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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개국1등공신 복지겸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2:58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복지겸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국하신 복지겸 장군은 태봉의 마군장군으로서 918년에 배현경 · 신숭겸 · 홍유 장군와 함께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를 개창하였다. 복지겸 장군은 신라말 고려초 당대 최고의 무장으로서 고려를 대표하는 자랑스런 위인이다.

특히 장군의 본향인 당진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우리 선조들의 뜨거운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고장이다. 바다와 긴밀히 접하고 있던 당진은 신라 때부터 대중교통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으며, 국가의 중요한 요충이었을 뿐만아니라, 수군창(水軍倉)과 곡창(穀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신라가 조공무역을 하던 대진 즉 지금의 당진은 큰 항구였다. 당진은 당나라의 사신과 상인들의 숙소가 위치하였던 국제무역도시의 효시이기도 하였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역사의 장면속에서 영화롭던 큰 나루 당진은 21세기를 맞이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의 중심도시가 되고 있으며, 세계가 주목하는 철강 무역도시로 부활하고 있다.

지난 3월 27일 복지겸 장군의 사당건립을 통해 일생을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살다간 장군의 업적과 숭고한 국충애민(國忠愛民) 정신을 계승발전하고 후대에 선양할 수 있게 된 것은 충청도민의 자긍심을 고양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글 싣는 순서

1. 당과 통일신라의 몰락과 복지겸

2. 황해바다의 강력한 해상세력

3. 왕건을 왕으로 추대한 개국1등공신

4. 영웅의 아름다운 낙향

1. 당과 통일신라의 몰락과 복지겸

 

복지겸 장군은 누구인가?

서기 900년경 삼국시대의 어지러운 형국에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국하신 1등 공신이다. 초명(初名)은 사귀(沙貴)·사괴(砂瑰)이며 면천 복씨(沔川卜氏)의 시조이다. 태봉(泰封)의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궁예(弓裔)가 민심을 잃자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를 개창(開倉)하고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뒤에 환선길 (桓宣吉)이 난을 일으키자 태조(太祖)에게 알려 진압하게 하였고 임춘길(林春吉)의 모반을 평정하였으며, 994년(성종 13) 태사(太師)에 추증되었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죽산(竹山)과 칠현산(七賢山)에서 남쪽으로 치달리다 한남(漢南)의 금북정맥(錦北正脈) 정기가 어린 가야산 자락을 따라 호수같은 바다를 끼고 풍요롭고 넓은 옥토의 면천이 위치하고 있다. 당대의 무수한 세력들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격전장이 되기도 하였던 아름다운 고을 면천에 중국 당(唐)나라로부터 복학사(卜學士)라 일컫는 사람이 들어왔다.

복학사(卜學士) 가문은 기존 면천지방 호족(豪族)인 박술희(朴術熙) 가문과 손을 잡고 백성들의 의기를 모아 해적을 토벌하고 부의 축적과 함께 강한 해상세력을 형성하였으니 철원의 궁예, 나주의 견훤, 개성의 왕건과 견줄 정도가 되었다. 이와 같이 덕망(德望)과 부(富), 세력(勢力)을 고루 갖춘 강력한 집안의 후손인 복지겸 장군은 자연스럽게 왕건과 교분을 갖게 되었고 그와 함께 궁예(弓裔)의 주력부대 장수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태봉국(泰封國) 궁예의 실정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복지겸은 동료 기병장군(騎將)인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등과 함께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새로운 고려왕조(高麗王朝)를 열게 하였다.

고려를 개국한 이후 복지겸 장군은 도성경비(都城警備) 및 감(監察)을 맡아 왕건의 최측근 무장(武將)으로서 초기의 혼란한 시기에 모든 반역음모를 잡아내며 왕권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마군장(馬軍將) 환선길(桓宣吉)과 그의 동생 향식(香寔)은 왕건을 추대한 공으로 왕건을 보필하며 숙위(宿衛)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복지겸 장군의 지략으로 가볍게 평정하였다. 또한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 강길아차(康吉阿次), 경종(景琮)이라는 자들의 반역음모를 적발하여 제거하는 등 고려 개국초(開國初) 태조 왕건의 가장 신임 받는 장수로서의 본분을 다하였다.

