 가사 뿐만아니라 곡조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전하는 말에의하면 후전진작은 소위 후전에서 음녀 즉 갈보를 데리고 음란하게 노래와 춤을 추며 노는 일을 말하는데, 고려말까지 궁전 뒷편에서 고관이나 왕들이 흔히 즐기던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음란가사와 음란한 곡조를 모두 맹사성 등이 가사를 전부 새로 바꾸고 곡조는 신명나는 향가조로 고쳐썼다고 한다. 1425년(세종 7년) 10월 15일, 세종은 이조판서 허조에 말하기를 삼군도진무인 맹사성과 더불어 "향악에 익숙한데 조상들이 평소에 들으시던 제례악에 향악을 연주하는 문제를 맹사성과 의논하라"고 명하셨다.

 

1430년(세종 12년) 9월 9일 세종은 맹사성에게 말하기를 "박연과 정양은 모두 신진의 사람이므로 그들에게만 아악기 만드는 것을 맡길 수 없으니 경은 유의하라"라고 말한점 등으로 미루어 그당시 부직으로 영악학으로 있던 맹사성의 위치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430년 11월 2일,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찬성 허조, 호조판서 안순 등을 불러 악공의 등용문제를 의논하였다. 1431년(세종 13년) 8월 2일, 세종은 맹사성에게 이르기를 사신회례에 연주할 음악에 대해 의논하였다. 1431년 10월 1일, 박연이 세종에게 상언한 아악의 관복제도의정확성을 명나라에 알아보려하였다. 상정소 제조 황희, 맹사성, 허조, 신상등이 문제를 상의하여 상언하였다.


1432년(세종 14년) 3월 28일 세종은 경연에 나아가 상정소의 제조 맹사성 등을 불러 조정의 의식에만 아악을 쓸뿐 회례에 까지 쓸 수 있게 되었음을 자문하였다. 1432년 8월 28일, 세종은 송,원의 제도에 따라 악을 제정할 것에 관해 동지중추원사 유사눌의 상서문에 관해 상정소 제조 황희, 맹사성, 허조, 정초 등의 자문을 받았다. 1432년 10월 24일 관습도감 제조 맹사성, 감자지, 유사눌, 별감 박연등이 세종에게 근천정지가 궁중음악의 가사 가운데 패금소저란 글귀를 설명하였다.

 

이상 실록에 있는 음악에 대한 기록을 발췌하여 간단하게 소개했거니와 고불은 특히 옥저 일종의 피리의 솜씨가 대단했던 것으로, 그 소리는 가히 신기 바로 그것이었다고 한다. 온양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는 내빈들이 고불이 부는 옥저의 소리를 듣고 고불정승의 재가를 확인하고 방문했다고 하니 솜씨뿐 아니라 취미 또한 정감이 풍부한 음악연주자로도, 또한 음악 이론가로 악기제조의 솜씨도 탁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악보, 제조한 악기, 가사등이 전해 내려 온 것이 없어 소개할 수가 없고, 고불의 음악에 대한 일화가 너무나도 많이 있으나 지면관계로 이만 줄인다. 

 

 

 4, 고불의 저서

 

1) 육전수찬(六典修撰)

1422년(세종4년) 8월 11일 세종은 [육전]을 수찬하는 인원을 임명하였는데, 성산부원군 이직과 좌의정 이원으로도제조로 삼고, 찬성사 맹사성과 참찬 허조 두 사람을 실무자격인 제조로 임명하다. [육전]이란 이조, 호조, 예조,병조, 형조, 공조 6조의 법전인데, 이는 법전 편찬방식의 전통적방식으로 편찬한 조선조 최초의 법령집이다. 태조 때 이루어진 것으로 원명은 [경제육전상절]이다. 세월이 경과됨에 따라 실정과 부합되지 않는 점을 개정하는 것을 수찬이라고 하는데 대대적인 보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개수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완성된 연도는 1426년(세종 8년)이다.

 

2) 고려사

고려사는 원래 기전체로된 고려의 정사 이나, 조선이 개국되자 이태조가 정도전과 정총등에게 명하여 고려 역대실록과 강목 그리고 이제현의 사략, 이색의 금경록등을 참고하여 편찬하였으나, 이는 37권으로 된 편년체에 불과하여 조잡한 것이 되었다. 이어 다시 유신에게 교정케 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다시 세종은 사국을 두고 정인지 , 김종서 등에게 (이중 맹사성도 들어 있음) 개찬하도록 하여 무려 36명이 참여하고 60여년의 세월끝에1451년(문종1)에 완성되었다. 물론 고불은 영춘추관사등 사관의 경험도 있어 [고려사]를 개찬하는 일에 오랫동안 참여했다.

