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태조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3:07


왕위쟁탈전과 신라 말의 혼란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신라는 이후 1세기 동안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귀족들은 개인적으로 사찰을 지을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고, 그 가운데는 3천 명에 가까운 노비를 부리는 대귀족도 있었다.

신라 혜공왕(765~780년)대를 기점으로 수많은 반란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왕권을 비롯한 중앙정부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반란의 와중에 임금이 살해되고, 싸움에서 승리한 자가 임금이 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150여 년간 무려 20여 명의 임금이 바뀌었고, 즉위한 지 1년이 못 되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822년 웅천(공주) 도독 김헌창은 왕위 계승권자인 자기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가 하면 45대 신문왕은 왕위쟁탈전에서 패하여 청해진(완도)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장보고의 힘을 빌려 즉위한 일도 있었다. 신라의 통일 위업을 달성하는 데 큰 힘이 되었던 화랑마저도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 속에서 유흥과 향락에 빠져들었다. 신라는 점점 속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최치원과 같이 쓰러져가는 천년 왕국을 되살리고자 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러한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최치원이 선택한 길은 신라를 떠도는 방랑 생활이었다. 52대 효공왕 무렵에 신라는 겨우 경주 일원만을 지키는 힘만 남았다. 그 대신 지방 세력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고 중앙정부는 이들을 견제할 능력이 없었다.

이들 지방 세력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궁예와 견훤이었다. 이들이 큰 세력을 이루다 나라를 세움으로써 한반도의 역사는 신라·후백제·태봉이라는 후삼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중원에서 뿌리를 내린 고구려와 일본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백제를 통일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무너뜨린 천년 왕국 신라. 그런 신라가 통일 시대 이후 불과 2세기 만에 바람 앞의 등불처럼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고려를 건국할 용의 후손, 왕건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王建)은 신라 헌강왕 3년(877) 정월 14일 송악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악 지방 호족인 용건(龍建, 나중에 왕융으로 개명)이며 어머니는 한씨 부인이다.

왕건의 아버지 융은 몸집이 크고 아름다운 수염을 길렀다. 도량이 넓어 삼한을 통일하려는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융은 꿈을 꾸었다. 아름다운 미인이 꿈속에 나타나 아내 되기를 약속했다. 그는 먼 훗날 송악산에서 영안성으로 가는 길에 한 여인을 만났다.

“꿈속에서 만난 여인이 바로 저 여인이구나.”

융은 곧장 그 여인에게 청혼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융의 부인을 꿈속에서 본 여인이라 하여 몽부인이라고 불렀다. 이 여자는 삼한의 어머니가 되었기에 성을 한씨(韓氏)로 택했다.

융은 송악산 옛집에서 여러 해 동안 살다가 새집을 남쪽에 지었다. 그 터는 곧 연경궁 봉원전(延慶宮 奉元殿) 터이다. 그 무렵 동리산 조사 도선(道詵)이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一行, 당나라의 유명한 승려로 풍수지리의 대가)의 지리법을 배워 돌아왔다. 그는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까지 왕서 융의 새집을 보고 말했다.

“쯧쯧, 기장을 심을 터에 어찌 삼을 심었는고?”

한씨 부인이 마침 그 말을 듣고 남편인 융에게 이야기하니 천방지축 급히 따라가서 그와 만났는데 한 번 만난 후에는 단박 구면과 같이 되었다. 드디어 함께 곡령에 올라가서 산수의 내맥을 연구하며 위로는 천문을 보고 아래로는 시운을 살핀 다음 도선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땅의 지맥은 북방(壬方) 백두산 수모 목간(水母木幹)으로부터 내려와서 마두 명당(馬頭名堂)에 떨어졌으며 당신은 또한 수명(水命)이니 마땅히 수(水)의 대수(大數)를 좇아서 六六三十六(6×6=36) 구(區)의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大數)에 부합하여 다음해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에게 왕건(王建)이라는 이름을 지을 것이다.”

도선은 그 자리에서 봉투를 만들고 그 겉에 쓰기를 “삼가 글을 받들어 백 번 절하면서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주인 대원 군자(大原君子) 당신께 드리노라.”라고 하였으니 때는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3년 4월이었다.

융은 도선의 말대로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달부터 한씨 부인이 태기가 있어 왕건을 낳았다.

민지의 《편년강목》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태조의 나이 17세 되었을 때에 도선이 다시 와서 만나기를 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은 이 혼란한 때(百六之運)에 상응하여 하늘이 정한 명당에 났으니 삼국 말세(三季)의 창생들(백성들)은 당신이 구제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자리에서 도선은 태조에게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법, 유리한 지형과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天時) 법, 산천의 형세를 바라보아 감통보우(感通保佑)하는 이치 등을 가르쳐 주었다.

왕건의 탄생을 예언하고 그에게 천하를 얻을 수 있는 비결을 전해 준 도선(道詵, 827~898)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도선은 풍수지리설을 발전시켜 고려 건국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훗날 태조 왕건은 죽음을 앞두고 〈훈요십조〉에서 “도선이 정한 곳이 아니면 절을 짓지 말라.” 하였다고 하니 왕건이 도선을 얼마나 숭모했는지 알 만하다. 도선은 화엄사에서 득도한 후 많은 제자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고려 숙종은 그를 왕사(王師)로 추존했다.