태조 원년(918년) 8월에 개국 1등공신에 책봉되었고 면천지역의 토지 300경(약 180만평)을 하사 받았으며 자손대대로 세습되었다. 개국의 위업을 이룩한 장군은 고려왕조가 안정되자 고향인 면천(혜성·槥城)으로 낙향하여 지역 고을들을 다스리며 마지막까지 백성과 더불어 일생을 봉사한 위대한 분이다.

 

신라의 몰락과 후삼국의 분립

9세기말에 이르러 신라 사회는 사회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진골귀족의 내부 분열로 왕위 쟁탈전이 계속되었고 6두품 세력의 등장과 사회 발전에 따른 골품제의 동요로 신라 사회는 점차 붕괴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세력이 대두되면서 이들은 중앙정부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호족 세력을 형성하며 성장하여 신라 왕조 붕괴의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다.

특히 이들 중 신라 하대의 혼란한 상황하의 농민봉기를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여 정권 수립 단계까지 이른 것이 견훤과 궁예로써 이들은 각각 후백제와 태봉을 세워 후삼국을 성립시킨다.

통일 후 신라의 정책을 보면, 진골귀족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사치와 방탕에 빠져들었다. 특히 그들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골품제도를 통하여 관직독점을 강화하고 우월한 경제적 지위를 확보하면서 백제․고구려 유민에 대하여는 신분적 차별을 가했다. 또한 경주 중심의 세력만으로 지방 행정을 통어하려는 폐쇄적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시책은 지방행정을 제어할 수 있는 탄력성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더욱이 백제․고구려 지역에 토착하는 세력을 등한시하게 되어 후일 반 신라적 지방세력의 출현을 초래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들 세력의 형성은 곧 하대(780~935)에 접어들면서 중앙의 정치가 문란해져 가는 시대적 상황에 편승하면서 성립되었다.

 

지방호족의 대두

후삼국의 분립과 고려에 의한 통일로 요약되는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변동을 주도한 세력은 호족(豪族)이었다. 호족은, 신라말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현저히 약화되는 진성여왕대로부터 고려초 귀족사회가 형성되는 성종대까지 약 1세기 동안, 지방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그래서 이 1세기 동안의 사회를 '호족의 시대(豪族의 時代)'라고 부르기도 한다.

호족은 지방사회에서 일정한 지역을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군·현(郡·縣) 정도의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국에는 수많은 호족이 분산적으로 할거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의 골품제사회가 해체되어 갔다는 점에서는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새로운 사회질서와 정치체제가 성립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커다란 혼란이었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은 호족의 몫이었다.

당시 호족은 사회변혁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후삼국의 분립을 청산하고 새로운 통일왕조(統一王朝)를 건설하는 데에 호족의 向背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호족의 지지를 획득하여 호족을 통합해내는 일이 후삼국 통일에 있어서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므로 후삼국 건국자 중에서 호족의 지지를 더 많이 획득하는 자가 후삼국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후삼국 건국자의 역사적 성격을 조명하는 작업은 신라말·고려초의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 황해바다의 강력한 해상세력 복지겸

 

해상세력과 지방호족

9세기 이후 약 100여년 동안 황해를 중심으로 당과 신라는 총체적인 불안정국이 진행되었다. 당은 안사의 난 이후 율령체제의 파탄과 절도사들의 발호로 중앙왕실의 지방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또한 과중한 세금 압박과 체제를 거부하던 일부는 관향을 떠나 유망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한편,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는 8세기 후반부터 정치․사회․경제․사상 등에 전반적인 변화가 오고 있었다. 예컨대 골품제도의 동요로 연속적인 왕위의 쟁탈전과 지방반란이 일어났고, 9세기에는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 국내외를 떠돌아 다녔다. 헌덕왕 8년(816년)에는 170명의 신라인이 굶주림을 참지 못해 당나라까지 가게 되었다. 결국 극심한 천재지변과 굶주림, 진성여왕(887~897)의 실정 등을 견디다 못해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또한 각지에서는 독자적인 세력가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 유이민 가운데 일부는 해적성향을 가진 해상세력가에게 투탁하여 해적이 되어,당시 동아시아 해역을 빈번하게 왕래하던 민간무역선을 약탈대상으로 삼아 크게 번성하였다.

