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흐는다

[스크랩] 신라 하대의 혼란(16)

오늘행복스마일 2018. 12. 27. 12:48

1. 진성여왕 시대


진성여왕이 즉위한 887년 당시 신라는 붕괴 직전이었다. 혜공왕 때부터 시작된 진골귀족들의 이전투구는 신라의 통치력을 와해시켰고, 민생을 파멸적 상황으로 몰고 갔다. 이 와중에 성장한 지방세력들은 이미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민심은 신라라는 체제가 붕괴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진성여왕이 물려받는 신라는 부도직전의 상황이었다.


진성여왕은 모든 것을 내던지고 전면적인 체제개혁을 해야 했다. 진골귀족들을 설득하고, 때로는 힘으로 누르면서, 골품제의 특권을 해체해야 했다. 민심을 다독이고, 지방호족들을 회유하고 때로는 통제하며 국가 통치력을 복원해야 했다. 그러나 진성여왕은 황음을 즐겼고, 왕과 관계한 자들이 세도를 부리면서, 뇌물이 난무하고, 조정의 기강은 무너졌다.


이러자 신라 수도 서라벌에 조정과 왕을 비방하는 방이 붙여졌다. 삼국유사는 방의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남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파가()”

해설하는 사람은 이렇게 풀이하였다.
“‘찰니나제’는 여왕을 말한다.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을 말한다. 소판은 벼슬 이름이다. ‘우우삼아간’은 세 명의 총애 받는 신하를 말한다. ‘부이’란 ‘부호부인’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성여대왕과 거타지 [眞聖女大王 居陀知]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신라 조정은 왕거인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당대에 존경받는 학자였던 왕거인은 감옥에 갇히자 심정을 시로 남겼는데, 그가 시를 쓰자 하늘에서 벼락이 쳤다고 한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나라 태자 단(丹)이 피눈물을 흘리자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고
추연(鄒衍)이 원한을 품자 여름에도 서리가 내렸다네.
지금 나는 길을 잃어 옛 사람과 같은 처지가 되었는데
하늘은 어찌하여 상서로움을 내리지 않으시는가.

[네이버 지식백과] 진성여대왕과 거타지 [眞聖女大王 居陀知]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파멸은 다가오고 있었다. 진성여왕 3년(889) 당시 신라는 지방에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 국가재정이 빈약했다. 이는 국가 통치력이 붕괴되었음을 뜻했다.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는 것들은 지방에 파견된 관리들의 부패와 지방호족들의 독립적 성향 때문이었다. 진성여왕은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는 파멸적 상황에 몰려 있던 민생에 기름을 끼얹었다. 분노한 백성들은 드디어 신라체제에 대한 전면적 저항을 시작했다.


3년(서기 889)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세금을 보내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궁핍하였다. 임금이 사람을 파견하여 독촉하니,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 이때 원종(), 애노() 등이 사벌주()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나마 영기()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사로잡게 하였으나, 영기가 적들의 보루를 보고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못하였다. 촌주() 우연()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임금이 칙명을 내려 영기의 목을 베고, 나이가 10여 세에 불과한 우연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성왕 [眞聖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원종과 애노의 난은 시작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각지에서 군웅들이 반신라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났다. 북원의 양길, 명주의 김순식, 그리고 후삼국을 열었던 궁예와 견훤이 그들이었다.


2. 궁예와 견훤


889년 원종과 애노의 난은 삼한의 백성들이 신라에 대해 사형선고를 언도한 것이었다. 신라는 진골귀족들의 나라 즉 그들의 나라 였지 우리들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 사형선고의 이유였다. 그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나선 인물이 궁예와 견훤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헌안왕의 서자였다. 삼국사기는 궁예가 태어났을 때 불길한 기운이 있어 버림을 받았다고 적었다. 당시 헌안왕은 김제륭계와의 타협을 모색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다음 왕위계승자는 사위 김응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어난 아들은 환영받지 못할 운명이었다. 궁예는 그렇게 제거될 운명이었으나 유모위 기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성장한 궁예는 세달사의 승려가 되었다가, 신라의 체제가 붕괴되자 기훤에게 의탁을 하였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서울 인근 바깥의 주, 현 중에서 배반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도처에서 뭇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같이 모여들었다. 선종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 재위 5년, 대순() 2년 신해(서기 891)에 죽주()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에게 투신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며 예로써 대우하지 않자, 선종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여 기훤의 휘하인 원회(), 신훤()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궁예 [弓裔]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그러나 기훤은 궁예를 신뢰하지 않았다. 892년 궁예는 원회, 신훤등과 함께 기훤을 떠나 양길에게 갔다. 북원의 양길은 궁예를 중용했다. 궁예는 양길의 명령에 따라 지금의 강원도 지역을 공략하여 894년 명주를 점령하였다. 이무렵에 궁예는 양길로부터의 독립을 도모했다. 김대검, 모흔, 장귀평, 장일등을 부장으로 삼고 스스로를 장군이라 하였다. 나라를 세울 야심을 품고 관직을 설치했다.