십대 후반의 왕건이 도선을 만난 일화 외에는 그의 소년 시절이 어떠했는지 알려진 기록은 없다. 다만, 이 시기는 신라 정치가 문란하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던 때였으므로 소년 왕건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을 것이다. 예컨대 왕건이 13세 되던 진성여왕 3년(889)에는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난 시기였고, 16세가 되던 진성여왕 6년(892)에는 견훤이 완산주에서 세력을 키웠다. 또한 895년에 궁예가 강원도 일대에서 독립 세력을 키우고 있을 무렵은 그의 나이 19세였다.

라이벌 궁예와의 만남

왕건의 나이 19세였던 895년, 이 무렵 궁예는 강원도에서 한강 일대까지 세력권을 펼쳐 나가고 있었다. 왕건이 살던 예성강 일대 여러 호족들은 궁예가 세력을 뻗치자 아연 긴장하며 속속 그에게 귀부하기 시작했다. 왕건의 부친 왕융은 당시 송악군의 사찬(沙粲)이었는데 때마침 궁예의 세력이 예성강 일대에까지 뻗쳐오자 다른 호족들과 마찬가지로 궁예 밑으로 들어갔다.

왕융이 귀부해 오자 궁예는 즉시 그를 금성태수로 삼고 맏아들 왕건에게는 발어참성을 쌓게 하여 그곳 성주로 삼았다. 이때가 왕건의 나이 약관 20세였다. 궁예와의 운명적 만남을 시작으로 왕건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궁예의 부장이 된 왕건은 수많은 전쟁터를 온 몸으로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우기 시작했다. 광주(廣州), 충주, 당성(경기 남양), 청주, 괴양(괴산) 등 여러 고을을 평정하여 궁예에게 바쳤다. 왕건의 활약에 흡족한 궁예는 그를 아찬으로까지 승진시켰는데 이후로도 왕건의 승전보는 계속 이어졌다.

효공왕 7년(903)에는 수군을 거느리고 금성(뒤의 나주) 일대로 가서 10여 군현을 공략, 점거하기도 했고, 날로 세력을 더해가는 후백제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서 견고한 보루를 쌓기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나주는 왕건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요충지로서 부상하게 되는데 나주를 평정한 왕건은 곧 남해 진도마저 확보하여 견훤의 세력이 남쪽으로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이로부터 3년 후, 정예부대 3천을 이끌고 상주에 사화진을 친 왕건은 견훤과 여러 차례 대적하며 백전백승을 거두었다. 이때 거듭 패한 견훤에게 있어서 왕건은 마치 망령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궁예의 성장에는 실상 왕건의 공로와 지략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그의 전과는 후백제의 왕 견훤으로부터 얻어낸 것이기에 더욱 값진 것이었다. 더욱이 뛰어난 외교가이기도 한 견훤이 중국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려 한다는 정보를 재빨리 입수하여 이를 저지한 것도 왕건이었다.

압록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압록은 과거 무진주라 불리었으며, 견훤이 세력을 떨치던 곳이었다.

해상 세력 출신답게 왕건은 뛰어난 해상 제독이기도 했다. 함선 1백여 척과 말을 타고 달릴 정도로 큰 대선 10여 척을 보유했던 그는 이 전함들을 이끌고 나주를 근거로 서남해 일대를 평정하여 궁예 세력의 확장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물론 이러한 왕건의 충성에 궁예도 상당한 신뢰를 표시하며 파진찬 겸 시중으로 승진시키기도 했다. 이렇듯 뛰어난 공적을 세운 덕에 수상의 지위까지 오른 왕건은 공평무사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주위의 신임을 더욱 얻어 나갔다.

그러나 제아무리 뛰어난 공적을 쌓았다 하더라도 왕건은 일개 궁예의 부하장수일 뿐이었다. 이 시기 궁예의 위세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궁예는 한반도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한강 유역과 임진강 유역을 점령했으며 왕건의 해상 활동을 통해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는 등 한반도 통일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궁예는 철원으로 도읍한 905년경을 전후로 자신의 세력을 과신하며 주위를 의심하기 시작, 급기야 신하들을 죽이고 부인 강씨마저 죽이는 등 폭군의 길을 걷고 있었다. 따라서 철원 땅에서 왕건은 항상 신변의 안전을 도모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이런 이유로 914년 왕건은 날로 포악해져 가는 궁예를 뒤로 하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대외원정을 표방하며 나주로 떠났다.

궁예를 피해 나주에 온 왕건은 자기 세력 확충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 지역을 견훤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민심을 얻어내는 한편, 정주 지역 대부호인 유천궁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향호 세력과 결탁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서해 해상 세력권은 왕건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왕건이 나주에서 돌아와 해상의 경제적 이득과 군사 방책들을 보고하니 궁예가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었다.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견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궁예는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궁예의 칭찬에도 왕건은 불안할 따름이었다.

궁예의 의심병은 신하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나는 미륵 관심법(彌勒觀心法)을 체득하여 부녀들의 음행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만일 나의 관심법에 걸리는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하겠다.”