 

3) 태종실록

원명은 [태종 공정대왕실록]이라 되어 있음. 모두 36권16책 선덕 육년 신해 삼월 일로 그 편찬연대가 기록되어 있고, 춘추관 경봉 왕지찬진이라 되어 있다. 그 감관사는 [대광보국승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영집현전 경연사 겸 판병 조사 세자부 신 맹사성 ]이라 기록되어 있고 편집에 참여한 사관 16명의 명단이 실록 끝에 적혀 있다.

 

4) 팔도지리지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책. 8권 8책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치는 세계 지리학 사상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다. 지면관계로 그 내용에 관해서는 생략하거니와, 이 지리지는 1424년(세종6년) 11월 15일에 시작하여 1432년 (세종14년)1월 19일에 완성된 것으로서 8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린 것이다.

 

 

5. 고불의 작품

 

고려 충혜왕 말년에 궁중에 음란한 풍습이 유행하여 후전에 폐행하는 갈보를 두어 신성과 음사를 지어 불러 즐겼는데, 이를 후전진작이라고 했다 한다. 이 괴성과 음사는 조선조 개국 이전까지 유행하였는데, 특히 공민왕때 섭정을 맡았던 스님 신분에 인간 불가사리란 말까지 유행시켰던 신돈의 음란생활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지금까지 전해진 것은 없으나, 그 음보나 음사가 어느정도 궁중을 문란시켰을지 짐작이 간다. 조선이 개국되자 태종은 이 악습을 없애고자 고불을 비롯하여 변계량과 허조 등에게 음곡과 가사를 전부 수집하여 개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불이 관습도감 제조로 있을 때 별감 박연과 함께 근천정 가사와 음곡을 개수하여 회례 때 쓰여졌다는기록이 실록에 있으니 노래가사와 음곡창작에 많은 활동이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와 국문학사 연구대상이 되는 향가나 그 밖의 작품이 교과서나 혹은 교재에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는 조선조 초기의 인물로는 고불을 비롯하여길재 , 원천석, 변계량, 황희, 김종서, 왕방연, 성삼문, 이개, 유응부 등을 들 수 있는데, [진서간행본] 청구영언에는김종서, 성삼문, 왕방연의 시조 6수와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4수만이 실려 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초기 많은 사람이 작품을 썼겠지만 그 작품이 구전 전승되는 동안에 거의 인멸되고, 그 중 작가의 인격과 더불어 국민에 충격이 컸고, 작품내용이 동감을 자아냄으로써 일반인에게 널리 애송된 것만이 지금까지 전해졌다고 볼 수있다. 고불이 세종 17년 2월 1일 76세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이나 다름없는 온양으로 내려가 태평한민이 되어 작사한 강호사시가(일명 感君恩)를 소개하고 그의 한시를 소개한다.

 

 

江湖四詩歌(一名 感君恩)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난다.

濁醉溪邊에 錦鱗魚안주로다.
이몸이 한가해옴도 亦君恩이샷다.

江湖에 여름이 드니 草堂에 일이 업다.
有信한 江波는 보내느니 바람이로다.
이몸이 서늘해옴도 亦君恩이샷다.
江湖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있다.
小艇에 그물치고 흘리 띄어 더뎌두고
이몸이 소일해옴도 역군은이샷다.

 

 

山田睡鄕(꿈나라)


삿갓에 되롱이 입고 細雨에 호미메고
산전을 흣매 다가 녹음에 누엇으니
목동이 牛羊을 몰아 잠든 나를 깨와라.

 

위 시들은 당시 훈민정음이 없었으니 한문으로 된 것을 한글이 창제된 직후 옮기다보니

현대인들이 읽고 이해하기에 다소 어색한면이 있다.

 

 

燕子樓<김해>


駕洛遺虛幾見春 首露文物亦隋주
可燐燕子如懷古 來訪高樓喚主人

(이 한시는 [문헌편찬출판부]에서 1959년 3월 1일 발행한 [한국역대명시전서]93쪽에 실려 있다.)