그러나 궁예가 독립을 할려면 넘어야할 산이 있었다. 바로 양길이었다. 국원등 30개성을 지배하고 있던 양길은 궁예의 독립을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두 군웅은 896년 격돌하였다. 이 격돌에서 양길을 제압한 궁예는 드디어 901년 나라를 선포했다.



천복() 원년 신유(서기 901)에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궁예 [弓裔]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고구려의 옛 땅에 궁예가 있엇다면 백제의 옛 땅에는 견훤이 있었다. 삼국유사는 견훤의 탄생과 관련된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



“옛날 어떤 부자가 광주() 북촌()에 살았는데, 딸 하나가 있었으니 자태와 용모가 매우 단정하였다. 그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제 침실에 와서 함께 자곤 합니다.’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서 그 자의 옷에 꽂아두어라.’라고 하였고, 딸은 그렇게 하였다. 날이 밝자 북쪽 담장 아래에서 실을 찾았는데,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그 후에 임신을 하여 남자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고 불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후백제 견훤 [後百濟 甄萱]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삼국유사는 또 견훤이 어릴 적, 호랑이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했다. 장성한 견훤은 군인이 되어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근무했다. 삼국사기는 견훤이 용맹함이 다른 병사들을 압도하여 비장이 되었다고 했다.


호랑이의 젖을 먹고 자란 견훤에게 신라말의 혼란은 기회였다. 원종과 애노의 난을 기점으로 신라의 체제가 붕괴되자 견훤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야심을 품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



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란하려는 뜻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 현을 가서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드디어 무진주(, 광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중략)

[네이버 지식백과] 견훤 [甄萱]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무진주를 점령한 견훤은 이후로도 세력 확장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900년 완산주를 점령한 견훤은 백제의 부활을 외쳤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 전북 전주)에 이르렀는데, 주의 백성들이 환영하며 위로하였다. 견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주위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백제가 나라를 연 지 600년 만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보내어 수군 13만 명이 바다를 건넜고, 신라의 김유신()이 땅을 휩쓸며 황산()을 지나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하니 내 지금 감히 수도를 세워 원한을 씻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후백제의 왕이라고 칭하고, 관직을 설치하여 직책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가 당나라 광화() 3년으로 신라 효공왕() 4년(서기 900)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후백제 견훤 [後百濟 甄萱]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676년 당을 축출하고 224년 만에 신라는 다시 붕괴되고 말았다.


3. 최치원과 6두품


신라는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기훤, 양길, 궁예, 견훤 등 천하군웅들이 분노한 민심을 등에 업고 새로운 세상을 외치며 들고 일어났다. 서라벌 서남쪽에는 적고적이라는 도적 집단이 주와 현을 도륙하고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위기에 빠진 신라를 구하기 위해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등용했다.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 12세에 당으로 유학을 가, 과거에 급제한 이후 당에서 승승장구한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다. 28세에 큰뜻을 품고 고국에 돌아왔지만, 신라에 6두품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1차 고당전쟁 당시 당군에 종군하여 활약했던 설계두가 신라를 떠나면서 "신라에서는 사람을 쓰는 데 골품을 논하기 때문에 진실로 그 족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다 해도 그 한계를 넘지 못한다."고 저주했던 것처럼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6두품은 중용되지 못했다. 최치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최치원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진성여왕8년(894)이었다. 이해 최치원은 시국에 관한 10여개 조목을 올리며 개혁을 주문했다. 골품제의 특권을 해체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치원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치원은 서쪽에서 대당을 섬길 때부터 동으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에도 모두 어지러운 시절을 만나 처신하기가 어렵고 걸핏하면 허물을 뒤집어쓰니,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유유자적 노닐며 자유로운 몸이 되어 산림이나 강과 바닷가에 누각과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고 책을 베개 삼아 읽고 풍월을 읊조렸다.

경주의 남산(), 강주()의 빙산(), 합주()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 합포현(, 경남 창원)의 별장과 같은 곳이 다 그가 노닐었던 곳이다. 마지막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면서, 형인 승려 현준() 및 정현()대사와 도우()를 맺고 한가롭게 지내다가 노년을 마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치원 [崔致遠]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현실에 좌절한 최치원은 결국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그러나 다른 6두품들은 달랐다. 그들은 신라 체제에 저주를 퍼부으며 궁예와 견훤 그리고 왕건의 품으로 달려갔다. 골품제를 개혁하지 않고 진골귀족들만을 위한 나라로 남고자 했던 신라는 결국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출처 : 연림잡필
글쓴이 : 대연림 원글보기
메모 :