그는 3척이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 놓고 죽이고 싶은 자가 있으면 곧 그것을 달구어 여자의 음부를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게 하여 죽이곤 했다. 부녀들의 공포와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였다. 그때에 궁예는 처형한 사람들로부터 몰수한 금은보물과 가재도구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는 성난 눈으로 한참이나 왕건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음모한 것은 웬일인가?”

왕건은 얼굴빛을 조금도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능히 관심(觀心)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 나는 지금 곧 입정(入定)을 하여 보고 나서 그 일을 이야기하겠다.”

궁예는 곧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이나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그때에 장주(掌奏, 벼슬 이름) 최응(崔凝)이 옆에 있다가 짐짓 붓을 떨어뜨리고는 뜰로 내려와 그것을 줍는 척하고 왕건의 곁으로 달음질하여 지나가면서 귓속말로 말하였다.

“왕의 말대로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왕건은 그제야 궁예의 속마음을 깨닫고 엎드렸다.

“사실은 제가 모반하였으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허허허, 그대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상으로 궁예는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를 주었다.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

궁예가 막 나주에서 돌아온 왕건에게 ‘미륵관심법’을 빌미삼아 역모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왕건의 나주행은 단순한 신변보호 차원만이 아닌 자기 세력의 확충이 더 큰 요인이었던 것이다.

궁예 미륵불

물론 왕건이 없었던 역모죄를 시인함으로써 오히려 궁예의 사면을 받아내었지만, 실제 왕건이 역모를 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역모를 안 궁예가 고도의 술책으로 왕건을 협박한 것이 이른바 ‘미륵관심법’인 듯하다. 이 일을 계기로 왕건은 918년에 궁정 쿠데타를 일으킬 때까지 궁예의 감시망을 피하며 숨죽이는 처신을 계속해야 했다.

고경문의 예언

왕건이 궁예 휘하에서 살얼음판을 걷고 있을 즈음, 한 가지 미묘한 사건이 발생한다. 918년 3월의 일이었다. 중국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라는 사람이 시장에서 갑자기 웬 사람을 만났다. 그는 얼굴이 이상하고 수염과 머리가 희며 옛날 관을 쓰고 거사(居士)가 입는 옷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는 도마 세 개를 들고 오른손에는 옛날 거울 한 개를 들었는데 거울은 사방이 1척 가량이었다.

그 사람은 왕창근을 보고 다가와 물었다.

“내 거울을 사겠느냐?”

“네.”

왕창근은 쌀 두 말을 주고 거울을 샀다. 노인은 거울 값으로 받은 쌀을 길가 거지들에게 다 나눠주고 가버렸는데 그 빠르기가 바람과도 같았다. 왕창근이 거울을 시장 담벼락에 걸어 놓았는데 햇빛이 옆으로 비치는 순간, 가늘게 쓴 글이 은은히 보였다. 이상하게 여겨 거울에 나타난 글씨를 읽어보았지만,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거울에 비친 글의 내용은 매우 난해하여 마치 고시(古詩)를 방불케 했다.

삼수 가운데와 사유(동서남북) 아래, 옥황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보냈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칠 것인바 이를 일러 운수가 일삼갑에 찼다고 하는 것이다. 밤이면 하늘에 오르고 낮이면 세상을 다스려 자년이 되면 중흥 위업을 이룩하리. 종적과 성명을 감추거니 혼돈 속에서 누가 ‘신’과 ‘성’을 알리요. 부처님 뇌성이 진동하고 신령한 번개가 번쩍이며 사년(已年)에 두 용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형적을 드러내리. 지혜로운 자는 이것을 보고 우매한 자는 보지 못하나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따르면서 사람들을 데리고 정벌을 한다. 때로는 성하고 때로는 쇠하기도 하나니 이렇게 하는 것은 악독한 잔재를 없애기 위함이다.
이 용의 아들 서넛이 여섯 갑자에 대를 바꾸어 가면서 계승하리.
이 사유(동서남북)에서 기필코 ‘축’을 멸하리니 바다 건너오는 때는 ‘유’를 기다려라. 이 글을 만일 현명한 임금에게 보이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고 임금은 길이 행복하리. 나의 기록은 전부가 1백 47자이다.

三水中四維下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此謂運滿一三甲
暗登天明理地 遇子年中與大事 振法雷揮神電 於已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一則現形黑金東 智者見愚者盲 與雲注雨與人征
或見盛或見衰 盛衰爲滅惡塵滓 此一龍子三四遞代相承六甲子
此四維定滅丑 越海來降須待酉 此文若見於明王 國秦人安帝永昌
吾之記凡一百四十七字

거울의 문구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왕창근은 그 길로 곧장 궁예에게 달려갔다. 거울을 본 궁예도 그 뜻이 궁금하여 거울을 판 노인을 찾게 했으나 종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다만 왕창근이 수소문한 끝에 기이하게도 동주(東州, 철원) 발삽사(勃颯寺)의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불상 앞에 토성(土星)을 맡은 신의 옛날 소상이 있는데 그것이 거울 주인의 모습과 같이 그 좌우 손에는 역시 도마와 거울을 들고 있었다. 왕창근이 기뻐하여 그 사실을 자세히 써서 올리니 궁예는 경탄하고 이상히 여겨 글을 잘 아는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에게 그 글을 해석하게 하였다.

