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강화도 역사기행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1:45

조선팔도의 기운이 참성단에 모이다. 

 마니산의 예언은 100% 적중했다. 


무진년(戊辰年 1568년) 6월6일,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 전국의 역학 대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토정 이지함을 비롯해 박지화, 서기, 전우치 등 당대 조선 최고의 도인들이 강화도 마니산에 모인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조선팔도의 기운이 참성단에 모인 것일까?

이는 토정 이지함이 조선에 다가올 환난을 예측하고 이를 막기 위해

조선팔도의 도인들을 극비리에 불러 역술가대회를 가졌던 것이다.


이때가 서기1568년 무진년 음력6월6일 여름이었다.  마니산에 모인 역학대가들은 폭염이 내리쬐는 참성단위에서

엄숙한 분위기속에 커다란 느티나무를 그늘 삼으며 3일 밤낮으로 천상회의를 가졌다.


요즘으로 말하면 시국선언인 셈이다. 이날 참성단에 모인 도인들은 먼저 마니산의 기(氣)를 몸에 받는

의식을 거친 뒤 조선에 닥쳐올 엄청난 대 환난을 예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융희멸망, 일제식민지, 미. 소 강대국의 개입으로

형제끼리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남과 북이 분단되는 끔찍한 현실이 닥쳐 올 것을 예시했다. 

 

마니산예언은 적중했다.  

그들의 예언은 앞으로 이십년 후, 임(壬)의 수(水)해가 되고 용의 토(土)해가 되어

수극토(水克土)하는 해에 남쪽바다가 열리면서 우리나라가 물바다가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수극토(水克土)의 수(水)는 물을 뜻하며 물의 해인 임진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온 강토가 적의 발굽아래 놓일 큰 재앙이 내다보인다는 것이었다. 


또 북쪽의 길이 열리면서 호란을 맞게 되고 민족의 정기와 기운이 고갈되어 백성들끼리

아귀다툼만 벌이다 ‘융희’라는 연호를 쓰는 해에 조선이 망하고 두동강이 나서

형제끼리 죽고 죽이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날 것 같다고 내다봤다.  


도인들의 회의는 3일 동안 계속됐다. 그리고 각자 계룡산과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 설악산, 한라산으로

흩어진 뒤 3년 후 약속대로 마니산 참성단에 다시 모여 들었다. 이번에는 정여립도 함께 했다.  


3년 만에 다시 만난 그들은 각각 자신의 예언을 털어놨다. 이 자리에서 한 도인이 말하기를

“앞으로 남쪽이 열리고 북쪽이 열리면서 난리가 두 번 있으니 그게 바로 왜란과 호란이며

그로인해 백성들끼리 아귀다툼만 하게 될 것”이라며 한탄했다. 


또 다른 도인은 앞으로“삼백여년 후에 또다시 외란이 일어나‘융희’라는 연호를 쓰는 해에 조선 이조는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왜 나라가 망하는 날, 왜보다 더 큰 나라가 다시 우리나라를 빼앗아

북쪽에 있는 나라와 나눠가지며 비로소 천년의 통일국가가 남. 북으로 쪼개지고 동족 간에

끔찍한 살육이 자행 될 것”같다고 예언했다.  


마니산 참성단에서 두 번째 시국회의를 마친 도인들은 다시 마니산을 내려와 전국을 돌며 나라를 지킬

방비책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전라우수영에서 우연히 이순신을 만난 토정일행은 이순신이 진정

이 나라를 지킬 인물임을 직감하고 앞으로 다가올 임진환난을 설명했다. 


이순신이 그토록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려했던 것도 이지함 일행의 이 같은 예언과 함께

간곡한 당부 때문 일지도 모른다.  


토정 이지함은 선도(仙道)의 대가였다. 

역시 이지함의 예언은 인간의 운명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수백 년을 내다본 기인이자 점술가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자본주의 경제학자였다. 


토정은 또 지리학과 천문학을 탐구한 과학자였으며 특히 토굴 속에 살면서 빈민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힘쓴 빈민운동가였다.  