 

 

III. 고불의 사상

 

1. 고불의 충효사상

 

한국인의 충효사상은 전통적으로 그 생할 속에서 몇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도덕규범을 적용하고 있는 점이다. 충효사상은 개개인의 인격적 도덕성을 중요시 하였고,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밝혀 주었으며, 국가의 인격적 도덕성을 중요시 하였고,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밝혀 주었으며, 국가의 도덕성과 국가간의 도덕적 관계에도 엄격한 규범을 제시해 주었다. 둘째,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부여하였다. 우리나라의 역사속에서 교육의 시작은 충과 효의 교육이었으며, 교육기관인 성균관이아 향교, 시교육기관인 서원, 서당 등 사설교육기관의 교육목적과 교육방법 등에서도 충효의식이 주가되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까지도 가정교육의 학교교육을 통하여 한국인의 인격형성에 충효사상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셋째, 의례의 생활화이다. 전통적으로 제사의례는 우리나라의 생활속에 일반화 되어 있다. 제사를 통하여 조상에 대한 공경심을 표현하고 친족간의 강한 결속을 나누었고, 나라의 행사나 국왕의 생일등 여러 가지 왕권유지 차원에서도 충효사상의 철학적 기반은 아주 공고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유교철학의 특징인 충효사상은 조선조 초기부터 척불숭유로 그 정치개혁의 사상이 바뀌면서 나라의 기본강령이 되었다.

 

그 당시 유행한 글중에 [毒藥苦口利於病 忠言逆耳利於行]이란 것이 있다. 이 글은 우리말로 표현하면 [독약이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충성된 말이 귀에는 거슬리지만 행하면 이롭다] 라는 말이다. 여기서 언뜻 생각해보면 독약은 입에 쓰다하여도 병이 낳으니까 당연히 무리해서라도 먹어야 하지만, 충성스런 말이 귀에는 거슬리나 행하면 이롭다는 말에는 충의 요구가 강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충효사상을 같은 개념으로 본다면 충에 효가 빠질 수 없고 또 효가 충에 빠질 수가 없는 것이다. 고불은 효자였다. 그 실례를 든다면 1431년(세종 13년)에 집현전 부제학 설순등이 왕명으로 저술한 [삼강행실도]에 고불 맹사성과 그의 아버지 맹희도부자가 나란히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명심보감]효행편에 "태공왈 孝於親子亦孝之身旣 不孝子 孝焉"이라고 있는데, 이 말을 풀이해보면 [태공이 말하기를 내 자신이 부모에게 효도하면 내자식이 또한 나에게 효도한다. 내가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는다면 자식이 어찌 나에게 효도할 것인가]라는 말이 있다. 2대가 모두 "삼강행실도"에 들어 있는 것은 조선조에는 없는 일로 고불의 효심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보여준다.

 