바다에서 해적들이 橫行하던 시기에 한반도 서ㆍ남해안 곳곳에는 해상활동을 통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군사력을 키운 이른바 해상호족들이 웅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합법적 교역과 불법적 약탈을 병행하였는데, 9세기 후반 일본 해역에서 벌어지고 있던 신라 해상(海商)들의 해적활동이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 준다.

9세기 말 후삼국의 정립과 더불어 호족들 사이의 각축전이 보다 치열해졌다. 이에 각지의 호족들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위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해상호족을 포함한 지지세력들은 공리적(公利的) 이념을 내걸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종전의 해적행위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의 관할영역에서 활동하던 불법적인 해적을 토벌하여 민생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부 해적들은 해상호족에 흡수되거나 해체되었고,또 다른 일부는 스스로 공리적 이념을 내세우며 호족화하였다. 이처럼 해상호족의 해적행위 중지와 해적토벌 그리고 해적들의 호족화로 인하여 마침내 한반도 해역에서 해적이 사라졌다. 호족들 역시 고려왕조로 귀속됨으로써 점차 독자성을 잃게 되었다.

 

가장 큰 무역항 대진(大津:唐津)

통일신라 이후 조선술의 발달 등으로 대외무역이 크게 번성하자 지방세력들은 자기의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에서 찾았다. 원래 대외무역은 조공의 형식을 취하여 국가간에 행하여 왔었지만, 세력을 점차 증대시켜 온 지방의 사상인(私商人)들은 국가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민간무역을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해상호족들은 해안이나 강의 포구에 웅거하여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축적된 경제력을 기반으로 군사력을 증강시켜 주위의 인민들을 포섭함으로서 독립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서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항포구가 발달되어 있고 동고서저의 한반도 지형상 배후에는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과거 고구려와 백제땅이었으므로 반신라적인 의식이 비교적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수도인 경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중앙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왔다. 지리적으로는 중국과의 왕래가 편리하여 국제무역을 통한 경제력 확보가 용이하였다.

특히 혜성(槥城)은 아산만의 남쪽 연안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면천군(沔川郡)으로 불린 곳이다. 이 지역을 포함한 현재의 충남 내포지방은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진번군이 해상루트를 통하여 전진기지로 삼았던 곳으로 추정되며, 낙랑군과 해상으로 밀접하게 교섭했던 서해항로의 요충지였다.

혜성에는 삼국시대에 백제가 가리저(加里渚) 동쪽에 수군창(水軍倉)과 곡창(穀倉)을 설치하였다. 후에 신라는 혜산(懳山)의 동쪽에 화경관(禾京館)을 지어 신라와 당나라를 왕래하는 사신과 상인들의 숙박과 상거래에 활용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의 최대 무역항인 당진은 신라 조공무역항으로서 대진(大津)이라고 불렸다.

 

서해안의 강력한 호족 복지겸․박술희

혜성 출신의 호족으로는 복지겸(卜智謙)과 박술희(朴述熙)를 들 수 있다. 복지겸의 선조 복학사(卜學士)는 당으로부터 혜성군에 건너와 거주하면서 해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모아 보호하였다. 복학사가 언제 어떤 연유로 당으로부터 혜성군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 알수 없다. 그러나 해적을 소탕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던 해상세력가였음이 틀림없다.

박술희 역시 혜성군 사람으로 박술희의 아버지인 득의(得宜)가 고려조(高麗朝)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대승(大丞)의 벼슬을 하고 있었던 점은 박술희 가문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음을 알수 있다. 또한 혜성군이 대중국 해상교통로의 요지로 많은 상인과 사신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는 점에서 박술희 가문 역시 유력한 해상호족이었음을 일수 있다.