토정을 비롯한 조선의 역학대가들이 나라의 운명을 예언하고 방비책을 찾고 있을
그 당시 조정은 노론과 소론 간 당파싸움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특히 윤원형, 윤원로 형제의 거침없는 국정농간과 부패 권력자들로 인해 나라가 크게 기울고 있었다. 

또 조정에 있는 무리들은 한낱 정권야욕에만 눈이 멀어 있었고 조선의 왕은 기력이 쇠진하여

천자의 자리마저 잃고 있었다.


스스로 중국에 속국임을 자처하며 조공이나 바치고 그 자리에 안주하는 한심한 소인배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이라는 거대한 배가 심하게 흔들리며 멸망의 낭떠러지를 향해 항해를 하고 있는데도

정작 그 배를 이끄는 사공들은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밥그릇싸움만 하고 있었다는 애기다. 


따라서 토정을 비롯한 역학 대가들은 닥쳐올 대 환난을 예감했었음에도 이 같은 사실을 조정에 알릴수가 없었다. 

소인배들이 득실대는 조정에 알려봤자 귀를 기울일 정치인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마이동풍’ 이요 ‘우이독경’이었다.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도인들은 다시 마니산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곳 참성단에 제를 올리며 환란을 피할 묘책을 찾기 시작했다. 조선팔도의 이름있는 도사들이

나라가 위기에 처할때마다 마니산 참성단을 찾은 이유는 마니산이 민족의 영산이기 때문이다.   


 

마니산은 민족의 영산이다. 

마니산은 백두산천지와 한라산 백록담사이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팔도에서 기(氣)가

가장 세기로 유명하다. 참성단(塹城壇)은 서기전 (BC)2283년에 단군왕검이 직접 제단을 쌓고

손수 제천보본(祭天報本)의 전통윤리를 수범(垂範)했던 곳으로 우리 민족과 한울과의 연결고리 구실을

해주던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의 원리를 간직한 제천 단이다.  

 

지금도 참성단에는 우리말로 풀이된 ‘참성단 중수비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丁酉(서기 1716년임) 江華留守 崔錫恒記"

"우리나라 수천리 땅에 강화는 나라의 방패,

그런 강화 중에도 마니산은 천신에게 제사드리는 명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단을 만들었으니 이름 하여 참성단이다.  


 

세상이 전하기로는 단군이 돌을 쌓아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던 곳. 

돌이켜 보건대 수천 년을 지났으니 풍우에 씻기고 깎이어서

서북 두면이 반쯤 무너졌고 동편계단이 기울어졌다. 


 

그래서 이 고을 어른들이 만나면 서로 개탄하고 있다.

부족한 유수로서 이 산에 올라 보니 분연히 이곳을 중수할 뜻이 생겨... 

아! 무너진 것을 고쳐 옛 모습을 되살리는 것은 수령의 마땅한 책무가 아닌가.

하물며 이곳은 이 겨레의 시조 단군이 당 요와 같은 시대에 나시어

손수 단을 쌓아 정결히 제사 지내던 곳임에 있어라!"  


 

조선조 숙종 26년(1700) 5월에 강화유수 최석항(崔錫恒)이 중축을 기념하기위해

중수비(重修碑)를 참성단 동쪽에 세웠으며 그 비문은 지금도 현존해 있다. 

 

참성단은 단순한 제단이 아니고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 될 수 있는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이 서린 천단(天壇)으로서 천지신명의 감응을 얻고 근본에 보답하는

보본의 윤리를 깨우쳐 주는 신령스러운 곳이다. 


 

강화군 개천대제 행사열어 

따라서 해마다 개천절이 되면 마니산 참성단(사적 제136호)에서 강화군수와 강화문화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례 등을 올리는 개천대제(開天大際) 행사와 관광객이

제례복을 입고 참여하는 개천대제 재현행사가 열리고 있다. 

 

강화군은 올해부터 민족의 명산인 마니산과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위해 마련한 것으로 알려진

참성단의 명성을 활용, 전국 유일의 개천대축제를 열어 빛과 소리를 주제로 한 타악 공연, 무예 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마련할 계획이다. 또 오는 6월부터 마니산을 찾는 등산객을 대상으로

`마니산 기(氣)축제'도 상시 개최할 예정이다.