문제의 고시를 받아든 송함홍과 백탁, 허원은 다음과 같이 그 뜻을 풀이해 냈다.

“‘삼수중과 사유 아래 옥황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 마한이라는 뜻이요. ‘사년에 두 용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형적을 드러내리.’라는 것은 ‘청목’은 소나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으로 이름을 삼은 사람의 자손이 임금이 되리라는 말이다. 왕 시중(왕건)은 왕으로 될 기상이 있는데 아마 그를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흑금’이라는 것은 철인데 그것은 지금 국도 철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궁예왕이 처음 여기서 일어났는데 결국 여기서 멸망한다는 말일 것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칠 것’이라는 것은 왕 시중이 임금이 된 후에 먼저 계림(신라)을 점령하고 다음에 압록강 강안까지 회복하리라는 뜻이다.”

이렇듯 문제의 내용을 해독해낸 이들이지만, 그렇다고 이 해석을 그대로 궁예에게 알릴 경우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왕은 시기가 많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일 이 글을 사실대로 고한다면 왕 시중이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요, 우리도 역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결국 송함홍 등은 듣기 좋은 말로 적당하게 꾸며서 궁예에게 알렸을 뿐이었다.

의기를 들고 일어나다

궁예의 폭정이 철원 땅을 뒤덮을 무렵인 918년 6월,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은 폭군 궁예를 몰아내고 당시 백성의 신망을 받고 있던 왕건을 추대하고자 비밀리에 왕건을 찾아갔다.

“왕 시중, 지금 왕은 처자를 살해하고 신하들을 마구 죽이므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암군(暗君)을 폐하고 명군(明君)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니 왕 시중께선 저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의 일을 본받아 행하십시오.”

“나는 충의로운 신하라고 항상 자부해 왔는데, 지금 주상이 포악하다고 두 마음을 가질 수는 없소. 무릇 신하가 임금을 바꾸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나같이 부덕한 자가 감히 탕왕과 주왕의 일을 본받을 수 있겠소?”

왕건은 낯을 붉히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내심 반승낙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그 뜻을 간파한 홍유가 다시 왕건을 설득하고 나섰다.

“때를 만나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쉽소이다. 더욱이 하늘이 주는 것을 얻지 않으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는 법이올시다. 지금 백성들은 모두 왕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있고 게다가 전날에 왕창근이 지녔던 거울의 예언도 있으니 어찌 가만히 엎드려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소?”

언변 좋은 홍유의 말에 왕건은 잠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밖에서 이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던 부인 유씨가 나타나 왕건을 독려했다. 부인 유씨는 부호 유천궁의 딸로 일찍이 왕건이 나주 정벌에 가서 얻은 부인인데, 장부 못지않은 기개가 있었다.

“의병을 일으켜 포학한 임금을 바꾸는 것은 예전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수들의 의논을 들으니 저도 분발이 되는데 하물며 대장부는 어떻겠습니까?”

말을 마친 유씨는 서둘러 갑옷을 가져다가 왕건에게 손수 입혀 주었다. 왕건이 갑옷을 다 입자 홍유 등 4명의 장군이 왕건을 부축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왕건을 지지하는 장군들이 그가 나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왕건의 모습이 보이자 이들은 일제히 “왕공이 의기(義旗)를 들고 일어났다.”라며 크게 외쳤다. 순식간에 왕건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몰려와 그 수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와! 와!”

추종자들은 왕건 일행보다 먼저 궁예의 궁성에 도착해 북을 울리고 고함치며 분위기를 북돋았다.

그날 밤, 궁예를 권좌에서 단숨에 몰아낸 왕건의 쿠데타는 문자 그대로 무혈혁명이었다. 그만큼 민심이 이미 궁예에게서 떠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거사 다음날인 918년 6월 15일, 왕위에 오른 왕건은 국호를 ‘고려(高麗)’로 정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혹을 약간 넘긴 42세였다. 이듬해 태조 왕건은 도읍을 철원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옮겼다.