고려초 강감찬(姜邯贊) 장군에게도 대승(大丞) 직위를 추증하였던 것을 보면 상당한 직위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박술희의 부친 박득의 역시 아들 박술희와 함께 고려초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득의와 술희 부자 모두 상당한 벼슬에 올랐으며, 혜성지방의 강력한 호족이었음을 알수 있다.

 

문무를 겸비한 복지겸

복지겸에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문무를 겸비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학문의 연마를 통해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었다. 만일의 사태에도 대비하는 용의주도한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대단히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리고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이 같은 그의 태도는 선천적인 성격에다 깊이 학문을 연마한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 그 때문에 그는 궁예 밑에서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복지겸이 병부령(현재의 국방장관)직을 수행하였으며, 감찰직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연구되어지고 있다. 물론 복지겸에 대해서는 기록에 별로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그가 학식있고 신중한 인물인 것은 틀림없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 복지겸의 선조는 당나라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복학사(卜學士)라 칭하는 자가 중국으로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지역민들을 보호하였는데 복지겸은 그의 후손이라고 되어있다. 학사라는 칭호로 보아 어느 정도 학식이 있었던 가문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면에서 그도 은인자중하는 성격과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그의 성격으로 인해 왕건을 왕위에 추대하여 개국 1등 공신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왕건을 왕으로 추대한 개국1등공신

 

왕건을 왕(태조)으로 추대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918년(육월 을묘)에 이르러 기장 복지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등이 몰래 모의하고 야반에 태조의 집에 가서 다 같이 추대할 뜻을 말하였다. 태조가 굳게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는지라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고 제장이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시켜 달려가며 소리쳐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라고 하니 이에 분주히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먼저 궁문에 이르러 복을 치며 떠들석하게 기다리는 자가 또한 만여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를 듣고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차지하였으니 나의 일은 이미 끝났구나 하며 이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나가 도망가니 내인이 궁을 청소하고 신왕을 맞이하였다. 궁예는 암곡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신숙)는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 이삭을 몰래 끊어 먹다가 뒤이어 부양(강원도 평강)민의 살해한 바가 되었다.

 

홍유(洪儒)는 의성사람으로 왕건의 반정 날 왕건을 찾아왔던 4사람의 장수(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중의 한명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전의 행적은 거의 없어 처음부터 왕건의 부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왕건 즉위 후 유금필과 함께 청주로 진군하여 이 지역의 반란을 차단하고, 후백제를 멸망시킬 때까지 종군했다. 왕건은 그의 고향인 의성 부근인 경북 일대를 평정할 때 그를 파견했다.

 

배현경(裵玄慶)은 경주사람으로 본명은 백옥삼이었다. 나중에 성까지 바꾼 것은 그의 집안이 미미하다고 볼 수 있다. 완력이 뛰어나 사병으로 입대해서 장군까지 진급했다. 왕건이 즉위한 후 수많은 전투를 따라다니면서 많은 공을 세웠다. 후백제를 멸망시키던 태조 19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가 병들자 태조가 친히 그의 집까지 와서 손을 붙잡고 탄식했는데, 왕건이 병문안을 마치고 막 대문을 나갈 때 사망했다.

 

신숭겸(申崇謙)은 홍유 등과 마찬가지로 왕건을 추대하기 전의 삶에 대해선 전혀 기록이 없다. 그의 본명은 능산(能山), 광해주(지금의 춘천) 사람이다. 지금은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어 있다. 체격이 장대하고 무용이 뛰어났다고 한다. 태조 10년 공산전투에서 태조는 견훤에게 대패해서 죽을 뻔하는데, 이때 김락과 함께 역전하여 태조를 탈출시키고, 전사했다. 태조는 두 사람의 공을 기려 도이장가라는 향가를 지었다. 태조가 포위되자 태조의 옷을 대신입고 적을 유인했다고 한다.