 안덕수 강화군수는 최근 기자간담회를 통해"개천대축제 등 새롭게 확대되는 축제로

강화는 풍성한 축제의 고장으로 거듭날 것"이라며 "많은 관광객이

강화를 찾아 풍성한 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니산은 성화전수의 사적이다. 

한편 마니산은 일제에서 해방과 더불어 우리 민족사에 기록돼야 할 역사적 사실이 바로 마니산 성화전수의 사적이다. 

개천 4403년(1946) 광복 제1주년기념 축하행사의 일환으로 서울의 세 명산인 남산, 북악, 안현(안산)에서

3일간의 봉화제전(烽火祭典)을 거행하면서 횃불을 지폈다. 


 

그 당시 광복절 전야인 오후 6시에 단애종사가 채화(採火)하여 성화전송단 대표 손기정(孫基禎)씨로 하여금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에게 전송되어 남산에 마련된 봉화대에 점화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 횃불을 민족성화로서 보본의 역사성이 깃든 제천단인 마니산 참성단으로 옮겨 전수시키기로 하고

그 해 10월 3일(음력) 개천절을 기해 그날 아침 6시에 마라톤선수 함기용(咸基鎔)에 의해 마니산으로 전송되었다. 


 

당시 민정장관인 민세 안재홍이 이를 받아 점화함으로써, 전국민의 축전(祝典)으로 제천의식을 성대히 봉행하게 됐다. 

지금도 전국체전때 민족화합을 다짐하며 메인스타디움을 환하게 밝혀주는 성화가 마니산 참성단에서 채화되고 있다

 

 

 

강화도의 옛 이름 갑비고차 

갑비고차(甲比古次). 강화도의 옛 이름이다.

강화도는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수난의

역사 흔적이 곳곳에 자리해 문화유적 답사지로서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렇듯 강화도는 민족의 성지인 참성단 뿐만 아니라 5진, 7보, 53돈대가 해안을 따라 위치한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호국의 현장이다. 강화도는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5번째 큰 섬이다.


 섬 전체에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유적이 분포되어 있으며

진, 보, 돈대만 돌아보아도 하루가 모자랄 정도다.  

 

천제 올리며 임금이 오르내리던 918개의 계단길

918개의 계단길은 삼국시대의 임금들이 천제를 올리기 위해 다녔다고 한다.

참성단으로 오를 수 있는 단군로는 시원한 산들바람과 지저귀는 새소리를 벗삼아 쉬엄쉬엄 올라가면

서해 바다의 풍광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이색의 <참성단>    

단군의 자취가 이 옛단에 머물러 있으니    

세월따라 선경에 온 것이 분명하구나    

 

질펀한 바람결에 갈매기만 깜박이니    

천지도 끝이 있을까 늙어만 가네    

이 몸이 몇 번이나 이곳을 찾을 수 있을는지  


 하늘과 땅이 이 자리 모두 있으니 하늘의 기와 땅의 기가 이곳에 모여 발하지 않을까.


 최근 풍수전문가들이 마니산 참성단에서 엘로드로 기 측정을 한 적이 있었다.

무려 65회를 회전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이는 분명 마니산의 영묘함을 증명한 것이다.

 

 

 

 

 김포 문수산성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문수산(376km)에 소재한 문수산성은 사적 제 139호로 조선 19대 숙종 20년(1694)에

           바다로 들어오는 외적을 막고 강화도 방어를 위해 쌓은 성이다. 1812년 대대적인 중수를 했다. 원래 문수산의

           줄기를 이어 염하 해안까지 연결된 둘레 6km의 포곡형 산성이었으나 현재 산줄기의 성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파손되었다. 구한말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산 교육장으로 의의가 깊은 곳이며, 가까이엔 신라 진성여왕 때 창건하

           였다는 문수사가 있다.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용두레 마을

'강화용두레 노래'가 들려오는, 용두레의 본고장

‘용두레’ 는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의 논 (천수답 등)에 퍼 올리는 재래식 양수 방식으로 힘든 용두레 작업 시

흥겹게 부르던 농요에서 유래되었으며 황청리 용두레질 노래는 전통민속 놀이로 지난

1986년 전국민속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서 강화도의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앞으로 용두레마을에서는 연중행사로 용두레체험과 허수아비 관람, 가을에 용두레 햅쌀축제 등

다양한 이벤트로 도농 교류의 장으로 만들 계획이다.