그런데 고려라는 국호는 태조 왕건이 처음 지은 것은 아니고 태조가 전에 섬기던 궁예의 첫 국호가 고려였다. 당시 궁예가 국호를 고려로 택한 것은 견훤의 영향 때문이었다. 옛 백제 땅에서 일어난 견훤은 그곳 인심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국호를 백제라고 명명했는데 이를 흔히 후백제라고 부르는 것은 옛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궁예는 이것을 그대로 본떠 효공왕 5년(901)에 ‘옛날 신라에게 망한 고구려를 다시 세운다.’는 슬로건 아래 국호를 고려라고 했다. ‘고려’는 궁예의 말대로 고구려의 약칭이었고 때문에 중국사적은 예로부터 고구려를 흔히 고려로 쓰곤 했다. 궁예는 뒤에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 태봉으로 고쳤는데 뒷날 고려왕조는 마치 ‘고려’ 국호를 태조가 처음 지어낸 것처럼 꾸몄다. 왕건이 굳이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은 무엇보다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식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고려의 도읍지 송악은 한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수도로서는 매우 좋은 지리적 요건을 갖춘 곳이었다. 또한 송악은 태조 왕건의 선조 대부터 대대로 살아왔던 땅인데다가 풍수지리설에 ‘마두명당(馬頭明堂)’, ‘부소명당(扶蘇明堂)’, ‘송악명당’ 등으로 불리는 명당지였다. 송악의 북쪽에는 송악산과 천마산이 있고 좌우로 임진강과 예성강 두 강이 흐르고 있어 풍수지리상 최적의 조건을 타고난 지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강화도, 교동 등의 섬이 마치 방파제처럼 앞바다에 놓여 천연의 요새지로도 손색이 없었다. 이전 수도였던 철원 지역이 수륙 교통이 없어 교통상 난점이 있었던 반면, 송악은 예성강이라는 수륙의 큰 관문이 있어 수도로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만월대

개성시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옛 고려의 왕궁지(王宮址)

고려 수도가 된 송악은 이후 개주(開州)라고도 불렸는데 뒤에 수도권이 확장됨에 따라 개성부로 고쳐지고 때에 따라 개경(開京), 황도(皇都), 송경(松京), 송도(松都) 등의 별칭도 쓰이면서 고려왕조와 함께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견훤과의 신경전

태조 8년(925) 조물성 전투를 중심으로 고려가 승기를 잡자 후백제의 견훤은 외조카인 진호를 인질로 내놓으면서 휴전을 청하였다. 이에 태조도 종제인 왕신을 인질로 교환하는 동시에 10살 연상인 견훤을 ‘상부’라 불렀다. 그런데 조물성 전투에서 누가 먼저 휴전 요청을 했는가는 기록에 따라 다르게 전하고 있다. 《고려사》에는 견훤이 먼저 화의를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는 그와 반대로 견훤의 군사가 매우 강하자 태조가 짐짓 화의를 맺고자 왕신을 인질로 후백제에 보냈다고 되어 있다.

화의 신청자가 누구였든 간에 고려와 후백제의 평화는 반년도 채 못가서 깨지고 말았다. 앞서 고려에 왔던 후백제의 인질 진호가 갑자기 병을 얻어 죽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태조가 시랑 익훤을 시켜 진호의 시체를 보내 주었더니 견훤은 고려에서 그를 죽인 것으로 생각하여 인질 왕신을 죽이고 웅진 방면으로 진격하여 왔다. 태조는 여러 성에 명령하여 성을 고수하고 나와 싸우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에 신라 왕이 사절을 파견하여 말했다.

“견훤이 맹약을 위반하고 고려에 출병하였으니 하늘이 반드시 그를 돕지 않을 것이다. 만일 대왕이 그에 반격하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패망할 것이다.”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죄악이 가득 차서 스스로 넘어질 것을 기다릴 뿐이다.”

이 일에 앞서 견훤은 “절영도의 좋은 말이 고려로 가면 백제가 멸망한다.”고 하는 도참(예언)을 듣게 되었다. 견훤은 일전에 태조에게 말을 선물한 것이 몹시 후회되어 사람을 시켜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태조는 웃으면서 말을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후삼국 통일전쟁이 불붙다

후백제 인질 진호의 죽음을 계기로 견훤과 태조 왕건은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지간이 되었다. 은인자중하던 태조도 이듬해인 927년에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운주(홍성)와 웅진을 공략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로 돌아섰다.

태조의 파상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견훤은 예봉을 신라로 돌렸다. 견훤이 신라의 근품성을 불사르고 고울부로 쳐들어가자 태조는 신라를 도와 견훤을 공략하였다. 그러는 사이 태조는 영창과 능식에게 수군을 이끌고 강주(진주)를 공략하게 했다. 이때 강주에는 왕봉규가 독립 세력을 이루고 자칭 지강주사라 하면서 후당과 통하고 있었다. 영창과 능식은 왕봉규 세력을 진압하고 그 근해의 도서를 경략하고 돌아왔다. 태조가 강주를 경략한 것은 나주와 강주를 잇는 해상 세력을 구축하여 견훤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전세는 고려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태조가 고사갈이성(문경) 방면으로 진군하자 그곳의 성주 흥달이 자진해서 성문을 열고 투항하였다. 그러자 주변의 여러 성주들도 후백제에 등을 돌리고 고려로 속속 투항하기 시작했다. 고사갈이성은 태백산맥으로 넘어가는 관문으로 이로써 태조는 경상도를 관통할 수 있는 완전한 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제 한반도는 고려와 후백제의 싸움터로 변하여 신라는 단지 경주만 다스리는 일개 지방국으로 전락했다. 신라는 고려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의지할 곳 없는 경애왕은 틈만 나면 태조 왕건에게 견훤의 음험함을 지적하면서 후백제와 화친하지 말 것을 충고하곤 했다.