이들 개국1등공신 네 사람은 모두 처음부터 왕건의 심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복지겸은 환선길과 청주인들의 모반, 임춘길의 반란을 사전에 밀고한 사람이 복지겸이라는 사실만이 그의 공적으로 전한다. 반역정보에 빨랐던 것으로 보아 정보담당 업무를 보았거나 궁예의 부하들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왕건편이 된 인물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태조왕건의 최측근 복지겸

918년 6월 병진일, 王建은 드디어 왕으로 등극하여 국호를 高麗로 정하고, 天授(천수)라는 연호를 반포했다. 그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고려의 건국에 반대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王建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 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馬軍大將 환선길이 50여 명의 군사를 이끌 고 內殿(내전)을 덮쳐 王建에게 칼을 겨누었다. 그러나 소수의 반란군은 王建의 태연 한 태도를 보고 복병을 깔아 둔지도 모른다 고 생각하여 겁을 집어먹고 재빨리 下手하 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타이밍을 놓친 이들 은 끝내 근위병의 추격을 받고 붙잡혀 모두 처형당했다.

환선길의 반란 이외에도 淸州 출신 순군 임 춘길 등도 작당하여 쿠데타를 도모하다가 복지겸의 정보망에 걸려들자 도주했다. 임 춘길의 반란집단도 역시 붙들려 모두 처형 되었다.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에게 반역자로 지목돼 주살된 첫 인물이 바로 환선길과 이흔암이다. 「고려사」를 보면 '열전' 중에서도 반역자만을 따로 취급한 곳이 있는데 이들은 여기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고려사」중에서도 왕별로 시간을 따라가며 사건을 기록한 부분을 '세가'(世家)라 하는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왕이 된 바로 그달인 태조세가 원년(서기 918년) 6월 대목을 보면 '경신(庚申)에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桓宣吉)이 반역을 꾀하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고 있으며 그 며칠 뒤인 기사일(己巳日)에는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이흔암(伊昕巖)이 반역을 모의했으므로 기시(棄市: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것)했다'고 나온다.

왕건 즉위 이후, 반란 사건은 네 차례 이상이나 기록돼 있다.

왕건의 즉위 5일만에 환선길이 모반을 꾀하다 실패하고 참수됐다. 소판 종간, 내군장군 은부를 처형하였다. 14일째 되는 날에는 이흔암이 반란을 꾀하다 주위의 신고로 체포되어 극형에 처해졌고 이어 동년 9월과 10월에는 청주인에 의한 모반(謀反)사건이 연이었다.

뿐만 아니라 명주(강릉)의 실력자 왕순식 역시 왕건에게 복종하기를 계속 거부했다. 이 와중에 8월에는 공주․운주 등 10여개 주․현이 자발적으로 후백제에 투항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초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건은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복지겸을 곁에 두고 반대세력을 축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환선길(桓宣吉)의 반역

환선길은 궁예 휘하의 최고 장수로 나온다. 그러나 그 역시 왕건 즉위 이전의 경력은 알 수 없다. 홍유, 신숭겸 등은 모두 마군지휘관이었는데, 환선길도 같은 부대의 장수였다. 동생과 함께 반정에 가담해서 공신이 되고 왕건은 그를 숙위장 즉 경호대장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권력 핵심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경호대장이 일으킨 반란이니 만큼 이 반란은 왕건에겐 최대의 위기였다. 그는 태조가 문관들과 회의하는 순간을 노려 거사하기로 했다. 이날 동생도 환식도 함께 가담하기로 했는데, 그는 좀 늦게 왔다. 환선길은 때를 놓칠 수 없어 부하 50여명과 함께 단독으로 회의실에서 왕건을 급습했을 때 왕건은 무방비 상태였다. 그러나 왕건은 태연하게 환선길을 꾸짖었고, 왕건의 너무나 태연한 태도에 환선길은 방에 매복이 있는 줄 의심하고 달아나다가 살해된다. 만약 환식이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환식은 뒤늦게 왔다가 역시 살해되었다.