황청리 용두레는 저 먼 들녘에 가득히 울려 퍼지는 할아버지들의 구수한 노래 가락에 맞춰 물을 푸는

아름다운 전통을 간직하고 있으며, 옛 부터 맑은 물이 흘러 큰 인물이 많이 난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마을이다.

마을 동쪽은 등산을 할 수 있는 국수산이 엄마 품처럼 다가오고 서쪽으로는 석모도와 서해 바다가 펼쳐져 있어

아름다운 서해 낙조를 관망할 수도 있다.

또한 넓은 농경지 끝자락의 바닷물이 빠지면 나타나는 갯벌에서 조개잡기와 망둥이 낚시 등을 즐길 수 있으며 겨울철에는 청둥오리와 기러기 등 철새도 많이 찾아와 또 하나의 멋진 볼거리를 제공하는 마을이다.

황청리 용두레마을은 매년 농촌 체험행사도 병행하고 있다.

봄에는 용두레마을 모내기 체험과 순무심기, 속노랑 고구마 심기체험 등이 있으며, 또 고슬고슬한 강화섬 쌀밥과 함께 간기능에 좋다는 구수한 순무김치, 야들야들한 상수리 묵 등 정이 듬뿍 담긴 시골음식을 맛볼 수 있다.

특히 마을 앞 바다에서 잡은 망둥이, 숭어 등 싱싱한 회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황청리 마을은 국내 최대 새우젓 생산지이며, 강화도새우젓축제가 열리는 외포리와 인접해 있으며,

국내 유명사찰인 ‘보문사’ 및 석모도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황청포구마을은 예로부터 강화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방문지이기도 하다.

자연과 더불어 바다와 갈매기가 항시 조화를 이루어 사람들을 반기는 곳이다.

역사와 유래

용두레마을은 강화군 석모도 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로 행정명은 내가면 황청1리 이며,

예로부터 맑은 물이 흘러 큰 인물이 많이 난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

용두레마을은 구수한 노랫가락에 맞춰 물을 푸는 아름다운 전통이 전해져 오는데 이 용두레란 영농방법이

기계화되기 이전에 낮은 곳에 있는 물을 높은 곳에 있는 천수답에 퍼 올리는 연장으로 농경지 구조에 알맞게

5단계까지 설치하여 물푸기를 하였던 재래식 양수시설이다.

용두레질 노래는 옛 부터 논에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용두레 질을 할 때 마을사람들이 다 같이 흥겹게 부르던,

용두레마을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승민요로, 1986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구수한 우리가락이다.

마을풍수

강화도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용두레 마을은 구수한 노래 가락에 맞춰 물을 푸는 아름다운 전통을 간직한 마을 이다.

또한 남쪽과 동쪽으로는 봉화산과 국수산으로 포근하게 둘러싸여 있고,

서쪽으로는 석모도와 서해바다가 펼쳐져 있어 아름다운 서해 낙조를 관망할 수 있는 곳이다.

삼암돈대

황청리 인근에 위치한 삼암돈대는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된 곳으로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 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접경 지역이나 해안 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 시설로 조선 시대에 축조한

강화 54돈대 중의 하나다. 강화도의 서쪽 해안 중앙, 석모도(席毛島)를 마주한 곳에 설치하였다.

계룡돈대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된 곳으로 돈대는 오늘날의 초소라고 할 수 있다.

계룡돈대는 강화 54돈대 중 유일하게 1679년(숙종 5년)에 설치된 것이라는 축조연대가 표시되어 있다.

황청낚시터

강화도 황청낚시터는 1993년에 축조되어진 준 계곡형 저수지로서 수면적은 약 2만3천 여 평이고 평균수심은 2.5m~4m 이며 최고수심은 15m가 넘는다. 주변경관은 깊은 산과 오래된 노송들로 이루어져 있어 아늑하고 조용하며 산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면 넓은 바다와 아름다운 섬이 보이는 좋은 낚시터다.