후삼국 통일 지도

신라의 이러한 태도에 불안과 증오감을 품은 견훤은 질풍노도처럼 대군을 휘몰아 신라로 쳐들어갔다. 그때에 경애왕은 왕비, 궁녀, 종실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연회를 차려 즐겁게 놀고 있었다. 갑자기 적병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경애왕은 왕비와 후궁 몇을 데리고 숨을 곳도 없이 달아나고 있었다. 견훤은 신라 궁궐을 마음껏 약탈하고 경애왕을 찾아내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다. 경애왕은 겨우 임금의 체면을 세우는 자결의 허락을 받아내어 사치와 향락의 끝을 죽음으로 마무리했다. 견훤의 행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비를 겁탈하고 부하들을 시켜서 궁녀들을 강간하게 하였다.

그런 후 견훤은 경애왕의 고종사촌이며 헌강왕의 외손인 김부(金傅)를 신라 왕으로 세웠다. 그가 신라 마지막 임금인 제56대 경순왕이다. 견훤이 신라를 갑자기 습격한 것은 고려와 친한 경애왕 중심의 신라 정권을 타도하고 신라에 새 정권을 세우려고 한 것이다. 견훤은 경순왕을 세운 후 많은 인재를 인질로 잡아가고 재물과 보물도 훔쳐 갔다.

포석정

신라 왕족이 쉬기 위해 만든 곳.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이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 중에 견훤의 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경애왕의 사망소식을 들은 태조 왕건은 치를 떨었다. 곧 사신을 신라에 파견하여 조제(弔祭)를 지내게 한 다음 몸소 5천의 정예군을 이끌고 견훤을 공산동수에서 기다리다 요격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태조는 패하고 말았다. 태조는 아끼던 신숭겸과 김낙 두 장수를 잃고 자신은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목숨만 건졌을 뿐이었다. 의기양양해진 견훤은 태조가 아끼던 장군 김낙의 목을 베어 미리사라는 절 앞에다 내다버렸다.

승리에 도취한 견훤은 태조에게 다음과 같이 야유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이제 평양성의 다락에 활을 걸고 패강(예성강)의 물을 말에게 먹여야겠다.”

이에 태조도 견훤을 폭군에 비유하며 쏘아붙였다.

“해를 돌아오게 할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듯이 신라를 도울 것이다.”

패전도 패전이지만 신숭겸과 김낙을 잃은 태조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에 태조는 김낙의 아우 김철과 신숭겸의 아우 신능길, 아들 신보를 모두 원윤으로 삼고 지묘사를 창건하여 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신숭겸 유허비와 용산재

왕건의 부하로서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한 신숭겸은 후백제군과의 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하여 죽임을 당했다.

927년 12월, 승리감에 도취된 견훤은 후백제와 고려를 사냥개와 토끼에 비유하며 의기양양해 했다.

“구멍에 든 토끼와 사냥개가 다투다가 서로 피곤해지면 마침내 반드시 남의 조롱을 받는 것이요.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는 것은 역시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니 마땅히 고집을 경계할 것이요, 스스로 후회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견훤의 오만은 과장이 아니었다. 당시 후백제는 군사력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의 오월국은 물론이고 거란국과도 국교를 트는 등 활발한 대외관계를 유지하여 국제무대에서는 고려보다 한발 앞서고 있었다.

고창 전투의 승리

공산동수에서 태조가 견훤에게 패한 뒤로 고려와 후백제는 자주 충돌을 일으켰다. 928년 11월 견훤이 고려의 부곡성을 공격했다. 그 다음해에는 의성부와 순주에 침입하여 성주 홍술을 죽였다. 또 그해 12월에는 고창군(안동 부근)을 포위했다. 이 싸움에서 고려의 유금필이 오랜만에 대승을 거두었다.

태조 13년(930) 정월, 왕건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 병산으로 가 의성 북쪽의 고창군(안동)을 치려 했다. 이를 위해 견훤은 석산에다 진을 쳤는데 태조는 석산의 코앞인 병산에 진을 치고 견훤과 맞서 대승을 거뒀다. 이것이 바로 고려와 후백제의 운명을 결정지은 유명한 고창 전투였다. 양군이 격전을 거듭한 끝에 후백제군 8천여 명이 죽고 견훤은 패주하였다.

태조의 고창 승리는 후백제의 판도 확장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순왕에게는 신라의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자못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견훤을 의지했지만, 이제 태조와 화친하는 수밖에는 다른 대비책이 없었다. 경순왕은 태조가 고창에서 승리하자마자 사신을 보내 축하하고 왕건과의 회동을 청했다. 그러나 왕건은 싸움터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이듬해 2월 신라가 다시 사신을 보내어 회견을 청하자 왕건은 50여 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경주로 갔다.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교외까지 나와 맞이하고 임해전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건이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었다. 그러자 경순왕은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다.

“우리나라가 불운하여 견훤에게 짓밟혔소. 이보다 더 원통하고 슬픈 일이 어디 있겠소?”

이 말에 좌우의 백관들도 모두 흐느꼈다. 왕건도 눈물을 흘리며 위로의 말을 건네었다.