 

이흔암(伊昕巖)의 반역

이흔암은 궁예의 심복이었다. 다른 재주나 식견은 없고 오직 활쏘기와 말타기만 잘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활쏘기와 말타지 즉 장군으로서의 능력을 꽤 있었다는 말이 된다. 궁예 말년에 그는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이 되어 공주를 습격하여 탈취하고 그곳에 거점을 마련한다.

마침 이때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하자 그는 제멋대로 공주를 포기하고 철원으로 돌아왔다. 동료이며 이웃에 살던 형부의 관원 염장이 배신하여 태조에게 이흔암의 음모를 고발했는데, 증거가 없었다. 왕건을 어떤 부하를 그의 집에 잠입시켜 정보를 수집하게 했다. 그 첩보원은 이흔암의 부인 환씨(환선길과 관련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가 화장실에서 홀로 "우리 남편의 일이 잘못되면 우리가 화를 입을텐데"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모반의 증거로 고발했다. 이 일로 이흔암은 살해되고 가족은 노예가 되었지만 음모에 가담한 사람이나 부하, 동료는 추궁하지 않았다.

 

고려 왕권강화의 주역 복지겸

위와 같은 반역의 주체들은 주로 친궁예세력으로 王建의 즉위에 대한 반발이었다. 임춘길(林春吉)을 제외한 재경 군세력 중 청주인(淸州人)으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을 찾을 수 없지만 王建의 즉위 대한 반발을 가졌을 세력은 많이 존재하였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궁예(弓裔)의 핵심세력화 했던 청주세력들 주에서 왕건과 연결되지 않았던 세력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세력들이 궁예 말년부터 서서히 제거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친궁예세력으로 王建에 의해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가 제거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王建은 그들을 고려사회에 편제하기 위해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예로써 마군장군(馬軍將軍) 이흔암(伊昕巖)의 반란을 들 수 있다.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복주(伏誅)되었으나 그의 당여(黨與) 300餘人은 제거되지 않고 불문에 붙였다. 이것은 이흔암을 제거하고 당여 300여인을 처벌하지 않으므로써 건국초기 동예세력(東濊勢力)의 이탈을 방지하고 고려사회로 친화시키려던 의도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친궁예 세력이었던 임춘길(林春吉)의 반란시 이에 가담하였던 세력을 제외한 淸州에 토착해 있었던 그의 세력기반도 고려사회에 편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청주의 재야세력 중에서도 고려건국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 세력이 있었다. 청주수(淸州帥) 진선(陳瑄) 형제는 林春吉의 반란이 있은 직후인 918年 10月에 반란을 일으켰다. 진선이 청주수라 칭했던 것으로 미루어 청주호족세력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또 진선들이 신라위계로 되어 있어 당시 귀부해 오던 호족들처럼 상당한 지역적 기반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한 조정통제하고 고려화하는 업무는 주로 복지겸이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무리가 없을 듯하다.

 

4. 영웅의 아름다운 낙향

 

복지겸 장군의 당진 낙향

태조 원년(918년) 8월에 개국1등공신에 책봉되었고 혜성부원군(槥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면천지역의 토지 300경(약 180만평)을 하사 받았으며 자손대대로 세습되었다. 개국의 위업을 이룩한 장군은 고려왕조가 안정되자 고향인 면천(혜성·槥城)으로 낙향하여 지역 고을들을 다스리며 마지막까지 백성과 더불어 일생을 봉사한 위대한 분이시다.

한편 효성지극한 장군의 딸 영랑은 전장(戰場)을 누비며 국사(國事)에 전념하는 동안 쇠약해진 아버지를 위해 정성으로 백일기도를 올렸다 한다. 이때 아미산(蛾眉山) 신령의 계시를 받아 마을에 은행나무를 심고 안샘의 물을 떠서 진달래 꽃으로 두견주(杜鵑酒)을 빚어 정성으로 봉양하니 장군이 완쾌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구전(口傳)되고 있다.