또한 준공 후 물이 한 번도 바닥을 들어 내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수량, 그리고 여름에는 맑은 공기로 반딧불을 볼 수 있으며 저수지에는 보리새우와 상류에는 오염물질이 없어 개울에는 아직 가재가 살 정도로 맑은 물을 유지하고 있다.
주 어종은 붕어와 잉어, 향어 등이며, 가족끼리 와도 불편함이 없도록 방가로와 민박 형 콘도가 잘 정리되어 있다.

국수산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선착장 부근에 있는 197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국수산은 이름난 영산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소원을 비는 천기신명한곳이며 산 중턱과 산 정상에는 옛 칠성당 터가 남아있다.

등산로와 약수터가 잘 정리되어 있으며,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해바다는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고

북쪽에는 북한의 송악산과 예성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MTB자전거 전용 경기장이 있어 자연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도시 속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마음껏 털어버릴 수 있다.

용두레마을 초입에는 황청포구마을이 외지관광객들을 반긴다. 외포리를 지나 2km가량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면 황청포구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입구에서부터 아담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배어나온다.

외포리의 유명세에 밀려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사실은 활어횟집 촌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포구에 정박해있는 크고 작은 어선들은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해질녘 일몰은 보는 이들의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충남 태안, 전북 부안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낙조명승지로 알려진 황청포구마을은 강화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도로를 끼고 있는 천혜의 드라이브 코스로도 유명하다.

 

 

 

 외포리 삼별초 유허비

 

대몽항쟁의 상징 삼별초

삼별초는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 때의 특수군대다. 1219년(고종 6년)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우(崔瑀)가 방도(防盜) 등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 (지금의 사설경비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 즉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뒤 야별초에 소속한 군대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고, 몽골병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의 조직을 만들었다.

                
 1993년 6월 1일 강화도 삼별초(三別秒) 연구회에서 삼별초의 기원이나 성격 항쟁의 원인과 의의 등

역사적인 해석이나 사료, 문헌을 수십 번의 토론과 답사를 거쳐 강화도가 삼별초의 출발지라는 점을 정립하고

삼별초 유허비를 내가면 외포리 선착장 망양돈대 아래쪽 공터에 세웠다. (위사진)

강화도는 외세의 침략과 압력의 시기에 중요한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특히 17세기 청나라의 침입때인 정묘· 병자호란과 19세기 프랑스와 미국에 의한 병인· 신미양요 때 역사적인 장소로 부각되었다.
또한 13세기 몽골의 침략에 장기항전이 전개되던 1232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는 39년간 고려의 수도로서, 그리고 항전의 지휘부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던 곳이다.

대몽항쟁의 거점 강화

1231년(고종 18년) 8월, 몽골의 고려 침입은 몽골의 동아시아 정복작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몽골의 침입으로 수도 개경이 포위되고 군사력의 한계를 인식한 고려정부는 몽골에 굴복하여 화의를 맺음으로써 일단 위기를 모면했다. 1232년 몽골군이 물러나자 고려정부는 곧 강화로 천도를 결정하고 즉각 이를 시행에 옮겼다. 곧 6월 16일 강화천도를 결정, 다음날 6월 17일 병력 2,000명으로 강도의 새 궁궐 조영을 조치하고, 7월 6일에는 고종이 개경을 출발하여 7월 7일 강화에 당도하였던 것이다. 강화천도가 얼마나 황급하게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만한 일이다.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강화천도는 몽골은 물론 고려정부 내에서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당시 이규보는 “도읍을 옮긴다는 것은 예로부터 하늘에 올라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처럼 전격적으로 가능했던 것은 순전히 당시의 집정자 이었던 최우에 의한 것이었다.

만일 당시 무인정권이 아니었다면 몽골의 침입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강화천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었다. 천도책의 논의과정에서 반대론이 속출하였으며, 국왕조차 달가와 하지 않은 강화천도가 매우 비상한 조건과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곧 무인정권은 그 정권의 운명을 천도에 걸었던 것이다.