“서로 힘을 합하여 적을 물리치도록 합시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태조는 경주에서 십여 일을 묵은 후 고려로 돌아갔다. 경순왕은 혈성까지 따라 나와 전송했다. 그리고 당제 유렴을 인질로 삼아 왕건을 따르게 했다. 전격적인 신라 방문으로 태조는 경순왕을 비롯한 신라인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았다. 견훤과 태조에 대한 신라인의 느낌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옛날에 견훤이 왔을 적에는 늑대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이 오니 마치 부모를 뵙는 것 같구나.”

백제의 내분과 견훤의 귀부

태조가 고창 승리를 계기로 일대 전환을 꾀하고 있을 시점, 후백제에 내분이 일어났다. 먼저 태조 15년(932), 견훤의 심복이던 장군 공직이 고려에 귀부한 사건이 일어났다. 태조 8년(935)에는 궁정 쿠데타마저 일어났다. 이처럼 후백제의 불행은 고려가 아닌 왕실 내부에 있었다.

견훤은 아들이 10여 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 넷째 아들 금강(金剛)을 사랑하여 견훤은 왕위를 넷째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금강의 형인 신검(神劍)·양검(良劍)·용검(龍劍) 등이 불만을 품고 견훤을 금산사(김제)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뒤 맏아들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금산사 석연대

아들 신검에 의해 견훤이 갇혔던 금산사는 통일신라 시대 후기에 건축된 사찰이다. 석연대는 호화스러운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이행되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금산사에 석 달이나 갇혀 있었다. 6월에 그곳을 탈출하여 고려의 속령인 나주로 몸을 피했다. 여기서 그는 전날의 라이벌 태조에게 망명의 뜻을 알렸다.

뜻밖에 견훤의 망명의사를 접한 태조는 감격하여 즉시 장군 유금필과 대광 만세를 보내 견훤을 맞아오게 했다. 태조는 일찍이 상부라 존칭했던 것을 상기하며 견훤을 상부로 대접했으며, 남궁(南宮)이란 대저택을 주었다. 그리고 그의 지위를 모든 백관의 위에 두고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러나 한때 천하를 포효하던 대왕 견훤의 신세로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호남 일대를 주름잡던 영웅호걸의 말로치고는 기구하기 짝이 없다 하겠다. 이제 천하의 대세는 결정되고 태조의 통일 작업은 매우 빠르게 진전되어 갔다.

신라왕조의 최후

견훤의 귀부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신라 경순왕이었다. 국운이 기울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경순왕은 망설이다가 결단을 내렸다. 경순왕은 친히 군신회의를 열었다.

“짐이 생각하건대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나라는 무고한 백성을 희생시킬 뿐 다시 일어설 힘이 없소. 이에 짐은 차라리 고려에 선양할까 하오.”

“아니 되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제라도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 사직을 지킬 길을 모색해야 하옵니다. 선양이란 말씀을 거두어 주소서.”

“짐은 아무 계획도 없소. 좋은 계책이 있으면 말해 보오.”

그러나 충신·열사를 자처하는 신하들은 입으로만 애국을 부르짖을 뿐 애국할 구체적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계책이 없으면 짐은 선양 사신을 고려에 보내겠소.”

“아니 되옵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대에 나라가 망한다면 지하에 가서 열성조를 무슨 면목으로 보시겠습니까! 이보시오 백관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는 말이오? 개인의 영달과 부귀만을 탐하다가 나라가 위급할 때 살길만을 찾는 게 천년 사직을 지키겠다고 조정에 출사한 당신들이란 말이오? 나라가 망하면 어디 가서 영광과 부귀를 누리겠소? 모두 새 나라에 빌붙을 궁리만으로 벙어리가 된 게요?”

태자가 통곡을 하며 울부짖었으나 회의장은 적막강산이었다. 군신회의는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경순왕은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외롭고 위태로워서 더 이상 나라를 지탱할 수가 없다. 어찌 죄 없는 백성들만 참혹하게 죽일 수가 있겠느냐?”

경순왕은 태자의 반대를 뒤로 하고 최후 결정을 내렸다.

한 사람의 반대가 있어도 의결이 되지 못하는 게 신라의 화백회의였지만 이 날의 화백회의는 여느 때와 달랐다. 경순왕은 반대 의견을 모두 물리친 채 스스로 답안을 내려 시랑 김봉휴(金封休)를 고려에 보내 항복 사실을 알렸다.

끝까지 항복을 반대했던 태자는 통곡하면서 부왕과 하직하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이 사람이 바로 개골산 바위에 의지해 마의(麻衣)를 입고 초식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전설의 마의태자이다.

935년 11월, 왕건은 시정 서리 왕철과 시랑 한헌옹을 신라에 보내어 신라 왕을 맞아오게 했다. 경순왕은 눈물의 환송을 받으며 신라 천년의 왕도를 버리고 귀부의 길을 떠났다. 백성들이 왕을 따랐다. 이때 향나무로 꾸민 수레와 구슬로 장식된 말이 30리나 뻗쳐 길을 메웠다.