어머니가 10세때 죽었기에 어머니가 없는 홀아비인 아버지가 82세나 살아 있었던 것과, 한성에 정부가 있어 정승까지 벼슬살이 하는 동안 아버지를 잘 모셔달라고 하인 부부에게 후한 대접을 베풀어 마치 정승과 하인사이가 아닌 친척을 대접하는 것같이 했다는 일화가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양지방 촌노들의 심심풀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등으로 미루어 고불이 아버지를 매우 극진히 모셨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484년(태종18년) 고불의 아버지가 82세(고불 59세때)에 돌아가시자 수묘생활 3년의 정성과 그 고통을 감수하며 죄를 사죄한 행동이 온양지방에 일파수동만파수로 소문이 퍼져 온수현감이 예조판서에게 진정하여 효자비를 내리게 한 일(현재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그 정각이 있음)이 있었다. 국조인물지 (1)세종조편을 보면 "洪武二年己酉七月十二日 趙夫人卒 公甫十歲而 水醬絶口泣血三年..."라는 기록이 있는데, 홍무2년이면 1369년(공민왕18년)이고 고불은 10세 때이다. 조부인은 어머니 흥양조씨이며 어머니가 죽자 7일간을 물한모금이나 장물도 입에 대지 않았고, 피눈물로 3년을 지냈다고 되어 있다. 물도 먹지 않고 장물도 먹지 않았다는 것은 좀 과장된 느낌이 드나, 불과 10세에 어머니가 죽었다면 모성애의 단절이 얼마나 어린가슴에 멍이 되어 눈물로 3년을 지샛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미국의 시인 O.W.Holmes는 이런 말을 남긴 것 같다. "청춘은 사라지고 사랑은 시들며 우정의 잎사귀는 떨어지지만 어머니의 남모르는 깊은 사랑은 그 모든 것 보다 오래간다"라고, 그래서 인간을 부모지간으로 맺어 주는 것은 혈육이라기보다 애정이라고 했나보다. 필자가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오래두고 할 수 없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일이니 효자는 날이 가는 것을 아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고불의 충효사상은 그의 선천성 내성적인 성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49년동안의 공무원 생활은 오직 충군애민과 사친이효 바로 그것이었다. 즉 태종과 세종때의 벼슬살이는 왕을 모시는 일이 효친의 행동과 같았고 태종과 세종조의 군신간 자문역할(실록에 대신 중에 가장 많이 나온다). 이 모든 것이 충군애민과 박학다식한 까닭이었다고 본다. 특히 태종8년(1408년) 사헌부 대사헌일 때  태종의 부마 조대림을 벌한 것이 왕실의 존엄성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법앞에는 만민이 평등하다는 법정신에 충실하다보니 끝내는 왕실을 모독하고 왕권을 가벼이 여긴 처사라고 반역죄를 적용하여 사형까지 선고한 일에 대해, 삼정승 육판서는 물론 원로대신들의 충신을 잃을뻔했다고 후회하며 다시 큰 벼슬을 주어 일하게 한 일은 고불의 충성심과 민본정신을 늦게나마 알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고불이 세종 20년에 79세로 죽자 세종은 고불에게 시호를 내리면서 고불의 성격을 말한 것을 보아도 고불은 성격이 온후자애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2. 고불의 정치사상

 

고불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왕도정치에 따른 덕치주의다. 사람은 날 때부터 착하게 태어났으나 생존경쟁을 하나보니 이기주의의 소산인 무질서와 부도덕이 정교일치에 어려움을 주어 그의 정치소신인 충군 애민정신을 실천적으로 승화시키는데 애쓴 흔적이 그의 49년간의 벼슬살이에서나 그의 타고난 온후자애한 성격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불의 학문 중에서도 그의 전공격인 것은 역사다. 공자가 유가사상을 집대성한 논어, 그리고 정치사상을 주로 역설한 맹자의 내용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이고 보면 고불의 정치사상은 역사학과, 공자님의 유가사상, 그리고 맹자님의 성선설에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다. 특히 논어에서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면 뭇별들이 북극성을 향하여 운행하는 것과 같이" 정치를 덕으로써 베풀면 백성들이 따라오게 마련이라는 것을 정치철학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맹자"에서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방문하니 왕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천리를 멀다 않으시고 오셨으니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맹자가 대답하기를 "왕께서는 하필 이(利)만을 말하십니까? 역시 인덕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 라고 하였으니 그의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고, 특히 고불은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님의 후손이기에 조상님의 정치관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고불은 항상 말하기를 "내가  덕을 베풀면 백성은 충성으로 보답할 것이요, 내가 학정을 베풀면 백성들은 원망으로 보답할 것이다" 라고 한말을 그의 어록에서 읽을 수 있다. 

 

또 그는 "물이 탁하면 물고기가 허덕이고 정치가 가혹하면 백성들이 흐트러진다"라고 말했으며, 그의 행동은 언제나 수기 ,정심 이어서 평소에 말이 적어 누가 대하든지 주로 듣는 편이고 강한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를 꺼려한 것이 그의 단점이라면 단점인 셈이다. 고불이 문과에 장원하고 처음 벼슬길에 오른 것이 우왕 12년 (1386년) 이다. 그러나 2년 후인 우왕 14년(창왕1년 : 1388년 5월)에 우리나라를 침입하는 원나라 홍건적을 물리치기 위해 왕명으로 위화도까지 출정한 친명파인 이성계와 조민수가 무슨생각을 했는지 사불가론을 주장하며 회군하여, 왕을 강화도로 추방하고 최영장군을 격살하여 이때부터 이성계일파의 건국 혁명 과업이 진행되었는데, 이때의 고불은 약관의 하급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장원급제자라 하더라도 학문만은 탁월했지만 정치소신이나 정치사상을 실천으로 옮기기엔 약관으로는 높은 문턱을 넘지 못하였다.