1231년 몽골과의 전쟁 중 강화는 고려정부의 피난처로 떠올랐다. 그리고 당시의 집정자는 강화천도에 그 정치적 운명을 걸게 되었다. 강화는 당시 상황에서 어떤 지리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일까.

먼저 강화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3대 하천이 서해로 흘러가는 하구에 위치하고 있어 조석간만의 차이가 크며, 물 흐름의 변화가 심한 관계로 육지로부터의 출입이 쉽지 않았다.

둘째, 해로를 통한 지방 각처와의 교통이 가능하였으며, 특히 남부지역으로부터의 조세수취에 불편이 없었다. 셋째로는 우리나라 5대 섬의 하나이며 서해상에서는 가장 큰 섬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강화는 개경으로부터 불과 이틀거리에 해당할 정도로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몽골과의 항전을 위한 천도지로서는 더 이상 적합한 곳이 없었다.

최근 몽골군이 강화를 공격하지 못했던 이유를 규명하기 위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몽골군이 수전(水戰)에 약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겠지만, 강화가 갖는 지리적 이점과 강화천도 이후 무인정권이 구축한 강도의 방어시설 혹은 당시 강도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력의 존재가 보다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여하튼 여러 차례에 걸친 몽골군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이 39년간의 천도기간 중 강화도 공격을 전혀 시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강화에는 천도로 새로운 궁궐과 관아가 조영되고 도시가 들어서게 되었다. 적의 공격을 염두에 둔 방어성이 구축되고 군사들이 주둔하였다. 곧 40년 몽골에 대한 항쟁은 사실상 강화를 중심으로 전개된 거대한 드라마였던 것이다.

대몽항쟁과 삼별초

천도 이후 몽골과의 항전은 1259년까지 계속되었다. 천도 직전인 1231년까지를 포함하면 몽골의 고려 침입은 모두 6차(11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몽골의 침입이 장기적으로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강도를 거점으로 한 고려의 치열한 저항 때문이었다. 몽골군은 전라, 경상지역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참담한 침략을 자행하였지만, 일반 백성들은 섬이나 산성으로 집단 피난하며 그에 저항하였다.

지방 각처에서의 항전은 강도정부로부터 파견된 지방관 혹은 방호별감의 지휘 하에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지만, 지방민의 자율적인 방어전이 일반적이었다. 가령 1236년 안성의 죽주산성에서 적의 포위 공격을 치열한 접전 끝에 물리쳤던 것은 강도(강화도)에서 파견된 방호별감 송문주의 지휘에 의한 것이었다. 1253년 몽골군의 주력이 충주에 침입하였을 때, 당시 충주인들은 충주산성에 입보하여 방호별감 김윤후의 지휘로 몽골군의 포위 공격에 대항하였다.

이들은 70일간 대항한 끝에 몽골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고, 이로 인해 몽골군은 더 이상의 남진을

단념하고 고려에서 철군하고 말았다. 당시 강도정부는 지방의 주요 거점 지역에 방호별감을 파견하여

현지 수령들과 협조하여 대처하도록 하였다.

한편 지방민의 자율적 항전 사례도 적지 않았다. 1232년 몽골군 사령관인 살례탑을 사살한 것은

승려 김윤후가 지휘하던 용인의 처인성 부곡민이었으며, 1254년 경북 상주의 상주산성에서 몽골군 주력부대를

격파한 것은 승려 홍지가 지휘한 상주민이었다.

이 같은 지역주민들의 방어전 참여는 고려 대몽항쟁의 중요한 한 특징이었으며 이 때문에 살례탑을 사살한

1232년 처인성 승첩의 경우는 뒷날 임진왜란 때 이른바 의병운동의 선구적 사례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무인정권은 대몽항쟁의 과정에서 강화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경남 남해도에 그 분사를 설치하여

팔만대장경의 조판이라는 방대한 작업을 성취하기도 하였다. 대장경 조판은 몽골군의 침입을 종식시키기 위한

염원이 그 직접적 동기가 되었으며, 당시 고려가 축적한 불교 문화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위대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강도의 무인정권은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적 능력에 일정한 한계를 드러냈고 이 때문에