경순왕의 행렬이 개성에 접근하자 태조는 직접 교외로 나가 경순왕 김부를 맞이했다. 이때 김부는 태조에게 신하의 예를 취할 것을 자청했으며 태조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귀부에 대한 보답으로 태조는 김부를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신명태후 소생)와 혼인시켰다. 또한 정승에 봉하여 태자보다 상위에 두게 했다. 그리고 해마다 1천 석의 녹을 내렸으며 경주를 식읍으로 삼게 하고 그곳의 부호장 이하의 향직을 관할하는 사심관이 되게 했다. 이로써 신라는 경순왕을 끝으로 56왕 992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후로 신라계열들은 고려에서 귀족 행세를 할 수 있었으며 신라의 문물 또한 고려에 많이 반영되었다. 더구나 태조는 김부의 백부 김억렴의 딸을 왕후(신성왕후)로 맞아들여 왕자 욱을 보았는데, 욱이 곧 고려 8대 왕 현종의 부친이니 신라 귀족의 피는 고려 왕실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후백제의 멸망과 후삼국의 통일

신라를 평화적으로 병합한 고려는 후백제를 칠 계획을 세웠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국정이 어지러워 갈 길을 잃고 있었다. 이 무렵 후백제의 장군인 박영규(朴英規)란 자가 있었다. 승주 사람으로 견훤의 딸을 아내로 삼았으니 견훤의 사위인 셈이다. 장인 견훤과 신라 경순왕 김부가 고려에 귀부해 버리자 자신도 귀부할 뜻을 품었다.

박영규가 투항하기 전 태조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었다.

“영규 장군을 뵌 후에 당상에 올라가 부인에게 절하고 공을 형으로 섬기고 공의 부인을 누님으로 높이며 반드시 끝까지 후히 보답하겠습니다. 천지신명이 모두 나의 이 말을 증언해 줄 것입니다.”

진심은 역시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던가. 태조는 박영규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박영규는 곧 태조에게 후백제를 공격하면 자신이 배후에서 이를 도와주겠노라고 전하였다. 이 무렵 귀부한 견훤도 태조에게 자신의 아들 신검을 속히 공격하라고 성화였다.

936년 9월,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일선군(一善郡, 선산)으로 진격했다. 이에 맞서 신검도 군대를 거느리고 북으로 올라와 고려와 겨루었다. 일선군 전투는 양국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일대 결전장이었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를 공격할 고려 군대가 10만 대군에 이르렀다고 하니 아마 태조는 이때 후백제와 최후의 결전을 치를 각오를 했음이 분명하다.

둥둥둥, 고려의 3군이 북을 울리며 진군했다. 진두지휘하는 사람은 놀랍게도 전 백제의 왕 견훤이었다.

“대왕이시다.”

견훤을 본 순간, 효봉·덕술·애술·명길 등 후백제의 4장군이 갑옷을 벗고 창을 던지며 항복하였다. 이렇듯 후삼국 통일전쟁의 마지막 결전인 일리천 전투는 후백제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는 바람에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고려군은 5천 명도 넘는 후백제군을 죽이고 패주하는 후백제군을 쫓아 탄령(대전 동쪽 식장산)을 넘어 마성에 이르렀다. 이 길은 일찍이 신라군이 계백의 백제군을 무찌른 경로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후백제의 신검은 양검·용검과 함께 고려 진영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후백제는 견훤이 거병한 지 45년, 칭왕한 지 2대 36년 만에 패망하고 말았다.

개태사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 그 유민을 위로하기 위해 창건한 절이다.

삼한을 평정하여 통일 국가를 세운 태조는 개성으로 돌아와 위봉루에서 문무백관의 조하를 받았다. 이때에 태조의 나이 60세, 궁예를 대신한 지 19년 만의 일이었다. 삼한을 평정한 태조 왕건은 이후 67세의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국외 시대 고려
당 송위, 왕선지를 쳐부숨 876  
  877 고려 태조 송악에서 태어남
  895 궁예, 후고구려 건국
하랄드, 노르웨이 왕국 창건 900 견훤, 후백제 건국
  901 후고구려 궁예, 왕을 칭하고 국호를
고려로 함
5대10국 시작 907  
  910 왕건, 나주포구에서 견훤 격파
오월, 한(漢)으로 개칭 918 왕건, 고려 건국, 팔관회 설치
동프랑크 하인리히 1세 즉위(작센왕조) 919 송악으로 천도, 평양성 축성
  921 흑수말갈 추장, 고자라 항복
  925 발해, 신덕 등 5백여 명 고려에 투항
거란, 야율아보기 죽음. 태종 즉위 926 거란에 의해 발해 멸망
중앙아시아에 터키계 이라크한 왕조
일어남
927 견훤, 금성에 침입. 경순왕 옹립
  930 태조, 서경에 행차하여 학교 세움
    울릉도에서 공물을 바침
후당, 전세를 균등하게 함 931 왕건, 신라의 금성 방문
이란에 부와이 왕조 일어남 932  
  934 발해 세자 대광현, 고려에 투항
  935 후백제 신검, 견훤 유폐하고 왕 즉위
    신라 경순왕 고려에 항복
후당 멸망, 후진 건국 936 후백제 멸망. 고려 한반도 통일
    개태사·미륵사·내천사·염양사 창건
프랑스, 농노제 성립 938  
  940 역분전제 정함
  943 태조 〈훈요십조〉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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