 

고불은 태종8년(1408년) 5월 1일 한성부윤이 되면서 세자시강원 우부빈객 즉 태종의 아들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성녕대군의 사부였기에, 충군 애민정신과 덕치주의를 강론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때문에 세종이 세자 자리를 이어받고 (1419년) 22세의 어린나이에 국왕이 되어 3년간 태종이 뒷바라지를 해줬다고는 하지만, 고불에게서 배운 덕치주의와 민본사상은 태종으로부터 이어받은 왕도정치와 강력한 왕권주의도 덕치주의에 우선이 될 수는 없었다고 본다. 특히 조선조가 건국되자 척불숭유전책은 고불의 정치사상과 맞아 떨어지는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즉 이성계가 건국한 과정은 수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는 떳떳하지 못한 혁명이었기에그 혁명의 정당성을 민심수습에 치중할 수밖에 없어, 그명분을 유교 사상에서 찾으려는데서 [척불숭유정책]을 표방하고 나선 것이 즉 유교 사상에서 근거를 둔 소위 문지정책이다.

 

고불로서는 건국초에 하급공무원이기는 하나 그의 평소의 학문이 주로 경서(4서 5경)이면서도 자치통감을 거의 암송하다시피 공부했으니, 고불의 유교적 정치철학은 그의 평소의 강한 이데올로기였다.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 있는 기사를 일괄해 보면, 고불은 태종 7년(1407년) 한성부윤이 되면서부터 계속 승진하여 태종 16년(1416년) 예조판서, 동 17년 호조판서, 동 18년 공조판서 이조판서, 그리고 세종 1년(1419년) 이조판서등 4조판서(지금의 장관)를 역임했고, 세종 3년(1421년) 의정부 찬성사, 세종 9년(1427년) 우의정, 세종 13년(1431년) 좌의정을 끝으로 , 세종 17년(1435년) 2월 76세에서 활동에 한계를 느껴 자진해서 벼슬을 그만 두었고, 정직 말고도 수많은 부직을 수행해 오는 동안 국왕의 자문역할로 국정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세종20년 10월 4일 고불이 죽었을 때 고불의 인간됨의 장점과 단점을 논한 기록이 실록에 나오는데 "사람됨이 조용하고 간편하며 선비를 예절로 우한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비록 계급이 얕은 자라도 뵙고자하면 반드시 관대를 갖추고 대문밖에 나와 맞아들여 상좌에 앉히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구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가는 것을 보되,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서 무릇 조정의 큰일이나 거관처사에 과단성이 부족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성격이 부처님같이 온후하고 자애했음을 알 수 있고 호가 고불(古佛)인점을 생각해볼 때 그는 선비정신이 몸에 배인 듯하다. 지면에 제약이 있어 그의 49년 벼슬살이에 따른 정치사상에 많은 사례가 있으나 이상으로 간단히 끝마친다.

 

 

 

IV. 고불의 묘소 유래와 맹씨행단의 유래

 

 

1. 사패지지의 유래

 

위에서 여러번 소개한 바와 같이 고불은 1438년(세조20년) 10월 4일에 향년 79세로 서울에서 세상을 마감했다. 객지인 서울에서 죽었으니 일단은 본가인 온양으로 그의 시신이 가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관례다. 그래서 10월 5일 상여행렬이 온양을 향해 가던 중 지금의 성남시 판교부근에서 상여꾼이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상여 앞에 놓인 명정이 하늘높이 떠 지금의 산소자리인 광주군 광주읍 직리 해좌(亥坐)에 착지했다. 그런일이 세종대왕에게 전해지자 세종은 "이는 국풍이다. 그리고 그곳이 길지이니 그곳에 장례를 치루라"고 하명하시고 사패지지로 585.887평을 하사하시어 이곳에 고불 맹사성의 묘를 썼다.

 

 

2. 사적 109호 맹씨행단의 유래

 

맹씨행단 경내에 있는 고택은 그 건축년대가 서기 1330년이다. 즉 고려 충혜왕이 즉위하던 해이다. 집주인은 고불의 처조부가 되는 최영장군의 집인데, 지금으로부터 668년전에 지은 집으로 최영장군이 이성계 일파에게 죽임을 당하자 손자사위인 고불이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너무 오래되어 여러번 개수한 것이 오늘의 모습이고, 사랑채는 임진란때 허물어져 1997년 연세대 고고학 연구팀이 발굴조사하여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건물 중 제일 오래된 고려식의 구조에 티베트식을 가미하여 지은집이라서 건축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할 만한 건물이다.