 

고려 개국공신에 대한 예우

복지겸 장군은 사후(死後)에도 배향공신(配享功臣)이 되어 고려왕조와 더불어 추앙을 받아왔으며, 후손들도 주요 직위에 등용되어 고려를 위해 충성과 봉사를 다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 왕족과 공신들은 철저한 박해와 홀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문종(文宗, 1414~1452년)대에 이르러서는 복지겸 장군을 비롯한 고려의 16공신이 숭의전(崇義殿, 경기도 연천소재)에 배향되는 등 일부 명예가 회복되기도 하였다.

한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 ?~927)의 관향인 평산(平山 : 황해도 평주)에서는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에 신숭겸, 복지겸, 유금필, 배현경 등의 철상(鐵像)을 만들어 이들의 업적과 충절을 흠모하며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추앙받는 충신(忠臣)인 복지겸 장군은 일생을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헌신하였으나 관향인 충청남도, 당진, 면천 등으로 부터는 주목받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1995년부터 장군을 숭모(崇慕)하고 충청인의 정신문화 회복을 위해 면천지역에 진달래를 식재하였는가 하면 당진의 군화(郡花)를 개나리에서 진달래로 변경하였으며, 학술세미나 및 진달래 축제 등을 통해 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있다.

 

복지겸 장군 관련 유적 및 전설

1. 소년 복지겸 전설지 아미산

소년 복지겸이 17살 때 아미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아미산 산산봉에서 바둑을 두던 신선들이 소년 복지겸에게 머리가 명석하니 나라 일을 해보라고 권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일로 인해 정치를 하게 되었고 고려개국1등공신이 되었다.

 

2. 복지겸 처가 관련 전설지 도당굴

도당굴에 살던 복지겸의 처가 혼인날 축하객으로 온 복지겸 장군을 보고 전생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던 복지겸 장군을 알아보고 그 혼사를 파하고 복지겸에게 시집을 왔다는 이야기이다.

3. 면천 은행나무와 안샘

1100년 된 면천은행나무는 당진군 면천면 면천초등학교 교정에 두 그루가 있다. 복지겸 장군의 딸이 아버지의 병환을 고치기 위해 집 뜰에 심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 곳이 복지겸 댁의 장독대였다고도 한다. 지역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상당부분 은행나무 밑이 땅에 묻혔다고 하며 이 은행나무는 두견주와 더불어 복지겸의 천식을 다스리기 위해 심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안샘은 내정(內井), 꽃샘, 화정(花井)이라고도 부른다. 복지겸 장군이 병들어 위독할 때 그의 딸 영랑이 아버지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100일 정성으로 현몽을 받아 아미산 진달래로 술을 빚어 드렸다는 전설의 샘이다.

이 샘물로 1930년도부터 박성흠이 두견주를 빚어 무형문화재 86-나호로 지장을 받았다.

 

 

 4. 무공사

무공사는 2007년 8월 26일 건립 기공식을 시작해 홍살문, 창의문, 추원재, 무영사, 정충문, 숭모당, 신도비, 준공비 등이 건립되었다. 이는 2009년 3월 27일 준공 및 영정봉안식을 가졌다.

 

맺음말

장군의 본향인 당진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우리 선조들의 뜨거운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고장이다. 바다와 긴밀히 접하고 있던 당진은 신라 때부터 대중교통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으며, 국가의 중요한 요충이었을 뿐만아니라, 수군창(水軍倉)과 곡창(穀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신라가 조공무역을 하던 대진 즉 지금의 당진은 큰 항구였다. 당진은 당나라의 사신과 상인들의 숙소가 위치하였던 국제무역도시의 효시이기도 하였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역사의 장면속에서 영화롭던 큰 나루 당진은 21세기를 맞이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의 중심도시가 되고 있으며, 세계가 주목하는 철강 무역도시로 부활하고 있다.

지난 3월 27일 복지겸 장군의 사당건립을 통해 일생을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살다간 장군의 업적과 숭고한 국충애민(國忠愛民) 정신을 계승발전하고 후대에 선양할 수 있게 된 것은 충청도민의 자긍심을 고양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출처 : 박철준과 함께
글쓴이 : 쌀 한톨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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