외교적 책략에 의한 현상 타개 노력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전쟁의 장기화는 몽골 지휘부와 고려정부 양측에 모두 초조감을 더해 주었다. 몽골 조정은 고려에 대한 요구를 점차 완화해가면서 그 복속을 기대했으며, 고려정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집권 유지에 한계를 나타내며 결국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몽골의 요구의 골자는 개경환도와 고려 국왕의 몽골 입조였다. 몽골은 고려의 복속의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이를 계속 요구하였다. 마침내 국왕 고종의 몽골입조 요구는 태자가 입조하는 것으로 양해되었으며 개경의 환도문제도 시간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요구의 완화는 고려의 치열한 저항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집권자가 사망하면서, 그 권력은 최씨의 자손에게 계승되었다. 그리하여 최우의 사후에는 아들 항에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손자 최의에게 차례로 계승되었는데, 1258년 정변에 의하여 최씨 대신 김준이 권력을 잡고, 그리고 이후에는 김준을 붕괴시킨 임연이 집권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것은 무인집권자의 독재권력 자체가 약화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전쟁의 장기화는 고려정부 내에서도 강경 일변도의 무인정권의 반몽책에 회의를 제기하는 주장이 점증하게 되었다. 이것은 고려 집권층 내부에서도 의견 상충이 야기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삼별초의 역사적 성격

고려정부에 있어서 삼별초의 봉기는 명백한 반역행위였다. 그리하여 이후 역사 기술에서 삼별초의 봉기는 ‘작란(作亂)’, 삼별초는 ‘역적(逆賊)’이나 ‘적당(賊黨)’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려의 대몽항전 및 삼별초의 항전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최근에 출간된 중학교 국사교과서에서는 고려 대몽항전 수행과정에서의 농민· 천민들의 역할에 주목하여 1231년 충주민의 항전, 1232년 처인성 부곡민의 항전 등을 강조하는 한편, 삼별초의 투쟁이 고려의 대몽항전을 계승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무인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반대하여 대몽항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강화에서 멀리 진도로 내려가 고려· 몽골 연합군과 싸웠다.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그러나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인의 자주 정신을 보여준 것이었다.

강화도는 강력한 군사력을 수반한 외세의 침입이라는 위기의 시대에 거의 40년간 전시수도로써,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장기 항전을 뒷받침하였던 것이다. 1270년 5월 무인정권의 붕괴와 개경 환도의 결정, 6월 삼별초의 진도 이동으로 강화는 역사의 중심무대에서 일단 물러나게 된다. 그해 8월 몽골사신 도렌카(頭輦哥)에 의하여 강도는 전소되었다. 당시 “도렌카가 사람을 시켜 강화 성내의 민가를 불태우니 무릇 미곡과 재화(財貨)가 타버린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최씨정권에 의한 전격적인 천도 결정, 국왕의 이거, 궁궐과 성곽과 관아 및 절 건물의 조영, 대몽항전의 지휘부, 밀집한 사람들, 바다를 막아 농지를 넓히는 간척 등 39년간 전개되었던 움직임이 일단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강도시대 39년의 경험은 그 후 외세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 때마다 그 위기를 피하는 천혜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1270년(원종 11년) 무인정권의 붕괴 및 국왕 원종의 개경환도 선포,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삼별초군이 봉기하고 나선 것은 이 같은 상반된 입장이 가져온 결과였다. 임연정권과 원종의 갈등은 임연에 의한 원종의 폐위로 나타났고, 결국 몽골 조정은 임연정권에 대해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여 원종의 복위를 성사시켰다.