 

고불이 좌의정 때(세종 13년<1431년>~세종 17년<1435년>사이)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허조를 초청하여 3정승이 은행나무 한 그루씩을 심었는데 세 그루 중 한그루는 죽고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 있는데 (충남 천연 기념 보호수) 이곳을 이름하여 행단(杏壇)이라고 한다. 그리고 경내에는 세덕사라고 하는 사당이 있는데 이곳에 위패를 모신분은 고불의 조부이며 두문동 72현(두문동에서 순절)인 맹유와, 고불의 아버지인 수문전 대제학인 맹희도, 그리고 고불 맹사성 3대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이곳 온양지방 유림과 자손들이 다함께 문묘의 제사방식으로 제례를 올린다.

 

그리고 돌담 경내를 벗어나 약 150m 거리에는 구괴정이란 정각이 있는데 역시 앞의 은행나무 세그루와 함께 삼정승이 느티나무 각세그루 합하여 아홉 그루를 심고 이곳에다 정자를 짓고 망중한을 즐겼는데 이곳을 "구괴정"이라 명명하였다. 지금은 아홉그루 중 단 한그루만이 살아 받침대에 의지해서 겨우 연명하고 있다. 이 유서깊은 곳을 속칭 "삼상당"이라고도 하고 삼선댕이"라고도 한다. 돌담 밖에는 정문(행랑채)이 있고 사적 109호 맹씨행단의 유래에 대한 게시판이 한글과 영문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이곳을 아산시에서 2002년까지 성역화하기 위해 "맹씨행단성역화사업 종합 기본계획"을 세워 진행중에 있다.

 

현재까지는 "청백리 고불기념관"과 "구괴정"이 복원되었고, 고불이 살던 고택 사랑채 발굴조사가 끝나고 공중변소 등 정비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취약한 지방재정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실정에 있고 중앙정부의 예산으로 문화재 보호육성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현재 아산시에는 사적 세곳이 있다. 사적 109호 맹씨행단 , 사적 112호 이충무공 묘 , 사적 155호 현충사(이충무공 유허)가 있다. 이 중 사적 155호 현충사는 1967년 성역화 작업에 착수하여 1967년 수백억 정부예산을 투입하여 1969년 총면적 14,500평에 각종 조경시설과 부속 건물을 지어 현재도 나라예산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을 보면 , 같은 사적이면서 청백리 고불정승의 사적 109호 행단은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다.

 

 

고불 맹사성 연보

 

1360년 : 고려공민왕 9년 7월 17일 송도(지금의 개성)에서 태어남
1386년 : 27세, 문과 전시에 장원함. 이어 예문 춘추관 검열로 발탁됨.
1386~1392년 : 27~33세, 전의승, 기거사인, 우헌납 등 관력을 거쳤음.
1399년 : 40세, 우간의대부가 됨
1406년 : 47세, 여러벼슬을 거쳐 이조참의가 됨
1407년 : 48세. 세자 양녕대군을 모시고 시종관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다녀옴(당시는 양녕대군의 스승을 겸직하였음)
1408년 : 49세, 사헌부 대사헌이 됨
1416년 : 56세, 이조참판이 됨. 동년 9월 예조판서로 승진함(지금의 문교부 장관급)
1417년 : 58세, 호조판서가 됨
1418년 : 59세, 공조판서가 됨
1419년 : 60세, 이조판서가 됨
1421년 : 62세, 의정부 찬성사로 승진
1425년 : 66세, 성질사로 명나라에 다녀옴
1427년 : 68세,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
1431년 : 72세, 태종실록완성. 8월 의정부 좌의정이됨
1432년 : 73세 , 팔도지리지 완성 찬진
1435년 : 76세, 노령으로 좌의정과 모든 부직을 자진 사퇴함
1438년 : 79세, 세종20년 10월 4일 별세 관장으로 장례를 거행하고, 시호로 충신접례왈 (忠信接禮

                    曰 문(文) 청백수절왈(淸白守節曰 정(貞) 이라고 세종대왕이 사시(賜諡)함.

 

자료제공 : 문화관광부       저자 :맹온재(孟縕在)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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