몽골 입조 후 귀환 중이던 원종은 1270년 5월 강도에 사람을 보내 임연을 뒤이은 집정자 임유무를 처단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무인정권을 붕괴시켰다. 5월 23일 원종은 개경환도를 전격 선언하고, 5월 29일에는 이에 불응하는 삼별초의 혁파를 통고하였다. 고려의 반몽항전을 뒷받침해 왔던 삼별초는 크게 동요하였고, 6월 1일 장군 배중손, 노영휘 등은 왕족 승화 후 온을 새 임금으로 옹립하여 반몽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들은 원종의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어 사람들에게 “오랑캐 군사가 크게 이르러 인민들을 살육하려 한다. 무릇 나라를 지키려는 자는 모두 모이라”고 외치며 동조 세력을 규합하였다.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와 신의군의 3개 특수 부대를 통칭하는 것인데, 그것은 몽골 침입 직전인 1230년 집정자 최우에 의하여 설치되었던 ‘야별초'에서 기원한다. 당시 최우는 국가 공병의 군사력 약화 및 치안의 불안을 염려하여 이를 보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방법은 기존 5위 체제의 중앙군 조직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야별초라는 새로운 특수부대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최씨정권이 갖는 특수한 정치적 입장의 반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야별초는 국가의 공적 군사조직이면서도 무인정권과의 긴밀한 연결 관계를 갖는 정치군인의 성격을 태생적으로 공유하게 된 것이었다.

야별초 설치 이후 곧 몽골군의 침입이 개시되었고, 이에 따라 그 조직은 강도로 옮겨져 활동하였다. 야별초의 규모는 당시 제반 여건으로 더욱 확대되었고, 이에 몽골군의 침입이 계속 중이던 1253년 좌별초와 우별초의 2개부대로 분리 운영하였다. 또한 몽골과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여 온 자들을 중심으로 신의군이라는 부대를 새로 창설하였다. 결국 군사력의 보강 내지 치안유지를 목표로 하였던 야별초의 창설은 몽골의 침입이라는 상황에 의하여 그 필요성이 증가함으로써, 고려 중앙군 체계를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

야별초 혹은 삼별초는 정치적으로 무인정권과의 친연성을 부정할 수 없었고, 이 같은 부대의 성격에 의하여 자연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반몽책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능을 하였다. 1270년 원종은 무인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였으나, 삼별초를 해체하지는 못했다. 삼별초는 원종의 개경환도와 몽골에의 복속에 정면 반대하고, 원종을 대신하는 신정부를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각기 고려의 정통성 계승이라는 명분을 두고 대결하였다. 삼별초의 경우 몽골에 복속한 개경정부는 더 이상 고려의 정부가 아니라는 것이며, 원종의 개경정부는 삼별초를 고려 왕권에 도전하는 반역집단으로 규정하였다.

왕족 승화 후 온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간단한 조직을 정리한 삼별초는 그 거점을 강화로부터 멀리 떨어진 서남해안의 섬, 진도로 옮겼다. 이들 삼별초 반몽세력은 봉기 직후인 1270년 6월 3일 강화를 출발하여 두 달 후 진도에 정착하였다. 이로써 고려에서는 몽골에 항복한 원종의 개경정부와 이에 반발하며 무인정권의 반몽책을 계승하는 삼별초의 진도정부로 두 개의 정부가 대립하게 되었다.

진도를 거점으로 한 삼별초는 나주· 전주 등 전라도 일대와 경상도 남부지역을 그 수중에 넣어 개경정부에 대항하려는 계획이었지만, 이것은 성취되지 못하였다. 또한 개경정부와 몽골의 군사력에 대응하는 한 방편으로 일본과의 연합에 의한 방어선 구축을 기도하였으나 이 역시 일본 측의 소극적 반응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우세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제해권을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남부 연안지역에 그 세력을 떨치면서 개경에 이르는 조운 교통로를 마비시키는 등 개경정부에 상당한 위협을 가하였다.

진도 이외에도 완도, 혹은 남해도 등지에 삼별초의 유력한 부대가 주둔하여 서해 혹은 남해의 제해권을 축으로 하는 넓은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1271년 5월 몽골과 개경군의 총공격으로 진도는 함락되고 일부 세력은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김통정을 지휘자로 하여 1273년까지 항전을 지속하였다.

진도의 용장성, 그리고 제주도의 항파두성은 당시 삼별초의 거점성 이었으며, 한라산 기슭 ‘붉은오름’이라는 산과 삼별초 최후의 지도자 김통정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출처 : 강화사랑 팡팡공인
글쓴이 : PangP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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